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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南岡先生墓碣銘(남강선생묘갈명; 김영간, 1468~1538)
2.文貞公南岡先生神道碑銘 並序 (문정공남강선생(김영간)신도비명 병서)
3.文貞公南岡先生虎溪祠壇碑銘 並序(문정공 남강선생 (김영간)호계사단 비명 병서)
南岡先生墓碣銘(남강선생묘갈명; 김영간 1468~1538)
原文 ; 1964年甲辰譜
解釋 ; 2006.5.13.金順大
孔子曰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而後之論者曰沒後有名可稱眞有善可知夫君子之爲善非爲求名於世也凡其人無可稱之實雖孝子仁孫欲爲之揄揚尙不可得况旣沒之後一世之公案大定曷有亡其實而稱其名者乎
공자께서 말씀하시되 군자가 질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고 하셨으나 후세 사람들이 논하기를 죽은 후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다시 불리어지고 선행이 알려지게 된다고 하였다. 대체로 군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세상에서 이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며 무릇 그 사람의 실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비록 효자나 어진 후손이 이를 떠받들고자 해도 오히려 불가능하다. 하물며 이미 죽은 후에 한 세대의 말씀과 행동(公案)이 크게 이루어져 있다 해도 어찌 그 행실을 잊어버리면 그 이름을 거론할 수 있겠는가.
鳴呼沒三百年之久名稱於人世者吾於故都承旨金公永幹見之矣公字挺之金海人駕洛國王首露之玄冑也中祖有諱牧卿麗朝官至輕車都尉臨海候歷三世諱孝蔘官兵曹參議諱震百戶曹參判是公之祖與父也參判娶贈判書慶州李文炯之女以生公
아! 돌아가신지 300년이나 된 오래된 이름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내가 옛 도승지를 지낸 김공 영간을 살펴보니, 공의 자(字)는 정지이고 김해인으로서 가락왕 수로의 아득한 후손이다. 중조로서 휘가 목경인 분이 계시는데 고려조정에서 관직이 경차도위를 지내고 임해후에 봉해졌다. 3세를 지내 휘효삼은 관직이 병조참의를 지냈고 휘진백은 호조참판을 지냈으니 이분 들은 공의 조부와 부친이시다. 참판(휘진백)께서 판서를 증직받은 경주이씨인 이문형의 딸에게 장가가서 공을 낳았다.
公自幼性剛勁方直儼有成規人莫不器重之文藝夙就爲世所推 燕山朝登文科屢遷至弘文應敎數直言不從遂退伏于廣州之南漢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경하고 바르고 의젓하고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그의 기품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문장솜씨가 일찍부터 뛰어나서 세상 사람들에게 추천 받는바가 되었다. 연산군 때 문과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응교가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廣州)의 남한(南漢)으로 내려갔다.
中廟反正首擢公爲都承旨公劾論子光怙勢弄權之罪出爲黃海道觀察使乙亥與冲庵金公淨訥齋朴公祥上疏請復 端敬愼氏之位並及勳權脅持君父狀言甚抗直觸犯忌諱其時臺官希時宰旨合辭請拿鞫禍將不測鄭文翼公光弼承旨李公擎齋出力伸救之旣免猶被遠謫長興卽其地也
중종반정이 되어서는 첫 번째로 발탁되어 공이 도승지가 되었다. 공은 유자광을 탄핵하는 논의를 하여 권세를 믿고 권력을 농락한 죄를 물었고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 을해(1515)년에 충암 김정[1]과 눌재 박상[2]과 더불어 상소를 올려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하였고, 또 훈신들이 임금을 협박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항하여 이를 직언으로 남들이 꺼리는 일을 저지르니(觸犯), 이때 대관(대간)에서 때를 만난 듯이 의논하여 사면을 시키고 국문할 것을 청하니 장차 미칠 화를 예측할 수 었었다. 문익공 정광필[3]과 승지 이경재[4]가 힘을 다하여 구원하니 큰 화를 면하고 멀리 장흥으로 유배를 당하니 즉 그가 살았던 땅이다.
