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예배성공&인생성공 원문보기 글쓴이: 할렐루야
충성된 종이 맞는 연말 (잠 25:13, 마 24:45-51)
매년 그렇습니다만 정말 올해는 더욱 다사다난이란 말이 틀리지 않는 해입니다. 2003년은 많은 일들이 있었고 힘들었던 한해입니다. 끔직하고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뉴스거리가 많은 해였습니다. ‘대선 자금’, ‘굿모닝시티 파문’, ‘자살과 빈부 차이 급증,’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태풍 매미의 피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사스(SARS) 괴질 공포,’ ‘현대 아산 정몽헌 회장 자살’ 등 뉴스거리가 멈추지 않는 해였습니다.
앞으로 남은 며칠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분열이 두드러진 해였습니다. 진보 보수의 삼일절 집회, 사건과 사고에 대한 다른 목소리, 목회자의 탈선과 헌금사용 비리, 대형교회 목회자의 구속사건 등 교회도 편찮은 한 해였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교회가 새로운 하나의 연합기구를 위해 노력하고 연구하고 있는 것은 참 고무적인 일입니다. 이런 난제들은 올해로 끝날 과제가 아니라 내년으로 인계될 사건들입니다. 연초부터 시끌시끌 할 것같은 조짐이 있습니다.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1위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점입가경(漸入佳境), 이전투구(泥田鬪狗), 지리멸렬(支離滅裂), 아수라장(阿修羅場)의 순이었다고 합니다.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한결같이 절망적입니다. 교훈적인 것이 없고, 암담하고 답답한 말들만 나열됩니다. 이것이 2003년의 우리네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올해의 한자로 호(虎)자 한자를 선정하였습니다. 호랑이를 마스코트로 하는 프로 야구 한신 타이거스가 18년만에 우승하여 종이호랑이가 맹호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여유가 있고, 해학이 있고, 자신감이 있는 부러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의 종말적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5장은 예수님의 종말적 비유입니다. 크게는 시대적 종말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재앙과 세계의 재앙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나아가서 개인의 종말과 인류의 종말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충성된 종의 비유로, 마지막 때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윌 듀란트(Will Durant)라는 역사학자는 교회사 속에서의 아픈 상처들을 지적하면서, “교회는 오직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박해해 왔다. 한 부류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자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을 크게 구분합니다. 크게 말하면 누구나 충성된 종이 아니면 악한 종입니다. 두 부류의 종으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아니지만 한 해의 마지막 때를 맞으면서 충성된 종의 모습을 되새기는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종의 두 가지 요건은 충성과 지혜입니다.
첫째, 충성된 종은 주인이 모든 것을 맡기는 종입니다.
47절에는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합니다. 모든 소유를 맡긴다는 것은 아예 소유를 다 떼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옛날의 청지기는 충직하여 주인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배달사고’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주인의 것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나쁜 것을 말합니다. 충성된 종은 가로채기를 하지 않습니다. 가로채기는 농구, 축구에서나 하는 일입니다. 주인이 신임하고, 맡기고 잊어버릴 수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고사에 좌청룡, 우백호가 있지 않습니까?
요즘도 이 말은 권력자의 주위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좌우에 자리할 수 있는 종이란 권력자의 충성스런 종입니다. 힘이 있는만큼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좌청룡, 우백호가 떼먹기나 하고 가로채기나 하면 주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충직했던지 보디발은 자신의 집의 모든 것을 다 맡겨 주었습니다. 자신의 아내 외에 모든 것을 다 맡긴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의 간수가 감옥의 모든 일을 다 맡겼습니다. 간수가 죄수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길만큼 그는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지도자는 위임(delegating)을 잘 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위임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임받는 편의 충성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에게 위임할 수 있는 일들은 결코 나서지 않는 듯하다. 그분은 당신의 눈을 한 번 깜빡여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느리더라도, 실수하며 그르치더라도 우리더러 하라고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1864년 링컨대통령은 그랜트 장군을 북부 동맹군 사령관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계획을 알 필요도 없고 또 묻지도 않을 것이다. 책임을 갖고 행동하라.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면 나에게 연락하라”. 그랜트에게 모든 것을 믿고 완전히 맡긴 것입니다. 그랜트 장군은 모든 것을 맡길만한 충성된 인물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믿음으로 번역한 단어는 글자 그대로 ‘맡긴다’는 뜻의 고어에서 왔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믿으면 맡깁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믿음직하면 다 맡기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한 농부의 비유를 보세요. 포도원의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다른 나라에 갔습니다. 포도가 결실하여 딸 때가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어 소출을 가지고 오게 합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소출을 위해 보낸 종들을 때리고 내어 쫓았습니다. 주인이 생각하기를 농부들이 종들은 때리고 내어쫓지만 내 아들을 보내면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오자 농부들은 아들은 상속자니 죽이고 우리가 이 모든 소유를 취하자고 하면서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21:41에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라”. 충성되지 못한 농부는 악한 농부입니다. 악한 농부란 포도원을 맡기지 못할 농부란 말입니다.
우리 나라 옛말에 “고양이에게 반찬가게 지켜달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강아지에게 메주 멍석 맡긴 셈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두 말은 다 맡기지 못할 자에게 맡기는 것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충성된 종은 맡겨놓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종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그의 책에서 “우리는 둘째 아들처럼 불충성과 연약함 때문에, 또 큰 아들처럼 분한 마음과 분노 때문에 똑같이 아버지의 집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 가운데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다. 누구에게 가산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첫째입니까? 둘째입니까? 물려줄 수 있는 아들이 있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이런 아들, 이런 종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충성된 종은 사람들을 맡아 양식을 나눠줍니다.
45절에는 “주인에게 그 집 사람을 맡아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라고 합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 나누어주는 것이 충성된 종의 할 일입니다. 이런 종은 자기 것처럼 관리하고, 자기의 것처럼 알뜰하게 나누어줍니다.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충성스러우니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28:14에는 말씀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은 정말 대단한 말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찬송할 때에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지 않습니까?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또 땅의 모든 족속이 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사심없이 전달합니다. 잘 맡아 나눠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입니다. 나눠주는 것은 섬기는 일입니다. 어떤 섬김이든 충성심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충성이 없으면 섬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과부들에게 구제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가난한 성도에게 물품을 나눠주는 일입니다. 이 일은 초대교회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처음에는 사도들의 직무였습니다. 그리고 구제 문제가 교회에 확산되자 훗날에는 집사들의 직무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구제할 때에 교회의 것을 가지고 나눠줍니다. 그런데 구제가 자칫 자기 생색내기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누어줄 때는 아무 사심없이 균등한 배분의 법칙으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래야 충성스런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단어와 욕심이란 단어가 어울립니까? 충성된 자가 자기 것만 챙깁니까? 충성과 욕심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충성된 자는 욕심이 없습니다. 충성된 자는 자기 것을 먼저 챙기지 않습니다. 충성된 자는 자기의 판단이 아니라 주인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고 일합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를 보세요. 나눔이 기초가 아니라 독점, 착복이 기초입니다. 자기 몫 챙기기에 혈안이 된 듯한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무슨 충성이 보입니까? 충성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삶을 보고 있는 것같습니다.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과학자, 천체물리학자 닥터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는데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는데 강의를 취소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두명밖에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두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해 겨울 시카고 거리는 유난히 추었는데도 그는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일주일에 이틀동안 한번도 빠짐이 없이 계속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 년이 흘러갔습니다.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충성된 종은 양식을 충실히 나누어줍니다. 지식을 충실히 나누어줍니다. 신앙과 지혜를 충실히 나누어줍니다.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만인의 주인으로 철저히 자유롭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에게 예속된 만인의 종으로 철저히 충성한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충실합니다.
셋째, 충성된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변함 없이 일합니다.
46절에는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는 두 종류의 종이 등장합니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입니다. 충성된 종의 반대는 불충한 종이 아니라 악한 종입니다. 불충한 것은 그 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변함 없이 충성합니다. 악한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변함 없이 게으릅니다. 꾸준한 것도 두 가지입니다. 충성으로 꾸준한 사람이 있고, 게으름으로 꾸준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끔은 평생 변함 없이 꾸준하게 게으른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든지, 지옥에서 영원히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변함 없이 게으른 이런 사람은 영원히 살지요. 그런데 지옥에서 영원히 삽니다. 야곱은 삼촌의 집에 가서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하루 같이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촌은 둘째 딸을 먼저 주는 법이 없다고 하여 첫째 딸 레아를 주었습니다. 야곱은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더 일합니다. 이 때도 성경은 7년을 하루같이 일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라헬을 아내로 삼기 위하여 14년을 하루같이 일하였습니다. 이런 꾸준한 마음이 충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같으면 장가 안가고 말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14년을 한결같이 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야곱의 성공 비결입니다. 그의 충성입니다. 충성은 자신에 대해서도 충실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불충한 자는 남에 대해서는 더 불충합니다.
캘빈 밀러는 다음과 같은 글을 그의 책에 남겼습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다음 4가지 진리에 기초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물질과 재능을 충성스럽게 관리해야 한다.
셋째, 크리스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다.
넷째,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영광스런 특성을 부여받았다”.
따지고 보면 네 가지 다 충성된 자가 가질 시간관이며 자세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한국의 전황을 살피기 위해서 부랴부랴 한강 인도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쌍안경을 가지고 인도교 건너편의 형편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이때는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있었고, 강 건너편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쌍안경으로 강 건너편을 보게 된 맥아더 장군의 눈은 문뜩 강 이쪽편에 서있는 부동자세의 군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가 탄 지프를 타고 이 병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끊어진 다리 앞에 서 있느냐?” 이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여기 서있을 작정인가?” 이때 이 병사는 여전히 부동자세로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입니다.” 전세는 위급하고, 지휘 계통은 사라지고, 지휘관들도 도망하는 형편에서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데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는 이 병사의 투철한 군인 정신을 목격한 맥아더 장군은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이런 군인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는 그날로 당장 미군 병력의 출동 명령을 내리고, UN군이 참전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전투를 뒤집어 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은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결론
벌써 마지막 주일입니다. 세월의 빠름을 실감합니다. 며칠 전 전남 장성 백양사의 방장 서옹(西翁) 스님이 열반에 들었습니다.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서옹 스님은 앉아서 열반에 든 ‘좌탈입망’(坐脫立亡)하였다고 하여 세인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자세를 보고 극찬하고, 부러워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봅니다.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들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에 “예”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어요” 했지만 뒤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아들입니까? “예”하고 갔으면 좋았겠지만 “아니오”라고 했지만 뉘우치고 간 아들이 기뻐하시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를 향해 가느냐, 누구를 향해 충성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지막을 봐야 알고,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습니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여 마지막에 주님이 오실 때에 이런 충성된 종이 되어서 복 있는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말을 맞이할 때에 끝이 좋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인생의 끝에서 끝이 좋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
나의 결산보고 (마 25:14~30)
박광현목사설교자료
오늘은 한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이기도 합니다.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마감하면서 송년주일을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에벤에셀, 즉 하나님이 여기까지 지켜주심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통하여 다함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은 가게 하나를 운영할지라도 그날 하루의 결산을 합니다.
본전을 빼고 순수 수익을 꼼꼼히 챙겨봅니다. 그리고 월별 누계를 내보고, 년 말 결산을 내봅니다.
그리고 다음 해의 새로운 계획을 새워봅니다. 기업체나 정부도 1년 예산과 결산을 해 봅니다.
열차도 출발역이 있으면 종착역이 있드시 인생도 총결산을 해야 하는 날이 있습니다.
인생은 대개 1월이 되면 “이상주의자”가 되었다가 6월쯤 되면 “현실주의자”가 되고, 12월에는 “허무주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새로운 비젼을 갖고 가장 아름다운 신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획을 세웠다가 6개월이 지나면 세웠던 계획들이 마음대로 이루워지지 않고, 그만 현실 속에 푹 빠져버린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년 말이 되면 자신이 한 해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하고 생각해 볼 때 참으로 허무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이상적인 자기의 모든 계획이 무너져 버렸고, 내 인생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가? 하고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가운데 우리는 나이를 한 살씩 더 들게 되고, 세월의 빠름을 절감합니다. 특히 목회자는 세월의 빠름을 더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고 인생은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들 각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결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올 해를 마감하면서 이 예배를 통해서 조용히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결산보고를 하나님 앞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달란트를 받은 자들이 각자가 주인에게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 결산보고를 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특히 여기서 비유로 말씀한 달란트 비유는 종말에 관한 내용이요,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시오, 이것은 예수님 재림 때, 역사의 마지막 때, 역사의 종말 앞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달란트에 대해서 결산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를 통하여 한해를 마감하는 우리는 복음적으로 조명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달란트를 보고하자는데 있습니다.
첫째 달란트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으니라. 그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곧 여행을 떠났더라’(마 25:14~15)
인생은 누구나 달란트를 받고 태어납니다. 각자의 달란트가 다 있습니다.
특히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달란트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가장 값진 것들이요, 이는 내가 싫다고 해서, 거절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명인 달란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주일, 오늘 우리는 달란트를 결산해 봅시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다면 당연히 다섯 달란트를 이를 남겨서 열 달란트를 주인에게 결산해야 할 것입니다.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두 달란트를 더 이를 남겨서 주인에게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가진 자도 왔으나 이를 남기지 아니한 고로 악한 종이 되어 불행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이를 남긴 종들은 주인에게 대 환영을 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의 배경은 BC 4년에 헤롯 왕이 죽고, 그 이후의 사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그 땅은 셋으로 분할이 되었습니다.
한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가, 또 한 지역은 헤롯 빌립에게, 또 한 지역은 아켈라오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서 이 아켈라로에게 주어진 땅이 유대 땅입니다. 아켈라오는 유대 땅을 분할 받고 로마의 형제에게 자신의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떠납니다. 그때 신하들을 불러놓고 자기가 없는 동안 각자에게 무엇, 무엇을 잘하라고 달란트를 맡기고 갑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우리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를, 역사적인 배경을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켈라오는 모든 종들에게 달란트 직무를 맡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주께서 달란트를 맡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 결산하는 날이 옵니다. 그때가 주님이 재림의 때입니다.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종들은 오늘 우리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기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복음의 사역 곧 구원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도 달란트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달란트를 거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거절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둘째 달란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그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15)주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세 가지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①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능력을 개발하여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린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하고, 어떤 가르치는 일을,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일을, 사람들은 다양하게 능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달리 칭찬을 잘해 주는 달란트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② 직분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부흥 성장되면 집사, 교사, 찬양대, 권사, 장로, 목사, 이렇게 직분들이 다 주어져 있게 됩니다. 여기서 달란트는 능력과 직업과 직분, 이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달란트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러한 달란트를 주었느냐고 불평하고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내게 이러한 직분을 주셨느냐고 말할지 몰라도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요 달란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거절할 수 없습니다.
외면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에 1년 동안 열심히 했을 때 1년을 지나고 나면 축복받은 삶이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으면 결과를 기다리십니다. 한 달란트를 주셨어도 그것은 일하라고 주셨기 때문에 1 달란트를 이를 남겨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지 않고 이 세상 일만 하느라고 묻어 두었다면 결과는 성경대로 될 것입니다.
조각가는 나무를 잘 다듬어서 조각을 합니다. 어떤 나무로는 좋은 것을 만듭니다. 좋은 작품을 만듭니다.
그런데 똑같은 나무이지만 조각가에 의해서 어떤 나무는 가치 없는 것을 만들기도 합니다.
조각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주인님! 나는 저 나무와 같은 나무인데 왜 나는 환영받지 못할 작품은 왜 만들었느냐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만들어진 상태대로 요긴하게 쓰여 지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다섯을 주었든지, 두 달란트를 주셨든지, 한 달란트를 주셨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불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어진 달란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은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세 가지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구약교회는 제사 지내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일하는 교회입니다.
일하는 것이 신약교회의 특징입니다. 신약 교회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소망도 없이, 예배만 참석하고 헤어지는 신자라면 아직도 그는 구약교회 성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다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요 신자입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많은 일군들을 세워서 주의 일하도록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매년 교회들은 주의 일을 위하여 각 기관에서 일할 일군들을 선출하게하시고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 순종하며 감사하며 감당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축복된 삶을 주 안에서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해 줌을 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내려주신 달란트로 사명을 바로 감당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가올 새해에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③ 일한대로 결산보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도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 했는가 대해서 각자가 받은 대로 결산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결산보고를 하였는데’(19절)라고 했습니다.
유대 땅에 왕으로 사명을 받고 떠났던 아켈라오가 로마로부터 다시 돌아왔을 때 종들을 부른 다음 결산보고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충성을 다한 신하는 많은 선물과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승진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충실치 못한 신하는 즉각 처형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시작의 때가 있으면 끝을 맺는 때가 옵니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습니다. 맡길 때가 있으면 결산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이미 가장 가치 있는 달란트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면 각자의 달란트대로 계산하게 됩니다. 많이 심는 자들은 많이 거둘 것이고, 적게 심는 자들은 적게 거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우리들교회/김양재 목사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200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일년을 잘 지켜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들이 특권을 누리고 화평을 누리기 원하는데 마지막은 또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셨사오니 마지막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이 시간 찾아오셔서 말씀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주고 받으셨습니까.
연말연시에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또 우리들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지난 주 신문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보았습니다.
켄터키 넉스빌에 있는 미들브룩 연합감리교회 프랭크 포토 담임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50세 된 어느 성도가 재혼을 해서 아내와 신혼 여행을 떠났는데 한 곳의 백화점에서 아내가 진열대의 진주 목걸이를 보면서 ''너무 예뻐요. 값이 무척 비싸겠네요. 그래도 누가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진열했겠죠.''하고 감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혼 생활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고 6개월밖에 못 살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혼 10주년을 맞아서 주례 목사님을 초청해 예배를 드리는데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선물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선물은 10년 전에 아내가 갖고 싶어했던 진주 목걸이였습니다.
아내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비싼 것을 어떻게 샀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에게 이 선물을 하기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내가 좋아하던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목마를 때 마시는 콜라도 안 마시고 한 푼, 한 푼 저금을 했소.''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고 했을 때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그 아내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기쁨과 평안이라는 말이 저에게 들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고, 부부끼리도 서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인가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신다고 오늘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선물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선물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사단이 우리 자존감을 짓밟아서 자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 권사에게 주어지는 선물도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소유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꿔놓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가진 것은 쉽게 없어지지만 존재 자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부모된 모든 사람의 마음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합니다.
성탄에, 생일에 물건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선물을 줄 수만 있다면 생명이라도 버리겠습니다. 정말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바뀌는, 업그레이드되는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중고등부 열린 예배를 하는데 여러분이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까.
이 근처에 사는 분들에게 이런 선물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특권을 선물을 주고자 하실까요.
첫 번째,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선물입니다.
1절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만 얻지 못합니다.
먼저 화평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바른 진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건강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멋있는 사랑을 만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것은 죄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 죄에 대해서 지겹게 들었습니다. 인생은 100%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의롭다 할 인생이 없고... 그 예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었습니다. 허물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이제 그 선물을 주신 분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화평을 누리자"는 권고가 아니라 선포입니다. 원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특권을 왜 못 누리는가 말입니다. 못 누리고 있으니까 "누리자"고 선포를 했겠죠.
화평은 하나님과 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분쟁이 없는 어떤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선물을 아무리 주고받아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평은 권세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일대일의 관계에서 성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바른 지식을 알고 있다해도 알아듣지 못할 상대방에게 교훈을 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바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 절대 의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한 며느리 다말을 보고 시아버지인 유다가 "그는 나보다 옳도다"했습니다. 그것을 ''의-righteousness''로 표현했습니다.(창38장) 이것이 어떻게 도덕적인 개념이겠습니까.
히브리어로 ''샬롬''의 역어이고 헬라어로 ''에이레넨''이라고 하는 "화평"은
전쟁이 없는, 전쟁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보상과 회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빚진 상태를 청산하고 긴장 관계가 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믿으면서도 이런 화평이 없습니까. 긴장 관계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빚진 것부터 갚으십시오. 회복할 것 있으면 빨리 회복하시고, 보상할 것 있으면 빨리 보상하십시오.
우리들교회의 비전이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는 교회입니다.
누리는 것 중에 화평을 누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가장 먼저 빌어주신 말씀도 "평강이 있을지어다" 였습니다.
돈이 있고, 자식이 잘나고, 건강하고, 용모가 빼어나도 평강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성탄 예배 때 정몽준 캠프의 대변인이었던 김행씨 간증을 들려드렸습니다.
지난 대선 때 후보지지 철회 일로 세계 언론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신문기자에 대변인으로 그렇게 잘하는 글과 말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느끼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정몽준 후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너무 미워하다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25년이나 안 만나던 어머니를 찾아가서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평강을 누리려면 이렇게 빨리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강을 누리려면 관계에서 자기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일대일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아내 자리, 남편 자리, 자식 자리, 사장 자리, 사원자리.. 자기 자리를 알아야 어떻게 하면 평강이 이루어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상대방의 수준과 학력과 성격으로 낮아지면서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섬기는 것이 성실입니다. 화평의 근거입니다.
2절 말씀은 이것이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는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절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과거형입니다.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간 사람들은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즐거워한다"는 원래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자랑할 만큼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아내 자리, 남편 자리.... 각각 제 자리로 찾아가는 것, 이것이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나의 영광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역대 뉴욕시장 중에서 1934년부터 45년까지 재직하며 가장 훌륭한 시장이라는 평을 들었던 피에렐로 라가디아씨가 판사로 재직할 때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먹다 기소된 노인을 재판하는 자리였습니다. 라가디아는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벌금 10달러 형(刑)에 해당합니다. 그 10달러는 제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는데 나는 그 동안 그것도 모른 채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벌금으로 제가 10달러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중절모를 벗어 재판장 서기에게 주면서
''여기에 계신 여러분 중에서 나처럼 너무 잘 먹은 것에 대해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금 47달러를 손에 쥐고 기소되었던 법정을 눈물을 흘리며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공부도, 결혼도, 이제 목적이 달라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즐거워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균 수명이 이미 희수(喜壽-77세)를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20년이면 망구(望九-81세)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고령화되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치매인데 어느 신문에서 치매 안 걸리는 방법을 보도했습니다. 하루 2시간씩 책을 읽어라, 의도적으로 왼발과 왼손을 많이 사용해라, 웃어라 등등.. 여러 가르침이 있는데 가장 기억나는 것이 ''가능하면 자주 감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제임스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 보도에서는 감동하기 위해서 극장과 공연장을 자주 찾으라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감동하면 어디에 와야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목장 모임에서 누리는 감동을 어디에 비교하겠습니까.
