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호의 최후가 주는 품질 교훈
“침몰할 수 없는 배”
1911년 5월 31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Belfast)의 조선소에
타이타닉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4만 6천톤이 넘는 사상 초유의
거대한 선박의 진수식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이 날 선주측의 한 직원은 감격하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이 배는 침몰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자랑하였다.
이후 타이타닉은 정박소로 옮겨져 10개월에 걸친 내장공사에 들어갔다.
750만 달러가 들어간 이 배는 수영장과 체육관을 최초로 구비한 정기 여객선이었다.
1912년 4월 10일 ‘침몰할 수 없는 배 (Unsinkable Ship)'라는
별칭을 가진 타이타닉은 2,200 여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영국의 사우스햄튼(Southampton)을 떠나
미국 뉴욕(New York)으로의 처녀 운항에 나섰다.
당초 64척의 구명보트를 실을 예정이었지만
안전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20척만 실었다.
20척의 구명보트로는 승선인원의 절반 정도 밖에 수용할 수 없었지만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당시 영국 선박운항 규정에 따르면
1만톤 이상의 배는 구명보트에 962명만 수용할 수 있으면 되었다.
“최후의 밤”
처녀 출항에 나선 지 5일째 되던 4월 14일 밤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달빛도 바람도 너울도 없었기 때문에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를 미끄러지듯 순항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이 잠든 11시 40분 경계근무를 하던 승무원이
경고벨을 3번 반복하여 울리면서 선장에게 다급하게 전화했다.
“바로 앞에 빙산이 있습니다, 빙산!”
이를 피하기 위해 엔진을 끄고 뱃머리를 급히 왼쪽으로 돌렸으나
빙산은 약 10초 동안 오른쪽 뱃전을 세차게 치고 긁었다.
충격에 놀란 스미스(E.J. Smith) 선장은 운항실로 뛰어들어 왔으며
승무원들은 이 배의 운영책임자인 앤드루스(T. Andrews)에게 급히 연락했다.
앤드루스는 타이타닉의 설계책임자이기도 했다.
선박의 상태를 점검한 두 사람은 배의 앞 부분에 있는 5개의 방수 격실에
물이 차는 것을 보고 타이타닉의 침몰을 예상했다.
구명보트를 띄울 준비가 끝나자 선장은 먼저
‘여자와 어린이들’을 태우라고 지시했다.
빙산과 충돌한 지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난 12시 45분
캄캄한 바다 위로 첫 번째 구명보트를 띄웠다. 정원은 65명이었지만
28명만이 타고 있었다. 최초의 보트가 내려지자 조난을 알리는 신호포를 발사했다.
그로부터 10분 후 두 번째 보트가 내려졌으나 승선 인원은 오히려 더 적었다.
이런 식으로 구명보트를 띄우는 동안 배의 앞부분은 계속 침수되었다.
세 번째 보트를 띄우고 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3등석 남자승객 5명이
미터 아래에 떠 있는 보트 위로 몸을 날렸다.
이 때문에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한 명의 여자가 크게 다쳤다.
1시 15분이 되자 배의 앞부분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뱃머리가 침수하자 배의 뒷부분은 허공을 향해 점점 더 높이 들려 올라갔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러한 혼란과 공포의 와중에서도 밴드 단원들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와 같은
찬송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2시 5분이 되자 20척의 구명보트가 모두 동이 나고,
남아 있던 4척의 조립식 보트 중 2척이 사용되었다.
선장은 승무원들에게 이제부터 자기 목숨은 스스로 챙기라고 말하였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비명 속에 2시 17분이 되자
허공을 향해 들려 있던 뒷부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배는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두 동강 났다.
순식간에 불이 꺼지면서 두 조각난 배는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산 자와 죽은 자’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신의 저주였을까?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을 것’이라던 타이타닉의 운명은
이렇게 끝이 나고 생사의 기로에 섰던 사람들도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렸다.
선장과 앤드루스, 그리고 용감했던 밴드 단원들은 모두 죽은 자의 행렬에
기꺼이 동참하였다. 구명보트를 타고 거친 바다 위에 내던져진 자들에게
희미한 먼동과 함께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새벽 4시 30분이 되자 무선으로 구조요청을 받은
카파티아(Carpathia)호가 도착한 것이다.
