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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자주 기억했던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10절, 20절 말씀이지요.
“내가 내 아버지와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다시 보겠습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11절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20절입니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10절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20절에는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여기서는 말이 바뀌지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우리들이 예수님 품안에 있고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품에 계시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두 번째는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을 들었습니다. 하와 할머니의 배 속에는 그때 우리가 다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씨앗이 하와 할머니의 배 속에는 현재 50억 인류가 다 들어 있었어요. 지금 나뭇가지가 아무것도 없지만 내년에 배가 연다든지 10년 후에 배가 열 배꽃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런 이치가 있답니다. 그 뿌리 속에는 영원한 나라, 먼 후에 뻗어날 가지가 눈에 보이지 않도록 거기에 들어 있답니다.
오늘 밤에도 이 선생님의 글을 제가 읽을 텐데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그러면 예수님 속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 선생님도 계셨지요? 그분은 하늘나라 가고 안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들 안에 예수님과 이 선생님 안에도 멀리 본다면 이 선생님을 아직 못 본 사람들도 여기 많이 와서 살지요? 그런 식구까지도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영적으로는 한 씨앗에서 난 자손이다, 그 사랑 안에 눈에 안보였지만 벌써 같이 잉태되었던 그 씨앗들이다, 그렇게 생각됩니다.
오늘 저는 그런 말 들었습니다. 이리 이사 오기 전에 옛날 예배 보던 자리지요? 저쪽 강당이 있었습니다. 그 집을 뜯어버리고 교육관을 세웠는데 그 집이 지어진 내력이 현동완 선생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현 선생님이 친척집으로 전지 요양을 한다고 섬으로 갔습니다. 햇볕과 물을 바꿔가지고 요양하기 위해서 어린 시절에 가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 섬이 가난한 빈촌인데 가을이 되어도 섬에는 항상 물이 좋지 않았던지 나락이 안 되어 버렸던지 흉년이 들어버렸던지 집집마다 지붕의 짚을 새 것으로 못 갈아서 집이 새더랍니다, 어린 나이에 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배에다가 짚을 싣고 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엉을 엮어가지고 지붕을 이되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이어주었답니다. 그 마을에 지붕을 못 이은 집들을 다 이어주고 떠나더랍니다.
그러니까 집 주인들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요? 어떻게 당신이 내 집을 이어주고 이렇게 비가 새는 집을 이어주고 가십니까? 인사를 하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어느 중이 우리더러 삯을 주면서 해주라 해서 우리는 이렇게 삯을 받고 이 일을 했습니다, 이 짚은 그 중이 사서 싣고 온 짚이요.” 그러고 떠나버렸답니다.
그 어린 소년시절에 그것을 보고 그 중이 누구인지 전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집을 깨끗이 이어주고 갈 때에 느끼던 그 어린 소년의 감격, 그 감화가 얼마나 컸겠어요.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각심하기를 나는 커서 그 스님과 같이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둘도 모르게 사람을 도와주고 좋은 일 해야겠다, 어린 시절에 그런 서원을 했답니다.
그래서 현 선생님은 일평생 오나가나 그렇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아무도 모르게 음덕을 숨어서 적선을 하신 분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셨어요. 그러면 현 선생님이 감화를 받을 때에는 그 중한테 감화를 받았으니까 이 예배당이 현 선생님 후원으로 지어진 것이지만 사실은 불교 신자인 중의 은혜를 안 받았다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설명하시더라고 그래요.