우리는 축제로 교회에 오기 때문에 이미 즐거움과 감동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전공하고, 평생 피아노 치느라 애썼는데 연주회 가서 울어본 적이 없고, 미술 전람회에서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심방을 하면서 또 어찌나 웃는지 다들 코미디언이 따로 없습니다. 왜 웃는 지도 모르고 그냥 말 한 마디만 해도 웃습니다. 큐티를 하면서 우리끼리 통하는 ''방언''이 있고, 성경을 읊어대면서 딱 던지는 말들이 그렇게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줍니다.
참 평안은 의롭게 살기 위해 흘리는 눈물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 평안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자꾸 합리화시키며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룬 것으로 속입니다.
진리를 온 마음으로 생각하면 거기에 불안이 있습니다. 심각함이 있습니다.
복음이 바르게 전파돼서 100% 죄인임을 지적 받으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면 적용이 힘들고 고민스럽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거룩함은 힘들어합니다.
지옥 가는 건 싫어서 용서 구하는 일은 너무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열광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거룩을 이루어 가는 일에 소홀하기 때문에 참 화평을 못 누립니다.
우리 믿음의 수준이 말씀으로 올라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파산을 할 지경이고, 남편이 부정맥이고, 카드 빚을 지고.... 그런데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는가 할 수도 있습니다. 빚이 많은데 빚 안 갚고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게 옳으냐 그르냐.... 적용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만 부르면 평안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배는 열심이어도 그런 일에 적용을 못하면 평안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거룩을 열심히 이루어가기 때문에 화평이 아니고,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거룩을 이루어가면서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자마자, 또는 믿은 후로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3~4절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의 의롭다 함, 화평, 즐거움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체험인 신유, 환상, 방언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것만 대단하다고 합니다.
성경 지식,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주관적입니다. 내 체험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으로 하나님께서 양육시켜 가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환난이 올수록 내 믿음이 객관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이기적이거나, 이해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나를 양육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복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도 주시고, 환난도 주시고, 가난도 주시고, 박해도 주십니다.
육체와 물질과 정신의 고통은 모두 영적 시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환난은 누르다, 짜내다, 분쇄하다 그런 뜻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필수 코스입니다.
바울 사도가 275명과 함께 행선하다 유라굴로 광풍의 환난을 만났습니다. 배가 파손되고, 기구, 재물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 없이 로마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환난에는 인내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는 무엇 무엇 밑에서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밑에서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것은 시어머니 밑에서 극심한 시집살이를 하고 남편 밑에서 힘든 경험을 당해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성도를 섬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날마다 합니다.
온유와 화평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확고 부동함으로 끝까지 버티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연단은 그런 인내를 가지면 인정받는 품질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인정받은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인정받은 인격에 예수 안에서 항상 좋은 것만 바라고 기대하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5절 -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이 강해 보일 때도 있고, 약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했다, 미워했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환난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만취한 상태로 음주운전을 한 차에 치어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 자매의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그 자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미팅에서 만나야 될 의대생을 스물 세살 처녀가 발가벗고 병원에서 만나는 환난을 겪으면서 스무살의 나이를 없애버렸다고, 세살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올바른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선이의 어머니는 지선이가 아프고 고통 당할 때 부둥켜안고 울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엄마가 감정적이 되면 아이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수술에 들어가면서 지선이는 다른 아무 것도 안 보고 엄마 눈이 흔들리는가만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에 힘주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 안 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열 세 번 수술에 한 번도 울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힘이었고 계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울어야 할 때와 안 울어야 할 때를 이렇게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가해자가 떠오르지 않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상을 당해서 힘이든데 가해자를 떠올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내 힘으로 못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선이가 하루, 하루를 눈물로 시작하고 모든 거울을 다 치웠는데 숟가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살려놓았으면 대책이 있으실 것 아니냐''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화상을 알기나 하느냐고 따졌다는 겁니다.
제가 전에 조그만 화상을 입고 화상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사포(sand-paper)로 문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선이가 전신화상으로 55% 이상 피부가 죽었기 때문에, 온 몸을 날마다 소독하고 거즈를 붙이면서 당하는 고통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습니다. 염증이 나면 죽기 때문에 날마다 그렇게 해줘야 하는데 정말 예수님이 화상을 당해봤느냐는 말이 나올 것 같습니다.
스물 세살의 여대생 마음으로는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으면서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좀 성숙했을 때는 완벽주의가 생깁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한 것까지는 좋은데 화평이 깨질 정도로 예민하게 되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안 고쳐주신 질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질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안질인지, 간질인지 모르지만 안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히고, 간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설교하다가 갑자기 발작을 하면서 쓰러지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설교를 한다면 그 모습이 어땠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안 고쳐주셨습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편두통이 심해서 일주일에 두 세 번 편두통이 발작하면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졸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이고, 설교자인데 그 분이 화평을 누렸겠습니까. 그러니 날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언행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죄감과 완벽주의 때문에 예수 믿고 나서도, 의롭다 함을 얻고 나서도 화평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우리는 100% 죄인입니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과 100% 죄인인 인생이 만나는데 어떻게 날마다 공포와 두려움과 갈등이 없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보겠습니다.
6절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연약할 때", 8절 "죄인 되었을 때", 10절 "원수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나의 많은 정죄감과 나의 불완전한 모습,
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화평이 깨어집니다.
그 때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보라는 겁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화평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를 의롭다 칭해주신 근거도 예수님이고, 화평의 근거도 예수님입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갈 일이 쉬지 않고 엄습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어떻게 해야될까요.
오늘 바라봤으면 내일은 안 바라봐도 될까요.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쉬지 않고 드려져야 되고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봐야 합니다. 순간 순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나눔 예배, 수요 예배... 이 모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굉장히 시간을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한 주일 동안 나를 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얼마나 감정의 낭비가 줄어드는지 아십니까. 훨씬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줄여주시는 주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 순간 나를 보게 됩니다.
말 한 마디하고도 금새 나를 봅니다. 내가 말 실수를 했어, 쓸데없는 말을 했어, 말을 해야 될 때인데 못했어, 거긴 괜히 갔어.... 이러면서 나를 보기 때문에 이상한 데 가서는 교만하고 이상한 데 가서는 열등감이 듭니다. 나를 보기 때문에 교만과 열등감이 교대, 교대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화평이 깨집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자신도 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은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되었다 하는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처럼 그렇게 설교를 잘 해도 ''나''를 보는 겁니다. 다 똑같습니다. 금새 믿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나''를 보기 때문에 화평이 깨집니다. 나는 100%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7~8절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지선 자매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자기 고통을 천 번, 만 번이라도 대신해줄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동생을 구해준 오빠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금식해주는 교회 분의 사랑을 광야 같은 투병생활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픈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화상이 사랑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백 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내 삶이고 얼굴이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이만하면 꽤 귀엽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지선 자매의 화상 전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선이는 대학교 2학년 때의 그 아름다운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용모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체격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지선이는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오픈하고 나서 ''괜히 오픈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깁니다.
지선이는 서럽고 힘든 시절 다 지나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너의 찢김과 찔림과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알고 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아시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선이가 병들고 약한 자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안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를 보기 때문에 용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못 보던 거울도 이제 볼 수 있게 되고, 거울을 보면서 ''안녕 이지선!'' 하고 인사하면서 지나간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 7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7개월, 너무 아픈 동안에 자기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55%의 죽은 피부 대신에 나머지 피부를 가져다가 이식을 하고 붙이는데 스테플러로 찍는 것처럼 갖다 붙이니까 여기 저기 땡기고, 쭈글쭈글 해집니다.
화상을 당하고 초기에 수술을 하러 일본에 갔는데 병원에서 어떤 꼬마가 지선이를 보더니 ''엄마, 괴물이야, 괴물!''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는 걸 듣고 지선이는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놓으셨으면 사람답게 고쳐주세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 후 수술을 하고 교회에 가게 됐는데, 교회에 간 첫 주에 식당에서 어떤 아이가 지선이를 보더니 ''엄마, 저기 이상한 <사람>있어.'' 하더랍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된 것 때문에 너무 감사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지선 자매가 감사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그 즉시, 즉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선이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실 것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도 자기의 완벽주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기로 했더니 놀라운 평안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목사님도 해결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아주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껴안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3주 후에 편두통이 사라지고 그 이후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 아플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보다 수준이 훨씬 높아서 평생 안 고쳐주셨습니다.
고쳐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고쳐주지 않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셔야 합니다.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나를 보지 말고
"모든 죄를 사하셨으니"(골2:13)
순간 순간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의 피, 보혈의 공로만 의지한다면
9절에도 "구원을 얻을 것이고", 10절에도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미래형이지만 로마서 8장 24절에 가면 "구원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끊임없는 갈등 구조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화평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나의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가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지만 또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화평이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보혈을 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나를 쳐다 볼 때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기도 제목을 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됐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선물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올바른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고도 정죄감과 나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망할 때 나를 보지 말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이 보혈의 공로만 즉시 즉시 바라보게 해달라고
그래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우리가 화평을 누리자 했는데 왜 화평을 못 누리는가를 알았습니다. 주님,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바라볼 때가 많은 것을 고백합니다. 열등감과 교만이 날마다 오갑니다. 나는 되었는 줄 알고 거기에서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해서 절망했습니다.
주님, 참으로 화평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100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환난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올바른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서, 부끄럽게 되지 않는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지금 환난을 주셨사오니 누르고, 분쇄하고, 짜내는 고통을 통해서 저희들이 올바른 소망을 이루어가기 원합니다.
주님,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볼 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주님의 공로를 인하여,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을 오늘도 고백합니다.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쳐다보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나는 100% 죄인입니다. 즉시, 즉시 주님만 쳐다보게 도와주옵소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 예수님만 바라보게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렇게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찾아가 주옵소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화평을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를 도우셨다 (삼상 7:12-14)
김영태 목사 설교자료
오늘이 마지막날입니다. 이제 2004년도라는 달력을 관심 있게 볼 시간도 몇 시간밖에 남지를 않았습니다. 4해마다 이때쯤이 되면 다사다난했다 하는 소리들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생사 어느 때 치고 다사다난하지 않은 때가 있습니까? 야곱은 바로 앞에서 자기인생을 되돌아보며 내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나이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살이는 험악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지 평안하게 살아간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험악한 세월을 어떻게 이기며 얼마나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얼마나 긍정적으로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험한 세월이라도 웃으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 험한 세월에서도 보람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험난한 세월을 살면서도 기뻐하며 살고 감사하며 살고 말하길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했습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은혜로 받을 수 없는 것을 그는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바라보니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사람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2002년이라는 365일이라는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지긋지긋한 분 있습니까? 아니면 살아온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총결산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리워합니다. 그동안 제멋대로 살아 보았지만 사는 날들이 평안하질 못했습니다. 불레셋 군대의 침략을 수시로 받아서 항상 불안에 빠졌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수치가운데 수치를 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가는 곳마다 불레셋 마을에 신당의 신들이 자빠지고 독종이 생겨서 사람들이 다 죽는 것입니다. 불레셋 온 마을이 공포에 떨게되고 견디다 못한 불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보내게 되고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옮겨진 후에 불레셋이나 이스라엘이 평안하게된 것입니다. 이때에야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시 찾게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사무엘이 미스바에 모이게 하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회개하게 하지요.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다 하는 소리를 듣고 불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나 하나님의 은혜로 저들을 문제없이 다 쳐부수고 승리의 기념으로 돌을 미스바와 센사이에 세우게 되는데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해서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받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1, 모여야 합니다 2,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3,회개해야 합니다 4,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1,하나님이 도와 승리하게 하십니다 2,다시는 적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3,평화가 옵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도우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도울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그릇이 무엇입니까?
1.모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 자주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에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 하는 것은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모이기를 게을리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잘살게되면 모이기를 게을리 합니다. 반대로 살기가 어려워지면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 해서 모이기를 게을리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잘살게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엎을 수 있습니다. 나를 먹고 살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내게 건강을 주시고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을 안다면 그분이 하나님인 것을 믿는 다면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모임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모이기를 힘쓸 때 은혜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2,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나의 사랑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두 번째나 세 번 째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첫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세상과 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보이는 우상이 있고 보이지 않는 우상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항상 말썽은 보이는 우상보다 보이지 않는 우상이 문제입니다. 보이는 우상은 많은 사람들이 멀리 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우상은 끊지를 못합니다. 물질을 끊어 내지 못하고 정욕을 끊어내지 못하고 명예를 끊어내지 못하고 혈육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다 끊어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행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끊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으스름 달밤에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려고 노를 저었습니다. 밤새도록 노를 저어도 건너편에 가 닿질 않아서 동틀 때 뒤를 돌아보니 배의 밧줄을 육지에 묶어 둔 채로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끊지 않고는 한 걸음도 복받는 자리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우상을 제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3,회계해야 합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여호와께 범죄 하였나이다 하니라” 우리는 지금 한해를 보내며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뒤돌아 보면 우리의 부족한 것들이 없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할 일들이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우상들이 없습니까? 하나 되라 하신 일들을 내 욕심대문에 깨버린 적은 없습니까? 일흔 번식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용서하지 못하고 아직도 가슴에 못을 박아 놓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정죄 하고 심판하지는 않습니까? 외에도 우리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일.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지 못 한일, 생각하면 회개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깨끗이 회개하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향하는 첫 발걸음이요, 회개는 축복과 은혜의 첫 발걸음입니다. 회개가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이 없고 회개가 없이 큰 은혜와 축복을 벋은 사람이 없습니다. 죄가 우리의 심령을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가 막히고 은혜가 막히고 축복이 막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죄는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으니까, "하나님도 이제는 늙으셨나봐. 능력의 팔이 다 약해졌나봐."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 선지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이사야 59장 1-2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회개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하나님이 2003년에 나를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4.기도해야 합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 예배하고 쉬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미스바에 이스라엘이 모였다 하는 소리를 듣고 불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위기입니다. 전쟁에서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사무엘이 젓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 하셨더라”(8-9) 할렐루야입니다.
기도는 생명줄과도 같습니다. 기도를 놓으면 생명줄을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기도는 쉬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로 승리한 성경의 사건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삶에 불어닥치는 어떠한 위험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기게 하십니다
모여서 우상을 다 버리고 회개하고 예배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응답해 주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1,하나님이 도와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불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불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10)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 어려울 때 도우시니 날마다 가까이 걷겠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내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실 때 반드시 이기게될 줄로 믿습니다.
2,적들을 막아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에 불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불레셋 사람을 막으시매”(13) 내 생애 전체를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2003년이라는 한해동안을 누가 보호할 수 있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 막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막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막아 주셔야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소리 없이 들어옵니다. 어둠의 권세를 가지고 어둠의 세력들을 끌고 들어옵니다. 나를 잘못되게 만들고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런데 누가 막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막아주셔야 안전합니다. 적들을 막아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이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3, 평화가 옵니다
“이스라엘이 그 사방지경을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 사람과 아모리 사람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땅에서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하시고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 아 내 맘속에 참 된 평화 있네 주 예수가 주신 평화 시험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네 아 귀하다 이 평안함, 주가 항상 계셔 내 맘속에 주가 항상 계셔 아 기쁘다 ■
금년에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도로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안과 근심 속에서 살았습니까? 하나님 주시는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2005년에 이 비를 여러분의 가정에 사업장에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믿음 (행 2:46-47)
한해 마지막 주일입니다. 1년 52주 가운데 오늘은 마지막 주일 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쯤 되면 사람들이 모두 지난 시간을 회고해 보고 많은 생각을 할 때입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온 한해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쁨도 있었고 속상한 일도 교차하면서 살아온 한해였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에 바빠서 하나님을 잊으며 살아오기도 했던 한해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간이 되면 후회만 남습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망년회를 합니다.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은 아무리 아름답고 추억이 있어도 다가올 미래보다는 소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을 회고하기 보다는 다가오는 새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새해 2003년도 우리교회 신앙표어를 “건강한 교회 건강한 믿음”이라고 정했습니다. 사도행전 2:46-47절에 근거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초대교회 때의 교회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 보면 초대교회시대의 교회모습이 얼마나 건강한 믿음이었고 얼마나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로 보면 가장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모이고 모여 기도하고 교제하고 찬미하고 구제하고 물건을 서로 나누어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백성들로부터 교회가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에 하나님이 날마다 신자들을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원형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때 교회의 모습은 우선 교회가 건강했고 신앙도 건강했고 생활도 건강했고 서로의 관계도 아주 건강했습니다. 이것이 원래 교회의 모습이고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우리교회의 꿈이고 목적이고 이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들이 시대가 변해 오면서 교회도 신앙도 많이 변했습니다. 교회와 신앙이 제도화되고 안정화되다 보니까 타성에 젖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참신성은 없어지고 습관신앙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모여도 그냥 감정 없이 모이고 찬송을 해도 그냥 의무적으로 합니다. 대중가요를 불러도 흥이 나고 감정이 나타나는데 찬송은 애국가 부르듯 감정 없이 그냥 부릅니다. 그것은 신앙이 자꾸만 퇴색하고 생명력이 약화되고 교회는 자꾸만 제도화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의 목표도 이 제도화되는 것을 가능하면 막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제도화되는 것을 막고 신앙이 다시 뜨겁게 회복되는 것을 기대합니다. 새해 목표를 그렇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몇 가지 새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영아세례”입니다.
각 가정에서 아기가 태어납니다. 얼마나 신선한 축복입니까. 결혼한 부부들이 아기를 얼마나 고대합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대하지 않는 부부에게는 빨리 임신을 하고 고대하고 기다리는 부부에게는 왜 그렇게 임신이 안 되는지 모릅니다. 부부가 결혼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아기가 없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간절히 소원하겠습니까. 그렇게 기다리다가 드디어 아이를 잉태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한달이 지납니다. 그러면 보통 아이를 안고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40일 정도 되면 나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받아들고 축복의 기도를 해 줍니다. 그 기도는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해 주다 보니까 좀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만 해 줄 것이 아니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그 아이에게 주일 예배 때 모든 분들이 축복해 주는 앞에서 영아세례를 주자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교회에 나오는 날 여러분 앞에서 영아세례를 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이가 커서 “나는 언제 세례 받았어요?” 하고 물으면 ”너는 태어나서 처음 교회 가던 날 만인 앞에서 세례를 받았단다. 하고 대답해 준다면 그 아이가 얼마나 선선한 감동을 받겠습니까. 당장 내일 모레 송구영신 예배 때부터 한아기가 세례를 받습니다. 앞으로 아이 낳는 분들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것이 새해에 우선 행할 일입니다.
두 번째는 “심야기도회”입니다.
그동안 한달에 한번씩 심야기도회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달에 한번 하다 보니까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전체 모임은 한달에 한번씩 하되 원하는 분들이 모여 매주 기도회를 갖기로 해서 지난해 한 해 동안 매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소수가 모이고 형식적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교회의 최대 약점은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금요일에 하던 심야기도회를 생략하고 수요일 저녁예배를 마치고 이어서 기도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원래 주일 저녁예배는 찬양예배로 드렸습니다. 주일예배는 너무 엄숙해서 찬양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일 저녁예배는 찬양을 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예배는 기도회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예배는 수요기도회였습니다. 이제 원래 의미를 되찾아서 수요예배는 기도회로 가지려고 합니다. 여러분, 내년에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잠시 교회에 들러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돌아갔으면 합니다. 새해에는 기도하는 일에 많은 분들이 참여했으면 합니다.
세 번째는 “주말 프로그램” 을 신설했습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지금까지 매년 세례교인 400여 명씩을 증가시켜 왔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신앙이 자라서 세례 받은 분이 매년 약 150여명이고 세례를 받고 우리교회에 오시는 분이 250여명이 되어서 매년 400여 명씩 세례인 을 증가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신 자수는 매년 증가하는데 출석률이 지난 2년 동안 멈추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을 것입니다.
우선 예배장소가 협소합니다. 그리고 주차공간도 협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왔다가 장소가 없으면 그냥 돌아갑니다. 현재 우리교회의 예배공간은 어린이를 포함해서 3천 명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주일이면 5천명 가까이 모이니 문제입니다. 거기다 근래에 형성된 주 5일 근무제의 부작용이 현실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말이면 가족단위로 빠져나갑니다. 주일날 젊은 커플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젊은 커플들이 금요일에 스키장으로 갔다가 월요일 아침 직접 직장으로 출근합니다. 봄가을이면 더 자연스럽게 가족단위로 밖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불가불 이런 모임을 교회가 만들어주기 위해서 주말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새해에는 사회위원회와 주말문화부가 이를 감당할 것입니다.
네 번째는 “미자립교회 교역자 초청 위로회” 를 마련했습니다.
우리교회는 도시교회 가운데서도 도심교회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입니다. 지방에서 올라오면 지방교회 특히 농촌교회는 자꾸만 공동화 되어갑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면 농촌교회는 인적자원과 재정자립이 아주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존립마저 흔들리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매년 60여교회개의 미자립 농촌교회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도 도왔고 남녀전도회에서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와주다 보니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돕는 일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 돕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는 어떤 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봄과 가을 두 차례 우리교회가 돕는 미자립교회의 교역자들을 직접 초청해서 격려도 하고 함께 예배도 드리며 실정도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초청되어 오면 여러 기관에서는 그분들에게 선물도 좀 준비해주고 환영도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분들을 외국에 가 있는 선교사 돕는 이상으로 환영해 주었으면 합니다.
다섯 번째는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을 강화”하는 일입니다.
우리교회는 수년전부터 몇 개의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실시해 오고 있습니다. 우선 서강 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구청 산하 많은 어린이집 가운데 가장 우수한 어린이 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실무자들이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년소녀 가장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관내에 소년소녀 가장이 발생하면 구청은 먼저 우리교회로 보냅니다. 그러면 그동안 수 제한 없이 우리교회가 받아서 후원하고 돌보아주었습니다. 한때는 23가정까지 돌보아왔는데 지금은 조금씩 줄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상담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주변이 상업지역입니다. 유흥밀집지역입니다. 그래서 맞벌이 부부들이 많습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우선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오면 아이들이 집에서 방치됩니다.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하면 이 아이들이 밖으로 나돌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 아이들을 맡아서 공부시키고 부모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주는 방과 후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이런 환경에서 발생되는 알코올중독, 마약중독, 탈 선자들이 발생하는데 이들을 위해서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있는 상담실과 상담전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수고하고 있습니다.