2,224명의 승객과 승무원 중 산 자는 711명, 죽은 자는 1,513명이었다.
인명은 재천이 아니라 재전이라 해야 할까?
1등석, 2등석, 3등석 승객의 생존률은 각각 62%, 41%, 25%였다.
3등석 승객의 생존률이 극히 낮은 데 대해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그들 중 상당수가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민자들이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했다는 것이 선주 측의 해명이다.
‘여자와 어린이들’을 우선으로 한 구조정책 때문에
성인 여자, 어린이, 성인 남자의 생존률은 각각 74%, 52%, 20%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구명보트의 총 정원은 1,084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711명만이 구조되었다는 것이다.
여자와 어린이들을 합하면 모두 534명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550명의 성인 남자를 더 태울 수 있었다.
희생된 여자와 어린이들 중에는 죽음을 무릎쓰고라도
남편이나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으려 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침몰의 원인은 무엇인가”
타이타닉호의 정확한 침몰지점을 찾아서 선체를 인양하려는 계획과 시도는
침몰 직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까지는
73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였다.
1985년 9월 1일 미국의 발라드(R. Ballard) 박사는
프랑스 과학자들과 공동으로 수중 음파탐지기와
이에 연결된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하여
캐나다 뉴파운드랜드(Newfoundland) 남서쪽 531킬로미터 지점에
가라 앉아 있는 선체를 발견하였다.
두 동강난 난파선은 해저 3800미터가 넘는 깊은 바다 밑바닥에
55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듬해 6월 발라드 박사는 2차 정밀탐사에 나섰다.
탐사팀은 세 사람이 탈 수 있는 소형 잠수선인 알빈(Alvin)과
이 잠수선에서 무선 원격조정이 가능한 카메라를 이용하여
선체 표면과 내부를 세밀히 관찰하였다.
정밀탐사 결과 선체 표면이 휘어졌거나,
철판의 이음새 부분이 벌어졌거나 이들을 조이는 리벳(rivet)
못이 튀어 나가고 없는 곳이 많이 관찰되었다.
또한 리벳의 머리부분이 잘려 나간 곳도 적지 않았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원(NIST)의 포케(T. Foecke) 박사는
난파선에서 나온 리벳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광석이 용해될 때 생기는 찌꺼기인
슬래그(slag) 함유량이 9%에 달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기준치의 3배가 넘는 것이었다.
또한, 세로로 자른 리벳의 절단면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슬래그의 배열선이 리벳 머리부분에서 90도로 꺽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리벳에 있다고 생각한 포케 박사는 모두 48개의 리벳을 분석한 결과
같은 유형의 불량이 19개나 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결국, 빙산에 부딪힌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배가 침몰한 원인은 철판이 아니라
작은 리벳의 결함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타이타닉의 참사가 주는 교훈”
이상과 같은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사소한 결함이나 부주의가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
거대한 타이타닉의 침몰은 작은 리벳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리벳으로 조인 부분을 망치로 때렸을 때 나는 소리가 바르지 않으면
리벳을 교체해 주는 것이 품질관리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법규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법이나 규정은 시대의 흐름을 적시에 반영하지 못한다.
당시에 적용되었던 구명보트에 관한 선박운항 규정도
타이타닉이 출항에 나선 것보다 18년이나 앞선 1894년에 제정된 것이었다.
법규를 제정할 당시에는 1만톤을 초과하는 배가 없었기 때문에
타이타닉호처럼 4만 5천톤이 넘는 초대형 선박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물론, 타이타닉호의 비극과 같은 대형 참사를 당하고 나서야
배의 크기와 톤 수에 비례하여 구명보트를 준비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3) 물리적인 조건 못지 않게 업무처리 시스템도 중요하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구명보트에 탄 사람은 총 정원의 3분의 2에 미치지 못하였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으려거나
겁이 나서 구명보트에 오르지 못한 여자와 어린이들의 희생을 생각해 본다면
‘여자와 어린이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한다는 원칙과 명분이
언제나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타이타닉호의 경우에는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업무방법과 절차를 미리 확립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더 구할 수도 있었던 많은 생명들을 잃고 말았다.
[참고] 이 글은 감사원에서 발간하는「계간 감사」200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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