우리가 여기서 예배를 보고 이렇게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있지만 이 집이 지어지게 된 경위는 어느 중의 감화를 받은 청년이 커서 이렇게 우리 한국에 현 선생님이라는 분이 나와 가지고 오늘날 이렇게 여기까지도 그 자금을 모아 성인을 기념하는 교회 집을 지으라고 보내진 것입니다. 이렇게 그 사연을 깊이 파고들면 그 부처님의 감화를 받고 믿었던 중의 감화를 또 소년이 받아서 나중에 예수 믿고 이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깊은 속에는 부처님의 은덕이 없다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렇게 깊은 뿌리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오후에 그 말씀 들었어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2천년 전에 하신 말씀이지요.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너희가 내 안이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다.” 그때 2천 년 전이지요. 2천 년 전에 제자들, 베드로니 요한이니 그런 열두 제자 그분들한테 예수께서 하신 그 말이지요. 그러나 그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어요. 예수님은 그 제자들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는 여러분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만 저 혼자 밤중에 방에서 혼자기도 할 때는 어느 때든지 예수님께 감사할 때, 물론 이현필 선생님을 부르지만, 그러나 현동완 선생님, 유영모 선생님, 최흥종 목사님 또 이 공 선생님을 부릅니다.
어른들의 사랑으로 이렇게 잘 살아가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그 어른들도 땅 위에서는 죄가 있을 테니까 예수님 피로 닦아 주시고 하늘나라 가서 편히 쉬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꼭 빼지 않고 그런 기도를 아니 할 수 없어요. 왜? 우리가 우연히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어른들이 예수 사랑으로 우리를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어가지고 이것을 우리가 살 수 있는 터전을 마음으로, 영으로, 눈물로, 혹은 재산으로, 지성으로, 땀으로 밀어주신 분들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까지는 기억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눈으로 저는 안 봤어요. 예수 믿습니다. 그렇게 말만 하고는 실제 느끼는 것은 그 어른들을 봤기 때문에 아주 실제 감사가 있어요. 입에 붙은 말이 아니야.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여기 모여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어른들의 사랑으로 우리가 모여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 안에 우리들 안에 예수가 있다, 그러면 베드로 선생님 안에 세계 교회가 들어 있었지요. 동서양에 있는 인류, 예수 안에 인류가 들어있고 그런 뜻으로 우리가 이런 책도 보고 그러지만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평소 우리 이야기이고 직접 우리를 살려준 분들의 이야기에요. 먼 누구 이야기가 아니야. 직접 잠자게 해주고 밥 먹게 해주고 따뜻하게 옷 입게 해주고 직접 어른들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분들의 은덕이 있어서 우리 이 책도 보고 늘 그럽니다. 그러니까 천리만리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을 한번 따라 읽읍시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정을 느끼면서 지금 이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말씀을 저녁에 읽을 테니 들어 보십시오. 인격적인 생활이라는 제목입니다.
“자기를 먼저 이기시기 바랍니다. 얌전 하다는 생각 잊으셔야 합니다. 양반 생각이 너무 짙으면 고기장사가 비린내를 모르듯 합니다. 천국의 사람이 되려면 다시 새로워 져야 합니다. 하여간 다른 일은 마시고 죄를 찾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자비 베풀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에게 넘쳐흐름을 깨닫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선을 베풀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가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 되려 마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옷을 입으심을 깨달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는 일입니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러운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 없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순수한 심령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방종 않는 일은 참 자유 얻는 방도입니다. 자유 없는 생활,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 아 그 얼마나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위안이 마음속에 새어들어 오는 시간인지요? 물 한 그릇을 자유로 못 마시고 먹을 것 하나 못 먹고 입고 싶은 대로 못 해 입고 살고 싶은 데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부자유, 그를 불러서 참 복 받는 이의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억하시고 가고 싶은 곳도 못가고 보고 싶은 것도 못보고 듣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듣고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야 말로 아 얼마나 영적 자유함의 생활인지요?”