또 교회 주변학교를 선교대상학교로 지정했습니다. 우리교회 주변에는 연대, 홍대, 서강대, 이대, 명지대 등 5개 대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몇 개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새해에는 이들 학교를 선교지정학교로 정하고 장학금을 보내고 관심을 가져서 선교대상 학교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특별히 장학금을 대폭 늘렸습니다. 교회내 장학금도 늘리고 주변 학교에 보낼 장학금도 늘렸습니다.
우리교회 새해 예산 중에서 순수 사회봉사와 선교비로 지출되는 예산이 전체예산의 27.6%입니다. 그중에서 장학금만도 2억여 원이 지출되고 있습니다. 전체예산에서 교회가 비좁아서 공간을 늘리려고 저축되는 예산이 새해 13억원입니다. 이 수치는 전체예산의 31%입니다. 그 31%를 뺀 예산에서 사회 봉사비와 선교비를 계산하면 무려 33%입니다. 이 정도의 재정운용이면 아주 건강한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그런대로 건강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헌금하시는 헌금이 이렇게 건강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여섯 번째는 “50주년 준비”입니다.
우리교회는 55.1.2일 창립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후년이면 50주년 희년을 맞이합니다. 이제 2년 남았습니다. 50주년이면 사람나이로 보면 이제 중년입니다. 사람이 중년이면 그 사회에서 뭔가 자리를 확보하고 있어야할 나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해는 “건강한 교회, 건강한 믿음”이라고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희년 준비의 해“로 정했습니다. 이제 50주년이 되는 2005년에는 “미래로 비상하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 가지 아주 특별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교회에 젊은이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20대가 25.6%입니다. 그리고 30대가 26.3%입니다. 40대는 17,7%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70%가 2-40대입니다. 이 수치는 우리교회의 재산 중 재산입니다. 전국 교회에서도 아주 특이한 현상입니다. 이제는 인재를 키우고 미래를 위해서 젊은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50주년을 전후해서 세 가지 큰 사업을 확대해 나갔으면 합니다.
하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입니다. 사업 중에서 가장 소망적인 사업은 인재를 키우는 사업입니다. 옛날 시골의 농부들 중에서도 생각이 있는 부모는 땅을 팔아 자식들을 가르쳤습니다.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장학금을 대폭적으로 확대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을 해외로 내보내 공부시키고 길러야 합니다. 인재양성이 최고의 사업입니다.
두 번째는 길러진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많이 내보내는 일입니다. 이제는 내 보내야 합니다. 기능을 가진 평신도 사역자들을 많이 내보냈으면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교회 개척하는 일입니다. 이제는 교회개척도 건물 세 얻어서 개척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렇게 개척하면 안 됩니다. 이제는 신 개척지역에 종교부지를 얻어서 정상적인 교회로 개척이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교회는 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자니까 오늘 현재 교회의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문제입니다. 공간확보 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우리교회는 현재 공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어떻게 할 틈이 없습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어디로 가서 은신할 처소가 없습니다. 교육공간도 좁고 앉아서 대화하고 친교할 공간은 전혀 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마치고 갈 곳이 없습니다. 예배 마치고 엄마를 기다려야 하는데 가서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주변 오락실로 가서 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미래를 위해서는 아주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 앞에 있는 500평 대지를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 대지는 우리 후손들 몫입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커 가는데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그곳에 아담한 교회를 지을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철학은 호화롭고 편안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절대로 호화로우면 안 됩니다. 앞으로 교회를 지으면 호화롭게 짓는 것이 아니고 아주 실용적으로 간이식으로 지을 것입니다. 교회는 천막교회라도 좋습니다. 임시 건물이라도 좋습니다. 은신처만 되어도 좋습니다. 대신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젊은이들은 있어야 하고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미래가 있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날마다 모이고 음식을 나누고 찬미하며 구제하고 예배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원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어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 새해 한 해 동안 힘써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로 하여금 믿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희년을 거룩하게 (레위기 25:11-12)
오늘은 금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 시간이 되면 마음들이 이상해집니다. 숙연해지기도 하고 착잡해 지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새로운 감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먼저 한 해 동안 은혜로 살아오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지나간 날을 회고하기보다 다가오는 새해를 계획하는 시간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새해는 2004년입니다. 2005년이 우리교회 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새해는 “희년 준비의 해”로 정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레위기 25:11절을 보면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했습니다. 희년이라는 말은 “50년째 주기의 마지막 해”를 말합니다.
한주간은 7일입니다. 이 7일을 일곱 번 곱하면 49일이 되고 여기다 여분 하루를 더 보태면 50일이 됩니다. 이 50일을 펜타코스테 즉 오순절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50일째 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 오순절 날이었습니다. 이것이 50일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1년을 일곱 번 곱하면 7년이 되는데 이 7년을 안식년이라고 합니다. 또 이 7년을 일곱 번 곱하면 49년이 되는데 여기다 여분의 일년을 더하면 50년이 됩니다. 그 50년을 희년이라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새해 2004년도가 교회 창립 49년째가 되는 해이고 후년인 2005년이 교회창립 50주년이 되는 희년이 되는 해입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 이 희년을 “거룩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오십 년째 되는 해.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하니라, 밭에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 희년은 회복의 해였습니다. 이 희년이 되는 날 아침에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종들은 그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모든 노예들은 해방되었습니다. 또 그동안 매각되었던 땅은 그날 본 소유주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희년은 회복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주어지고 회복이 이루어지고 풀리고 돌아가고 돌아오는 날입니다. 희년은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도 새해를 희년 준비의 해로 정하고 몇 가지 의미 있는 일을 해 보려고 계획했습니다.
첫째는 “감사의 예배”입니다.
우리교회는 1955년 1월 첫 주일 에 개척되었습니다. 그날 이성봉 목사님이 사택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우리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2005년이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렇게 개척된 지 50년 만에 세례교인 4040명, 교회학교 천명, 재적 6천여 명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교회들이 모두 50년이 된다고 다 이렇게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보다 더 양적으로 성장한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교회처럼 이렇게 단단하게 성장된 교회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희년에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기념행사”도 가지려고 합니다.
이제 교회가 50년이 되니까 50년의 역사를 정리해서 신촌 교회 50년사를 펴낼 것입니다. 그리고 50년 동안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악회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KBS 홀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우리교회 300여명의 찬양대로 하여금 대곡을 연주하게 해서 우리 교우들과 일반인들을 초청해서 우리교회의 희년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아마 근사한 축제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념사업”도 하려고 합니다.
우리교회가 5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사회를 위한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교회는 교회가 위치해 있는 이 지역사회에 할 일을 다 해 보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그래서 지역에 있는 유아원을 20여 년 동안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투자해 왔습니다. 또 방과 후 학교를 설치하여 맞벌이 부부들의 아이들을 맡아 생활에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상담실을 설치하여 각종 상담에 응하고 교육하고 치유하는데 힘써 왔습니다. 지역 내에서 발생하는 소년소녀가장을 돕는 일도 해 왔습니다. 그동안 우리교회에서는 이곳저곳에 장학금 보낸 것만도 적잖습니다. 금년에 장학금으로 지출한 금액만도 1억 8천만 원입니다. 이 장학금이 우리교회 내 젊은이들에게도 지급되지만 신촌 지역에 있는 지역민, 그리고 5개 대학과 유초등 중고등학교 까지 보내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교회가 50주년을 맞으면서 사회를 위해서 더 소중한 사업을 구상하던 중 이 시대 가장 절실한 부분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몇 가지됩니다. 하나는 노인 보호사업입니다. 앞으로 시대가 갈수록 가장 큰 사회문제는 노인들의 유기문제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사회가 노인인구가 급증하면서 노인 부양이 힘들어지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힘없는 노인들이 길거리에 유기되는 사건들이 양산될 것입니다. 그래서 50주년을 맞이해서 이 노인문제에 관심을 돌려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남한산성에 있는 성락원이 매물로 나와 이번에 교회에서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3,40여명의 무의탁 노인들을 모실 수 있는 규모의 건물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그곳에 무의탁 노인들을 모셔놓고 돌보아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을 권사회에서 맡아서 운영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남녀전도회가 매달 한번씩 올라 다니며 청소하고 관리하고 빨래해 주고 목욕시키고 머리 깎아 주고 돌보고 위로해 드리는 일을 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오늘 교회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새해에는 우리교회가 할 일이 더 넓어졌습니다.
또 지교회 설립도 하려고 합니다. 우리교단은 2007년이 되면 10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는 2005년이 되면 5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단에서 우리교회에 10개의 교회를 개척하라는 지시가 주어졌습니다. 우리교회는 이에 순종해서 2007년까지 열 개의 교회를 개척할 예정입니다. 개교회의 계획들을 뒤로 미루고 이 일을 우선해서 수행하려고 합니다. 지난해에 교회 하나를 이미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새해 2월 3일 부목사님을 파송해서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으면 교회개척하는 일에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회갑기념, 7순 기념, 8순 기념을 한다고 잔치하며 여행한다고 막대한 금액을 지출하는 분들이 있는데 가능하면 생산적인 일에 투자했으면 합니다. 여행은 이 다음 천국으로 가시면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헌금하는 것을 모으면 교회를 개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기념교회를 하나씩 지어도 좋습니다. 유산은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산으로 물려주지 말고 교회 하나를 기념관으로 개척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에 와서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왔던 흔적이 무엇입니까.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지 말고 흔적을 남기는데 사용하십시오. 그렇게 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때는 아주 자신감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가서 할 말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래서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것입니다. 해 놓은 일이 많았기 때문에 죽음이 다가올 때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2천만 원도 좋고, 5천만 원도 좋고 1억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으로 기념관으로 개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50주년 기념으로 2005년도에 선교요충지에 확장해서 선교사를 대량으로 파송하려고 합니다. 할 수 있으면 우리교회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많이 선교사로 나갔으면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 젊은이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파송 받아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 일찍 퇴직하고 시간 많은 분들 중 선교지에 가셔서 할 일을 찾아 해 보십시오. 카터 전대통령은 휴가 때마다 망치를 들고 선교지로 가서 선교사 집을 수리하고 학교건물을 수리하는 일에 헌신했다고 합니다. 어떤 공직에서 은퇴하신 분은 네팔로 나가 선교사 일을 돕고 스스로 여분의 삶을 선교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자기 집은 네팔에서 온 노동자들의 쉼터로 내 놓고 자신은 연금을 받아 후원 걱정 없이 선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분의 시간을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번째는 “시설 확장“ 입니다.
우리교회는 시설이 너무 협소하고 열악해서 여러분들이 주일마다 많은 불편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동안 교회확장은 가능하면 안하려 했지만 더 이상 수용할 수가 없어서 불가피 새해에는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시설보완만이라도 이루어지도록 계획을 하였습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헌금하셔서 금년에 구입 체결한 여행사 건물이 새해 2월부터 사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곳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우선 건물 1층을 휴게실로 만들려고 합니다. 주일날이면 차도 마시고 대화도하고 무대도 만들어 노래자랑도 할 수 있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은 중년 이상의 성도들이 모여 쉬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 휴게실을 여전도회에서 위탁받아 주일에는 휴게실로 주간에는 동네 누구나 와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가장 좋은 차를 제공하는 휴게실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간에는 평생교육원을 설치해서 노인교실, 주부교실, 취미교실, 사회교실, 외국어 교실, 전도훈련 등 다양한 용도로 주간 내내 활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신혼부부들이 아이를 안고 와서 맡기고 예배드릴 수 있도록 탁아소를 만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현재 교육관도 부족해서 주일마다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런 문제들도 어느 정도 해결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 교육관을 교육 전용 건물로 만들고 도서관 공간을 만들어 독서도 하고 책을 대여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새해에는 교회학교에 역점을 두려고 합니다. 어린이 전도도 해야 하겠고 교사 훈련교육도 더 많이 하고 아이들 교육에도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합창단도 조직해 놓았습니다. 새해 중반쯤 되면 어떤 합창단이 만들어졌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큰 문제는 식당공간의 문제입니다. 식당공간이 좁아서 주일마다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식당활용인원이 매주 1300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교회식당을 이용하는 것은 참 좋은 현상입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일은 못해도 이 일부터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래 전에 넓혀놓았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엇보다도 이 공간을 우선해서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60여 평의 공간을 더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어린이 공간도 마련해서 식사도 하고 이린이 용 피자집도, 빵집도, 오락기구도 설치해서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 오락실을 전전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합니다. 또 2층에 휴게실 하나가 더 마련됩니다. 그 휴게실은 중년 이하의 성도들이 활용하게 할 것입니다. 그곳은 청년회에서 위탁 관리하여 주일날은 휴게실로 주간에는 청년 문화카페로 활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3층은 사택 두 채를 지어서 아래에 있는 사택자리에 여전도회 노인들의 쉼터로 활용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정도 공간배치가 이루어지리라 생각됩니다.
다섯 번째는 “새해 변화하는 것” 입니다.
새해에는 몇 가지 변화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선 강단이 변화됩니다. 그동안 몇 년 동안 구조를 변경했던 강단이 좁아서 찬양대원을 증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단 양쪽을 넓혀서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조명도 밝게 설치하고 오케스트라가 앉을 공간도 마련하려고 합니다.
새해에는 가운을 벗으려고 합니다. 가운은 찬양대만 입고 설교자, 헌금위원, 성찬위원은 모두 정장으로 입으려고 합니다. 특히 성찬위원들은 매주 마지막 주일은 검은 양복에 정장차림으로 오셔서 배종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또 현재 5부 예배가 일부 변경됩니다. 현재 5부 청장년 예배에서 청년들은 앞 건물 별관으로 가서 청년만의 특성화 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3,40대의 청장년을 대상으로 한 예배가 같은 시간에 아주 감미로운 예배로 특성화하여 새로 마련될 것입니다.
또 새해에는 많은 임직 자들이 새로 임명되어 새로운 얼굴들이 늘어났습니다. 11분의 장로 후보자가 피택되었습니다 그리고 84명의 권사가 피택되었습니다. 98명의 새로운 집사가 임명되었고 2003년도에 135명이 세례를 받았고 274명이 세례를 받고 오셨기 때문에 입회하여 2004년에 세례교인이 409명이 증가하여 우리교회 총 세례교인은 4040명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우리교회의 미래상을 정립”하는 일입니다.
앞으로 우리교회는 어떤 교회여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교회는 다음의 세 가지 특성을 가진 교회로 성장했으면 합니다. 하나는 가장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한 정신가지고 일하며 살아가듯이 교회는 지극히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계속해서 우리교계, 사회, 지역에 건전한 영향을 미치는 교회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 개개인이 자기의 삶, 공적인 삶, 신앙인의 삶을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충실하게 살아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젊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신촌에 위치한 교회입니다. 신촌은 젊음의 문화가 아주 충만한 곳입니다. 이 특성을 살려 우리교회는 젊은 교회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교회는 20대가 전체교인의 25.6%, 30대는 26.3%, 40대는 17.7% 로서 40대 미만의 신자가 70%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수치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지금 보다 더 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심을 더 투자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계속 “성장하는 교회”가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곳이라면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모습입니다. 양적으로 내적으로 영적으로 충실하게 성장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계속 성장해 나가야 여러분의 신앙이 건전해 집니다. 신앙이 건전하다는 말은 그만큼 신앙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성장해야 여러분의 신앙과 삶도 따라서 성장합니다.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불화하거나 갈등하게 되면 여러분 자체도 삶도 신앙도 불화해 지게 됩니다.
저는 새해에도 교회가 새로워지고 발전하도록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복을 주실 것이고 그 은혜는 곧 여러분들에게로 옮겨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위해서 여러분의 뜨거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모든 것이 주의 축복이었습니다. (신명기8:1-10)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실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우리는 2005년도 12월 마지막 달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한 해를 보내면서 지난 난을 되돌아보는 것은 다가오는 새해를 준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 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많이 받았지만 감사할 줄 모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만분의 1이라도 갚으려는 마음이 우리들 속에 우러나와야 될 줄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쫓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에게 복종할 수 있도록 은혜를 강구해야 되고, 그런 은혜를 받은 후에는 마음속으로부터 감사를 드리면서 찬양 생활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첫 번째로, 겸손해 지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너를 낮추시며 너를 줄이게 하시며 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겸손에 대해서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줄이게 하시는 것이 겸손하게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람이 육신을 잊고 사는 동안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서러움 중에 배고픈 설움이 제일 서럽다고 합니다. 우리가 배고픔을 느낄 때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고센 땅에 있을 때, 먹을 것 염려하지 않을 때 이런 고통을 당한 게 아니라 광야에서 배고픔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의 햇빛이 내리쬐는 광야에서 아무리 먹을 것을 찾아도 찾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또한 정신적으로 절망상태에 빠지게 됐으니까 그 배고픔을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축복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겸손해 짐으로 하나님이 축복해 줄 수 있는 위치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버리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와 축복을 준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그들이 축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으로 볼 때는 무한한 축복의 기회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배부른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그립지 않습니다. 있다 해도 맛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는 작은 빵 한 조각도, 작은 음식 하나도 먹을 것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지날 때, 배가 많이 고플 때 기적적으로 먹을 것을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창문을 여시고 그들이 놀랄 정도로 매일매일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채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인생을 살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극이 있는 곳에 긍휼을 베풀 여지가 있고, 기근이 있는 곳에 은혜를 베풀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의 위치였습니다. 그러므로 굶주림에 의해서 겸손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 굶주림이 축복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1년을 지낸 동안 육신적인 어려움을 당하셨습니까? 사업의 실패로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내 자녀의 학력고사 성적이 생각한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낮아지게 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우리가 진정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면 감사가 나올 것이고,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면 어려움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낮아질 때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의 기회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리시며 먹이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심령은 매일매일 영적 양식을 먹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승리할 줄 믿습니다.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맛나가 내렸던 것처럼 우리 영혼의 양식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우리에게 임할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므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리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인 양식을 먹을 때 주리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양식을 쌓아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넘치는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세상 창고에 쌓아둔 것이 없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먹고 입고 산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일 맛나를 내리실 때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한 사람에게는 풍족하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맛나는, 하늘의 양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풍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성도가 다같이 풍족하게 부족함이 없이 나눌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고는 축 나는 법이 없습니다. 맛나가 매일 내려도, 영적인 양식이 매일매일 내려도 하나님의 창고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한정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무한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제나 오늘이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러므로 풍족한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은 바로 나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가 부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의 인생의 잔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입니다. 그의 모든 삶을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의 양식은 신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지켜주시고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신비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적이라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지 못해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은 신기한 양식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맛나는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야 될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양식에 의해서 살아야 될 하늘의 백성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의 양심이 목사에게 의존할 때 만족한 영적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참 만족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피조물이 넉넉히 살 수 있는 사랑과 은혜의 양식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단코 주리지 아니하겠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해서 수고한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나는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뿌리를 하나님 말씀에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뿌리를 하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인간은 망해도 하나님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고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뿌리를 축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두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광야 40년 길에서 이스라엘을 입혀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40년 동안 네 의복이 헤지지 아니했고’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살았지만 항상 좋은 옷을 입었고 그 옷이 낡아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이 좋은 옷을 입게 해 주시고 헌 옷을 입지 않고 새 옷을 사 입을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에덴 동산에 있던 아담이 자신을 봤을 때 벌거벗은 모습을 알게 되고 그래 가지고 자기가 멋지게 만든 무화과나무로 초미니스커트를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치마를 곳 말라 버려 가지고 부스러져서 수치가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의의를 나타내는 것을 마치 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들어 잎은 옷과 같습니다. 곧 시들어 버립니다. 곧 말라버립니다. 하나님은 아담에서 무화과나무로 만든 그런 치마 대신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튼튼한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 옷은 하나님의 의의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옷은 낡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영원히 부끄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따뜻하게 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의 옷을 입을 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의복이 헤지지 않은 것같이 우리의 의복도, 우리의 인생도 헤지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힘을 강건케 하십니다.
40년 광야 길에 그들을 지치지 않게 하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실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내 발이 부르트지 아니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광야를 건너는 순례자에게 있어서도 발이 부르트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뜨거운 모래밭 위를, 사막 길을 걸어갈 때 발에 물집이 생기고 상처가 나서 걸을 수가 없고 시리고 아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행군할 때 고통 당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 길은 상처 투성이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붙잡고 계시면 염려하지 않아도 될 줄로 믿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광야 길을 40년 동안 행군했지만 광야 생활에 고통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갈 때 메마르고 거친 광야 길 같은 거친 인생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이 붙잡아주면 고통이 없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의 힘이 쇠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아니 지난 날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과 시련이 많았지만 오늘 이 시간까지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고된 인생 행로에서 우리의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까지 우리를 돌봐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돌봐 줄 것입니다. 우리를 책임지고 도와줄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여호와는 너를 지켜 모든 환란을 면케 하시며 너희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라. 더구나 여러분의 봉사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성가대로 봉사하는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교회 학교 교사로 수고하는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나눔방을 책임지고 돌보는 일에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밖에 여러 모양으로 예배를 위해 봉사하는 여러분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발이 믿음의 길에서 부르트지 아니했음을 감사 드립시다
우리 가운데에는 금년 초보다 그 믿음이 많이 성장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는 사람은 고된 광야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힘들지 않고 지치지 않고 피곤치 않을 줄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의 징계의 축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니까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와 관계없는 아이가 싸움질하면 가서 말리지 않습니다. 내 자식이 그 속에 있으면 놀래서 달려가서 그를 붙잡고 야단치고 징계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워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40년 광야 길에 의복이 헤지지 아니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믿음으로 바로 살아야 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될 때 그렇게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은 나를 징계하시고 이 징계의 축복을 내려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심으로 감사와 찬송이 떠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를 낮추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며 강하게 하시고 징계하시는 이 모든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보니까 내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수많은 환란과 고난 중에도 난관 중에도 우리를 돌봐 주시고 도와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므로 힘써야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그 도를 행하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든지 그런 것 상관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십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십시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앞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하나 우리는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나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여러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여러분 인생도 하나님이 분명히 도와 주시고 책임져 줄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생활 속에서 의복이 헤지지 아니하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한 것처럼 지금까지 지내온 동안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 때문인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는 인도하시고 도와 주셨고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찾는 일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그런데 우리의 길은 반드시 형통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룰 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출처/박응순목사 설교 중에서
위엣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1-4)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이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이 마지막의 주일에 어떤 말씀으로 성도 여러분에게 은혜를 끼칠까 생각하다가,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의 가슴에 깊이 와 닿고, 나의 심금을 울리기에,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위엣 것보다는 아래에 것을 찾다가 이 시간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자신들이 아래에서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요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다고 이 세상에 아래에 속하였다하여 아래만 바라보고 사는 인생이라 한다면, 어찌 이세상에서 참 소망을 갖고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땅만을 바라보고 사는 짐승이 아니다. 아래만을 바라보고 기어다니는 벌레가 아니다. 오늘 본문의 복음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성도 여러분들은 이 시간부터 위엣 것을 찾으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땅에 것만을 보신 분들은 이제는 눈을 들어 위로 향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아래에 것만 찾아다녔던 여러분들은 이 시간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 향하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지금까지 위만 보고 살았던 분들도, 더욱더 분발하여 위엣 것을 찾으며 나아가기를바랍니다.
