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잘들 지내시죠?
저는 얼마 전부터
KTV의 ‘영상 기록, 시간 속으로-옛노래의 재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첫 방송이 ‘2011 귀국 방의경, 아름다운 것들’이었습니다...요.
잘 알고 계시겠지만 KTV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단체입니다.
한국전쟁 당시부터 ‘대한뉴스’ 등 우리나라 근대사와 대중문화사를 고스란히 기록,
보관해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때문에 가요 관련 자료와 주요 필름을 주로 방송하는 ‘옛노래의 재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을
개인적으로도 매우 소중히 여기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옛노래의 재발견’, 그 여덟 번 째 시간은
7월 23일부터 24일, 이틀 정도 예정으로 목포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바로 ‘목포의 눈물’, 그리고 가수 이난영에 대한 자취와
노래가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출발할 예정이지요.
그동안의 뜸했던 인사를 대신해,
그리고 프로그램 구성도 할 겸 그동안 발표했던 글, 몇 개를 찾아 올립니다.
머리도 식힐 겸, 참고삼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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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리포트 l 대한민국 가요제 현장 Sketch[1]
'mbc난영가요제' & 'kbs 목포가요제' Sketch, 그 木浦 2題
'예향' 목포는 호남선의 종착역인 동시에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 가요제도 출발한다.
바로 한국 가요의 못자리이자 신인가수의 등용문인 'mbc 난영가요제'와 그리고 'kbs 목포가요제'.
일제 하 우리 민족의 '망향가'이자 해방 이후에도 호남인들의 '시름가'로,
그리고 민주투쟁의 연대에는 남도인들의 '진혼가'이기도 했던 노래 '목포의 눈물'.
가요계 불멸의 여왕, 가수 이난영을 기리기 위해 매년 목포에서 열리는 가요제,
그 2005년 현장 2제(題).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목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향(藝鄕)'이다.
호남선, 아득한 레일의 끝에는 목포가 있다.
갯비린내와 살비린내가 가득한 목포에 처음 들어서서 그 삶의 비린내를 일단 걷고 나면
거기 선명하게 유달산과 영산강, 그리고 삼학도가 자태를 드러낸다.
목포는 호남선의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 가요제도 출발했다.
바로 MBC '난영가요제', 그리고 KBS '목포가요제'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일제 하, 1935년에 발표된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목포의 눈물' 1절 가사다.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의 '망향가'였고
해방 후에는 설움 받는 호남인들의 '시름가'였다.
그리고 민주투쟁의 연대에는 장렬히 산화한 열사들에 대한 남도인의 '진혼가'이기도 했다.
심지어 프로야구 응원가로도 사용되는 이 노래는 목포시민, 그리고 호남인들의 삶과 함께 했다.
이 노래는 마치 세발낙지처럼 입에 착 달라붙어 힘들고 슬플 때,
그리고 기쁘고 즐거울 때도 '목포의 눈물'은 어김없이 함께 했고 또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당시 Okeh레코드사와 손잡고, 향토노래가사를 공모했고
여기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文一石, 본명 윤재희/1916~1942)의 작품 '목포의 노래'가
3천여 통의 응모작 중 영예의 1등으로 당선되었다.
애절한 별리의 한을 담은 이 '목포의 노래'를 Okeh레코드사 사장 이철은 '목포의 눈물'로 제목을 바꾸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작곡을 의뢰했고 당시 목포 출신의 19세 소녀가수, 이난영(1916~1965)에게 부르도록 했다.
'목포의 눈물'은 우리 가요로서는 최초로 일본어로도 취입되어 일본에서도 사랑받았다.
동시에 이 노래로 가수 이난영은 목포를 상징하는 동시에 가요계의 '불멸의 여왕(女王)'으로 군림하게 된다.
'난영가요제' 그리고 '목포가요제'의 모티브가 된 가수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철공업을 하던 부친 이남순(李南順)과 모친 박소아(朴小兒) 사이에서
목포부 양동 72번지에서 태어나
1965년 4월 11일 새벽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마흔 아홉 나이에 파란 많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필자는 몇 년 전 그의 주검을 처음 발견했던 이로부터 실로 충격적인 증언을 들었는데
그 언급은 이 글에서는 피하기로 한다.