“절제의 생활, 모든 것이 풍부해도 자기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처럼 절약해서 쓰고 아끼는 생활, 그것은 모든 것에 풍부한 영적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아껴 쓰는 이에게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없는 것이 없고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물 한 방울을 아껴 쓰고 나무 한 부스러기를 아껴 땔 때에는 그 모습은 그대로가 바로 풍부와 만족한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존귀보다 겸손이 먼저 있고 풍부한 것이 있기 전에 절약이 먼저 있습니다. 빈핍이 있기 전에 낭비가 있습니다. 패망이 오기 전에 천박한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무엇이든 천하게 여긴 만큼 자기가 천해집니다. 시간을 특히 아껴 써야겠습니다. 값없는 세월이라 생각지 마시고 손 한번 놀리는 것, 발 한 발자국 옮겨 놓는 일, 말 한마디를 무심코 하시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말씀 한마디를 생명의 씨로 받아서 간직하는 것과 무심히 들어 항상 돌아다니는 말로 허술히 알아듣는 것과는 영원한 세계를 두고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노력의 효과를 잘 나타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른 이가 한 일보다 훨씬 귀한 가치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서 인격을 압니다. 배추 한 포기라도 정성으로 가꾸는 일 속에 자기 인격 전부가 반영이 됩니다. 지금 종자 하나를 잘 가꾸면 허술히 한 것과는 헤아릴 수 없는 큰 차이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일평생을 두고 시시각각 크고 작은 일까지 정성스레 생각하는 것과 허술히 생각하는 것과의 결과를 종합해서 생각해본다면 얼마나 놀랄 만큼 차이가 있는 것인지요? 그 결과가 최후로 그 사람의 일생을 결산 지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두려움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어디를 가서나 무엇을 하시든지 무슨 말씀이든지 예사로이 하시는 일이 없도록 극히 주의하시어 유여한 인격을 빛내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사 굶기를 며칠 전 부터 굶고 광주서 걸어갔습니다. 며칠을 굶고 화순의 도곡면을 거쳐서 곡성의 죽곡면 원달 상달로 올라가는 길이시던가 봅니다. 그때 제가 이 선생님을 따라 붙었지요. 동록 씨라는 분은 옛날에는 전도사직을 하셨지만 지금은 전도사직을 안 하고 계시지요. 그렇게 평 교우로 지내시지요. 그분의 어머니께서 그 지점에 사셨나 봅니다. 거기 도곡면 산골짜기에 지나다가 그 댁을 찾아가십니다. 가는 길에 심방을 하시고 이제 위로하시고 가실 량으로 그 댁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주 큰 부잣집의 후실로 예수를 믿은 분이 계셨어요. 그 후실이 이 선생님 보기가 부끄러우니까 얼굴을 내놓지 못했지요. 십리 밖에 사시는데 이 선생님 지나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몰래 찹쌀떡을 해가지고, 눈물겹게도 밤새도록 10리 밖에 있는 거기서 걸어와 그 어머니 집에다 떡을 가져다 놓았대요. ‘내일 선생님이 여기 지나가실 때 이 떡을 꼭 대접하십시오,’ 그렇게 위탁했던 것이에요. 그렇게 가져다 둔 떡을 수레기 어머니, 한나 씨 어머니, 이 선생님 세 분이 가시는 길에 드시라고 내 놓은 거지요. 제가 따라 갔으니까 네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새벽부터 갔지만 거기가 어느 지점인지 몰라도 아침밥은 시간이 넘어 버렸고 점심은 빠르고 한 열시나 열한시 사이에요. 그 집에 들어갔는데 손님이니까 방으로 모두 들어갔지요. 그러니까 거기 계신 분이 지난밤에 부탁하고 가신 분의 뜻대로 떡을 내놓았는데 다시 따뜻하게 했는지 몰라도 김이 모락모락 나요. 찰떡을 그득히 하고 쑥떡을 그득히 해가지고 상에 차려 내 왔어요.
이 선생님이 그것을 받았지요. 방으로 바로 들어가시고 제가 그 뒤를 따라 갔으니까 누구 다른 사람 만날 시간 없었거든요. 전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그 집에 들어가서 큰 방에 들어가서 앉아있는데 바로 찰떡이 나오거든요. 그 떡이 누가 만든 것인지 어떤 영문인지 모르지요. 그때 이 선생님이 ‘우리 기도합시다.’ 하고 기도를 하셨어요. 이 선생님 기도 잘 하시는데 그때 기도하는 것 처음 들어봤거든요.