그렇다면 위엣 것을 찾으라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감사함과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거듭나는 삶을 강조한 것으로, 바로 우리의 삶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구별된 성도로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한 강조적 표현입니다. 다시말해 우리 인간은 땅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기에, 땅을 디디고 사나, 그 곳에 목적을 두지 말고, 우리의 마음과 심령은 천국에 두고 살아갈 것을 권고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해를 보내면서, 새로운 해에 문턱에 서게 될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의 말씀이 될 줄 믿습니다.
너희는 위엣 것을 찾으라, 아래의 것, 아닙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반복하여 두 번이나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누가 계시기에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는가?
1) 하나님께서 만유 위에 계신다.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2)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계신다.
롬 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3) 성령이 계신다.
요 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2. 위엣 것을 찾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이다.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것이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3)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골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4)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다.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3. 왜 위엣 것을 찾아야 하는가?
1)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2)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3)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4)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5)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함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 것을 찾아야"한다. 우리가 이 세상보다 더 저 세상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하늘 나라를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거룩한 사랑을 가지고,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와 교제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의 친구이며 우리의 머리이시며, 영적인 지도자이시다.
4.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의무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않는"것이다. 하늘의 것들을 찾으므로서, 그것들에 애정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상의 욕망보다는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땅의 것을 사랑하기 보다는 하늘의 것을 사모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영적인 것들을 귀히 여기며, 반드시 소유하여야 한다.
다윗은 주의 일을 구하고 영적인 삶을 추구하였기에, 자신이 주님의 집, 성전에 거하기를 즐거워 하며,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의 세계를 바라보며, 오실 그 분을 앙망하였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영적인 성품으로 변모되는 것을 말한다. 육신의 생을 버리고 영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1)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더 오래 평안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가? 영의 생각으로 여러분의 건강한 생명의 연장과 평안한 삶을 누리기를 바란다.
2) 육에 속한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유 1: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3)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4) 영적인 예배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5) 하늘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지상의 것들은 하늘의 것들과 반대 위치에 놓여있다. 우리가 땅에 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도 있으나, 그것들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되며, 그것들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아래에 것을 지배하고, 위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5.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우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것들에 대해서, 우리의 세상에서의 분깃에 대해서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죽음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자들은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리고 세상은 우리 대신에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하면서, 세상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구한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큰 모순이며, 오류인가?.
2) 우리의 참된 생명은 저 천국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절).
우리의 참된 생명은 위로부터 났고,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러다가 주님 나라에 가면, 우리의 생명이 영생을 누려 완전하게 보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것이라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설명하고 있다." 감추어졌다는 말은 그것이 우리에게 비밀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감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함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므로, 우리도 그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현재로 그리스도는 숨겨진 그리스도이며 "우리가 보지 못한" 그러한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그 분과 함께 감추어졌고, 그 분과 함께 안전하게 보전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보지 못하나, 알기에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보지 못하나, 그 분을 믿기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3)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우리가 소망하며 기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 분을 뵐 수가 없으나,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로, 재림하실 때에, 순수하고 헌신적인 삶을 산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복을 받을것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4절).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소망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1)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은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혀 소멸되었으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 자신이 산 것이 아니요 오직 여러 성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목적이며 원리이다. 그 분은 영으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는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명쾌하고 확실한 답변을 주고 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분은 지금 숨어 계시는 것처럼 우리가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분은 지금 하늘 나라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위에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에 모든 영광을 입으시고, 그의 "거룩한 천사들과"함께 그리고 "그의 자신의 영광과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나타나실 것이다
마 26:64;막14:6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막 13:26;눅21:27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그러므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성도 여러분들도 이 시간 주님께 다가오기기를 바란다. 왜 주님께 나아와야 하는가? 주님을 믿는 자는 위엣 것을 사모하기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분을 통하여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이 그 분과 자리를 함께 할 때에, 그 분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 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 분을 믿는 성도들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살후 1: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그 분과 함께 오는 것과, 그 분과 함께 영원히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성도들의 전체적인 만남이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누리는 그 영광 가운데서 우리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복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신비의 세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을 넘어서 다가올 저 세상에서 살 수가 있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다. 성도 여러분의 관심은 위엣 것을 찾으라는 오늘의 말씀의 제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여기가 아니라 바로 저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바로 저 천국에 우리의 보화가 있고, 바로 거기에 우리에 영생이 있다.
6.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씀의 목적은 무엇인가?
1)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신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3)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애 주신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결론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아랫 것만을 추구하며 찾아왔다.
이 해가 지나기 전에 지나간 일을 반성하여 보고, 욕심과 욕망과 사리 사욕에 취하여 무겁고, 힘들게 들었던 모든 것들을 이제 내려 놓고, 잠시 우리는 위엣 것을 찾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이제까지 어려웠던 모든 문제들을, 지금까지 힘들었던 모든 여러 개개인의 시험들을
내려 놓고,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위엣 것을 찾아야 한다.
이 마지막의 주일에 문턱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여러분의 눈이 저 하나님의 세계를 향하여야 한다. 그래야 다가오는 2003년은 더욱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다.
새해는 새 사람을 옷을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전을 떠나가기 전에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너희는 위엣 것을 찾으라
출처/생명수교회 설교 중에서
버리고 가야할 것들 (엡 4:25-32)
지난1년은 이제 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월과 함께 살아져 가는 인생사에서 가는 세월과 함께 생각해야할 영적인 교훈들이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가는 세월이 아쉬워 감상적으로 시를 쓰기도 하고,
빠른 세월에 대한 허탈 속에서 생의 허무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상례(常例)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은 <말씀>에 입각하여 묵은해를 보내고, <말씀>에 입각하여 새해를 맞아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베소서 4:22절에 보면 묵은해와 함께 버리고 가야할 것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엡4:22)
1. 우리 모두에게 묵은해와 함께 버리고 가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새 집으로 이사를 하려고 할 때, 옛날 것은 다 버리고 갑니다.
지난번 저도 아파트로 이사를 해보니, 옛날 쓰던 물건들을 많이 버리고 가야하였습니다. 새집에 옛 가구들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도 묵은 것들을 다 버리고 가야하겠습니다.
① 묵은 생각, ② 묵은 감정, ③ 묵은 습관, ④ 묵은 버릇, ⑤ 묵은 취미, ⑥ 묵은 오락, 등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들은 다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년 말을 맞으면 한번쯤 새롭게 출발하기를 원합니다.
과거의 불행스러웠던 일들, 지난날의 무거웠던 짐들을 다 벗어버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것들을 잊으려고 합니다. 좋지 않았던 생각들,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다 잊으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버릴 것을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유혹에 욕심을 따라 썩어져갈 구습들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버리고 가야할 것이겠습니까?
2. 묵은해와 함께 먼저 <거짓>을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25절에 “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거짓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온통 세상이 거짓된 세상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 것, 손에 잡히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거짓으로 차 있습니다.
이제는 거짓이 도리어 참을 희롱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경제이론(經濟理論)과 같이,
요즘 세상은 모든 가짜들이 도리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꽃도 가짜 꽃이 더욱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통일동산에 실향민들의 묘소를 가보니, 멀리서 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꽃동산인데 가까이 가보니 모두 가짜 꽃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요즘 여성들의 얼굴도 가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 조형미들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얼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거짓을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함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즉 진실일 뿐입니다.
죄인이 죄인이 아닌척하는 행위를 하나님은 제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이 바로 거짓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차라리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다윗을 들어 쓰시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든 것을 진멸 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사울 왕은 살찐 소들과 양들을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였다’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책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던 것, 거짓된 행위들, 거짓된 신앙들,
그와 같은 것을 다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켰던 사탄은 거짓으로 저들을 유혹하였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진리를 역행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말씀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못하도록 거짓으로 인도합니다.
입술로 거짓말한 것, 행동으로 거짓말한 것,
모두 묵은해와 함께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전도가 왜 잘 안됩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말의 진실성이 없고, 행위에 믿음성이 없다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전도의 길이 막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서 제일 깊이 반성해야할 진실성의 회복입니다.
사람에게서 진실성이 살아지면 아무 것도 그에게 맞길 수 없습니다.
제직들에게 이런 기회에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당회 때 가장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것은 제직들의 책임의식 결여였습니다. 매주일 마다 헌금위원 할 사람이 없어서 아무나 붙잡고 까운을 입혀서 내려보낸다고 합니다.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주님께서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뭐 하나 제대로 책임감당도 못하면서, 그것이 돈 드는 일도 아닌데, 그냥 마음의 정성으로 준비만 하면 될 것을 그런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주님께 나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을 맞기는 것은 그런 작은 일이라도 다 골고루 맡겨야 이후에 하늘 나라에 가서 물을 때, “나도 주일날 안내위원도 했고, 헌금위원도 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안내로 봉사도 했습니다”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들은 다 한번씩 안내위원, 헌금위원, 그리고 안수 집사와 권사들에게는 기도담당을 맡기고, 구역장 권찰들에게는 교인들을 살펴달라고, 성가대원들에게는 성가를, 부엌에서 봉사하는 일들은 그렇게 봉사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 잘 감당하는 것을 보고, 주님은 큰 일을 맡깁니다.
안내위원 잘해 보세요, 헌금위원 잘해 보세요, 차량안내, 부엌봉사, 권찰봉사, 성가대 봉사, 교사봉사, 책임감 있게 해 보세요. 반드시 큰 것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천국에서 상 받을 사람들은 목사 장로들만이 아니라,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큰 책임을 맞고서도 무책임하게 감당했으면 책망을 받을 뿐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성의 결여에 있습니다.
안내위원, 수금위원, 기도담당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새로운 마음으로 다짐하고 새해를 맞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3. 묵은해와 함께 <성령을 근심하게 한 것>을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 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모두 성령이 들어와 게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라면 성령은 날마다 감화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을 소멸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면 더 이상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대로 살지 못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감화감동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인격의 신으로 우리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혹 죄 된 길에 들어서거나, 합당치 못한 일에 간여할 때는 성령이 탄식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서 성령이 떠나면 자연인 그대로입니다.
성령의 감화감동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늘 시민으로서 훈련되고, 연단 되고,
거듭나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진리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때때로 우리들도 육신의 욕망에 이끌려 육신의 행위대로 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실 된 성도라면 얼마 못가서 회개하게 됩니다.
너무 오랫동안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막힙니다. 꼭 성사될 줄 알았는데 펑크가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성령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탄식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묵은해와 함께 성령을 근심하게 했던 일을 다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지난 세월 성낸 일, 분낸 일, 악한 말 한 것, 남을 미워하고 악한 생각을 품었던 것, 이러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분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그것도 묵은해와 함께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교인들끼리도 서로 보기 싫은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관계에서 내게 손해를 끼쳤다거나, 내게 엉뚱한 말을 했다거나,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분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제 다 털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계속 품고 있으면 마귀가 그 마음속에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또 오늘 본문 28절에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도적질 한 일이 있으면 그것도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도적질이라고 하여 누구 집 담을 넘어간 것만 도적질이 아닙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흠친 것만이 도적질이 아닙니다.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고 거짓으로 탈취한 것도 다 도적질입니다.
요즘 닭과 개들이 짓지를 않는 이유가 있답니다.
어느 날 닭과 개가 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견공이 먼저 닭에게 물었답니다.
“어쩨 요즘 아침에 울지를 않는가?”
“명퇴 당한 우리 집 주인 깰까봐 싫건 잠자라고 그러지...”
이번에는 닭이 개에게 물었답니다.
“요즘 어째서 사람을 봐도 짖지를 않는가?”
“그놈이 그놈이요 모두 도둑놈들이니 뭐라고 힘들게 짓겠는가” 라고...
시대를 풍자하는 웃으게 말이지만 우리 모두 생각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우리들, 물건하나들 팔아도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어 이를 보려고 하는 그런 구습을 쫓던 일을 묵은 세월과 함께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 29절 말씀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의 말은 믿지 않은 사람들과 달라야 할 것입니다.
거침없이 여과되지 않은 말들, 깡패기질의 말들, 육신의 욕망대로 쫓아 나오는 말들, 그런 말들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대신 덕을 세우는 말들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가는 세월과 함께 이러한 말에 젖어 있었으면 다 버리고 가야 하겠습니다.
새해는 참으로 우리말부터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묵은해는 다 역사의 뒤로 살아져 갑니다.
세월과 함께 버리고 갈 것을 버리고 갑시다.
구습을 쫓던 옛 사람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갑시다.
지금껏 술 먹던 버릇이 있었으면, 오늘부터 버리고 갑시다.
아직도 몰래몰래 피우던 담배들이라면 그 몸에도 해로운 것을 무엇 때문에 새해로 가지고 가겠습니까? 그 밖에 모든 숨겨진 죄의 습성들이 있었으면 다 버리고 새해를 맞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마라의 단물 (출15:22-26, 요4:13-14 )
오늘은 2006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12월 31일 365일 열두 달을 한결같은 은혜로 지켜주신 우리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어느 해보다도 금년은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요 기적의 한해였습니다. 저도 많다고는 할 수 없어도 육십 평생을 지나면서 금년같이 어려웠던 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7월 5일 북한은 미사일 실험을 했습니다. 10월 9일은 핵실험을 했습니다. 온 세계는 놀라고 술렁거리며 강대국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유엔이 한 순간에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하며 일촉즉발의 위기 가운데 갔습니다. 우리나라는 야단이 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라면, 쌀, 연탄, 기름도 사 모으지 않고 공항으로 모두 다 달려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우리나라는 이상한 나라라고, 정신이 나갔다고,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핵 실험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남한에 있는 우리를 보고 세계가 더 놀라기도 했습니다. 저도 겉으로 표정은 말할 수 없었지만 저의 속가슴에는 ‘아~ 금년은 너무 어렵다 내가 살 수 있을까?’ 정말 정말 긴장하는 한 해였습니다. 우리가 어찌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놀란들 무슨 길이 있습니까? 공항으로 간들 무슨 길이 있습니까? 우리는 억지로 참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버리시지는 않겠지.’ 그런 어떤 기대를 가지고 살았던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다 사람인데, 그러나 아직 그 위험은 그대로 있으며 시간은 흐르면서 연말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의 가슴들은 다 뛰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터질 듯합니다. AP통신이 세계 몇 십 개국 가운데 스트레스가 어느 나라에 제일 많은가를 얼마 전에 조사를 했는데 한국 사람이 1위라고 합니다. 81%. 거의 전 국민들이 스트레스에 꽉 차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 나라가 호주, 세 번째 나라가 캐나다, 프랑스, 영국, 그 다음 네 번째 나라들이 미국과 독일 그 다음 이태리, 스페인, 멕시코. 제일 다혈질이고 급한 사람은 지금 흥분하지 않는데 우리는 지금 흥분하고 있습니다. 안팎의 문제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루도 국내 정치는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우방과의 관계도, 사학법 문제도 어렵고 모두 들고 일어나는 이 화산 폭발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 왔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새해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지난날을 잊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그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새해에 더 좋은 나라, 사회가 되고 수습이 되며 치료가 되고 길이 열릴 줄로 믿습니다.
내년은 돼지 해라고 합니다. 돼지꿈을 꾸면 모두 좋다고들 합니다. 복권을 사며 모두 돼지꿈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성서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년은 더구나 황금돼지, 그냥 돼지가 아니고 아예 황금돼지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년에 자녀를 낳으면 더 좋다는 이런 말도 있어서 금년에 결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돼지는 불결한 동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돼지는 기르지도 않고 먹지도 않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돼지 치고 돼지 쥐엄 열매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은 돼지를 불결하게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때도 우리는 돼지 해지만 황금돼지는 있을 수도 없고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인생은 다 황금 말이 되는 것이며, 예수 잘 믿으면, 주님 더 사랑하면, 예수님 귀히 여기고 우리 믿음만 잃지 아니하면, 황금 말이 나오고 황금의 축복이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으면 안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대로 황금돼지 해에 황금돼지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속았습니까? 지난 일 년도 너무 많이 속았습니다. 다단계 무슨 기업에 수십만 백성들이 속아서 수 조원을 다 잃고 사기를 당했습니다. 바다 이야기에 모두 수백만이 도박에 빠져서 자살한 사람도 많고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정이, 인생이 무너졌습니다. 세상에 무슨 그런 큰 기대를 어디에 기대를 합니까? 황금돼지에, 바다 이야기에 기대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만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 앞에 나아갈 때, 그를 사랑하고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오늘 본문에도 말씀하시기를 애굽에 있던 그런 질병을 하나 없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을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이런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도 건너고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이제 수르 광야를 삼일동안 헤맸지만 그곳에서 물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많은 원망 불평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홍해에 대한 놀라운 경험도 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기적도 경험하게 하지만 우리에게 참는 것도 훈련시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것은 참아서 이기는 시험도 있고 또 피해서 이기는 시험도 있으며, 우리가 정면으로 대결해서 이기는 시험도 있습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넘어뜨리려는 세력은 정면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그걸 또한 잘 참고 기다려야 시험을 이기고 좋은 날이 올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돌아가야 될 때도 있습니다. 내게 누가 싸움을 걸어 올 때는 피해야 합니다. 가족과 남편이 화가 났다 이럴 때는 아내가 피해야 합니다. 같이 정면으로 부딪히면 안 됩니다. 아내가 지금 살림 살다가 속상해가지고 화가 나면 남편이 그 때는 다 들어주어야 됩니다. 그 분이 말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믿을 이는 남편인데 믿고 말하는 것은 들어 주어야 됩니다. 속상해도 그걸 다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지난 다음에 그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러면 다 서로 풀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피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누가 술 한 잔 하자고 할 때는 ‘거기 가서 안 먹지.’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보자. 하여튼 가고 내가 안 먹겠다.’ 이것도 안 됩니다. ‘아예 안 간다.’ 이렇게 피해야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지, 한잔 하는데 가서 혼자 ‘주여, 주여’ 그래봐야 그것도 덕이 안 됩니다. 거기서 내 주를 가까이 불러 보십시오.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아예 안 가는 게 은혜지. 가서 그런 욕 얻어먹으며 술 파티에 가서 분위기 망가뜨리지 말고 그건 피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시험은 가지가지 종류가 옵니다. ‘아~ 이 거 내가 참아야 되겠구나.’, ‘이거 내가 꼭 기다려야 되겠구나.’, ‘인내해야 되겠구나.’, ‘피해야 되겠구나.’, ‘양보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하면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물이 없다고 해서 막 ‘왜 물 안주냐?’ 하는데 목마를 때가 있습니다. 갈급할 때가 있습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생수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라에 가서 저들이 물을 발견합니다. 반가워서 물을 먹었는데 이 물이 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그곳에 쓴물이 있는데 홍해바다의 짠물하고 석회석이 있는 물이 혼합이 되어 물이 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 원망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그곳에 떨어뜨려라 합니다. 그러자 그 쓴물이 단물이 됩니다. 모든 백성이 이 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미가 깊습니다. 쓴물을 단물 만들어 놓았다고 성경은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다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모르는 것은 성경은 어떤 사건 속에 영적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쓴물이 단물 되었구나! 이렇게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그렇게 읽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죽으셨느냐?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오늘 이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십자가의 나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쓴 인생 쓴 물이 우리 인간인데 마라의 물은 우리 인간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쓴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죄악의 쓴물, 저주의 쓴물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온갖 불의의 쓴물이 우리 안에 철철 흘러넘치고 있는데 이 쓴물을 바꾸어 주실 이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해융에 담은 쓴 물을 주님이 마심으로 찬송가에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마라의 물이 되십니다.
♬두려워 말라 어린 양이여 네 푸른 목장 기름졌도다 마라의 쓴물 달게 하신 목자 그는 이미 쓴잔을 마셨도다. 오직 주님 오직 주님 능치 못함 없겠네. 오직 주님 오직 주님 오직 주님 능치 못함 없겠네 오직 주님♬(복음송 ‘오직믿음’) 예수님은 못 쓰는 인생, 죄로 인하여 쓴 물을 사람은 바꿀 수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니까 밖에 있는 자연의 물은 회복할 수 있습니다. 고칠 수 있습니다. 교인들 회사에 가보면 공장 하수가 내려가는데 잉어도 기르고 붕어도 기릅니다. 무엇을 저에게 소개하느냐 하면 ‘목사님! 우리는 오염된 물을 전부 정화시킨다는 그걸 알려줍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이 세상은 얼마든지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늪지대도 빌딩지대로 만들 수 있고 아파트 단지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오물 쓰레기장도 골프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지식이 발달해도 우리 안에 있는 이 쓴물을 바꿀 자는 없습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 아담 이브로 말미암아 죄악의 쓴물이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져내겠습니까?