‘난영(蘭影)’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지은 예명, 본명은 ‘옥순(玉順)’, 이후 ‘옥례(玉禮)’로 개명한다.
故 이난영 여사를 추모하기 위해 그녀의 사후 3년 뒤인 1968년부터 '난영가요제'가 호남매일신문사 주최로 열리게 되었고
또한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유달산 중턱, 목포 시가지와 삼학도 그리고 다도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다.
1969년 6월 10일 목포악기점을 운영하던 박오주에 의해 세워진 이 노래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비 제1호로서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노래비 앞면에는, ‘목포의 눈물’ 가사와 그 아래 이러한 글이 새겨져 있다.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
남쪽하늘 아래 꿈과 사랑의 열매를 여기 심습니다.
이난영의 노래가 문일석 가사 손목인 작곡으로 여기 청호의 넋처럼 빛나고 있습니다.’라는
추모글이.
아울러 이 노래비는 그동안 작곡자 누락, 가사 오류 등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호남매일신문사 주관으로 1968년부터 시작된 '난영가요제'는 한 때 중단되었다가
1991년부터 목포 MBC 주관으로 다시 전통가요의 맥을 잇기 위한 수레를 돌리기 시작했으며
또한 1989년부터는 KBS에서도 이난영의 맥을 잇는 '목포가요제'를 매년 개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 2005 'mbc 난영가요제' & 'kbs 목포가요제' 현장.
현재 목포시에서는 '난영기념관' 건립과 난영공원도 추진 중이다.
故 이난영 여사를 추모하고 신인가수를 발굴하기 위해 23회 째를 맞게 되는 '난영가요제'와
16회 째를 맞고 있는 '목포가요제'는 각각 MBC와 KBS, 양대 방송사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기 때문에
가수가 되기 위한 지망생들의 등용문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기대된다.
매년 150명~200명의 지망생이 각각 몰리는 이 대회에 입상하면
상장과 상금, 그리고 한국연예인협회에서 가수 인증서를 받게 된다.
대한민국이 인정한 정식 가수가 되는 것이다.
이 대회를 통해 가수 최유나, 이정옥, 아랑, 듀엣 오즈의 신은정, 이하린, 김상민, 홍성남, 송광호,
그리고 최근 화제의 가수 춘자, 국악가수 김산옥 등도 이 대회를 통해 배출되었다.
제2, 제3의 이난영을 꿈꾸는 가수들을 발굴하기 위한 대회로
난영가요제, 목포가요제는 계속 출전곡을 이난영의 곡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가요제의 성격과 취지를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일단 수긍하지만
한편으로는 출전곡을 제한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가수를 발굴하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지, 검토해야 한다는 논쟁도 매회 불러일으켰다.
사실 이난영이 발표한 노래들은 그렇게 다양한 장르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지난 2004년, 목포가요제에선 남자 출연자의 경우
남진과 나훈아 곡으로만 참가곡을 제한한 것 또한
대회 규정을 반드시 재검토해야한다는 논란을 부추겼다.
조선중기 문인 윤선도, 남농 허건, 의제 허백련을 비롯,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 예술인, 대중가수 등 걸출한 예술인들이 다른 어떤 고장 못지않게 많이 배출해냈고
지금도 풋풋하고 넉넉한 인심이 살아 있는 목포,
나라 잃은 민족의 한을 노래한 '목포의 눈물'의 이 고장에서
전국적인 규모의 가요제 행사가 두 개씩이나 매년 함께 열리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Copyrights ⓒ韓國歌謠作家協會報 2005년 3월.
# 난영가요제 (매년 6월 혹은 9월 개최) 문의/목포시청 문예관광담당관실(061-270-8566)
# 목포가요제 (매년 10월 개최) 문의/KBS 목포방송국(061-270-7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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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주요 연보]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72번지 출생.
1923년 목포 공립여자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 입학,
1929년 4학년 중퇴.
1933년 9월 태양극단 시절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 취입, 데뷔(태평레코드).
1933년 10월 오케레코드사 ‘향수(鄕愁)’, 11월 ‘불사조’ 취입.
1934년 2월 ‘봄맞이’ 발표.