“하나님 아버지. 이 죄 많은 이놈이 찰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면 이 죄인 놈의 이빨이 썩어 내려앉게 해 주시고 목구멍이 썩어서 내려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립니다.”
이어서 한나 어머니나 수레기 어머니에게 “떡 잡수시지요.” 하니까 모두 뛰뛰 하고 굳은 표정으로 다 물러나버려요. 그래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으레 먹을 줄 알고 바짝 상 옆으로 갔었지요. 그런데 어머니들이 모두 뛰뛰 하고 뒤로 물러앉으니 먹을 수가 있어야지요. 눈치를 보니까 먹어서는 안 되겠어요. 뒤로 쭉 물러났지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상에 차려진 떡에서 막 김은 나는데 김이 올라와요. 그래 혼자 생각하기를 ‘참 이분들 묘한 사람들이다. 왜 이럴까?’ 했어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따라갔거든요. 참 기이한 일이다 싶었어요.
그 다음에야 알았어요. 한 3년 후에야 그 영문을 누가 가르쳐 줍디다. 그 떡이 다른 떡이 아니라 알고 보니까 10리 밖에 있던 어느 부잣집 후실인데 예수 믿고 회개하는 뜻으로 그렇게 떡을 해다 주신 것이라고요. 그럼 이 선생님이 그걸 절대 몰랐을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는 직감으로 느낀 거예요. 어떤 영감으로 느낀 것이지 그 사건을 누가 말해서 안 것은 아니라고요. 그런걸 보면 역시 명철하시기도 하고, 영의 사람이지요.
그때그때 잠깐 잠깐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간 실수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 떡을 영문 없이 먹을 수 있지 않아요? 배는 고프고 감사해서 먹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무슨 일을 깊이 생각하시고 그렇게 틀림없이 하셨기 때문에 그 감화력에 의해서 바르게 하신 거지요.
요사이 들어봅니다. 열한 살 먹어서 이 선생님께 나간 아이들이 벌써 50대가 되었어요. 열세 살 먹고 열네 살 먹어서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때 이 선생을 본 분들이 여기 한 50대가 되었거든요. 그 어린 소녀시절에 이 선생님을 보고 감화를 받았는데 눈을 떠보면 차려드린 밥을 안 잡수시고 가신다든지 옷은 다 떨어지고 살이 보인다든지 거기서 이 선생님에 대한 인격적인 감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이 자기 고향과 부모와 친척을 버리고 돌아와서 여기 이렇게 사시고 계신 것을 발견했어요. 요사이에서야 몇 분 말 들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그간 남녀 분별이 강해가지고 우리가 서로 반말을 못해봤거든요 지금은 백발이 났으니까 그래도 말을 하지요. 옛날에는 고개 숙이고 땅만 보고 이야기하면 듣고 그랬거든요. 야, 그랬구나. 그런 게 느껴져요.
선생님은 늘 심사숙고하라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거 찬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깊이 생각하라고 부탁을 해요. 본인 생활도 그렇고 글이 그런 거지요. 글이 그런 내용의 글이시지요. 가사 찬물 한 그릇 떠드리지요. 찬물 한 그릇 떠다가 준 것만 봐도 그 사람 다 알아버려요. 이 선생님 속도 모르고 이 선생님은 남의 깊은 비밀을 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찬물 한 그릇 떠다 주고 나가는 것 보면 ‘아 저 사람은 이렇구나,’ 짐작이 간다고요. 마음이 괴로운지 서러운지 기쁜지 평화스러운지 그거 직감으로 알 수 있어요 이 선생님 아니더라도 알 수 있어요.