[1]金淨(1486∼1521);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출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다.
[2]朴祥(1474∼153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진사 지흥(智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3]정광필(鄭光弼, 1462~1538)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4] 이경재(李擎齋)?
公遂挈眷家居因遺誡曰凡吾子孫不應擧勿干祿終公之身足不出里門口不言時事監躬耕獲詩酒自娛敎諸子以義方遇鄕人如敵己見者不知爲顯人而無不歡然相得也
공은 마침내 가족을 거느리고 돌보며 살면서 훈계를 남기며 이르기를 무릇 내 자손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고 나라의 녹도 받지 말라 하였다. 끝내 공은 그의 발로 동네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입으로 그 시절의 일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몸소 농사를 짓고 수확하며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기고 여러 자식들을 의로서 가르쳤다. 동네사람들을 마주치면 적을 본 것 같이 하여 그가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했으나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이 없었으니 이는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鳴呼公之忠義若出處大節雖救之古昔見稱於君子者難以多得矣惜乎其疏辭與遺蹟之炳朗可傳者屢閱兵燹今無得以徵之至其家乘之所載亦不備而甚略故世之知公者旣幾希矣
아! 공의 충성과 도의는 큰 절개에서 나왔고 비록 옛 자료에서 군자라 칭했던 것을 구하려 하나 많은 것을 얻기가 어려웠다. 애석하게도 그 상소문들과 남기신 유적들이 전해올 법 하지만 여러 번의 병화를 거치면서 (없어져) 지금에는 얻을 수 없고 모을 수가 없고, 그 가승에 실린 것도 또한 부족하여 아주 생략되어 있으니 세상에서 공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이미 희박해 졌다.
其後承世居遐土貿貿然莫知其先之事實前後數十年屢煩 天聽請復公官爵今春天官考出久遠之蹟恩 宥己在於公被謫之越明年丙子於是乎上自公卿大夫曁遠近士林始知公之大義直節雖宋朝之孔道輔無以尙焉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 멀어지고 땅도 바뀌고 바뀌어 그 선조의 사실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전후 수십년이 되어 여러 번 임금이 듣고 공의 관작을 회복하였다. 금년[1] 봄에 이조(天官, 吏曹)에서 오래된 그의 업적을 검토하여 은혜로서 공이 유배를 당한 것에 대해 죄를 없애 주었다. 다음해 병자(1816)[2]년이 그 때이다.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원근의 사림에서 공의 대의와 강직한 절개를 비로소 알게 되니 비록 송나라의 공도보[3]가 부럽지 않다.
[1] 글을 쓴 1831년
[2] 다음 해면 1832년인데 간지는 壬辰, 따라서 今春과 明年丙子의 문구가 이상함.
[3]孔道輔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곽 황후(郭皇后)가 후궁(後宮)인 상미인(尙美人)을 질투하여 다투다가 말리는 인종의 얼굴에 잘못하여 손톱자국을 내었는데, 인종이 이를 빌미로 곽 황후를 폐출(廢黜)하자, 중승(中丞) 공도보(孔道輔)와 간관 어사(諫官御史) 범중엄(范仲淹) 등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음. 여기에서는 이 두 사람이 목숨을 내걸고 극간(極諫)한 것을 말함.
