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월 3일(수) [ 성심원 ~ 운리구간 ] 걷기
경상남도 산청군 읍내리 성심원과 단성면 운리를 잇는 13.4km의 지리산둘레길. 이 구간은 웅석봉 턱밑인 800고지까지 올라가야하는 다소 힘든 오르막과 탑동마을까지 긴 내리막 임도를 품고 있다, 풍현마을과 어천마을을 이어주는 아침재, 웅석봉에서 흘러 경호강에 오르는 어천계곡,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청계저수지가 아름답다. 단속사터였던 탑동마을에서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산청 삼매 중 하나인 정당매를 만나 역사와 걷는 길이다.
이 구간은 위와 같이 힘든 오르막과 긴 내리막 임도라 ..... 서울에서 새벽일찍 출발하였고, 2차 첫날이라 성심원 -> 운리가 아닌 운리->성심원으로
▲ 단속사지터에서 걷기 시작한다.
- 단속사[ 斷俗寺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智異山)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5대 경덕왕 당시 창건한 사찰.
748년(경덕왕 7) 대내마 이순(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763년 신충(信忠)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경덕왕 때 직장(直長) 이순이 일찍부터 발원하기를 나이 50세가 되면 출가하여 절을 짓겠다고 하였다. 748년 마침 그의 나이가 50세가 되었으므로 조연(槽淵)의 작은 절을 중창하여 단속사라 하고, 스스로 삭발하여 법명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하였다 한다.
또, 763년 신충이 두 친구와 관을 벗어 걸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왕이 두 번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대왕의 복을 빌겠다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 교종(敎宗)에 속하였으며, 폐사 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보물 제72호인 단속사지동삼층석탑과 보물 제73호인 단속사지서삼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금당지에는 민가가 있어서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원래 위치에 건립되어 있는 동·서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서, 삼국통일 이후 이와 같은 쌍탑 가람의 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위시하여 비 조각이 출토되고 있으며, 근처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쓴 ‘廣濟嵒門(광제암문)’ 각석(刻石)이 있다.
경내에는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어 813년(헌덕왕 5)에 세운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1148년(의종 2) 이 절에 들어와 1159년에 입적한 탄연(坦然: 大鑑國師)의 영당(影堂)과 비, 그리고 최치원의 독서당이 있었다. 현재 신행선사비편의 일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그리고 대감국사비편은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고려 말의 강회백(姜淮伯)은 과거하기 전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손수 심었는데, 그 뒤에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하였다. 또, 이 절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화(神畫)라고 하였다. 한편, 이 절에서 1226년(고종 13)에 간행한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속사 [斷俗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성심원 ~ 운리 구간 중간지점 표시
▲ 웅석봉밑에서 성심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라 .... 올라올때와 전혀 다르다
▲ 주변에 숙소가 마땅하지 않아 .... 나와 남미여행을 함께한 지인의 집에서 하루 ... 신세를
♣ 6월 4일(목) 오전 [ 운리 ~ 덕산구간 ] 걷기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마을에서 산청군 시천면 사리까지 걷는 13.9km의 지리산 둘레길. 운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걷다보면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따라 걷는 길에서 백운동 계곡으로 가는 길을 만난다. 이 길은 나무를 운반하는 운재로였다. 임도 아랫부분에 너른 길이 울창한 참나무 숲속에 남아 있다. 참나무 숲을 걷다보면 너들도 만나고 작은 개울도 지난다. 좁아진 길을 지나 백운계곡을 만나고 백운계곡에서 마근담 가는 길은 솔숲과 참나무 숲을 지난다. 남명 조식선생이 머물렀던 산천재가 있는 사리에서 바라보는 덕천강과 천왕봉은 아름다움과 굳센 기상을 담고 있어서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의미있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 지리산 둘레길중 참나무 숲이 가장 멋진 구간이라고 한다
▲ 백운계곡에서 시원하게 세족도 하고 .....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 마근담 가는 길
▲ 날씨가 더워 시골 빨래터에서 세족도 하고 ... 쉬어간다