1934년 일본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동경 히비야공화당)’ 개최, 이난영 조선인 가수로 단독 출연.
1935년 1월 경성방송국 ‘신민요’ 당선, 일본에 중계, 노래 이난영.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발표.
1936년 7월 오카 랑꼬(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가요계 진출,
‘合歓の木蔭で(고가 마사오(古賀政男) 곡)’ 등 취입.
1937년 11월 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결혼.
12월 ‘해조곡’ 취입.
1939년 1월 ‘목포의 추억(문일석 작사, 이봉룡 작곡)’ 발표.
‘다방의 푸른 꿈’ 발표.
1942년 이봉룡 작곡 ‘목포는 항구다’ 발표.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과 KPK악극단 활동.
1965년 4월 11일 타계
1968년 호남매일신문사 주최 '난영가요제' 개최 (이후 잠시 중단, 1991년부터 목포 MBC 주관 다시 개최)
1969년 6월 10일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우리나라 노래비 제1호)
1989년 KBS '목포가요제' 개최.
첫댓글 69년에 세워졌다는 노래비의 규모가 굉장하군요.
성서님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목포의 눈물>에 대한 몰랐던 흥미로운사실들 알게 됩니다.
목포와 부산, 위치적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아름다운 풍광은 물론 좋은 가수 또한 많이 나온다는군요.
오존(O3)이 폐를 깨끗하게 하고 정서적으로도 감성이 풍부해져서 목포와 부산시민들은 모두 노래를 잘부른다는군요.
제 말이 맞지요?
박성서님... 정말 고마운 말씀을 전할께요.. 항상 이렇게 박선생님의 좋은 글을 바람새친구가 되어 볼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바람새친구들의 모임에 정성을 다 하셔서 참석해 주셔서 바람새친구의 일원으로 정말 마음 뿌듯하고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넵, 감사. 잠을 안자도 버틸 수 있다면 스위트홈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
언제 한 번 또 날을 잡아서리...^^
늘 우리가요에 일조 하는 박성서님에게 감사를,,,
고맙습니다.
저도 늘 감사.^^
박선생님~자료 감사히 보았습니다. 7월엔 목포로 출장 가셔야 겠네요. 제가 보디가드로 따라 가고 싶은데 ...
편안한 줄장이었으면 좋겠네요. ㅋㅋ 세발낚지 많이 드시고 오세요 .
놓칠 뻔했네요, 세발낙지... 더욱 기다려집니다...요.
기적이 울리고 목포역에 도착하면 울려퍼지는 목포의 눈물..
유달산에 올라 노래비도 보고 흘러나오는 노래도 들어보고 했지만
이렇게 소상히 알지는 못했네요.고맙습니다~7월 23일 24일 꼭 챙겨 보겠습니다.
기억나시는지요. 풍각쟁이님 앞마당에서 모두 함께 기타반주에 맞춰 이 '목포의 눈물'을 합창했지요.
그때 모두들 가사를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로 노래하더군요.
실제 가사는 '스며드는데'가 아니라 '숨어드는 때'입니다.
이걸 제대로 알려야겠다, 싶어서 목포행을 결심했다는...^^
(그리고 방송은 7월 30일입니다. 23일에는 남진 씨 편이 방송됩니다...요.)
네 기억 나지요..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삼학도~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이 노랫말이 주는 느낌이 더 좋군요 ㅎㅎ
새악씨 옷자락을 눈물로 아롱지게 한 님과의 이별이 훨씬 더
애처롭게 들린다는..고맙습니다^^
아~~~~~~~~숨어드는 때가 훨씬 말이 되네요...ㅋㅋ
몇십년을 그렇게 불렀어도 이제야 알겠네요.
어디 목포에 눈물 뿐이겠어요?
제작자들의 의도와 다르게 변해버린 여러곡들이 있겠죠...
샘~고맙습니다~~~
바람새 카수 햇살님과 아이리스, 란님을 위해 '옛노래 속에 잘못 불려지고 있는 노랫말들',
뭐 이런 거 한 번 정리해볼까유?
목포에 오시면 연락 하시겼죠?
넵, 기쁨 두 배, 즐거움 서너 배... 乞 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