바울이 말한 대로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질 자가 누구입니까? 로마서 1장 28절에서 31절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한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악이 가득 찼습니다. 온갖 범죄와 불의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고칠 수 있습니까? 과학이, 물질이, 권력이, 인간의 지식이, 우리의 이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꿀 자가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롭게 바꿀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기독교는 바꾸는 종교입니다.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꿉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셨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로 고기 잡는 어부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사도로 만들겠다. 제사장으로 만들겠다.’ 다 바꾸어 주셨습니다. 기생 라합을 다윗의 조상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룻이라고 하는 이 불행한 여인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전부 바꿉니다. 내 안에 역사하는 모든 저주가 떠나가고 새 생명이 내게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갈 때 저들이 범죄하여 원망 불평해가지고 광야에 뱀들이 나와서 이스라엘 선민을 삼키지 않습니까? 뱀이 무니까 독이 온 몸에 번져 붓고 소리 지르다가 죽습니다. 그럴 때 저들이 살려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야! 구리 뱀을 달아라.’ 해서 장대 위에 구리 뱀을 달았습니다. 모든 분들이 그걸 보고 보는 순간 그 병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몸에 있는 독이, 저주가 떠나갑니다. 이 구리 뱀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리 뱀을 보고 치료 받았지만 온 인류의 몸에 있는 이 독은, 이 뱀의 독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온 인류의 구리 뱀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망에서 내 안에 있는 독사의 독에서 건져 주실 이는 구리 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구리 뱀은 모세가 달았지만 온 인류의 구리 뱀은 하나님이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 안에 있는 수많은 독과 저주, 마라의 쓴물은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내 안에 주님 오시면, 주의 영이 내 안에 오시고 내가 회개하여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모든 멸망, 저주에서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밖에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마라의 쓴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광야 생활의 전부가 어렵지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살면 광야생활도 천국같이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광야에서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광야생활도 천국같이 살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주님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자기 안에 마라의 쓴물을 갖고 있으니까 늘 인생을 쓰게 살아갑니다.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 안에 있는 쓴물을 제거하시고 여러분 안에 평화의 왕으로 사랑의 주님으로 임재하실 줄로 믿습니다.
2007년 대학교수들이 교수 신문에 2007년 소망하는 사자성어를 전체적으로 제일 많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반구제기’입니다. 이것은 무엇 뜻이냐 하면 군인이 화살을 가지고 쏘았을 때 적을 쏘았지만 내 화살은 빗나가고, 내가 어려움을 당해서 전쟁에 졌을지라도 적과 싸워 이기지 못했을지라도 그 문제를 적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문제를 찾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구제기’입니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교수들이 바라는 것이 2007년에는 이런 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모두 ‘문제가 당신에게 있다.’, ‘핵실험, 핵에 있다.’ 핵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핵은 우리 안에 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무서운 미사일이 내게 있습니다. 이게 날아가서 남편을 강타하고 아내를 강타하며 우리 가정을 파괴하는 것은 다 내 안에 있는 죄악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이 핵이 제일 무섭습니다. 내 안에 쓴물이 내 안에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은 이걸 모릅니다. 전부가 세상에 있고 오늘 우리나라는 높거나 낮거나 모두 쏘아댑니다. 지도자들도 전부 순진한 국민들을 향하여 전부 여기 다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그렇게 있겠습니까? 다 서로가 가정이든 사회든 오늘 이렇게 우리 사회가 얼키설키 엉켜서 걷잡을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은 ‘모두 자기는 문제가 없고 나는 잘하고 있고, 나는 이렇게 훌륭한데 모두 다른데 문제가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을 만나게 되고 이 쓴물이 기적이 일어나서 단물로 바뀌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요한복음 4장도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지 않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아주머니! 이 물을 먹으면 아주머니는 영원히 목마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으세요.’, ‘선생님! 그 물은 내게 좀 주세요.’ 그러니까 ‘네 남편을 데려오라.’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마리아 여인이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맞다. 너는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다. 너는 남편을 찾았으나 남편을 못 만났어. 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를 행복하게 할 행복을 밖에서 찾은 것입니다. 멋진 남자, 이해심 많고 관용심 많으며, 좋은 직장 갖고 있고 돈 많은 저 아저씨 만나면 행복하리라 자기에게서 문제를 찾지 않습니다. 반구제기하지 않고 어디 멋진 사람 만나면 내가 멋진 인생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찾아보니 다 멋진 아저씨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만나보니 저게 문제고 저기 만나보니 이게 문제입니다. 저 사람은 얼굴은 편한데 일을 하나도 안 해 내가 먹여 살려야 하니 그것도 문제고, 거기서 낙심하고 상처받으며 그 다음 열심히 일하는 사람 찾아가니 일만 알고 아무것도 몰라. 자기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 밤새도록 일하고 집에 오지도 않아. 그러니까 또 돌아섭니다. ‘아~ 이제는 나만 알아주는 사람, 나만 알기는 아는데 돈을 한 푼도 못 벌어.’ 그러니까 그것도 또한 문제입니다. 이래가지고 계속 찾아다니다가 밖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불행과 고통은 행복을 밖에서 찾는 것입니다. 남자를 밖에서 찾고 사랑을 밖에서 찾습니다. 좋은 아름다운 모든 것을 가져다 놓으면 행복한 줄 아는데 내 안에 쓴물이 있는 한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셔서 여러분의 쓴물 죄악의 모든 쓴물들을 다 제거하시고 꿀물, 허니, 허니 워터, 허니 샘이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샘솟는 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는 한이 없습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내 안 때문에 나오지 바깥 때문에 나옵니까? 안에 능력이 크고 안에 은총이 큰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안을 새롭게 할 때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우리 인간이 범죄 한 다음에 안에 쓴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담 이브가 안에 쓴물을 가지고 서로 살아가니 부부간에 온갖 다툼 원망 불평이 생기고 내잘났다 그러고 오늘 성경에 읽어드린 로마서 1장에 있는 대로 교만하고 강퍅하고 자기만 알고 온갖 불의가 가득 차 있게 됩니다. 쓴물이 막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아담 이브도 서로 원망하고 책임 전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보고 ‘너 왜 이것 먹었느냐’ 그러니까 ‘저 사람이 나 먹으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브 보고 ‘너는 왜 그것 먹고 네 남편에게 주었냐?’ 하니까 ‘내가 그랬습니까? 저 뱀이 나를 유혹했지 않습니까?’ 세상에 말도 안 되는 말이 요사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을 아무리 이해하고 일백 번 고쳐 이해하려고 해도 모두 말이 안 되는 말을 합니다. 이게 다 어디서 나옵니까? 내 안에 쓴물에서 나옵니다. 무서운 독이, 저주가 막 나옵니다. 여러분! 예수의 보혈로 주님이 마라의 쓴물 마시므로 십자가 위에서 해융에 담은 쓴물을 마시므로 내 쓴 모든 저주가 떠나가고 달고 달콤한 단물의 인생이 되며, 가정이 되고 이 민족의 장래가 그렇게 되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보다 열배나 잘 사는 나라도 단물 먹으며 사는데, 똑같은 광야를 지나면서 광야 아닌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광야 아닌 삶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인구가 많고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모두 단 인생을, 단 꿀맛 같은 사회, 꿀맛 같은 교육, 꿀맛 같은 노조가 되는데 오늘 왜 우리는 이렇게 쓴물만 마셔야 합니까? 새해에는 모두 이 나라에 단물만 나오는 기적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저는 새해에 바라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나라 우리의 삶에 평화의 단물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주의 십자가 보혈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미움과 증오와 오해와 이기적인 것과 ‘나 살고 너 죽어야겠다.’ 이런 마음이 다 십자가 앞에 녹아져 버립니다. 다 사라져 버립니다. 어떤 독도 다 제거됩니다. 제가 독수리를 보니까 다 썩은 것만 먹어도 독수리 위는 얼마나 건강한지 수많은 병균들이 여기 지나가면서 다 죽어버립니다. 다 녹아버립니다. 그 위산에 안 녹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병 덩어리가 들어가도 다 녹아버립니다. 십자가 앞에 안 녹을 게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샘솟는 은혜, 샘솟듯 하는 피의 능력, ♬샘 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한없이 있도다 샘 솟듯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찬송가 190장) 솟아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들이 너무 붉으락 푸르락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극한 상황입니다. 포용과 관용을 말하면서도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은 무시무시한 동물의 왕국의 용어들을 쓰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대학까지 갈기 갈기로 모두 찢어졌습니다. 선생과 학생이 아닙니다. 모든 계층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모두 찢어졌습니다. 쓴물이 납니다. 이 쓴물이 누구 때문에 난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닙니다. 다 내 안에서 나옵니다. 농촌, 도시, 가정, 사회 한 구석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쓴물이 막 나옵니다. 새해에는 이 나라에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하나만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내 하나만 잘한다고 하는 이 쓴 독물들이 다 제거되고 실로암의 단물, 주님이 주시는 보혈의 단물이 강같이 샘솟듯이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고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 위에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도 나가보니 교회가 쓴물이 더 많습니다. 지금 어느 다른 종교보다도 한국교회는 모두 무서운 전쟁터와 같습니다. 목사님을 고소하고 설교하러 올라가면 끌어내리고 무서워졌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산다고... 잠깐 살다가 죽는데 저도 얼마 살겠습니까? 저는 80을 산다고 그래도 명성교회 개척한지 삼분의 일만 살면 갑니다. 원통합니다. 잠깐인데... 그래도 교인은 무엇이 다릅니까? 죽는 것 하나 놓고 사는 게 교인인데 죽는 것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고, 죽는 것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죽는다는 것 이것 하나 때문에 우리가 늘 주님 앞에 순종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 죽는다는 것 없애버리면 사람이입니까? 동물입니다. 동물도 어느 정도 죽을 때를 안답니다. 우리가 항상 힘쓰고 살 수 있습니까? 항상 큰소리치며 살 수 있느냐 말입니다. 겸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새해에 평화가 찾아와야 되겠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평화를 사랑하는, 만나면 서로 모두 웃는, 즐거워하는, 내 안에 어떤 무기도 갖고 있지 않고 모두 품을 수 있는 이 넓은 마음, 사랑이 넘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가난, 극빈자 이 가난의 쓴물이 제거되었으면 합니다. 몇 년 동안 계속 가난한 자를 자꾸 생각하며 한국교회도 기업도 적극적으로 돕지만 가난한 사람은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가난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이게 전체적인 답입니다. 공산주의가 다 같이 잘 살려고 전부 가난한 자 없이하려고 부자끼리 힘을 모았는데, 이 지상에 거지는 다 공산주의 촌으로 찾아갔습니다. 공산주의 말만하면 가난이 찾아갑니다. 우리를 부유케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부요하신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정말 부요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시면 우리 인간은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와주어야 잘산다.’ 아닙니다. 지하자원, 이 세상에 있는 것 다 가져도 내 안에 독물이 있는 한, 쓴물이 있는 한 잘 살수 없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제가 우리나라에서, 실지로 된 걸 텔레비전에 보여주는 걸 보았습니다. 바다이야기에 작년에 몇 백만이 빠졌는데 도박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집 재산 싹 다 잃어버리고 직장 다 버리고 거지노릇 합니다. 저녁이 되니까 완전히 옷을 거지로 갈아입고 정신병자인척 하면서 나갑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나가서 지하철에서도 촬영을 방송국에서 계속했습니다. 보면 100% 불쌍한 거지입니다. 멀쩡한 젊은이가 그래가지고 만원 벌어서 옷을 갈 입고 어디고 가느냐하면 도박장으로 바로 갑니다. 여러분! 이 사람에게 전 세계가 도와주어도 백 억 불이 있어도 이 사람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내 안에 쓴 물을 두고 누구 도움을 받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는 잘 살 수 있는 요소가 무한히 많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주님을 내 안에 모시면 첫째 부지런해집니다. 돈을 아껴서 삽니다. 돈 하나만 가지고도 몇 백배를 늘립니다. 근면합니다. 사치하지 않습니다. 잘난 척 안 합니다. 진실하니까 모두 돈을 빌려줍니다. 장사 잘 됩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 소망이 생깁니다. 비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의 능률이 오릅니다. 머리가 깨서 총명해집니다. 아이디어가 막 살아납니다. 어떤 분야든지 예술이든 정치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과학이든 비즈니스든 어떤 것이든 그리스도의 영이 안에 들어가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안에 있는 능력을 꺼내는 것입니다. 보화, 황금돼지는 밖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황금마차는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나라는 100% 잘 삽니다. 주님이 오시면 100% 잘 됩니다. 가난이 다 물러갑니다. 오늘 돈을 가지고 어디로 갑니까? 유대인들 보십시오. 세계에 돈이라는 돈은 유대인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노벨상 받은 사람, 이건 바로 며칠 전에 이스라엘 정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유대인은 1948년에 해방된 나라입니다. 지금 반세기 조금 넘었습니다. 우리하고 다릅니다. 그런데도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노벨의학상이 48명, 물리학상이 44명, 노벨화학상이 27명, 노벨경제학상이 20명, 노벨문학상이 12명, 평화상을 제외하고도 150명의 현대인들이 유대인 출신입니다. 히브리대학은 노벨상을 받는 사람이 해마다 안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2006년에도 노벨화학상을 금년에 로저 콘버그 교수가 받았습니다. 히브리대학 객원교수로 2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한 사람입니다. 작년에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일 오먼 교수입니다. 역시 히브리대학입니다. 2004년에 아브라함교수와 아론교수 두 명이 받았습니다. 다 히브리대 졸업생이고 히브리대학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3백 개의 대학이 있는데도 대학에서 노벨상이 한 명도 아직 안 나왔습니다. 상고에서 나오고 그 외에는 한 명도 안 나왔습니다. 대학이 뭐가 필요합니까? 전부 상고 세워야지, 대학가서 뭐하냐 말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 교육은 우리의 능력은 전부 밖에 것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유대인들 교육의 핵심은 내 안에 하나님이 창조한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하나님이 함께하는 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개발해 내는 것입니다. 교육은 하나도 강요하는 법이 없습니다.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에 일등 가는 민족이 되고 일등 가는 사람을 길러내려면 내 안에 기업도 있고 과학도 있습니다. 오늘 성가대에서 불렀던 베토벤의 ‘천사의 합창’도 그 사람이 공부해서 이런 것 작곡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 기도하니 그 안에서 ‘천사의 합창’ 같은 곡이 나온 것입니다. 제가 오늘 그 찬양 듣고 눈물이 너무 나오고, 세상에 이런 노래가 어디 있을까? 제가 오늘 1부 때도 그랬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이 천사의 합창을 하라고,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세계적인 첫째가 다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예수를 내 안에 모신데서 나옵니다. 부유함이, 행복도 여기서 나옵니다. 가정의 화목도 소 잡아먹고 호텔에 가서 음식 먹어서 행복한 게 아닙니다. 다 먹고 나올 때 싸웁니다. 식비 내다가 싸웁니다. 행복은 이 안에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 이 안에 있는 사랑은 무궁무한한 자원입니다. 2007년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여러분의 가는 길에 만만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삼환 목사 설교 중에서
늙은 종 이야기 (창 24:1-9)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할 때는 모두가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지난 한해를 살아오는 동안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보람된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후회되는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발자취에는 의례히 그런 법입니다. 보람된 일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회되는 일들만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간이 되면 보람된 일 보다는 후회되고 아쉬운 일들만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나간 시간보다는 새롭게 다가오는 새 시간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이야기입니다. 이 종에게서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가장 충성스럽고 충직하고 진실하고 주인으로부터 신뢰받는 청지기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께, 교회 앞에, 내 인생에, 직장인으로서, 사업가로서, 교직자로서, 젊은이로서, 어른으로, 부모로, 자식으로, 신앙인으로 이렇게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한해를 다 살아간 다음 한해를 되돌아 볼 때에도 조금도 후회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늙은 종 이야기라고 붙였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존재는 참 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일을 시작하시고 섭리를 이루십니다. 그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내와 함께 할 일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곁에는 아들 이삭 한사람뿐입니다. 그 아들의 나이가 40입니다. 이제 결혼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살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하란으로 가서 며느리를 골라야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 중요한 일을 위해 자신의 늙은 종을 보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등장합니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아주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맡아 일하는 청지기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 늙은 종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구나. 이것이 진실한 청지기의 삶이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헌신자들의 정신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종에게서 몇 가지 모습이 발견됩니다.
주인으로부터 소명을
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종에게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즉 “너는 가서 며느릿감을 택하여 데리고 오라“그 말입니다. 이 종은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며느리를 간택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이 종은 주인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맡아서 관할하고 있는 청지기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볼 때 40세 된 아들 이삭보다 이 종이 더 미더웠을 것입니다. 얼마나 믿었으면 며느리 선택권까지 줘서 보냈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삶은 이렇게 인정받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이 복을 받는 인생이고 은혜 입은 삶입니다. 직장에서든지 사회에서든지 어디서든지 인정받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삶입니다. 이 인정받고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일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섭리들은 이루어지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데는 반드시 누군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냐 하면 이 종같은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살아가는 것이 귀한 일인데 주께로부터 인정받고 소중하게 쓰임 받는 일이라면 얼마나 소종한 일입니까.
주인 의중 정확히 이해
무슨 일을 할 때는 뜻을 정확히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 종은 늙은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경험이 풍부하고 생각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지침을 건성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임감 있게 물었습니다. 5절을 보면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내가 이삭을 데리고 가도 됩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절대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혹시 오고 가는 중에 이방여자들을 보고 현혹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눈에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할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혹시 눈이 돌아가 이방여자에게 빠져버리게 되면 큰일입니다. 우리는 때로 일을 많이 하면 되는 줄 압니다. 주인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면서 일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되 정확하게 알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나 교회의 일은 자기를 위한 일도 아니고 나타내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래서 정확한 뜻을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종의 모습에서 그런 신중한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
마침내 이 종이 주인의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 길은 가나안에서 메소포타미아 까지 가는 길로 거리가 800km 정도 되는 길입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에서 터키를 거쳐 이라크 땅까지 낙타를 타고 갔을 테니까 3,4개월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이 종이 그렇게 가서 마침내 목적지인 하란의 근방에 도착해서 마침내 우물가에 앉아 기도했습니다. 어디 가서 처녀를 골라서 데리고 가야 합니까. 그 멀리 그 넓은 땅에서 오늘처럼 도시가 아니고 몇 가족끼리 부족들이 사는 초라한 동네를 찾아 처녀를 구해야 합니다. 아마 그의 마음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우물가에 앉아서 기도를 합니다. 그때 이 종이 두 번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한번은 주인에게 복을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12절을 보면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며느릿감을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참 신실한 종입니다. 오늘은 주인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는 종들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인 없는 자리에서 다 주인을 욕합니다. 배반합니다. 노사관계를 보십시오. 자기가 다니는 직장이 망하건 말건 투쟁하고 불 지르고 파괴하고 그럽니다. 기업주가 아무리 악덕 기업주라고 해도 자기가 다니는 직장을 파괴하고 불 지르는 행위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행동입니다. 오늘은 부모가 아무리 유산을 안주었기로서니 부모를 버리고 모른 체하고 거리로 내몰아 얼어 죽게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니 그 자손들이 복을 받겠습니까. 그래서 여기 이 종의 모습이 참 신실하게 보입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것이 이 종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종이 두 번째 또 기도합니다. 이번에는 며느릿감을 아주 순조롭게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4절을 보면 “이제 여기 우물가로 처녀들이 올 것인데 내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한 소녀가 물을 길으러 오면 내가 물을 좀 달라 할 테니 나만 말고 당신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 하는 소녀가 있으면 그가 하나님이 짝 지으신 규수로 알겠습니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구체적인 기도입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까 한 처녀가 물을 길으려 왔습니다. 그래서 “물 좀 달라“고 했더니 그 처녀가 선뜻 물을 주면서 “당신의 낙타에게도 주겠다”하고 물을 길어 낙타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그때 그 늙은 종이 너무나 신기해서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서 사느냐, 뉘 집 자손이냐, 네 집에 빈방이 있느냐” 그래서 그 소녀를 따라 집에 가 보니까 그 집안이 자기가 찾고 있는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 리브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비하고 반갑고 하나님의 인도가 분명합니까. 이 종이 소녀의 집에 가서 지금까지 된 일을 다 이야기 하니까 모두 그를 환대하고 리브가의 오빠 라반과 그 부친 브두엘이 그 자리에서 데리고 가서 네 주인의 며느리를 삼으라고 말했습니다. 50절을 보면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 로서 말미암았으니 ..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너무나 선명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섭리였으니 누가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이 종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개념적인 기도를 합니다. 기도의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아주 구체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나에게 이런 사람을 주소서” 그렇게 자세한 꿈을 담아 드릴 때 그 기도가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할렐루야 축구단이 있습니다. 처음 이 축구단은 기도하는 젊은 선수들이 모여 결성했습니다. 그 젊은 선수들이 하루는 의논하기를 “이제부터 누구든지 골을 넣으면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신현호 선수가 골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이 선수가 골을 넣고 보니까 너무 좋아서 뛰어 다니다 보니까 기도한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기도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경기를 하는데 이번에는 이영무 선수가 공을 넣었습니다. 그때 이 선수가 곧 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모습은 대단한 용기이고 대단한 신앙의 간증입니다. 그때부터 축구장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도하지 못한 신현호 선수가 후일에 이런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날 기도할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그 후 선수생명이 끝나 버렸고 이영무 선수는 그날 기도한 것 때문에 오늘까지 선수생명이 지속되고 있다“. 기도는 무슨 기도든지 다 소중합니다. 그런데 더 소중한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도이고 자세한 기도입니다. 한 해 동안 이런 기도를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종은 자기의 주인에게 복을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진정 주인의 뜻에 맞는 처녀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이 종이 처녀를 따라 집으로 가서 지금까지 된 일을 다 말하자 그 종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딸을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어느 낮선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을 데려가겠다고 할 때 누가 선뜻 딸을 데리고 가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그 종의 신실함, 신실한 언행, 진솔한 자세, 그의 신실한 기도내용 등을 들었을 때 온가족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모습이 중요합니다. 이 신실함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실함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재산이고 믿음이고 자본입니다.
