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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12일 오후 2시 20분, 북경역에서 K215次 열차의 침대칸에 앉아 연길 출장길에 올랐다. 이 열차는 다음날인 13일 오후 2시 55분 연길역에 도착할 예정이니 약 24시간 30분 쯤이 걸린다.
연길, 중국 동북3성(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중의 하나인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이며 300만 조선족 동포의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참고로 중국의 행정단위는 성(省)과 이에 동급인 자치구(自治區)가 있고, 그 아래 단계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같은 주(州)단위의 행정단위가 있다. 그 아래로는 자치현(自治縣)이 있다.
연길은 이번으로 네 번째 방문이다. 내가 연길에 처음 갔던 것은 96년 8월 여름이다. 96년 6월 군대를 제대하고 두 달간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해 번 돈으로 복학하기 전 혼자 배낭을 메고 찾아왔던 곳이다.
당시 나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요녕성 대련항에 처음 내렸는데 길림성의 성도인 장춘을 거쳐 이곳 연길에 왔었다. 그 당시 연길의 연변대학 경제과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유학을 하고 있기도 했고, 그 첫 번의 중국여행에서 꼭 가보고자 했던 용정의 대성중학교가 바로 지척인 곳이어서 꼭 들러야만 했던 곳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벌써 네 번째나 가는 도시이지만 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이 연길행 기차에만 오르면 뭔지 모를 가슴이 벅차오름과 설레임을 느낀다. 그 이유는 8년전 내가 중국에 처녀 방문 했을 때 대련에서 장춘, 장춘에서 도문까지의 기차를 타고오며 느꼈던 만주벌판에 대한 ‘느낌’ 때문 이었으리라. 물론 외국여행을 처음하는 당시의 나에게 여행에 대한 두려움과 설레임이 교차하기도 했을 것이었다.
당시 나는 중국 동북의 벌판을 기차를 타고 가로지르며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 너머로 질리도록 그 ‘지평선’을 바라보며 창가에 앉아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 감회는 해가 지고 난 후에도 창 밖의 어둠 너머에서 내게 ‘느낌’으로 끝없이 다가왔고 나는 홀로 기차의 창가에 앉아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보낼 수 없던 그날 밤을 밤새 맥주를 마시며 그렇게 이 길을 갔었다.
오늘 나는 하얗게 눈이 덮인 그 광야를 또다시 달린다. 세월은 변했으되 광야는 변함이 없다. 그 옛날의 이 광야도 지금의 저와 같았을 것이리라…
13일 오후 3시 연길역에 도착했다. 역사(驛舍)는 변함이 없으되 지금의 연길은 8년전과는 전혀 다른 도시가 되었다. 시내에는 높은 빌딩들이 들어섰고, 아파트와 쇼핑센터들은 한국의 여느 지방도시와도 같다. 내 느낌에 가장 눈에 띄게 변한 것이 있으니 당시 벽에 붉은 글씨로 여기저기 씌여져 있던 을씨년스러운 구호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레와 좌판 일색이던 그 유명한 연길의 서시장은 새로지은 건물 안의 쇼핑센터로 탈바꿈 되었고 재래시장과 현대의 쇼핑센터가 조화를 이뤄 그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러한 변화 속에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연길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인 연길냉면을 파는 ‘진달래’와 ‘복무대로’ 식당의 냉면 맛이다. 이곳의 냉면 맛은 모든 조선족 동포들이 인정할 정도로 이름이 나 있다. 북경의 유명한 조선족 식당에도 이곳에서 조리사를 데려 왔다고 광고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정도이니까.
다음날인 14일 다시한번 연길의 냉면을 맛보기 위해 진달래 식당을 찾았다. 점심시간이었는데 1층부터 빈자리를 찾다가 4층에 와서야 겨우 빈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그 냉면 맛은 오묘한 국물의 맛에 있는데, 시원하면서 감칠 맛이 나 마실수록 자꾸 더 마시고 싶은 겨자를 풀어 먹는 한국의 전통 냉면 육수 맛과 천연 재료 만을 써 담백하면서도 은은한 깊은 맛을 내는 북한의 냉면과 비교할 때, 그 중간쯤을 적절히 섞었으면서도 고추 다대기 양념을 풀어 약간 매운 맛을 낸다.
14일 오후, 연길시와 인접해 있는 용정시에 가기 위해 1인당 15元을 내고 택시를 합승했다. 용정시는 항일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독립군의 주요 활동 무대 중의 하나 였던 곳이며 지금도 곳곳에 그 흔적과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곳이다. 또한 내가 8년전 중국에 첫 여행을 왔을 때 가장 가보고 싶어하던 목적지 중의 하나인 민족 시인 윤동주를 배출한 대성중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序 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윤동주
택시를 타고 지금은 용정시 제5중학으로 바뀐 옛 대성중학교를 찾았다. 8년전과 비교해 주변에 건물과 상가들이 많이 들어섰다.
학교 안으로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지금은 시인 윤동주의 기념관으로 쓰이는 2층의 옛 대성중학교 건물이 보이고 그 앞에 윤동주 시비(尹東柱 詩碑)가 있다. 내가 이곳을 찾은 날은 날씨가 매우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 물론 관광객은 나 밖에 없었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토요일이고 날씨도 추워 관리인 직원이 일찍 퇴근을 한 모양이다.