▲ 남명 조식선생이 머물렀던 산천재가 있는 사리에서
♧ 남명 조식[ 南冥 曺植 ] / 경(敬)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진 선비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안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퇴계 이황 이 태어나고, 경상우도(慶尙右道)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년)이 태어났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16세기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정치판의 물갈이라는 절실한 시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신파인 사림과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격돌은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는 사화로 결말이 났고, 그러한 상황은 연속되었다. 칼자루는 언제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였던 훈구파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진 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했지만 학문적 미성숙성과 과격성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데, 이때도 정권의 승자는 중종반정의 훈구 세력이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질려서 신진 사림에 힘을 실어 주려 했던 왕도 두 세력의 대격돌 앞에서는 결국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사림이 미래라면 훈구파는 현실이었다. 왕이 추구하는 미래가 사림에게 있다 하더라도 왕은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훈구파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권이 훈구파에게 넘어가면 사림은 귀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향촌 사회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인 그 당시에 퇴계는 그 길을 걸었지만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명 조식
▲ 덕천강
♣ 6월 4일(목) 오후 [ 덕산 ~ 위태 ] 걷기
덕산-위태구간은 낙동강수계인 덕천강도 만나고 두방산의 경치도 감상하면서 걷는 9.7km의 지리산둘레길이다. 이 구간에서는 남명조식선생의 유적도 둘러보고 지리산 천왕봉의 기운을 느끼면서 임도와 옛길를 걷게된다. 이 구간의 중태마을안내소는 주변에 농작물이 많이 있어 주민들의 소중한 농작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실명제 부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 구간을 지날 때는 책임여행을 실천하는 의미로 안내소를 방문하자. 덕산~위태 구간은 시천면 사리 원리, 천평, 중태, 옥종면 위태(상촌)마을을 지난다.
▲ 이 재를 산청사람들은 위태재라 부르고, 하동사람들은 중태재라 부른다.
이 재를 넘으면 하동과 산청을 오가는 것이다.
▲ 남원을 출발하여 함양과 산청을 거쳐 ..... 이제 하동으로 넘어간다
▲ 하동부터는 대나무 군락지가 많다
▲ 민박집에서 먹은 저녁식사
♣ 6월 5일 오전 [ 위태 ~ 하동호 구간 ] 걷기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와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 하동호를 잇는 11.5km의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호 구간은 낙동강 수계권에서 식생이 다양한 섬진강 수계권인 지리산 남쪽을 걷는 길이다.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물들이 북쪽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은 섬진강이 된다. 걷다가 만나는 숲의 모습도 다르다. 남명 조식선생과 지리산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자주찾았던 오대사터가 있는 백궁선원도 스친다. 지리산 자락의 큰 댐인 하동호도 만난다.
▲ 민박집(정돌이네)를 출발하면서
▲ 멋진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
▲ 대나무 죽순이 한창 자라는 시기
▲ 지리산 자락의 큰 댐인 하동호
♣ 6월 5일 오전후[ 하동호 ~ 삼하실 구간 ] 걷기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 하동호와 하동군 적량면 동리 동촌마을을 잇는 9.4km의 지리산둘레길. 하동호- 삼화실구간은 청암면 소재지를 지난다. 돌다리를 건너 시냇물을 건너보는 모험도 해보고 산골마을 아이들이 학교를 다녔던 존티재도 넘는다. 익살스러운 장승도 만난다. 구 삼화초교였던 삼화에코하우스에 자리잡고 있는 지리산둘레길 삼화실안내소에서 다리쉼도 하고 안내도 받을 수 있다. 하동호- 삼화실구간은 평촌, 관점, 상존, 동촌, 이정마을을 지난다.
▲ 산골마을 아이들이 학교를 다녔던 존티재에서 익살스러운 장승도 만나고
▲ 삼화실에 도착하여 ..... 어제 숙박한 정돌이네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한다.
♣ 6월 6일(토) 오전[ 서당마을 ~ 대축 구간 ] 걷기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리에서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대축마을을 잇는 16.7km의 지리산둘레길.