종의 책임감
이 종이 마침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순전하게 처녀를 만난 후에 처녀를 데리고 곧 바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의 집안에서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래서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애원했습니다. 55절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가라”고 간구합니다. 며칠 더 묶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융숭한 대접도 받고 그 종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의 마음에는 자신의 평안함이나 좋은 대접을 받는 것 보다 주인이 걱정되었습니다. 자기 주인이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56절을 보면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하고 길을 떠납니다. 얼마나 책임 있는 종입니까. 그러니까 한때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 종을 양자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이렇게 책임 있게 살면 우선 자기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또한 세상이 그런 사람들 때문에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결론
그렇게 종이 며느릿감을 데리고 왔을 때 아브라함도 이삭도 만족해서 기뻐했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기뻐한 그 배후에는 이름 없는 아주 충성스러운 종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종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 이름 없는 종의 모습을 장황하게 기록해 놓으신 이유가 바로 이점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청지기의 정신과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해서 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누구로부터 신뢰받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행복하고 보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보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이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기적인 부자 카네기가 늙어갈 때 사람들은 누구를 후계자로 선정할까 모두 궁금해 했습니다. 그때 카네기는 아주 과감하게 자신이 데리고 있던 비서를 후계자로 선택하였습니다. 이 비서는 처음에 경비원으로 그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비원이 너무나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카네기는 그를 자신의 수행 비서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를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기용하고 또 마침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신실함과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양치는 목동에서 백성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농사짓던 엘리사를 불러 예언자로 삼아서 그 어려운 시절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골 청년 요셉을 불러내서 애굽으로 보내 가장 어려울 때 그 나라의 총리로 삼으셨습니다. 들에서 양치 던 그 시대의 가장 뒤떨어진 목자들에게 꿈을 보여주셔서 예수의 나심을 알고 가장 먼저 찾아가 축하하게 하셨습니다. 군대백부장 고넬료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청하여 은혜 받으라고 계시를 주심으로 고넬료 가족 모두와 종들까지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님이 그 모습들을 보시고 기쁘게 여기셨던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복을 받는 길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 모습이 이 늙은 종의 모습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향기로운 인생은 하나님도 감동받으십니다. 새해는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한 해 동안 많은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될 것이고 이 종이 인도받은 그 인도를 우리도 받게 될 것입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에벤에셀 (삼상7:12-14)
오늘 이 자리에 정말 잘 오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신 것이 잘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위해 오신 발걸음이기에 잘 오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2006년 마지막주일인데 이 뜻깊은 자리에 오신 것이 잘하신 일입니다. 사실 시간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아침에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의 시간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있고, 또 일년이 있습니다.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방향과 목표가 달라집니다. ‘처음’하면 설레임과 기대감, 상쾌함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지막’하면 언제나 숙연함과 진지함, 그리고 아쉬움과 후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의 부여 속에 인생은 성숙해져 가고, 신앙은 더 깊어 가는 것입니다.
한해의 마지막인 이 시점에서 우리 믿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백할 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벤에셀’이라고 믿습니다.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찾고 있는 신앙의 사자성어가운데 이것보다 소중한 고백이 없습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란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고백을 모두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난 한해동안, 아니 나의 모든 생애동안 여기까지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살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본문은 바로 에벤에셀이란 말이 처음 사용하게 된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2절에 그것을 알려줍니다. 사무엘이 온 백성과 함께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워 에벤에셀이라 불렀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실 여기에 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우여와 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지나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기념비를 세운 이후에 어떤 일이 임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임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이스라엘처럼 에벤에셀을 고백하고, 기념하고, 다짐하고 나아가면 우리의 삶에도 그런 결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에벤에셀을 고백하면서 나아간 그들에게 임한 결과가 무엇일까요? 본문을 보면 그것을 3개의 중요한 단어로 집약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굴복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라고 말합니다. 에벤에셀의 고백과 신앙으로 나아간 그들에게 가장 먼저 임한 축복은 굴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승리, 궁극적인 승리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이보다 소중한 축복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이 집요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란 나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혔던 나라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정복할 때 가드와 가사에 약간 남겨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힘을 규합해 큰 족속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블레셋만큼 집요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이 나라는 아주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잊을 만 하면 또 공격하여 긴장하게 만듭니다.
본문에 굴복과 승리가 오기까지 앞부분에 보면, 이스라엘은 이들과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릅니다. 그런데 할 때마다 큰 패배를 경험합니다. 이스라엘은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궤를 앞세우면 승리할 것이라 믿었지만, 오히려 그때는 더 패배했고 언약궤는 블레셋의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사무엘은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전쟁에서 이처럼 연속으로 패배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을 직시한 것입니다. 원인을 찾는 중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긴 죄가 있었습니다. 나라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총체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진 죄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죄로인해 실패한 것을 깨달은 뒤에 온 백성을 미스바로 모이게 합니다. 거기에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것이 7장 초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눈물과 통곡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신실히 믿을 것을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 뒤에 이스라엘은 다시 블레셋과 전쟁하였고, 이제 큰 승리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10절과 11절에서 승리를 말하고, 본문 13절에서는 궁극적인 승리를 알리는 선언으로서 블레셋의 굴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 에벤에셀의 신앙과 고백의 기점으로 이스라엘에게 굴복과 승리라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패배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진다해도, 아무리 약하고 힘이 없다해도 승리를 주시는 분이시고 승리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와 낙심과 좌절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을 역전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패색이 짙더라도, 아무리 가망이 없더라도, 아무리 실패를 반복하여 더 이상 역전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용기를 갖고 그 자리를 박차고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도 이런 굴복과 승리를 위해 미스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은 미스바를 통과한 후에 임한 결과입니다. 이제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눈물과 통곡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궁극적인 굴복과 승리는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앞에 분명 굴복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회개와 참회와 결단으로 미스바를 경험하고 통과하여 새해에는 날마다 승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회복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라고 말합니다.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고 담대함으로 나아갔던 이스라엘에게 굴복과 승리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에게서 빼앗겼던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에벤에셀의 축복이요, 에벤에셀의 신앙입니다. 에벤에셀의 기점으로 다 뒤돌려지고 모두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잃은 것이 많았습니다. 땅도 많이 잃었지만, 사람도 잃었습니다. 물질도 잃었고, 인재도 잃었습니다. 시간도 잃었고, 마음도 잃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이 주는 상처요, 흔적입니다. 그런데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이스라엘에게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벤에셀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십니다. 고난과 아픔과 시련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런 회복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사건으로 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욥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 절망과 고통 중에 살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나중에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고,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새해에는 그 모든 것이 다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기도하고 고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시60:1) 이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새해를 회복의 해로 선포하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이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가 에벤에셀의 고백 속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셋째, 평화입니다. 14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이것이 에벤에셀의 신앙과 고백속에 나타난 마지막 결과입니다. 승리, 회복, 그리고 평화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놀랍게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이스라엘에 보여주었던 모습은 한마디로 두려움과 공포였습니다. 연일 전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가족이 전쟁으로 맥없이 죽었습니다. 나라는 언제 더 큰 위기를 맞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지금 살아있지만 그들은 산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음의 공포와 위기 속에 두려움으로 지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고,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평화가 임했습니다. 마음에는 평안이, 삶에는 평화가, 신앙에는 화평이 임한 것입니다. 그 평화 속에 이스라엘은 모든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자유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세상은 결코 평화를 만들지 못하고,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은 곳곳에 전쟁과 테러로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어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보도되었습니다. 한 개인으로 보면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22년 동안 개인숭배와 함께 억압적인 통치를 해 온 중동의 독재자였습니다. 그는 연좌제를 통해 자신의 정적들의 가족과 친구를 모두 처형해 단체로 땅에 묻었습니다. 그는 지난 82년 집권 당시 자신의 암살을 기도했던 두자일 마을 시아파 주민 140명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그의 이런 삶으로 보면 사형집행이란 결과는 당연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이라크내의 종파간의 갈등이 커질 것이고, 종교전쟁으로 번질 확률이 더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관여했기에 테러가 더 자행될 것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피가 피를 부르고, 복수가 복수로 이어지는 전쟁과 테러의 공포와 무서움이 2007년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대의 상황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평화를 원해도 되지 않습니다. 유엔을 만들어 중재해도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중의 하나는 바로 ‘내적평안’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라는 사람이 지은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란 책에서 그것을 잘 알려줍니다. 우리 마음에 질서가 잡히지 않을 때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몹시 흔들리고 혼란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우리의 내면세계를 질서 있게 정돈하여 평안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려움과 염려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의 삶에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걱정과 염려와 한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벅찬 기대감으로 출발하지만, 여전히 안개와 같은 우리의 앞날로 인해, 예상치 못하는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불안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당면한 문제로 염려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 시점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평화입니다. 내적 평안이요, 신앙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을 고백하고, 그 신앙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까? 어떤 것이 우리를 걱정과 염려와 근심으로 몰아갑니까? 이제 우리 모두 에벤에셀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에벤에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앞으로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책임지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고, 능력으로 역사 하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내 삶에 힘이 되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모든 걱정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 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평화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2006년 마지막주일에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신앙의 사자성어는 ‘에벤에셀’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이 신앙으로 나아갈 때에 분명 승리와 회복과 평화의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한해를 마무리하시고,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욥기42:1-10)
2006년 한 해의 마지막 날, 주일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Rohihlahla 1918~)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백 인종 차별정책을 종식시킨 탁월한 인권운동가 이었습니다. 1963년 44세 때에 종신형을 선고받아 27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1990년 2월 11일 72세에 석방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은밀하게 민중을 이끌었습니다. 민주적 선거방식을 통하여 대통령이 되어 1994년 5월 4일 취임을 하게 되었을 때, 전 세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오랫동안 극심한 인종차별정책에 시달려온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피의 보복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델라는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고, 흑백의 화합을 위한 관용과 화해의 정치를 하였습니다. 혁명대신 백인 정권 지도자들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민주적인 통치 아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공헌하였습니다.
그의 대통령 취임사의 한부분입니다.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공간들을 채울 다리를 놓을 시간이 왔습니다. 새 시작을 할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취임사는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가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위한 평화가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위한 일, 양식, 물 그리고 소금이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가 우리 각자의 육체와 영혼이 이미 자유로워 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소서.”
350년 동안의 백인들의 인종차별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려 할 때, 분노와 보복대신에 용서와 화해, 화합을 위한 관용을 실천하였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욥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동방의 의인’이라고 칭찬받은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뜻밖에 다가온 재앙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착하고 의좋던 열 명의 자녀들도 갑작스런 사고로 한꺼번에 세상을 떴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온 몸에 생긴 부스럼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고, 아내마저 등을 돌리고 그의 곁을 떠나 가버렸습니다.
그 때, 고통 받는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멀리에서 찾아온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었습니다. 이들은 너무나 처참한 욥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욥의 곁에서 소리 내어 울면서 옷을 찢고 가슴아파하며 일주일동안 한 마디도 말을 못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입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은 위로라기보다 충고였고, 책망이었습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냐? 빨리 회개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세 친구가 번갈아가며 자신을 정죄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벌인 논쟁의 내용이 4장부터 31장까지 무려 27장의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논쟁의 분량입니다. 세 친구가 한 말을 모두 합하면 211절입니다. 그런데 욥의 반론은 457절이나 됩니다. 이 논쟁은 친구들의 침묵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렇게 변론이 끝난 다음, 욥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을 만난 다음 욥의 변화입니다.
1.회개였습니다.
고난의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은 욥의 신앙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고난당하기 전까지 경험했던 하나님과는 차원을 달랐습니다.
42장5절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지금가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가 눈으로 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42장2절입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고난 중에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습니다. 친구들과 논쟁을 계속하는 동안 그 불만이 순간순간 튀어나왔습니다.
욥기10:1-3입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나는 이제 원통함을 참지 않고 다 틀어놓고, 내 영혼의 괴로움을 다 말하겠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겠다. ‘나를 죄인취급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로 나 같은 자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 주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
욥기13:23-25에는 기도형식으로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주께서는 줄곧 나를 위협하시렵니까? 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을 뿐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나를 공격하고 계십니까?”
욥은 자신이 이토록 가혹한 고난을 받아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겪으면서 만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왜 자신을 고난으로 이끄셨는지!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난 다음에야 이렇게 회개하였습니다.
42장 3절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회개도 은혜 받은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고 하는 것은 곧 회개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세상에서 내가 의로운 줄 알고 살수도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만나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욥처럼 회개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의 생각으로, 말로 지은 죄악들을 회개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였고,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말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많았습니다. 주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옵소서.”
2.용서입니다.
욥기42:7,8입니다.“주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용서해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용서에 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용서는 서로의 작용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용서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서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나만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경우에는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내 마음에서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문제는 그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죄는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용서의 문제는 바로 나를 위한 나의 문제입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를 용서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내 몸에 병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미움, 분노, 증오, 저주하는 마음은 독과 같아서 내 마음에 품고 있으면 내가 피해를 받게 됩니다.
성경에는 용서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어느 날 주님께 물었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한다’하고 하면, 너는 용서해주어라.”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다가 죄를 짓는 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 되게 해서 도리어 그 사람을 망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뭐 속도 없는 줄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디 내가 하는 말대로 해보고서 그 결과를 보라니까! 그렇습니다. 용서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6:12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욥의 친구들은 ‘진리’ ‘참’이라는 막대기로 욥을 치면서 괴롭혔습니다. 욥은 자기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회개를 독촉하는 친구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그 많은 시간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그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욥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용서하면 내 기도의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3:7입니다, “남편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존중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가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무지 기도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입니다. 용서하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하늘의문이 열립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 되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부부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푸십시오.
열심 있는 한 남자 성도의 이야깁니다. 기도를 하고 싶으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만 해도 입이 막히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다닌 것조차 고통스러웠고,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유난히 공부를 잘 하지 못하였으므로 성적표를 가지고 가면 꼭 아버지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것도 그 날 저녁 식사시간에 다른 식구들은 다 밤을 먹는데, 베개를 들고 서 있게 했던 것입니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이 사람은 동생들 앞에서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마다 그렇게 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쌓여서 아버지와 관계된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직장의 상사도 아버지 같다는 이유로 아주 싫어졌고 어디서나 상사를 비난하고 욕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하여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른 것조차도 싫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힘들게 하고 미워하던 그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고는 기도도, 일도 잘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키가 작은 것은 아빠를, 뚱뚱한 것은 엄마를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머리가 나쁜 것은 아빠를, 얼굴이 예쁜 것은 엄마를 닮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을 나무라고 꾸짖을 것입니까? 기도할 것입니다,. 축복할 것입니다. 본인도 부모 탓하지 말고 기도하고 일어설 것입니다.
어느 날 조용히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자기 마음의 방에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가 들고 있던 베개를 내려놓고 꼭 껴안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그 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팠니?” 그리고 아버지를 향하여 조용히 타이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아들에게 그런 응어리를 심어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분은 그 주님의 모습을 본 다음 대성통곡하며 울고 난 다음 얼굴이 천사처럼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35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수요 밤 예배에서 회중기도를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열기 위하여 기도의 열기 위하여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마당에 우리가 잊지 말고 하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굳이 상대방을 찾아가지 않아도 먼저 마음으로 용서하십시오.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버리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그렇게 하십시오.
3.회복과 축복의 시작입니다.
욥기42:10입니다.“욥이 주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이 말씀은 정말 귀합니다.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린 욥을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 그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욥의 삶에 회복과 축복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받기 전의 욥의 상태보다 갑절이나 더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열렸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1,2장에서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는 과정을 봅니다.
남편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을 잘만 낳는데,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마음에 브닌나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증오가 있었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시고 자기에게는 주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자식도 하나 낳지 못하는 자신이 한 없이 미웠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간절한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기도 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닌나의 격분시킴 때문에, 울며, 괴로워서, 고통하며, 슬퍼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 후에 한나의 마음에 있던 모든 원통함과 격분됨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이스라엘 국부가 되었습니다.
분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새 날이 밝았다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새 삶이 시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용서하고 나아갈 때에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의 문은 열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주님 앞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새 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해가 진정한 축복의 시작이 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
삶의 결산 (마25:14-30)
1. 전도서 7장에 보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는 지혜자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이 지혜롭게 결산되기 위해 여러분 삶의 시작보다 삶을 결산하는 인생의 마지막이 더 나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맡은 세 인물 중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는 똑같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주인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삶은 칭찬과 축복으로 결산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이라는 책망과 더불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심판으로 그의 삶이 결산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을 결산하게 될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 비유 말씀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뜻하고, 달란트를 맡은 종들은 넓게는 모든 사람을, 작게는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란트”는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에게 맡기신 생명과 시간, 물질과 재능, 환경과 지식 등 유무형의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달란트가 주인의 소유로서 종들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달란트가 종들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러분에게 주어진 생명과 시간, 물질과 재능, 환경과 지식 등 유무형의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과 시간, 물질과 재능 등을 모두 자기 것처럼 여기며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달란트를 주인이 종들에게 맡길 때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맡긴 목적은 한 마디로 주인을 위해 이윤을 남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에 칭찬과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19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달란트 맡은 자들과 반드시 결산한다는 사실입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사람의 삶에 대한 결산, 곧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기실 때,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각각의 종들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판단과 뜻에 따라 배분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맡기실 때, 어떤 사람에게 4,50년을, 어떤 사람에게는 7,80년을, 또 다른 사람에게 3,40년을 맡기십니다. 물질을 맡기실 때, 어떤 사람에게 평생에 20억 원을, 어떤 사람에게는 10억 원을, 또 다른 사람에게 3억 원을 맡기십니다. 지식을 맡기실 때, 어떤 사람에게 석,박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고졸학력을, 또 다른 사람에게 초등학력을 맡기십니다. 건강을 맡기실 때, 어떤 사람에게 아주 건강한 체질을, 어떤 사람에게는 약골 체질을, 또 다른 사람에게 병약한 체질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맡은 정도에 따라 충성을 다해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적다고,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남보다 환경이 나쁘다고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그 능력에 따라 맡겼기 때문입니다. 맡은 바대로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맡은대로 충성을 다해서 남기라는 것입니다.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천체물리학자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취소해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두 학생, 등록한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인가요?’ 그래서 알려줬습니다. 그러니까 첸드리스카 박사는 강의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난히 추웠던 시카고의 눈보라, 차가운 사나운 바람을 헤치고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한 번도 빠짐이 없이 계속적으로 겨울 동안 강의를, 두 학생을 상대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년이 흘러갔습니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그리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성실한 강의, 두 사람을 앞에 둔 이 한 분의 강의가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많이 맡았느냐, 적게 맡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맡은 바대로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눅12:48)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다섯 달란트 맡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받은 칭찬과 축복의 내용이 두 달란트 맡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기고 받은 칭찬과 축복이 똑같은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는 “착하고 충성된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남겼다고 했습니다.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기신 뜻과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이고, 그 주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려면 무엇보다 삶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셨습니다.(요9:1-4) 과연 이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유대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를 증거했습니다.(요9:27-38)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합니다.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그 가운데서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려면 “바로 가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서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이발소에 “내일은 공짜로 이발해 드립니다.”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공짜 이발을 하려고 벼르고 있다가 다음날 가서 이발을 했습니다. 이발을 하고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나오려니까, “네, 손님. 사천 원만 내시면 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손님이 “아니 이발을 공짜로 해준다고 해서 들어왔는데요?”라고 하자 주인은 “ 어디 공짜라고 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둘은 밖에 나가 간판을 보았습니다. “여기 공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디 공짜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일이면 공짜로 해드린다고 했죠.” “나는 어제 이 간판을 봤단 말이에요.” “그러나 간판은 여전히 내일을 가리키고 있잖습니까?” “그럼 언제 오면 공짜입니까?” “내일이오. 오늘은 항상 돈을 받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내일이니 기대할 수 없군요.” 오늘이 없이 내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로 순종하지 않은 한 달란트 맡은 자에게 미래는 심판과 영원한 불행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명히 깨달으시고 바로 순종하시므로 삶의 많은 것을 남겨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맡은 자가 어떻게 해서 “악하고 게으르며 무익한 종”이 되었습니까? 이 사람은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와서는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님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이 심고 뿌려 놓은 것을 거둬들이는 아주 인색한 분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서 주인님의 돈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현대역 성경) 주인을 아주 인색한 사람으로 말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혹은 두 달란트를 주면서 나에게만은 왜 한 달란트 밖에 주지 않았느냐는 반항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포도원 품군의 비유에 나오는 어느 품군과 같습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나가 놀고 있는 사람을 만나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아홉시쯤에 나가서 보니, 또 다른 사람들이 장터에서 빈둥거리며 서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라며 일하도록 했습니다.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라며 일하도록 했습니다. 일을 모두 마친 후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똑같이 품삯을 치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인의 처사에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사람이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기를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시는군요.’라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선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마20:1-15) 일이 없어 놀고 있는 형편에 포도원 주인이 불러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선하신 주인을 인색하다며 악하게 보며 원망 불평하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각각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어느 정도를 맡기셨던 선하신 주인의 것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사람이 “악하고 게으르며 무익한 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인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인님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이 심고 뿌려 놓은 것을 거둬들이는 아주 인색한 분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서 주인님의 돈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주인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이 사람처럼 악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맡은 바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게으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2차 대전 말기에 독일군이 온 세계를 점령하고 있을 때를 중심으로 엮은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 속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운동자들이 감옥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도 없는 한 사람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처형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되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저항운동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돌아다니며 장사한 것뿐인데 왜 나를 죽이는가?” 라고 항의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저항운동자가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은 죽어 마땅하오.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참하게 피를 흘리며 싸우는데. 아무 일도 안했으니 그것이 큰 잘못이오.” 라고 대단히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라 민족이 위태한 데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이 커다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맡은 바 달란트는 주인의 뜻에 따라 주인을 위해 남기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각없이 오직 자기 삶에만 치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악하고 게으른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명한 영화 <빠삐용>은 빠삐용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게 되지만 13년간 10번의 탈옥을 기도하여 마침내 자유를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빠삐용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무기형을 선고받고 남미 프랑스령 가이아나의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빠삐용은 혹서와 독충,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리며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탈옥하나 실패하여 독방에 2년간 갇히게 됩니다. 그는 위조범 친구 드가와 함께 또 탈옥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빠삐용은 또다시 붙잡혀 이번에는 5년 동안 독방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도소장은 그들을 절대로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섬 ‘악마도’로 보내버립니다. 이곳에 영원히 유배되어있으면서도 빠삐용은 탈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무죄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빠삐용에게 인생을 낭비한 것이 바로 유죄라며 분명히 그의 유죄를 밝힙니다. 그점에선 빠삐용도 유죄를 시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면 결국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유익을 남기지 않았다면 하나님 앞에 무익한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006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달란트로 얼마를 남겼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얼마나 유익함이 되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 오실지라도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칭찬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동휘 목사 설교 중에서
기념책 (말 03:13-18)
사람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고 예술에 대한 정보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 사회를 규정하기를 정보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 사회는 정보에 대한 기록에 개인에게까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모든 것들이 정보화되어 있습니다. 한 개인의 모든 것들이 정보에 의해서 보존되고 정보에 의해서 밝혀지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개인의 모든 것들이 이미 정보화되어 있어서 정보에 의해서 그 사람에 대한 판단과 평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가령 예를 들면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간다면 무엇보다 비행기를 예약해야 합니다. 돈을 지불해야 하고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비행장에 가면 정보를 확인하고 비행기 표를 주고 외국에 가면 내 여권에 있는 정보를 확인하고 입국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정보가 없는 사람은 이미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개인 정보에 대한 기록이 없으면 실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개발된 이후 개인은 이미 하나의 정보 캡슐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심지어 물건 하나도 살 수 없는 시대가 곧 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물건을 살 때에 개인의 신용을 담고 있는 신용카드를 가지고 물건을 사게 됩니다. 이미 그 카드에는 내 경제 생활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정보에 의해서 내게 돈도 주고 물건도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개인의 정보가 더욱 많이 담겨지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삶이 정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개인의 정보에는 두 가지 정보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정보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정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신용 불량자에 대한 것입니다. 신용 불량자란 경제 생활에 관한 그 개인의 정보가 그 사람에게 불리한 상태를 말합니다. 반대로 신용이 좋은 사람은 카드 한 장으로 자동차도 살 수 있고 집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 사람의 삶은 자신의 신용을 담고 있는 정보에 의해서 좌우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개인에 대한 진정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들의 개인정보를 기록한 것을 기념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정보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육체에 대한 정보에 대한 말씀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셨다고 말씀하셨고 우리 영혼에 대한 정보에 대한 말씀은 우리의 생각도 아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물론 교회도 성도들의 개인 정보를 매우 초보적 수준이기는 하지마는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교회의 어떤 직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도 정보에 속한 것입니다. 그 교인은 어디에 살고 있느냐 하는 정도의 정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개인 정보는 어디까지나 참고적인 정보일 뿐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직분을 임명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런 믿음이 없으면 교회 정보란 실제로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진정한 실체는 하나님이 그에 대해서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개인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해서 그 사람은 평가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 사람은 신실한 사람이다 고 말씀하시면 그는 신실한 사람입니다. 인생은 결국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가지신 정보에 의해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계시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개인에 어떤 정보를 가지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말라기 3장에서는 하나님이 한 개인에 대한 어떤 정보를 귀히 취급하시는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관심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심하고 하나님이 중히 여기시지 않는 것에 집착하며 살 때가 많았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관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십니다.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실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 가졌던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술수도 아시고 남이 알지 못하는 간음도 아시고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한 사실도 아시고 계시고 고아와 과부를 압제한 일도 알고 계시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한 사실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를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하나님은 다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인간관계의 모든 부분도 하나님은 모든 정보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나로 인하여 남이 상처를 받는 일에 무심한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을 아프게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는 모든 인생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살아온 삶을 판단 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인생이 한 평생 동안 가졌던 인간관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는 이유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사람을 판단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고 반대로 사단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형제를 참소하는 자 곧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는 자가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에 대한 정보 가운데 인간 관계의 정보를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물질 생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십니다.