또 물을 대접해 봐요. 찬 물 한 그릇 잡수시라고 드려 봐요. 그럼 그 물을 먹는 것만 보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지 않아요? 이 선생님은 김이 뭉게뭉게 나는 찰떡을 드려보니까 속을 알아요. 아 이 선생님이 그런 분이다, 안 먹을 떡은 목구멍이 썩어 내려앉아 버리라고 그러고 안 먹는다. 먹을 떡은 그분이 자시거든요. 어디 가서 누가 안주면 달라고 그분이 직접 달라고 해서 잡수시는 분이니까.
그전에 그 말씀하십디다. 그 한나 어머니께서는 능주 교회 종을 치던 과부 집사님이시거든요. 옛날에 그 댁이 교회를 3일 동안 빌려가지고 우리가 성경 공부를 했어요. 해방 되고 그 이듬해요. 그때도 한번 참석해봤습니다. 그때는 개인 생활이지요. 공동생활 아니니까요. 개인 개인이 소문 듣고 찾아가서 만나 성경 공부를 할 때 옆에 앉아있었지요. 그런데 광주에서 가신다. (끊김)
박공님과 같이 광주에 가서 이 선생님을 만나면 아주 고맙게 봐버리고 꼭 천진한 아기 같아요. 그때는 법도 없고 엄하지도 않고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그러십디다. 손님이 오신다고 하면 무릎을 꿇고 아주 엄하게 대할 때도 있지요. 그렇게 짱짱하게 하실 때가 있지만 마음을 놓고 허물이 없는 사이에는 아주 아기 같아요. 아주 아기 같아요. 부드럽고 아기 같은 그것도 목격했어요. 그러니까 몸가짐이 그렇더라 그 말씀입니다.
성경도 그때는 몰라요.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겠고 이 선생님이 어떻게 밥 먹는가 보자, 그것도 봤고 어디 가면 무릎 꿇는가 보자, 그것도 봤고 어디가 무릎 어떻게 풀어버리는가 보자, 그걸 주목할 때거든요.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신 분이라, 그렇게 지내신 것이 지금 회상이 됩니다.
그래서 아까 하신 말씀처럼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제하고 아껴 쓰면 풍부해진다. 절제의 생활로 모든 것이 풍부해도 자기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처럼 거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아껴 쓴다. 그렇게 절약해 쓰고 아끼는 생활 그것은 모든 것에 풍부를 불러일으킵니다. 아껴 쓰는 이에게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없는 것이 없고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물 한 방울을 아껴 쓰고, 땔나무 한 부스러기를 아껴 때는 그 모습은 그대로가 바로 풍부와 만족한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존귀보다 겸손이 먼저 있고 풍부가 있기 전에 절약이 먼저 있습니다. 빈핍이 있기 전에 낭비가 있습니다. 가난했다, 그 말은 낭비했다, 그런 결론이라는 말이에요. 패망이 오기 전에 천박한 인생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망했다. 그 집안이 망했다. 평소에 천박하게 살았다. 이 말이에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무엇이든지 천하게 여긴 만큼 자기가 천해집니다. 돌 하나 풀 한포기 채소 한 가닥을 천히 보면 자기 자신이 천해진다, 저는 그렇게 생각 됩디다.
제가 또 한 번은 남원에 있을 때입니다. 아침 해가 뜰 때부터 해가 툭 뜰 때까지 몇 집 어머니들이 갈 때 따라간 일이 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 이튿날 이 선생님이 오신다는 기별을 어떻게 아셨던가 봐요. 그러니까 밤새도록 잠을 안 자고 이렇게 큰상에 자기 평생에 못 먹은 거 다 차려 놨어요. 식혜도 해놓고 떡도 해놓고 과일도 깎아놓고 고기는 안 잡수시니까 나물 해놓고 밥을 해놓고 국 끓이고 미역국 끓이고 김이 뭉게뭉게 나게 차려 놓았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선생님은 딱 일어서요. 식사하시는가 보다 하고 안심하고 부엌에 어머니가 계신데 딱 일어나 나가버리면, 어머니는 울어요. 아 밤새도록 지성을 다했는데 입도 안 대고 나오시거든요. 그럼 그 다음 집에 가지요. 조금 거리 있으면 인제 거기서도 알고요, 또 밥상이 나와요. 그럼 저기서 먹어버렸으면 이 집은 얼마나 섭섭할까요? 또 들어가 조금 앉아 있다가 그냥 나와 버려요. 그 어머니 또 울어요. 참 살과 같이 피와 같이 정성을 다해 차려 놓은 음식인데 안 잡수세요.