8년전 이곳 기념관을 둘러보던 기억을 되살리면 앞쪽에는 윤동주의 어려서부터의 생애와 자라온 과정들, 시인으로서의 삶과 사진들 그리고 이곳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다른 민족 선각자들의 소개가 자세히 되어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방명록과 후원금을 낼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당시 나는 거금 50元의 후원금을 냈다), 이곳 한쪽의 벽에 한국의 누구누구 국회의원 이라고 기부자 명단이 크게 씌여 있는 것을 보고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요즘 국회의원도 그런 짓거리를 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기념관이 문을 닫은 시간이어서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기념 사진 몇 장을 찍고 근처 다방으로 피신(?)했다. 다방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다음 행선지인 용정시의 지명이 유래한 ‘용정’ 즉, 옛이름 용두레우물까지 가는 방법을 확인하였다. 용정은 워낙 작은 도시라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2元이면 갈수 있다고 귀엽고 착하게 생긴 조선족 아가씨가 미소와 함께 친절하게 일러준다.
다방을 나와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골목 어귀를 돌아나오니 큰 길 한 켠에 작은 공원과 함께 우물 하나가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용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고 한글과 한문으로 씌여있다. 우리말의 옛이름은 ‘용두레우물’이다. 이곳 우물은 1880년경 조선인이 처음 발견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으로 향하였다. 일송정은 가곡 선구자의 구절에 나오는 바로 그곳이며 비암산 아래를 지나 용정시를 가로지르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천년을 두고’ 아직도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지금 이 비암산 중턱 한 봉우리에 일송정이란 정자가 하나 있는데, 원래 이곳 정자가 있던 곳에 정자 모양을 한 한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당시 독립군들이 이 한 그루 정자모양의 소나무 곁에 모여 산 너머 조선땅을 바라보며 항일 투쟁과 독립의 의지를 불사르던 곳이다. 지금 그 소나무는 없어지고 사람들이 그곳에 정자를 세웠다. 그야말로 가곡의 구절처럼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없어지고 한줄기 해란강만 천년두고 흐르는’ 셈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가보니 8년전에는 정자만 있던 이곳이 바로 앞에 비석이 하나 만들어진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 곁에 산장을 두어군데 지어놓고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려 하는 모습이 어처구니 없어 보인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여기서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라는 그 산장 일꾼의 말이다.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이곳에 산장은 무엇이며 돈벌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더욱이 그 산장을 한국사람이 투자한 것이라 한다. 할 말을 잃는다.
15일 오전, 일을 볼 겸 도문시 정부청사로 향했다. 도문은 북한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변방의 도시로 강의 건너편은 북한의 함경북도 남양시(南陽市)이다. 두만강은 1월초에 갔던 단동의 압록강과 비교하면 냇물에 불과하다.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다.
두만강가에 가면 북한과 연결된 다리를 볼 수 있는데 지금도 변방 검사를 통과한 차량이 북한으로 끊임 없이 물자를 실어 나른다. 다리의 중간에는 변계선(邊界線)이라는 국경선 표시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다리 이쪽의 중국측 가로등은 노란색으로 다리 저쪽의 북한쪽 가로등은 파란색으로 칠해 놓았다.
요금을 내면 변방 검사 문 위의 옥상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북한측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중국측 병사의 호위로 다리 중간까지 가서 잠깐 변계선을 넘어(즉, 북한 땅을 밟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고맙게도 사진을 대신 찍어 주기도 한다.
내가 8년전 이곳에 왔을 때는 강 건너 북한의 산 중턱에 ‘속도전’이라는 세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 도문은 8년 전에 비해 많이 발전한 모습이지만 강 건너 북한은 마치 시계가 멈춰버린 듯 8년 전 모습 그대로 이다.
연길에서의 몇 일을 바삐 보내고 19일 연길의 중심대학인 연변대학을 가보았다. 이곳 연변대학은 8년 전 내가 경제과에 유학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을 찾아와 유학생 기숙사에서 몇 일을 묵고 간 곳이다. 이 곳 주변 역시 많이 변해 있었다. 주위에 식당과 PC방, 서점 등 거의 한국의 어느 대학가처럼 꾸며져 있었다.
내가 당시 묵고 갔던 그 유학생 기숙사는 지금은 헐리고 새 기숙사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낮 선 중국여행의 두려움과 설레임을 안고 잠시나마 의지할 친구를 찾아 이곳을 들어서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누구나 겪는 중국여행 초보자의 모습이었다.
내가 이번 연길 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매일 저녁 사우나에 가서 편히 쉴 수 있었다는 점이었고(사실 북경의 사우나보다 가격이나 시설면에서 훨씬 낳았다), 또 다른 하나는 PC방에 가서 한국 드라마 ‘야인시대’를 8편까지 보고왔다는 사실이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 오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백야 김좌진 장군이 나오는 대목에선 그 무대인 만주에서 내가 그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뭔가 다른 감회에 젖을 수 있게 해주었다.
2월 21일, 나는 밤새 눈보라가 휘날리는 만주벌판을 다시 한번 가로질러 북경으로 돌아왔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 속에 묻어 나는 애향심과 애국심이 크게 돋 보입니다. 역사 의식이 남 다른 것도 다 이국 생활을 오래 하면 그런가 봅니다. 특히 오늘날 주변 강대국들과의 갈등이 심화되는 현상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군요. 대성 중학교 윤동주, 일송정, 두만강, 연변, 만주, 진달래 식당....다 그리운 이름들 입니다. 역시 무엇보다도 먼저 내 나라가 잘 살고 힘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계속 좋은 글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