3:8-12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 생활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나를 시험하여 보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시험해 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 생활에 대해서 얼마나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한 평생 물질 생활을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십니다.
물질생활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물질 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의무가 바로 십일조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평생을 물질 생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며 특별히 헌금생활의 정보를 가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도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는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고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자신의 물질 생활의 이력서를 가계부를 통해서 적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가계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일년 행사를 알 수 있으려면 재정출납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 생활에 대한 정보는 우리 삶에 대한 정보와 같습니다. 주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주신 것에 대하여 반드시 점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물질이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왔든지 물질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물질 생활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을 물질 생활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계시는 주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반드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물질 생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는 것은 물질 생활을 보시고 거기에 합당한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언어 생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십니다.
3:13-15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에 대해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가 사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나니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는 모든 말을 다 듣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더라도 자신의 말로 자신이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정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모세가 한 말을 가지고 모세를 판단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정말 사악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말로 충성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람도 다른 사람에 대한 개인 정보를 마음에 담을 때 그 사람의 말을 가장 많이 정보로 담고 있습니다.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중요한 내 개인의 정보인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은혜스러운 말을 해야 합니다.
출처/조병우 목사 설교 중에서
세월을 아꼈는가? (에베소서 5:15~21)
하나님은 세월을 아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현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면서 살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세월을 아꼈는가? 이런 반성과 자성과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의미는 매우 함축적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시는가? 그 이유는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악한 것을 극복하는 길은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악은 시간을 헛되게 합니다. 악은 시간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 악과 맞서서 세월을 아낌으로써 죽은 시간을 살려내고 헛된 시간을 가치 있는 시간으로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로 악합니다. 금년 연말에도 각 신문에서 10대 뉴스를 발표했습니다. 국내 뉴스 가운데 밝은 뉴스는 2개 내지 3개 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7개 내지 8개는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는 뉴스입니다. 우리 국민을 근심시키는 뉴스입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악이 많습니다. 악한 환경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월을 아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계시방법을 여러 가지로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고, 지혜로운 분이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그 무한함과 의로움과 지혜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계시를 주시고 보이는 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시간의 의미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이도록 우리에게 주신 도구가 달력과 시계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달력이 없고 시계가 없다면 날짜를 알지 못할 것이고 시간을 계산할 수 없습니다. 생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만큼 달력과 시계는 인간에게 필요한 시간을 이해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달력과 시계로 인하여 성립되는 시간 개념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입니다. 우리는 지난 해 달력을 보면서 과거라고 해석을 합니다. 다가올 해의 달력을 보면서 미래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금년도 12월 31일을 보고 오늘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간의 본질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시간의 질이 다른 게 아닙니다. 똑같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왜 과거시간, 현재시간, 미래시간의 개념이 따로 있고 의미가 다른가?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을 위한 그런 구분인 것입니다. 천국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누가 선임자냐? 누가 천국에 먼저 왔느냐? 하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시간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천국에도 현재가 있습니다. 24장로와 앞서간 성도들, 천군천사들이 어린양 보좌 앞에서 경배와 찬양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경배와 찬양과는 다릅니다. 땅위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 우리의 찬양 속에는 불신앙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누리는 현재 이 시간 속에는 악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현재 시간에는 전혀 악이 없습니다. 천국 성도들의 경배는 완전한 경배입니다. 시간의 완성입니다. 그들의 찬양 속에는 불신앙이 없습니다. 천국 성도들의 경배 속에는 완전한 성령의 충만함과 완전한 영광스러운 예배이기 때문에 땅위에서 불신앙을 안고 드리는 우리의 예배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의미 없는 시간을 의미 있는 것으로 헛되이 생각하고 붙잡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계 신문에 칼럼을 하나 실었습니다. 제목은 '톱밥에 톱질하듯'입니다. 그런데 그 칼럼을 읽은 독자가 제게 격려의 말을 보내주었습니다. 톱밥에 톱질을 한다는 것은 과거에 매여 사는 것이라고 제가 해석을 했습니다. 톱질은 나무에 해야 됩니다. 톱밥은 이미 톱질을 했다는 과거입니다. 이 톱밥은 톱질을 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톱질은 나무에 해야 됩니다. 톱밥에 톱질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나무 한 토막 잘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흘러가버린 톱밥에다가 톱질하는 헛수고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흘러가 버린 과거에 집착하고 매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의미가 없는 일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의미 없는 것으로 폐기처분해 버리고 의미가 있는 것은 새롭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쁜 과거는 잊고 좋은 과거는 붙잡기 바랍니다. 톱밥에 톱질하는 헛된 인생들이 많습니다. 그 글을 읽은 독자도 자기 자신을 반성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1년 생활이 톱밥에만 톱질하는 자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영적인 개념에서도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영원한 현재를 말합니다. 내일 아끼겠다고 결심하지 말고 지난날 세월을 허송했다고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헛된 시간을 잊어버리고 미래의 기약 없는 결심도 집착 말고 오늘 세월을 아끼는 지혜를 발휘하기 바랍니다.
아낀다는 의미
지금도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대고 투병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환자들은 12월 31일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 오늘이 마지막 날이구나!’ 하는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내일이 1월 1일이구나! 아, 서해안에 가서, 동해안에 가서 일출을 보았으면…’ 그런 계획도 없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대고 중병을 앓는 그 사람들에게 12월 31일이 무슨 뜻이 있고 1월 1일이 무슨 뜻이 있습니까? 그 환자에게는 건강이 회복되어 퇴원하는 날이 최상의 날입니다. 다른 날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의 질을 가지고 보면 달력의 일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시계 속에 명시된 시간도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의 본질을 살아야지 시계에 맞추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계에 맞추는 그것은 기계입니다. 우리는 시계라는 이 기계를 초월하는 질을 누리고 살아야 됩니다. 달력을 뛰어넘는 시간의 질을 누리고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12월 31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1월 1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그날이 가장 좋은 날입니다. 1월 1일이 설이라고 좋은 게 아니고 출소하는 그날이 가장 좋은 날입니다. 우리에게 세월을 아낀다는 의미는 시간의 본질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세월을 아낀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뜻을 이해하는 것이 세월을 아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보내는 시간 속에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시간은 무효라는 것입니다. 앞에 보면,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인지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리석음을 극복해야 주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부정어법을 강조하는 기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에 보면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참말 열 마디를 해도 거짓말 한마디를 해버리면 그 참말 열 마디가 다 무너져 버립니다. 참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짓말 하는 습관부터 버리라는 것입니다. 거짓말부터 버리고 참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고, 빈궁한 자에게 구제하고 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구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까지 같이 하면 안 됩니다. 도적질하는 것을 버리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먼저 하지 말라고 명령을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우선되는 명령입니다. 십계명도 그렇습니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지 말라는 것부터 우리는 순종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라는 명령을 곧잘 하는데도 문제가 일어납니까? 그 속에 하지 말라는 것을 아직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도 앞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술 취함은 세상과 타협하고 죄에 오염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불신앙에 오염되어 있으면서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먼저 술 취함을 극복하고 그 다음에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삶은 나를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게 하고, 죄를 이기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가지게 합니다.
세 번째는 찬미와 감사와 복종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께 감사하며 피차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찬양과 감사와 복종,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여러분, 시간은 인간의 편에서는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다가 끝맺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간이 끝이 납니다. 인간 편에서는 다 끝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의 시간은 끝남이 없습니다. 중지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도 하나님의 시간은 그대로 연속이 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우리 편에서는 끝이지만,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영생으로 이어지는 시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를 통하여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끝났습니다. 그러나 노아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믿음의 후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바벨탑을 무너뜨린 것은 하나의 끝맺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새로운 구약의 선교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여러분, 끝났다고 좌절하지 말기 바랍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시간을 살리라
데일 카네기가 세일즈맨으로 생활할 때 도무지 실적을 올리지 못합니다. 세일즈맨은 실적을 못 올리면 퇴출됩니다. 그래서 다시 그는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절망을 안고 하염없이 해변을 거닐고 가는데, 어느 조그마한 가게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보니까 그 그림이 자기 심정을 잘 표현해 주는 그림이었습니다. 단순한 그림입니다. 바닷물이 다 빠져버린 모래밭에 낡고 작은 배 한 척이 그 모래에 얹혀 있는 처량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해변에 낡은 배 한 척이 모래 위에 얹혀 있는 그 처량한 모습을 보고 ‘저게 내 처지와 같구나!’ 그렇게 자꾸 마음이 끌려서 가까이 가게 되었는데, 그 그림 밑에 보니까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 제목은 ‘반드시 밀물 때는 온다’라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감동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구나! 이 배의 모습은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밀물이 밀려오면 이 배 밑에도 물이 찰 것이고, 물위에 떠서 배가 살아날 것이다’라는 새로운 감동을 보게 된 겁니다. 그는 자기의 생애에도 밀물 때가 온다는 소망을 붙잡게 됩니다. 그는 그 그림 한편에 그 밑에 있는 제목 한 마디에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시간으로는 끝난 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시간은 끝남이 없습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이 말의 헬라어는 ‘엑사고라죠’입니다. 이 말 뜻은 아주 심오합니다. 이 말은 건져 올려 살린다는 뜻입니다. 지금 떠내려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면 죽습니다. 그런데 건져 올려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말은 죽어가는 시간을 살려낸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잘못 관리하면 죽은 시간이 됩니다. 이 죽은 시간, 하나님과 단절된 시간, 범죄한 시간, 불신앙에 처해있는 그 시간을 살려내는 것을 가리켜서 세월을 아낀다는 것입니다. 올해도 분명히 1년 365일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주님 앞에서 의미 있게 산 시간은 그리 많지 못합니다. 그 외 시간은 다 우리가 죽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간을 죽이는 것이 불신앙이고 불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이 주신 시간을 우리는 살려야 됩니다. 그 시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시간의 조정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시간의 통치자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살 뿐이고 하나님이 정한 시간의 스케줄 안에서 복종할 뿐입니다.
곡식은 1년을 생각하고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내기를 해서 벼를 거두는 것이 몇 달 사이에 됩니다. 그러니까 벼농사가 몇 달 만에 되는 게 아닙니다. 벼농사도 알고 보면 1년 농사입니다. 타작을 할 때부터 볍씨를 미리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감자를 거둘 때부터 씨감자를 구분합니다. 1년 스케줄이 농사의 스케줄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스케줄입니다. 나무는 10년을 생각하고 심어야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서 재목이 되려면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속성재목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의 생리적 스케줄도 하나님이 정한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아기를 석 달, 넉 달 만에 못 낳습니다. 10개월간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의 스케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시간의 스케줄 앞에 복종할 줄 알아야 힙니다. 복종이 바로 지혜요 신앙이요 의로움입니다. 사람은 100년을 생각하고 키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재는 키워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사는데, 따지고 보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의 혜택을 우리가 다 받고 사는 것입니다. 100년 전에 좋은 일 했던 사람, 100년 전에 깨달았던 사람, 100년 전에 희생했던 그 사람들 덕택으로 오늘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해방 후 우리의 정치사를 보아도 살아있는 대통령의 역할도 크지만, 사실은 죽은 대통령의 역할이 더 큰 것입니다. 그 사람들 은공으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100년 대계입니다. 성급하게 교육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나무는 10년 대계입니다. 농사는 1년 대계입니다. 하나님의 스케줄에 복종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부질없이 하나님의 시간에 대항을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주의 뜻을 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늘도 부질없이 시간을 역행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곧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니라.” 다가오는 한 해도 인간의 시각으로 크게 기대를 하지 말기 바랍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 속에는 악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악이 항상 공존합니다. 그러므로 악이 없는 세상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악하고 때는 악하지만 때가 악하기 때문에 불리한 게 아니라 때가 악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세월을 아낄 줄 알면 더 유리하다는 뜻입니다. 밤이 캄캄할수록 하늘의 별빛이 더욱 빛납니다. 우리의 때가 악하고 환경이 악하다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약화되고, 의미가 약화되고 믿음으로 사는 일이 불리한 게 아니라 세월을 아끼는 지혜를 가지면 더 우리에게 축복과 은총의 시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시작하자
금년 세모에 우리 모두가 느꼈듯이 모두 힘들어 합니다. 지금 점포에서 장사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세모에는 우리 시민들이 모두가 힘들어 합니다. 경기가 많이 침체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그런데 힘들다고 하는 이것이 우리가 더 나은 환경, 분위기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지만, 금년 세모에는 우리 국민들이 많이 피곤한 것 같습니다. 금년 국내 뉴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톱뉴스가 된 게 북한 핵실험 문제입니다. 이것을 단순한 정치, 안보, 군사적인 문제 뿐 아니라 북한 핵실험이 우리들에게 준 심리적인 불안감, 압박, 좌절감, 북한 핵을 대처하는 우리나라에 대한 온갖 감정들이 우리를 너무 슬프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사회에 몰아쳤던 이 부동산 광풍으로 떼돈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좌절감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심리적인 분위기도 예년에 없이 금년 연말에 우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그것을 초월합니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스트레스가 있고, 아무리 우리에게 불리한 환경이 있을지라도 성경이 이미 말하기를 때가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고, 환경이 불리한 그것을 붙잡고 절망하고 힘을 빼지 말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이 주님의 말씀 앞에 바로 응답하고, 적응하고, 세월을 아끼는 지혜를 발휘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세월을 죽이는 불신앙에서, 세월을 아끼는 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채널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써서 이 지구촌에 모든 백성들 앞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분 책 가운데 이런 글이 한 줄 나옵니다. ‘고통의 채널을 빨리 바꿔라.’ TV를 보다가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이 나오면 불평하지 말고 채널을 빨리 바꾸라고 합니다. 화면을 보고 절망하고 욕 할 필요가 없습니다. 채널만 바꿔 버리면 됩니다. 오늘 우리 삶이 하나님과 어긋나 있는 삶의 채널을 하나님께로 바꾸기 바랍니다. 우리의 채널을 신앙의 채널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불신앙의 채널을 그대로 틀어놓고는 아무리 고민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개선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채널을 바꾸세요. 10년 전에 고정시켜 놓은 채널을 그냥 두고 무슨 은혜를 구하며 축복을 구합니까? 채널을 하나님께로 바꾸어야 됩니다. “세월을 아끼라!” 이 말씀을 안고 2007년도를 복되게 살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끝까지 함께 하리라 (마 28:20)
서론
끝이라 하면 시작의 종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아침이 시작이라면 저녁이 끝이고 한 달이 1일이 시작이라면 31일이 끝이며 1년이 1얼이 시작이라면 12월이 끝이며 인생이 태어남이 시작이라면 죽음으로 끝을 마감하는 것이며 주님이 세상에 오심이 시작이라면 주님의 재림이 세상이 끝나는 것입니다. 재림은 접어두고라도 금년 1월부터 12월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고 이 달도 마무리를 잘해야 할 것입니다. 속담에 "다 먹은 죽에 코 빠뜨린다"는 말이 있는데 금년도 이제 마지막 달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마무리를 잘해해서 한 해도 은혜가운데 보냈음을 감사하는 이 달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여기까지 도우심을 감사합시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감사이고 그리고 계속적인 은혜 공급의 간절한 요청이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만 계속 머물겠다는 전적인 헌신의 각오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라는 말은 처음부터 현재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금년 1월 1일부터 12월 3일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이라고 속단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분명히 도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2.남은 생은 맡기자는 것입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였습니다. 2006년도 1월 1일부터 12월 3일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남은 날들도 도와주실 줄로 믿고 그분에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하였습니다(막 9:29).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비결은 첫째도 기도요 둘째도 기조며 셋째도 기도인 것입니다. 즉 기도만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들의 남은 날들도 우리가 알 수 없고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도 없으니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 맡기고 계속해서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린다면 앞날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3.도와주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
본문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음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하였습니다(롬 3:4 시 100:5).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히 6:18). 그러므로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내편이시고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기 때문에 앞날을 위하여 염려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년도 마지막 달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금년 한해도 무사히 도우실 줄로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여 한 해를 무사히 보내는 좋은 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금년도 12월 3일까지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남은 일정도 주께 맡기고 도와주실 줄로 믿고 감사하며 기도하여 한 해를 무사히 보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루 아니 한 시간도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무사할 수 없음을 알고 수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윤근 목사 설교 중에서
마지막 날에 (요한복음 7:37 ~ 39)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7-39
2006년 마지막 날,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이고 어떻게 보면 멀고 먼 시간인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금년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해진 한 해였습니다. 홍콩의 한 영자신문은 올해 아시아 최악의 인물로 김정일을, 최고의 인물로 반기문 UN사무총장을 꼽았습니다. 대단한 나라지요.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어요. 세계를 놀라게 한 귀한 해입니다.
또 우리 국민은 대통령 때문에 수고를 많이 했어요. 그분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제가 생각해 봤어요. 제가 아이들을 키울 때 다섯 식구 돌보느라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참 힘들었습니다. 한 교회를 인도하고 섬기기도 그리 쉽지 않은데 대통령은 각각 독특한 자기주장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나라를 다스리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앞으로 임기가 1년 2개월 남았는데 우리가 대통령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1년도 긴데 1년 2개월은 더 길잖아요. 여러분이 좋아하던지 안 좋아하던지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대통령은 한 명밖에 없으니 그 분이 앞으로 최선을 다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도록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아니면 누가 기도를 합니까? 우리나라를 잘 되게 하기 위해 기도할 사람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분을 통해서 앞으로 1년 2개월 동안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고 전진하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가끔 불평하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 분이 편하게 일을 잘 하도록 해서 화를 안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참 힘든 한 해였지만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금년에는 3600억불의 수출을 했습니다. 한국역사상 들어 보지도 못한 엄청난 수출을 했습니다. 국가가 부강해지는 길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초막절 마지막 날, 아주 중요한 날에 행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앞에 모인 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초막절은 7일 동안 축제를 하는 날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모든 유대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야 됩니다. 먹을 것도 가져가는데 끓여서 먹지 못하니까 구운 것과 마른 빵들을 조금씩 가져가고 일주일 동안 살 초막집을 지을 나뭇잎도 가져가야 합니다. 집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야외에다 초막을 만들어 놓고 머리 넣고 자는 척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셔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할 때 제대로 잘 곳이나 있었겠습니까? 저녁이 되면 나뭇잎이나 풀 같은 것을 뽑아 자리를 만들어 자곤 했어요. 초막절은 그 때를 상기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이 집의 지붕은 언젠가는 없어질 지붕이요 우리의 진정한 지붕은 하나님이시다.”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고 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의 지붕이요 이 땅의 초막들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초막을 만들어 자고, 먹을 것이라고는 집에서 가져온 마른 빵 덩어리를 뜯어서 가족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예루살렘 밑에 있는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떠다가 한 모금씩 먹었으니 일주일 동안 배도 고프고 자지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팔레스타인 지역은 밤에는 차고 낮에는 뜨겁습니다. 40년 동안의 광야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만 몸은 참 피곤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그림을 보면 계단이 여러 개 있습니다. 뒤쪽에는 성전 뜰 안이 있고 양 밑에는 긴 계단이 쭉 있고 계단 밑으로 사람들이 모여섭니다. 마치 지금 여러분의 모습과 비슷해요. 명절 마지막 날, 거기서 예수님께서 집에 돌아가기 전, 배고프고 목마르고 피곤한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일주일동안 거기서 같이 지내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보니 그들은 몸이 피곤할 뿐 아니라 인생이 힘들어요.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배고픈 자, 나에게 와서 내가 주는 양식을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습니다. 지금 저는 소곤소곤 말해도 여러분이 이 마이크를 통해 잘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마이크로 이야기를 해도 제가 목이 쉬어서 감당을 못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이크도 없는 광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을 해야 하니까 힘과 열정을 다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구든지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 와서 마셔라. 마지막 날, 길을 떠나면서 나에게 와서 내가 주는 떡을 먹고 내가 주는 물을 마셔야 인생에 목이 마르지 않다.”