그러니까 한 세 집이 네 집이 가면 이제 해가 낮이 되어버리지요. 한집에서도 밥은 안 잡수셨지만 배가 불러요. 영적으로 배불러요. 그럼 누구 집에서든지 음식은 입에 안 댔어요. 그래서 지금 생각해 봅니다. 그걸 잡수시고 가시면 육적으로는 만족하셨겠지요? 그러나 안 잡수시고 갈 때 영으로 그 천상의 위로를 받았지요? 천상의 위로를 받아가지고 생명도 자식도 재산도 아깝지 않아요. 모든 재산 모든 자녀를 이 선생님 뜻대로 해달라고 던져버린 거예요. 이 선생님 앞에 던져버려요. 아기가 한 살 먹어서 주고 두 살 먹어서 주고 내가 키운 것보다 당신은 내 자식을 맡을 만한 인격이 있다, 믿음직하다, 내 자식을 맡아 주시오. 그런 아기들이 모인 곳이 양육원 아기들, 그런 소년이 모인 곳이 고아원, 그런 어머니 할머니가 모인 곳이 양로원 그랬지요.
처음에는 절대 양녀도 아니고 고아도 아니고 그 집 어린 아기들로 유치반, 그 집 조금 큰 아기들로 고아 반, 그 집 시어머니는 할머니 반, 그 집 시아버지는 할아버지 반, 그렇게, 그렇게 나중에 형성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그 식구들이 집집이 가서 맛이라도 보고 냉수를 마셨어요. 네 것 내 것 따로 있고, 내 재산 내가 지키고 내 자식 내가 키우고 그러면 이런 공동체가 형성이 안 되지요. 동광원이라는 울타리가 형성이 안 되어요. 그렇게 생명을 줘도 아깝지 않은 것은 이 선생님의 생활에서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라고요.
생활에서 감화를 받았지 뭐 성경말씀은 선생님께서 별로 말 안 했지요. 신령한 말도 별로 안 하고 기적도 없어요. 그 인격적인 그 사랑 그 무엇인지 모르게 먹는 것도 아니고 입는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 느껴지는 평화, 영성으로 느껴지는 감화, 영성적으로 느껴지는 그 어떠한 인력 끄는 힘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부모형제, 친척, 고향 모든 것을 이 선생님께 위탁하고는 일체 의심을 안 했지요. 조금도 의심 안 해버렸어요.
그렇게 생각해보시고 아까 글을 다시 읽어드릴 테니 들어보세요.
