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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 (十牛圖) ⑤
9. 반본환원(返本還源) -본 고향으로 돌아오다-
반본환원(返本還源)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이제 주객이 텅 빈 원상속에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침을 묘 사한 것입니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입니다. 진리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송(頌)
返本還源已費功 반본환원이비공 爭如直下若盲聾 쟁여직하약맹롱 庵中不見庵前物 암중불견암전물 水自茫茫花自紅 수자망망화자홍
본향으로 돌아옴도 공연히 애썼구나. 어찌하여 마치 바로 귀머거리 장님같이 암자에 있으면서 바로 앞을 못 봤던고.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붉게 피네.
이 송(頌)은 이제 본고향으로 돌아온 경지를 노래한 게송입니다. 모든 분별이 사라진 고요 한 적멸의 세계를 완전히 깨닫고 보니 있는 그대로가 진리 아닌 것이 없습니다.
'본고향으로 돌아옴도 공연히 애썼구나.' 함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진리가 먼 곳 에 있는 줄 알고 그토록 헤매며 찾아다녔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소를 찾는다 고 우거진 숲을 헤치고 무던히도 다녔고, 소를 붙들어 고삐를 매어 바투어 잡고 채찍으로 다 스려 길들이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그것이 순일해지고 보니 굳이 찾으려고 애쓸 것도 없었 는데 하며 다시금 반조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어찌하여 마치 바로 귀머거리 장님같이 암자에 있으면서 바로 앞을 못 봤던고.' 하며 다 시 한번 반조해 봅니다. 깨닫기 전에도 물은 흘렀고 꽃은 피었었는데 어찌하여 귀머거리처 럼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장님처럼 천진면목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 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인 것을...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스스로 붉은 것을... 그야말로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소식입니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다-
입전수수(入廛垂手)
입전수수(入廛垂手)는 큰 포대를 메고 지팡이를 짚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저잣거리를 찾아 나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림에는 포대를 잠시 내려놓은 모양입니다. 이때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 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송(頌)
露胸跣足入廛來 노흉선족입전래 抹土塗灰笑滿顋 말토도회소만시 不用神仙眞秘訣 불용신선진비결 直敎枯木放花開 직교고목방화개
가슴 풀고 맨발로 저잣거리 들어가니 흙과 재를 덮어써도 얼굴에는 웃음 가득. 신선의 참된 비결 사용하지 않아도 곧바로 마른 나무 꽃을 피게 하누나.
이제 십우도의 마지막 열 번째 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입니다. 입전(入廛)이란 세속의 저잣거리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이고, 수수(垂手)는 손을 드리운다는 뜻이니 세속에 나아가, 중생들에게 손을 내밀어 구제한다는 이야깁니다.
'가슴을 풀고 맨발로 저잣거리로 들어가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와 어떤 대상을 찾아가는 모습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일지는 몰라도 어떤 선입견이나 차별상을 두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이제 무애자재 인(無碍自在人)이 되었으니 어떤 집착과 꺼릴 바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입니 다. 가식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일체가 되었으니 가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眞理) 란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무애자재한 모습으로 차별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찾아갑니 다.
여기서 무애자재(無碍自在)란 말이 나와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애(無碍)란 걸림이 없다 는 말입니다. 이 말은 번뇌 망상의 장애가 모두 사라져 없다는 뜻입니다.
무애(無碍)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총지무애(總持無碍)라 하여 보살이 대총지(大總 持) 즉 대다라니(大陀羅尼)를 얻어 선법(善法)을 잃지 않고 악법(惡法)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 체의 언어제법(言語諸法)을 분별하여 남김없이 요달하므로 걸림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는 변재무애(辯才無碍)라 하여 보살이 대변재(大辯才)를 얻어 중생의 근기(根機)를 따라 대승 ㆍ소승의 법을 설하여 모두 통달케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도법무애(道法無碍)라 하여 보살이 대지혜(大智慧)를 얻어서 능히 대승ㆍ소승의 법과 세간의 언어와 문자를 통달하는 것 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한량없이 깊고 많은 뜻을 섭지(攝持)한 무애심(無碍心)이 자유인의 마음입니다. 무애심(無碍心)은 무소득(無所得)의 마음입니다. 얻을 바가 없는 마음입니다. 소득(所得)이 란 집착을 말합니다. 집착을 떠난 무소득의 마음이 무애심입니다. 무애심이 된 이라야 무애 행이 나옵니다.
이치가 이와 같으니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하는 등 제멋대로 행동하여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이는 절대 무애인이 아닙니다. 그런 이의 행은 잡행(雜行)이요 기행(奇行)일 따름입니 다. 무애행(無碍行)이란 모든 탐욕이 사라져 밝은 행동, 깨달은 행동, 지혜로운 행동을 한다 는 것이지 결코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고 아무렇게나 거리낌 없이 행동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재(自在)란 마음대로 무엇이나 자유롭지 않은 것이 없고 장애할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 입니다. 불ㆍ보살이 갖추는 공덕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 합니 다. 진여(眞如)의 세계와 현상계를 자재로이 관하고 설법교화(說法敎化) 활동이 자재한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무애자재(無碍自在)란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한 이가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무수한 방편과 지혜와 변재로 중생을 교화하는데 장애없이 자유자재함을 말합니다.
'흙과 재를 덮어써도 얼굴에는 웃음 가득'이란 이렇게 세속으로 들어가 중생을 깨우치고 자 중생들과 동사섭(同事攝)하며 티끌속에 뒹굴어도 본모습을 떠나지 않으니 미소가 피어납 니다. 이것을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합니다. 이는 세속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모습입 니다. 분별하고 차별하는 마음없이 중생의 고통을 들어 주고 마음을 열어 주고 그들로 하여 금 지혜를 갖추도록 일깨워 주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도를 닦는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
'신선의 참된 비결 사용하지 않아도' 이렇게 화광동진(和光同塵)하며 중생을 교화하는데 무슨 신선의 비결이 따로 있겠냐는 것입니다. 신선이 되기 위하여 연단법(鍊丹法)을 쓰고 복 기법(服氣法)을 쓰는 거와 같은 무슨 특출한 신통력을 보여서 뾰웅~ 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 니라 다만 진심을 다하여 일깨워 줄 따름입니다.
'곧바로 마른 나무 꽃을 피게 하누나.' 이 마지막 구절은 교화의 궁극적 목표일 것입니다. 도를 깨달아 중생 곁으로 달려가 온갖 흙과 재를 덮어쓰며 함께 뒹구는 것은 영원히 티끌 속 에만 뒹구르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습 니다. 늘 고통 속에서 목타게 허덕이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청량한 감로수(甘露 水) 부어 주어 고목에서 꽃을 피울 것인가가 관건인 것입니다. 감로수는 생명수입니다. 죽 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물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교설은 감로수와 같습니다. 부처님의 청량한 감로와 같은 법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도를 깨달은 이의 아름다운 회향인 것입 니다.
십우도의 열 단계는 도를 찾고 도를 이루고, 도를 이룬 후에는 교화를 펴야 한다는 대승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십우도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선(禪)적인 오묘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데 다만 그 대강이라도 공부해 보고자 곽암선사의 십우송(十牛頌)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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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속의 삶도 먼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십우도에 대한 설명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였습니다. _()_
인연은 늘 주변에 있듯이 진리ㆍ행복이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_()_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_()_
이제 사찰에 가시면 십우도가 눈에 잘 들어오실 겁니다. _()_
심우도 공부 잘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도업항신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