인생은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아침 일찍 떠나서 점심때까지 4시간을 걸어서 사마리아에 도착하셨어요. 얼마나 피곤하고 목이 마르시겠어요. 그래서 그 여인에게 “내가 목이 마르니 물 한 컵만 주시오” 하니까 “당신 유대인이 언제는 우리를 이상하게 보더니 이제 와서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약 내가 누군지 알고 또 내가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나를 보고 물을 달라고 했을 텐데. 이 우물물을 퍼서 마시는 자는 또 목이 마르다. 매일 와야 되고 매일 마셔야 하나 늘 목이 마르다. 그런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이 샘에 와서 이 샘물을 마시라. 생명의 물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그게 무슨 물입니까? 저에게 그 물 좀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지난 365일을 돌이켜 보면 여러분의 인생은 어땠습니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목이 말랐습니까? 아니면 마음껏 먹었고 마음껏 마셨으며 인생이 행복하고 편안하고 건강하고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생은 목이 마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사업을 하십니다. 작은 가게도 있을 것이고 큰 공장, 대기업도 있을 것입니다. 사업의 물을 1년 동안 마셨습니다. 참 힘드셨지요. 제가 종종 사업하시는 분들을 대하면 1년 내내 “목사님, 요즘 참 힘듭니다.” 하시더라고요. 힘들지요. 우리가 사업하는 이 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격려해야 됩니다.
사실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사업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고 판매할 상품이 있었습니다. 최소한 5명, 10명, 또는 100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사람들이 기업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업인들을 나라가 소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기업인이 없으면 노동할 곳, 직장이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 식당을 해야 식당 종업원 한 사람이 생깁니다. 공장을 시작해야 공장 직원 한 사람을 고용하지요. 무역업을 시작해야 그 일을 할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타이프 치는 사람은 집에서 혼자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일할 곳이 있어야 됩니다. 공헌할 곳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은 기업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과 그냥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차이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냥 직장생활하고 싶어 하지 기업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아침 8시에 출근했다가 저녁 5시에 퇴근해서 집에 와서 TV보고 싶지요. 집에까지 와서 ‘내일 우리 직원들 월급을 어떻게 줄까?’ 고민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하는 사람들을 낙심시키면 안 돼요.
정부도 기업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자신 있게 일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고 마음껏 창의적으로 기업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되지요. 기업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필요한 서류가 너무 많아서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지쳐서 그만 둡니다. 해보지도 못하고 힘들어서 그만 두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국민들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마음껏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됩니다. 제가 대통령은 아니지만,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격려를 해 줘야 되요. 그들이 열심히 직장에 충실할 때 직장이 더 좋아지고 더 많은 상품이 나오고 나라가 잘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려니 참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제가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듣는데 모두들 참 힘이 들어요. 돈을 벌려니 목이 말라요.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요. 제가 미국에서 30년 있다가 처음 한국에 와서 큰 회사에 가봤습니다. 그 때 저는 ‘야, 한국 사람들 직장 생활하느라고 참 고생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미국에 갔으니까 한국 실정을 잘 몰랐지요. 미국은 참 자유스럽잖아요. 서로 관계도 자유스럽지요. 제가 젊었을 때 어느 연세 든 분을 “핀델 박사님!”하고 불렀는데 그 분이 “그냥 존이라고 불러요”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우리는 어른을 그렇게 불러야 됩니다.” 했더니 “그러지 말게. 자네가 나를 싫어하면 핀델 박사님이라고 부르게”하셨어요. “아니요.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존이라고 부르게.” 이렇게 관계가 편안한 곳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오니까 한국은 전부 다 “차렷”이에요. 제가 손님으로 간 직장에서도 모두들 제 앞에서도 차렷이에요. ‘왜 이렇게 힘들게 그러나. 군사정부가 30년을 지배하더니 한국을 군대로 만들어 놓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윗사람, 아랫사람이 서로 힘들고, 나이가 조금 적다고, 계급이 하나 밑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고 그런 것을 보고 한국 남자들 고생 많이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직장에 나가야지요. 그래야 먹고 살잖아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목이 말라요. 그것이 인생이에요.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나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먹고 살기 위해서 일들을 하는데 그 일이라는 것이 인생에 큰 만족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해야 되니까 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어릴 때는 시키는 대로 하고, 어른이 되면 해야 하니까 하고, 은퇴한 후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하지만 은퇴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잖아요. 인생은 목이 말라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얼마나 목이 마릅니까? 학생들이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조금 전에도 어느 유학생이 제게 와서 공부가 힘들다고 합니다. 안 힘든 공부가 있습니까? 저도 오래 공부해 봤죠. 힘들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학자들이 배출됩니다. 제가 어느 학자가 발표하는 것을 듣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자기 전공분야를 정연하게 조직해서 그 지식을 정연하게 발표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는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꼭 있어야겠구나! 학자들이 참 귀하다. 학자가 소수는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책을 썼는데 주위에서 표절했다고 합니다. 자기 학생과 같이 써서 공동저자를 했는데 표절했다고 지금 어느 총장님 한분이 애를 먹고 있지요. 전에도 교육부 장관하려다 표절했다고 그만둔 적이 있었어요. 다들 목이 말라요. 총장하기도, 교수하기도 힘들어요. 인생이 목이 말라요. 365일 동안 여러분이 여기까지 온 것, 고생 많이 하셨어요. 사는 게 그렇지요.
가정도 목이 마릅니다. 인생이 목이 마르니 집에 가서라도 목이 시원하면 좋겠는데 더 말라요. 여러분 가운데에도 아내와 남편의 목을 더 마르게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자식을 낳았더니 목이 말라요. 힘이 듭니다. 이 세상이 주는 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이 마릅니다. ‘이 물을 마시면 내 인생의 목이 축여지겠지! 해갈이 되겠지! 배가 부르겠지!’ 기대는 하는데 기대처럼 그렇게 시원하진 않아요.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목이 마르니까 세상의 쾌락을 추구해 봅니다. ‘모르겠다. 멋대로 살아보자’하고 나갔더니 집안에 문제만 생기고 더 큰 고통과 죄의식이 생기고 방황하게 됩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자식한테까지 말을 듣습니다. 어느 사람은 자식이 “아버지, 회개하세요!” 했답니다. 아들한테 야단맞고 나니까 인생이 너무 기가 막혀요. 정신없이 쾌락을 추구하면서 가정 밖에 나가서 인생의 목을 좀 축여보겠다고 발버둥을 쳤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더 목이 말라요. 더 힘들어요. 자기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온 가족 모두 목마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365일 동안, 2006년 오늘까지 오느라고 수고하셨다고 그런 것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육신도 연약해져서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픕니다. 오늘 아침에도 한 분이 기도해 달라고 하는데 기도 제목을 말하지 않아서 그저 그 분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고 나니까 “몸속에 혹이 생겨서 내일 아침에 수술하러 갑니다.” 하며 눈물을 쫙 흘려요. 인생은 너무 목이 마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그 사람들을 볼 때 “누구든지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목을 축일 수 있지 이 땅 어디를 돌아다녀도 목을 축일 수가 없습니다. 잠시 물을 마셔 보지만 금방 목이 마릅니다.
여러분, 연말을 맞이해서 뒤돌아본 지난 1년 동안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어디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목을 축이려고 노력했습니까? 올 한 해 목이 말랐다면 해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주님과 여러분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모두 다 예수님께로 오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오십시오. 한 발정도 가까이 오세요. 인생의 마지막 목을 축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다가 올 때, 가까이 오면 올수록 여러분의 인생의 목은 축여질 것입니다. “내게로 와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8?39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여러분의 죄를 완전히 씻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순간에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다 덮어 주셔서 죄에 의해서 목마른 인생, 죄 때문에 애타는 인생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내 가슴속, 여러분의 가슴속,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성령이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 오늘 2006년 마지막 날이 가기 전에 마음의 문을 열고 여러분 안에서 영원히 솟아날 샘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예수를 믿었지만 세상의 물로, 세상의 것들로 배를 채워보려는 탕자처럼 살면서 아버지와 멀어진 사람들이 있으면 아버지께로 오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여러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참된 쉼이 있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더 배가 고프고 멀리 하면 멀리 할수록 더 목이 마른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 주는 돼지먹이, 쥐엄열매로 내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가 없고 배고픔을 채울 수가 없어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성령 충만한 내 가슴 속의 은총,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이 지나고 새해가 올 때는 예수님과 함께 거닐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그 떡을 먹고 생수를 마셔서 다음 해는 참 만족스러운 한 해가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상복 목사 설교 중에서
결산하는 인생 (마태복음 25:14~30)
오늘은 2006년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월이 느리게 간다고 말하지 않고 빨리 간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 속에는 아쉬움이 있다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세월만 다 갔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그런 말들을 합니다. 얼마 전에는 결혼 주례를 했는데 그 신랑의 아버지도 제가 주례를 했었습니다. 저는 신랑에게 말했습니다. "네 아들, 딸도 또 내가 주례할지 모르니 빨리 아기 낳아라." 제가 21살 때 목회를 시작했는데 목사님이 안 계신 교회에 제가 담임 교역자로 일하게 되었을 때 다른 흠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항상 너무 어리다는 말을 하고, 또 공중 기도를 하면 항상 "오늘도 어린 종을 단 위에 세우셨사오니"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이제 앞으로 제가 들을 소리는 뻔합니다. "오늘도 노종을 단 위에 세우셨사오니" 그 소리는 더 듣기 싫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를 안 시킵니다. 원로 목사님께서 제 아들 결혼 주례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경직 목사님의 후임자가 되었을 때 한경직 목사님이 내 아들의 주례를 하셨는데 오늘은 내가 내 후임자 이필재 목사의 아들을 주례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빨리 갔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설교 중 비교적 긴 문장을 기록한 비중이 큰 오늘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라는 금덩어리를 주었다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달란트라는 것은 화폐 단위로서 한 달란트만 하더라도 그 자본은 그 사회에서 넉넉한 자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부흥회를 하셨고 사람들이 1만 명이 모여서 남자만 5천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너무 오래 부흥회를 하셔서 해가 질 때까지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좀 짜증이 났습니다. 배도 고프고 갈 길도 먼데 설교만 계속하시니까 "이제 그만 돌려보내소서. 해가 저물어 가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먹을 것을 좀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는 200데나리온이 2만 명의 한 끼 식사분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 끼에 5천 원씩만 계산을 하더라도 200데나리온은 5천만 원이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신학자들이 보통 6천 데나리온이라고 계산을 하니까 넉넉한 자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넉넉한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돈으로만 환산을 지 않더라도, 시간! 시간은 곧 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너에게 70~100년의 시간을 넉넉히 주었다." 건강! 활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혜! 문명과 문화의 모든 기업 성취가 다 생각에서 나오잖아요?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성공합니다. 물질! "세계 모든 물질을 다 너희에게 주었다. 넉넉히 주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인간 창조의 순서를 보면 천지 창조가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넉넉히, 충분히 살 수 있는 행복의 기초를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인간을 만드셔서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노라. 넉넉하다.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괜히 약삭빠른 생각을 해서 '땅덩어리는 제한되어 있고 사람이 계속 많아지면 나중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그래서 전쟁하고 산아제한하고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원고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믿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금보다 10배 인구가 많아져도 넉넉히, 더 잘 먹고 살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관리를 잘 못해서 재앙을 불러올 뿐이지 '자원고갈'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인구가 많아지고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더 잘 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관리를 더 잘 하라는 뜻이 오늘 성경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창조물에 비해서 최고의 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이미 주어졌다." 그게 인간이 받은 축복입니다. 다른 것들은 에덴동산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향상하고 발전하는 창조적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인간에게는 삶의 자율권이라는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고 나서 멀리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이 말은 주인이 주어진 권한에 대해서 참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율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각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직업 선택!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 선택! 내 마음입니다. 생활의 근거지 선택! 이민을 가도 좋고 와도 좋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주님은 참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율권 축복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율권 축복은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심한 책망과 저주 선언이 주어졌습니다. 이유는 주인이 준 자율권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 진리의 특수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종교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안 해도 그만, 해도 그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인들에게 좀 극성스럽다는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와 하나님의 축복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의무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가다가 우리 교육관에 현수막이 붙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시뻘겋고 퍼런 글씨로 눈에 잘 띄게 색깔 조화를 해서 큰 글씨로 눈에 잘 띄도록 "당신은 오늘 밤이라도 죽으면 천국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말부터가 기분을 침울하지 않습니까? 멀쩡한 사람에게 오늘 밤 죽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질문으로 여기며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여기 분당선 지하철 타고 왔다 갔다 할 때 가끔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전도하시는 나이가 70은 되신 듯 한 노인으로, 그분은 그 지하철 안에서 전도를 하시는데 사람들에게도 환영을 못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지하철 타고 서울을 가는데 그분이 와서 막 전도를 합니다. 옆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이구~ 재수 없네! 저거 또 만났네!" 그러십니다. 그런데 이 전도자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말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란 말이야, 어? 알았지? 안 믿으면 지옥 가! 불교 믿는 거 다 쓸데없어! 그런 거 하지 마! 예수 믿고 천당 가란 말이야, 알았어? 내 잘 알아들어야 돼! 어?" 그러면서 막 책망하듯 하고 "난 또 딴 데 간다고!" 그러면서 떠나가시더라고요. 방법은 좀 세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것을 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잘 한다고 누가 칭찬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십니다. 핀잔과 꾸중을 받으면서도 말입니다. 그 분 마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의 자율권 행사로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그걸 왜 하셨습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성공 개념! 주신 것만큼 일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온 세계가 TV로 반드시 방영해 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마다 하는 것으로 저는 미국에서 10번도 더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항상 합니다. 지난 24일 날 했지요? 보신 분들 계실 것입니다. 세계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는 거의 다 합니다. 반드시 23일이나 24일 저녁에 해줍니다. 바로 스크루지 영감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영화가 세계 명작 영화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해마다 계속 보여줍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받은 것은 많은데 절대로 주지 않는 대표적 인물을 조명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어떤 계기와 영적 느낌으로 자기 모습의 미래를 보게 된 후에 변화되어 영국에서 손꼽히는 자선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 하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달란트를 사용해서 주인에게 기쁨을 결산하시도록 하는 노력을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충성보다도 더 중요한 말이 충성 앞에 있는 말입니다. "착하고"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충성한다는 이름 아래 불필요한 충성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착하게 해야 됩니다. 초대 교회 최초로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집사 선택할 때 선택 기준이 세 가지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공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 듣는 사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충성한다고 혼자 떠드는데 저 사람 때문에 문제야!"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착한 기초에서 해야 합니다. 깡패같이 한다든지 사기꾼 같이 하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때가 있고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때에는 쓰임을 받는데 필요한 힘을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준 서구 사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똑같습니다. 사회가, 교회가 먼저 풍성해 집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을 하고 선교를 많이 하면 그 일을 계속 하라고 하나님이 그 사회와 그 국가, 민족을 튼튼하게 해주셨습니다. 유럽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그룹을 청교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이민으로 미국이 이루어졌습니다. 1774년이 독립이라면 역사가 230년 밖에 안 되었는데 오늘의 미국은 합중국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 땅에 교회를 먼저 번영시켰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추수감사절 예배가 세계 명절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라고 그 사회를 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서구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를 생각해 보면 역사가 짧습니다. 개신교회는 120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계 교회 역사에 유래 없는 성장을 했습니다. 아울러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고 세계 선교를 하니까 나라도, 국민도 점점 더 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주고 계십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세계 평화의 가장 중요한 자리인 유엔의 사무총장이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계산을 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세계 평화의 가장 중심의 자리에 섰지 않습니까? 미국 사람들에게 대통령보다도 훨씬 더 인기 있게 취급하는 사람이 누구군가 하면, 미식축구 선수의 MVP 상을 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미국 사회에서 일 년 중에 최고로 인기 있는 사람인데, 한국 여인의 아들 하인즈 워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시아 수영에서 최우수 MVP가 우리 박태환입니다. 한국 사람이 근처에도 못 가던 피겨스케이팅 부분에서 김연아가 우승하였습니다. 옛날에는 꿈도 못 꾸던 자리입니다. 세계 수준의 인물들이 앞으로 계속 나올 테니 두고 보십시오. 미국에서 가장 관심인 한국의 소녀들의 미국 골프계 장악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도 제가 아쉬운 것은 황우석교수입니다. 그분만 잘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미래학자 사세휘가 "대한민국 2025년이면 10대 강국이 된다." 허만칸은 "아니다. 2010년이다." 엘빈토플러 박사는 "벌써 된 것이다. 한국은 10대 강국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먼저 번성하게 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힘을 주신 것이 서구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지금 한국에 그런 것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금년 일 년 동안 갈보리교회가 목표한 세계 선교사 파송 건은 목표를 넘어섰습니다. 오늘 예배 마치고 나가시다가 책 한 권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 "2006 갈보리 미션" 해마다 12월 달에 나옵니다. 일 년 동안 했던 사역의 현장사진들이 사진첩으로 아주 보기 좋게 나와 있으니까 이 책을 하나씩 가져가셔서 보세요. 그리고 '나는 이 선교에 어떻게 일 년 동안 동참했는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많은 선교사 가운데 기도의 목표로 내가 한 명은 책임지자!' 그런 식으로 해보세요. 이제 2006년부터 파송했으니까 해마다 이 책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선교지 교회 건축은 미얀마에 하나, 필리핀에 하나, 말레이시아에 둘이 완성되었고, 지금 계속 추진 중에 있는 교회 건축은 도미니카에 하나, 말레이시아에 둘, 아프리카에 다섯 곳입니다. 내년 2007년도에 완성이 될 것입니다. 각 봉사회와 선교회는 일 년 내내 교도소, 복지원 등을 찾아서 봉사해 왔고, 착한 사마리아인주일을 열네 번 지켜서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하였습니다. 가끔 TV에서 어느 단체에서 사회 봉사한 것, 장애인들에게 가서 목욕시켜주고, 밥 먹여주고 이런 일을 했다고 칭찬하는 프로그램이 나옵니다. 지난주에도 나왔습니다. 그런 일을 우리 갈보리교회 선교회는 일 년 내내, 10년 내내 항상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TV에 한 번도 안 나옵니다. 우리는 숨어서, 남모르게, 그러나 누구보다도 많이, 가장 그늘진 곳에서 일 년 내내 합니다. 경비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금년에도 300가정이 갈보리교회를 찾아와 등록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선교에 동참하신 교우님들, 끊임없이 봉사해 오신 사역자들, 청지기 모두 감사를 전합니다. 어린이 기독교 교육을 목적으로 어린이집을 개원했는데 두 주일 전에 분당 구청에 담당 직원과 우리 관계자들이 함께 만나서 마지막 도장 찍는 자리에서 담당직원들은 갈보리교회 어린이집이 성남시에 있는 모든 어린이집과 유치원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된 다섯 곳 중에 하나라고 하시며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그것보다도 우리는 교사를 완벽하게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교사를 100%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세계 문화권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 어린이집을 어려서부터 운영함으로써 이곳을 거쳐나간 어린이들이 어릴 때의 기억이 평생 신앙적으로, 또는 세계 사역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게 교육시키려고 모든 준비를 다 끝냈습니다. 우리는 청년신앙공동체와 교육부 신앙교육에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며 노년층이 소외되지 않도록 "늘푸른집" 오픈을 열심히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열매는 몇 종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맨 앞에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 뒤에서 계속 뿌릴 씨를 보내주는 사람, 그리고 맨 나중에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면 언젠가는 반드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조직을 실천신학에서는 "V 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V formation"의 원리는 어느 공동체나 다 똑같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예를 들 수도 있고, 국가, 사회, 작게는 여선교회, 남선교회 등 조그만 공동체도 모두 "V formation"에 해당됩니다. "V formation"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가을철에 간혹 눈에 띄는 아름다운 광경이 있습니다. 가을 하늘에 기러기들이 멀리 하늘을 날아갑니다. 그런데 날아갈 때는 반드시 "V"자로 줄을 지어 날아갑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V"자로 가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그렇게 날아가야 장거리를 무난히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일 앞에 가는 기러기가 제일 힘듭니다. 뒤쪽으로 갈수록 힘이 점점 적게 들어서 맨 앞에 있는 기러기와 맨 뒤에 있는 기러기는 71%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가장 강한 기러기를 앞에 세우고 가장 약한 기러기를 맨 뒤에 세워서 줄을 지어 갑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하나가 훼방을 놔서 줄을 서지 않고 자기 맘대로 열을 이탈하여 왔다 갔다 하면서 진형을 흐트러뜨리고 다른 기러기를 툭툭 치면 전체가 다 못갑니다. 일단 그들은 모두 땅에 내립니다. 그리고 그 훼방꾼 기러기 하나를 집중적 공격을 해서 날지 못하도록 만들고 다시 날아갑니다. 이처럼 훼방꾼이 있단 말입니다. 앞서가는 교회는 힘듭니다. 이 기러기들이 날아가면서 소리를 냅니다. "웩! 웩!"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앞에 가는 기러기보고 조금 더 빨리 가라고 소리 내는 것입니다. 앞서 가는 사람은 힘듭니다. 앞서 가는 교회 힘듭니다. 그러나 아름답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며 열심히 합니다. 가을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를 보면서 내가 복음의 열매를 위해 어떻게 동참하여 지금 저 장거리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는가? 뿌리고 있는 자는 언젠가 기쁨의 단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 일 년 동안 모든 나쁜 추억들은 다 지워버리시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시면서 새해가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일 년 동안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나름대로 열심히 다 마치고 오늘 즐거운 결산 할 수 있게 된 것을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수고한 모든 청지기들에게 복을 주시고 새해가 2006년도 보다 더 큰 희망의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마다 건강 지켜주시고 지혜를 지켜주시며 식탁이 풍요롭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관심 있게 사랑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파송한 모든 선교사들의 현지 사역을 주님이 지켜주시옵소서. 내년에는 더 큰 일을 저희들에게 맡겨주시고 실천할 수 있는 새해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출처/이필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