“자기 길을 먼저 잊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배고픈 것만 생각하면 한 3일 굶고 있었는데 그 쑥떡 찰떡, 김이 뭉게뭉게 나는 그것을 앞에 놓고 그렇게 기도하고 딱 일어설 수가 있을까요? 저는 선생님처럼 그렇게 못하지요. 선생님도 자기를 생각했다면 못 하지요. 자기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다른 영혼 그 영혼들을 사랑하는 자비가 가슴에 꽉 찼던 거지요. 그러면 아까 그 후실이라는 부잣집 부인은 그 떡을 안 먹고 갔다고 얼마나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겠어요. 내가 죄를 지어서 선생님이 안 잡수시고 가셨다 싶어서 못내 대성통곡하다가 후실이라는 가문에서 뛰어나와 버렸다고 합니다. 불안해서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광주로 나와서 양림교회 앞에 홀로 집짓고 사신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떡을 먹어버렸으면 안심하고 거기서 소실로 잘 살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고 선생님이 그분을 만나가지고 말로 “후실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시오.” 그러지 않았거든. 마음으로 영으로 기도로 하셨지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자기를 먼저 잊으시기 바랍니다. 얌전하다는 생각 잊으셔야 합니다. 양반 생각이 너무 짙으면 고기 장사 비린내 모르듯이 모릅니다. 허례허식 양반 껍질로 얌전한 것 천국의 사람이 되려면 다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여간 다른 일을 마시고 죄 찾는 일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자비 베풀려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에게 넘쳐흐름을 깨닫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선을 베풀려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가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 되려 마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옷 입으심을 깨달아 알려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는 일입니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 없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온순한 심령으로 부족한 것이 참 행복이라고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자유 방종 않는 일은 참 자유 얻는 방도입니다. 자유 없는 생활 주를 생각하는 시간 아 그 얼마나 자유와 참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위안이 마음속에 새겨 들어오는 것인지요? 물 한 그릇을 자유로 못 마시고 먹을 것을 하나 못 먹고 입고 싶은 옷을 못해 입고 살고 싶은데서 못살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 부자유, 그를 불러서 참 행복은 이 사람들의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억하시고 갈 데도 못가고 보고 싶은 것도 못보고 듣고 싶은 것도 못 듣고 마음대로 못하는 생활이야말로 아 얼마나 참 자유로운 행복한 생활인지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 정경은 우리가 우리 생활을 더듬어볼 때 이 말씀의 흐름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여기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러운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6·25가 나기 전의 일이지요. 서울 어머니가 살던 문바위 집터가 비어있었습니다. 그해는 금남 언니도 해방 후에 한 1년 있다 내려가 버리고 동구씨도 내려가 버리고 서울 어머니도 하산해 버리고 집이 텅텅 비어 있습디다요.
“준호,” 선생님이 부르셨어요. “예.” 대답하니까 “오늘 문바위에 가봅시다.” “예.”하고 따라갔어요. 방에 들어가 보니 벌써 해는 집니다. “준호, 준호는 여기 남으시지요.” 그리고 혼자 내려가 버리세요.
참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제가 복이 있는 것을 느껴요. 그때 제가 어떻게 믿었을까? 이 선생님의 말을 어떻게 믿었는가? 무조건이에요. 거기에 이불이 있을까 요가 있을까 밥이 있을까 옷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지요. 가사 나무가 있을까? 성냥이 있을까? 해만 지면 추운 때거든요. 그러니까 혼자 내려가 버리시는데 해가 지니까 쓸쓸하고 처량합디다.
더듬어 보니까 성냥 하나가 있어요. 불을 탁 피워가지고 뒷산에 가 낙엽이 많으니 그 낙엽을 가져다 불 때고 잤지요. 그 이튿날 어린 소년 둘이 찾아왔어요. 그때 귀주 어머니가 어린 소년 5~6명 데리고 있었지요. 아이 둘이 와서 담요 하나, 그리고 단지 하나에 뭐 김치 조금하고 쌀 한 되하고, 그냥 성냥 한 곽 하고 가져다줍디다. 그리고 아이들이 가버렸지요.
선생님이 여기 있어라 할 때 이유도 없고 설명도 없어요. 거기 있으라, 하고는 양식이 와버리니 이제 오지 말라는 기별이거든요. 오지 말라고 하는가보다 짐작했지요. 거기서 한 일주일 있으니까 아이 하나를 보내줍디다. 혼자 있으면 적적하다고 아이를 보내줘서 그 아이하고 둘이 한 달쯤 살았지요.
그냥 한 달을 살다 보니 그 후에는 어머니하고 아이들이 다시 다 올라와 버려요. 청소 집에 있는 아이들이 올라왔어요. 그래서 소문을 들으니까 사변이 일어났다는 거지요. 그때 무슨 라디오도 없고 깊은 산 속에 있으니까 모르지요. 그때 6·25가 일어나고 동광원이 출발했던가 보지요. 동광원 식구 100명이 청소에 왔다고 거기 있던 아이들을 전부 산으로 올려보냈어요. 얼마나 명철하세요? 거기 살던 사람이 하나만 남아도 안 되어요.