而公同時之訥齋冲庵相與之伯仲矣但公之名稱於世者雖與冲訥二公有先後之間然今之稱公者不以先後而輕重之則公之眞有善可稱者可知也
공과 같은 시대의 눌재, 충암과는 서로 버금갔다. 단 공의 이름이 세상에서 거론되는 것이 비록 충암과 눌재 두 분에는 선후지간이 있으나 지금 공에 대해서 말하는 자는 선후와 경중을 따지지 않으니, 공에게는 진실로 착함이 있어서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己配貞夫人松京馬氏判書崇之女曰礪俊曰瑞麟俱參奉曰夢俊曰億俊俱通德郞曰僉使安聃曰吳瑞曰任自淑曰樂安郡守南效容是公之四女也孫曾以下今至九世十世之遠不可殫載焉
그의 부인은 정부인 송경마씨로서 판서를 지낸 마숭의 따님이고, (아드님이신) 려준, 서린은 참봉을 지냈고, 몽준, 억준은 통덕랑을 지냈으며 (따님들은) 첨사 안담, 오서, 임자숙, 낙안군수 남효용에게 시집갔으니 공의 네 따님이다. 순자와 증손이하는 지금 9세, 10세에 이르러 멀어져 다 기록할 수 없다.
墓在府治龍溪面萬壽洞辛坐乙向之原舊碣漫缺殆盡今諸孫將伐石新竪屬銘於余余不敢以文拙辭據其實序次如右續之
묘소는 부에서 다스리는 용계면 만수동 신좌의 을(乙) 방향 언덕에 있고 구 비갈이 마멸되고 거의 결락되어 지금 여러 후손들이 바야흐로 돌을 캐어 새로 세우고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여 나는 감히 문장 실력이 없어 사양하였으나 그 실제에 근거하여 순서대로 오른쪽(아래)과 같이 계속해 보았다.
銘曰 吁嗟金公有烈天植膓直啄勁之死不忒爰撮其美永垂千億蔚彼遺阡過者必式
새겨서 말하기를 ‘아아! 김공은 위엄이 있고 하늘이 내었다. 강직함이 부리로 쪼는 듯이 날카롭고 죽음에도 변하지 않아, 이에 그 아름다음을 본받아 영원히 천억세에 드리우니, 창대한 그의 유지를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이네.’
純祖三十年重光單閼秋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潘南朴宗學撰
순조30년 (1831년) 가을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반남 박종학 찬
文貞公南岡先生神道碑銘 並序 (문정공남강선생(김영간)신도비명 병서)
(휘永幹, 1468~1538)
原文: 1964年 甲辰譜
解釋 ; 2006.5.13.金順大
孔子曰魯無君子斯焉取諸聖人之言豈欺之哉余於南岡先生見之矣盖先生以出類拔萃之才生而爲國家之黼黻歿而爲士林之師表其出處之正大志操之堅確可以爲百世之曠感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되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하니 여러 성인의 말씀을 취하는 것을 어찌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나는 남강선생을 뵈오니(행적을 보니) 대개 선생은 발군의 재능을 가지시고 살아서는 나라의 임금에 충성하고 죽어서는 사림의 사표가 되시니, 그 몸가짐이 바르고 크고 지조가 굳세고 확고하니 가히 백세를 밝게 비추고 감동시키는 분이시다.
謹按先生姓金諱永幹字挺之籍金海駕洛國首露王之後也中祖諱牧卿仕于麗朝都尉封臨海候歷三世有諱孝蔘官兵曹參議諱震百官戶曹參判寔公祖若考也妣貞夫人慶州李氏文炯女先生生
삼가 생각해 보면 선생의 성은 김씨요 휘는 영간이요 자(字)는 정지이고 김해에 본적을 두고 있으니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이다. 중조이신 휘목경은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여 도위를 지내고 임해후에 봉해지셨다. 3세를 지나 휘효삼이 계셨는데 관직은 병조참의를 지냈고, 휘진백은 호조참판을 지내시니 이분들이 공의 조부와 부친이시다. 모친은 정부인 경주이씨인 이문형의 딸로서 선생을 낳았다.
而性剛勁方直人莫不器重之及長文藝又超越爲世所瞻仰 燕山朝擢文科屢遷至弘文舘應敎數直言不諱遂退伏于廣州之南漢矣
성품은 강경하고 발라서 사람들이 그의 사람됨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한 커서는 문장솜씨가 뛰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번 벼슬을 하고 홍문관응교가 되어 여러 차례 직언하기를 거리낌이 없어 마침내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廣州)의 남한(南漢)으로 갔다.
