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귓불을 때리는 겨울입니다. 이런 날은 따끈한 호박죽으로 몸을 덥히면 참 좋겠지요. 여러분은 단호박죽을 좋아하나요? 맷돌처럼 넓적한 청둥호박죽을 좋아하나요?
난 우유를 넣고 수프처럼 먹을 때는 단호박죽, 강낭콩이나 찹쌀경단까지 넣을 때는 청둥호박죽이 더 맛있더군요.
호박은 우리나라에 언제 전해졌는지 정확한 시기를 모른대요. 18세기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호박을 이렇게 소개해요.
채소 중에 호과(胡瓜)라는 것이 있는데 색깔은 푸른 빛에 생긴 모양은 둥글고 익으면 색이 누렇게 바뀐다. 큰 것은 길이가 한 자쯤 되는데 잎은 박처럼 생겼고 꽃은 누런데 맛은 약간 달큰하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없었지만 지금은 농가와 절에서 주로 심는다.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이다. 사대부 집에서도 더러 심기도 한다.
또 ‘호박이 전해진 지 거의 1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 호남 지방까지 퍼지지 못했다.’는 기록도 남겼어요. 이로 보아, 호박은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졌을 무렵에는 양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나 봐요. 평민도 호박은 즐겨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절간에서 중이나 먹는 채소’라는 뜻에서 승소(僧蔬)라고 했다는군요.
박지숙의 역사동화 <격쟁을 울려라! 조선을 바꾼 아이들>에도 호박이 나옵니다. 사실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지요. 홍이를 상징하는 음식이거든요.
그날 밤, 홍이는 느긋이 누웠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나니 세상 근심이 사라진 듯싶었다.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살았으면 좋겠다.’
홍이는 문득 호박죽을 먹을 때에 느꼈던 아쉬움이 떠올랐다. 덕순 어멈이 가져온 죽은 너무 묽었다. 양을 불리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찹쌀가루나 찹쌀경단을 넣으면 한결 풍부하고 깊이 있는 맛이 날 거야. 허기를 채워줄 든든한 식사로도 충분할 걸? 아, 콩을 넣으면 영양이 풍부하고 고소한 풍미와 씹는 재미도 있겠다!’
홍이는 새로운 음식 세계에 들어선 맛의 탐험가가 되어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호박으로 죽을 쑤었으니 색다른 음식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래, 떡도 괜찮으리. 흠, 호박꽃전, 호박국, 호박조림, 호박엿, 호박식혜……. 호박은 달고 순해서 어떤 음식이라도 다 어울릴 거야.’
그뿐이 아니었다. 호박은 구황식품으로도 한몫 톡톡히 할 듯싶었다.
홍이가 맛의 탐험가, 음식의 모험가가 되어 상상을 펼치는 이곳은 관아 안의 감옥입니다. 탐관오리에 맞선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지요. 실학자 정약용이 ‘가장 끔찍한 세상의 지옥’이라고 일컬은 감옥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가장 하찮은 호박으로 죽 잔치를 벌입니다. 이로써 호박죽은 나눔의 음식이 된 것이지요. 사람들이 시린 가슴을 따사로이 채우는 사랑의 음식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더 나아가 호박은 백성을 살리는 음식, 구황식품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어떻게 쓰고,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우주의 모든 존재는 새롭게 탄생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2020년의 마지막 달이군요. 이 한 해를 몽땅 잃어버린 것 같아 슬픕니다. 감염병이 멈출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는데 겨울 추위까지 겹치니, 몸과 마음이 더욱 시리군요.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살았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꾸 주문처럼 중얼거려집니다.
오늘도 힘겨운 날이겠지만, 따스한 온기 가득한 호박죽이라도 먹으며 기운 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