그때 청소 거기는 밤손님 와서 물어보고 낮에는 순경이 와서 물어보고 거기 모든 일을 아는 사람이 남으면 안 되거든요. 말하자면 유화례 여사가 오기 위해서 길을 닦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세례요한이 길을 닦듯이 유화례 여사가 지나갈 길목에 있는 사람들, 옛날에 살던 사람은 전부 비켜 버린 거예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있도록 하고 그 길목으로 올라가실 수 있게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그 길목에 우리 아기들이 살았거든요. 우리 아기들을 전부 산으로 올려버렸어요. 그 아기들은 동광원 아이들이 아니에요. 동광원을 시작하기 1년 전에 살던 아이들이지요.
그래 조금 있으니까 짐작이 가요. 뭔 난리가 일어났나보다. 그러면 6·25가 일어나기 전 몇 달 전에 이 선생님은 왜 무슨 직감이 있었느냐? 그거에요. 예언적으로 아신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어떤 직감이 있어서 저를 미리 산으로 올려 보내고 그 다음에 아기들이 다 올라오게 그렇게 착 착 착 됩디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요.
그때 저도 어린 아이들을 밤낮으로 데리고 살던 선생인데 아이들하고 저를 딱 분리했거든요. 한 달 이상을 아이들 옆에 못 가게하고 혼자 있도록 했어요. 그런데 그 담에 보니까 6·25가 일어나고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산에 피신했거든요. 광주에서 온 아이들이 대신 청소에서 살았는데 그 아이들은 죽 못 만나봤어요. 6·25가 끝나도록 서로 왕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서로 이쪽저쪽 비밀을 말할 수 없지 않아요? 이렇게 과거에 있던 사람과 새로운 사람이 서로 왔다갔다 못하니까 비밀이 보장되어요. 지리나 모든 사정이 비밀로 지켜져요. 지금 보면 얼마나 참 지혜롭고 바로 된 것인지요?
그러면 그때 저도 청년 아닙니까? 어떻게 그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을까? 그게 참 은혜롭고 복이지요. 제가 순종한 것 아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지요. 말이 쉽지, 산속에 들어가 그 집에 혼자 남을 수 있어요? 집 보러 갑시다, 그리고는 “준호, 여기 남으십시오.” 그러면 밤에 도망가 버리지요. 아무것도 없는 빈 집에 홀로 남겨두면 보통 화가 나서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안 됐어요. ‘산에 있으시오.’ 하니까 무조건 ‘예’ 했지요. 그만큼 이 선생님에게 영력이 있었지요. 아무 설명 안 해도 ‘산에 남으시오.’ 그럴 때 ‘예.’ 하게 되어요. 또 그렇게 대답해도 마음에 아무 부담이 없어요. 이 선생님께 대해서 아무 의심이 없어요. 나를 좋게 해주시려고 그러시는구나 하고 믿어버리는 거예요. 그랬어요. 지금도 그러란 뜻이에요.
우리 원장님이 어느 보모더러 ‘이렇게 하시오.’ 그러면 무조건 ‘예’ 하는 것이지 ‘왜 날 이래 할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이것이 곧 믿는 것입니다.
“복종하는 일은 행복스런 이들의 택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순수한 순종, 어린 아기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체험했다는 보고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도 위에 보모님이 이렇게 이것 하십시오, 가사 ‘오늘 금식 하십시오’ 또는 ‘찬물 잡수시오.’ 그러고 ‘예’하고 먹고 그렇게 살아요. 왜 날더러 찬물 먹으라 할까? 그러지 말라는 거지요. 자 따라 읽으십시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이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을 하거나 불평을 하지 말고 어린양과 같이 순결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996년 8월 동광원 수양회에서 김준호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