及中廟反正首擢爲都承旨劾論柳子光怙勢弄權之罪出爲黃海道觀察使威惠並行吏民畏服
중종반정이 되어서는 첫 번째로 발탁되어 도승지를 지내면서 유자광을 탄핵하는 논의를 하여 권세를 믿고 권력을 농락한 죄를 물었다.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나아가 위엄과 은혜를 병행하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경외하며 복종하였다.
納節還與冲庵金公淨訥齋朴公祥上疏請復 端敬愼氏位又劾論勳戚之罪語多觸犯時臺官希時宰意請拿鞫賴鄭文翼公力救免大禍竄長興
임기가 끝나고 돌아와서 충암 김정[1]과 눌재 박상[2]과 더불어 상소를 올려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하였고, 또 훈신과 왕의 인척들의 죄를 탄핵하며 많은 말로서 일을 저지르니(觸犯), 이때 대관(대간)에서 때를 만난 듯이 의논하여 국문할 것을 청했는데 정문익공(정광필)[3]에 의해 극력 구원되어 큰 죄를 면하고 장흥으로 갔다(유배).
[1]金淨(1486∼1521);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출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다.
[2]朴祥(1474∼153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진사 지흥(智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3]정광필(鄭光弼, 1462~1538)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乃挈家仍居誡子孫勿干祿足不出里門躬監耕穫沒齒自靖以殉葬于府治龍溪面萬壽洞坐辛原
이에 온 가족을 이끌고 집에 머물며 자손들을 훈계하여 나라의 녹을 받지 말게 하고(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고) 동네의 밖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몸소 농사를 지었다. 이를 숨기시고 스스로 편안하게 돌아가시니 장흥부의 용계면 만수동의 신좌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配貞夫人松京馬氏判書崇女四男曰礪俊曰瑞麟俱參奉曰夢俊曰億俊皆通德郞四女曰安聃僉使曰吳瑞曰任自淑曰南效容郡守孫曾煩不錄
부인은 정부인 송경마씨로서 판서를 지낸 마숭의 따님이다. 4명의 아드님으로 여준과 서린이 참봉을 지냈고, 몽준과 억준이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4명의 따님은 첨사 안담, 오서, 임자숙, 군수 남효용에게 시집갔고, 손자와 증손자는 일일이 기록하지 못한다.
惜乎其疏辭與遺蹟之炳朗可傳者屢經兵燹今無得而徵之故世之知公者旣幾希矣其後承久而不振莫知其先之事實而至於 純廟屢煩 天聽始復先生之官爵
애석하구나. 그 상소를 올린 글들과 남기신 유적들이 전해올 법 하지만 여러번의 병화를 거치면서 (없어져) 지금에는 얻을 수 없고 모을 수가 없으니, 세상에서 공을 알고 있는 것은 이미 희박해 졌다. 그의 후손들이 오래도록 부진하여 그 선조의 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하다가, 순조 때에 이르러 여러 번 임금이 듣고 비로소 선생의 관작을 복위하였다.
自是公卿大夫士咸知先生之大義直節而建祠于虎溪及撤享後數十年丙子春因國內士林之公議定私諡曰文貞抑亦顯晦有數而然歟先生與同時訥齋冲菴可以齋名而但顯晦之早晩不可以輕重於其間也
이로서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선생의 큰 뜻과 강직한 절개를 알고 호계에 사당을 짓고 또 제사를 지내온 지 수십년이 지난 병자(1936)년 봄에 국내의 사림에서 다 함께 의논하여 사호를 정하여 문정(文貞)이라 하니, 역시 어둠에서 밝아진 많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는가. 선생은 동 시대의 눌재(박상)와 충암(김정)과 같이 가히 공경을 받을 이름이다. 단 어둠에서 나타난 때가 빠르고 늦음은 그 기간에 경중이 있음이 아니다.