마을도 많이 지나고 논, 밭과 임도, 마을길, 숲길 등 다양한 길들이 계절별로 다른 모습을 하고 반긴다. 봄에는 꽃동산을, 가을이면 황금으로 물든 풍요로운 지리산 자락을 펼쳐 놓는다. 먹점재에서 미동 가는 길에 만나는 굽이쳐 흘러가는 섬진강과 화개 쪽의 형제봉 능선, 그리고 섬진강 건너 백운산 자락이 계절별로 색을 바꿔 순례자와 여행객들의 마을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길만큼 마을 숲도 다양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악양면 대축의 문암송은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 준다. 또한 지리산북쪽에 다랭이논이 있다면 이곳에는 갓논이 있다.
※ 이 구간중 삼화실(삼화실안내소) – 이정마을(0.4km) – 버디재(1.3km) – 서당마을(1.6km) 구간은 토지 소유자가 길을 내어 주지 않아 현재 패쇄된 상태라 .... 서당마을 -> 대축구간만 걸을 수 있다
▲ 이곳에서 부터는 많은 매실농장을 볼 수 있다
▲ 하동하면 생각나는 섬진강 풍경이 ..... 눈앞에 펼쳐진다.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악양면 대축의 문암송
♣ 하동 축지리 문암송 / [ 河東 丑只里 文岩松 ]
천연기념물 제491호. 한그루의 노거목인데 나무의 높이 12.6m, 가슴높이 줄기둘레 3.2m, 수관폭(樹冠幅)은 동서로 16.8m, 남북으로 12.5m에 이르고 나무의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줄기는 다소 비스듬히 서있고 그 모습이 당당하다. 이 나무는 일명 문암송(文岩松)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곳을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아오는데 연유한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축지리의 뒷산 기슭에는 소위 아미산의 천연기암 속바위가 있는데 이 소나무는 이 바위를 뚫고 자라고 있어 바위와 함께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바위를 둘로 가르는 소나무의 힘을 살필 수 있다.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화창한 봄날에 사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제사를 이 나무 아래에서 지내고 하루종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해서 이 소나무는 그간 잘 보호되어 온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동 축지리 문암송 [河東 丑只里 文岩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6월 6일(토) 오후[ 사성암 ] 관광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8월 28일 명승 제11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구례읍에서 약 2km 남쪽인 죽마리 오산(鰲山)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는데, 544년(성왕四聖庵史蹟)》에 4명의 고승, 즉 원효(元曉)·도선국사(道詵國師)·진각(眞覺)·의상(義湘)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오산은 해발 530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승지이다. 《봉성지(鳳城誌)》에 이르기를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하였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망풍대·신선대 등 12비경으로 절경이 뛰어나다.
또한 송광사 제6세인 원감국사(圓鑑國師) 문집에도 오산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오산 정상에서 참선을 행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宴坐修道)했던 곳”이라 하였다. 어쨌든 이와 같은 기록들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이래 고려까지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찰은 조그마한 소규모의 목조 기와집이며, 암자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암벽에 높이 4m되는 음각
[네이버 지식백과] 사성암 [四聖庵] (두산백과)
◈ 구례 사성암 마애여래입상 [ 求禮四聖庵磨崖如來立像 ]
오산(鰲山, 해발 530m)의 정상에 위치한 사성암에서 남쪽으로 50m 정도 내려가면 높이 20m가 넘는 암벽에 남서향으로 열린 ㄷ자형 벽면 안쪽에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와 대의(大衣)의 처리 등으로 보아 나말여초인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9년 7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0호로 지정되었다.
대의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신체를 따라 무릎까지 U자형의 의습선이 길게 늘어져 있다. 하반신에 군의(裙衣)를 입어 대의 끝단 밑으로 군의자락이 표현되었다. 군의자락 밖으로 나온 발이 얼굴과 손 등에 비하여 비사실적이고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다. 얼굴과 손이 신체에 비하여 강조된 것은 마애불이 위치한 지점이 지상에서 2미터 정도 위에 있어 예불을 드리는 사람의 시각을 고려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례 사성암 마애여래입상 [求禮四聖庵磨崖如來立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사성암 마애여래입상은 위 건물안에서 볼 수 있도록 유리도 만들어 놓았다
▲ 화엄사 입구 구례 맛집에서 대통밥으로 맛나게 저녁을 해결하고
▲ 비오는 저녁 황토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