墓道之石尙無樹立故今後孫將謀顯刻請不佞銘碑鳴呼先生之殉今屢百年典型雖邈而其大節特行載在國史野乘復何贅言哉况百世之下談公者必稱南岡先生南岡先生之號
묘도의 비석이 오히려 세워져 있지 않아 지금 후손들이 장차 협의하여 조각을 하고자 하여 나에게 비명을 청하였다. 아! 선생이 돌아가신지 지금 수백년이 지났으나 그의 모범됨은 비록 아득하다 해도 그 큰 절개와 특출한 행적이 국사야 야사에 실여있으니 어찌 불필요한 말을 다시 하겠는가. 이에 백세를 지난 후에 공에 대해 말함에 있어서 반드시 남강선생이라 칭하니 남강은 선생의 호이다.
銘曰猗歟先生其心也直歷事兩朝克盡厥職名分紊亂疏陳直言禍將難測力救源源守義自靖不尤不怨無忝厥祖垂裕後昆名聞當時後生攸尊天必佑之史書不佚我又特銘皦如白日
새겨서 말하기를 ‘아아 선생은 그 마음이 바르고 양 조정(연산군과 중종)을 거치면서 힘써 직분을 다하고 도리(名分)가 문란할 때에 직언으로 상소를 올려 화가 장차 미쳐 어려워 질 것을 알고 힘을 다하여 구원을 받았다. 의리를 지키고 스스로 조용히 살아 더 이상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 조상에 욕됨을 보이지 않고 후손들에게는 여유로움을 내렸다. 이름이 알려진 당시에 후생들이 존경하는 바이다. 하늘이 반드시 보살피고 사서에는 숨어있지 않았다. 내가 또한 특별히 새기니 그 또렷하기가 대낮과 같다.’
丙子春議政府贊政原任 奎章閣直學士驪興閔丙漢撰
병자(1936)년 봄 의정부 찬정원임 규장각 직학사 여흥 민병한[1]찬
[1] 민병한(閔丙漢, 186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장(景章). 충주출신. 창식(昌植)의 아들이다.
通政大夫秘書院承原任 奎章閣直閣東萊鄭寅昱書
통정대부 비서원 승원임 규장각직각 동래 정인욱 서
文貞公南岡先生虎溪祠壇碑銘 並序
문정공 남강선생 호계사단 비명 병서
(휘永幹, 1468~1538)
原文: 1964年 甲辰譜
解釋 ; 2006.5.13.金順大
湖南長興郡虎溪之祠古有金南岡先生之祠近移于興之萬壽洞祠下竪碑先生之十一代孫濟萬夐途北爲訪余農圃之下乞一言叙實按先生諱永幹字挺之南岡其號先生其門人稱之也
호남 장흥군 호계사에 옛부터 김남강선생의 사당이 있었는데 최근에 장흥의 만수동 사당으로 이전하여 사당아래에 비를 세우고 선생의 11대손 제만씨가 아주 먼 길을 와서 나를 찾아와 논밭(農圃) 아래에서 한마디 글을 써 주기를 청하였다. 생각해 보면 선생의 휘는 영간이고 자(字)는 정지이고 남강은 그 호로서 선생을 아는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다.
其先金海人駕洛國首露王其上祖中祖諱牧卿仕麗朝輕車都尉封臨海候三傳諱孝蔘官兵曹參議生諱震百戶曹參判其祖若禰妣貞夫人慶州李氏文炯女
그의 선조는 김해임으로 가락국 수로왕이 그의 윗 선조이고 중조는 휘목경으로 고려조에 벼슬하여 경차도위를 지내고 임해후에 봉해졌다. 3세를 전하여 휘효삼께서 관직은 병조참의를 지내고 휘진백을 낳으시니 휘진백은 호조참판을 지냈으니 그의 조부와 부친이시다. 모친은 정부인 경주이씨로서 이문형의 따님이시다.
公生而性剛直容貌凝重及長文藝日就而爲士林推重燕山朝擢文科弘文舘應敎以直言忤當路退居廣州之南漢山中及 中廟改玉首擢爲都承旨劾柳子光罪
공은 태어나서 성품이 강직하고 용모가 중후하였으며, 커서는 글 솜씨가 날로 발전하여 사람에서 그를 중하게 추천하였다. 연산군 때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응교를 지내고 직언으로 미음을 받아 광주의 남한산중으로 퇴거하였다. 또 중종반정에 처음으로 발탁되어 도승지가 되어 유자광의 죄를 탄핵하였다.
出爲黃海道觀察使未幾納節歸與金冲庵朴訥齋兩公請復 愼妣位又劾勳權少無忌憚臺官希時宰意請拿罪賴鄭文翼公力救以免謫長興率眷往仍居戒子孫勿應科杜門不出不談時事自靖以歿後士林屢瀆天聽竟復官爵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나아갔으나 얼마 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김충암, 박눌재 두 분과 더불어 신비(愼妣)의 복위를 간청하고 또 훈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조금의 거리낌 없이 탄핵하자 대관이 때를 만난 듯이 의논하여 잡아넣을 것을 청하였는데, 정문익공이 적극적으로 구원하여 이를 면하고 장흥으로 유배가게 되어 가족을 거느리고 와서 살면서 자손들을 훈계하여 과거에 응시하시 말도록 하고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때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 조용히 살다가 죽은 후 사림에서 여러 번 간청하니 임금이 듣고 마침내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而其遺蹟屢經兵燹百無一可徵可徵者家藏譜乘而己惜哉先生之峻節大義可以與日月爭光而合乎易名故公議齋發獻私諡而文貞以寓士林尊慕之微忱焉
그의 유적은 여러 번의 병화를 거치면서 백가지 중 하나라도 구할 수가 없으니 모을 수 있는 것은 집에서 보관하고 있는 가승뿐이다. 애석하구나. 선생의 높으신 절의와 대의는 가히 해와 달의 빛과 견줄 만하다. 여기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야 하니 공적으로 의논하여 삼가 사호를 드리니 문정이며 사림의 사람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작은 정성이라 하겠다.
配貞夫人馬氏判書崇之女甚有壼範四男礪俊瑞麟皆參奉夢俊億俊皆通德郞安僉使聃吳瑞任自淑樂安郡守南效容其四女曾玄以下煩不錄
부인은 정부인 마씨로서 판서를 지낸 마숭의 따님으로서 아녀자의 규범을 지키는 기품이 있었다. 4명의 아드님으로는 여준, 서린이 모두 참봉을 지냈고, 몽준, 억준이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첨사 안담, 오서, 임자숙, 낙안군수 남효용은 그 네명 따님의 사위이다. 증손과 현손이하는 복잡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鳴呼公之德行絶義可以書竹帛銘旂尙而未遑焉今於壽仍之壇一片之碑其不朽一故不揆硯荒力疾以銘
아! 공의 덕행과 절의는 가히 대나무와 비단에 써서 깃발에 새겨 숭상할 만 하다. 그러나 겨를이 없어 지금에야 단을 만들고 한 쪽의 비를 세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하나로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잘 헤아리지 못하는 글과 거친 힘으로 새겨보고자 한다.
銘曰 萬壽之洞其山蒼蒼萬壽之洞其水決決其中何有有祠有壇壇下何有有碑可攀不磨不磷孰不拜觀
새겨서 말하기를 ‘만수동의 그 산은 푸르고 푸르네. 만수동의 그 물은 흐르고 흐르네. 그 가운데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사당이 있고 단이 있네. 단 아래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비가 있네. 마멸되지 않고 갈라지지도 않을 것이니 누가 보고 경배하지 않겠는가.’
歲丙子仲春之下浣嘉善大夫前香山守波澄 尹寗求撰
병자(1936)년 2월 하순 가선대부 전향산수 파징 윤녕구찬
通政大夫秘書院承原任 奎章閣直閣東萊 鄭寅昱 書
통정대부 비서원승원임 규장각직각 동래 정인욱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