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의 여인 3
아침 일찍
화담과 지함, 박지화 세 사람은 주막을나왔다.
해사 마을을 다 빠져나가도록 누구도
간밤에 겪은일에 대해말을 꺼내지 않았다.
화담 일행은 초여름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강줄기를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들마다 모를 심느라 박자를맞추는
구성진 노래가락이울려퍼지고 있었다.
평양감사, 전라감사가 최고라는 말이 나올 법하게
호남 땅은 너르고 기름졌다.
유난히 맑은 강가에는
군데군데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쇠꼴을뜯기러 나왔을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강물을첨벙거리고 다니며
고기떼를 쫓고 있었다.
한나절을 부지런히 걷자 등줄기가 후끈한 게 땀이줄줄 흘렀다.
"어이구, 선생님. 숨 좀 돌리고 가시지요.
사약을받는다 해도 저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해사 마을을 떠난 뒤 박지화가 처음 입을 열었다.
"그러시지요. 선생님.
선생님은 어디서 그렇게 힘이나시길래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지함도 화담에게 쉴 것을 청했다.
"앉을 자리를 살펴보게."
화담의 명을 받자마자 박지화는 얼른 들 복판에
서있는 소나무숲에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농부들이
일하다 잠시 쉬려고 만들어놓은 소나무 그늘이었다.
"선생님, 좀 눕겠습니다. 제발 선생님도 좀쉬십시오."
박지화는 양반 차림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다는 듯
봇짐을 베고 덜렁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담이못 이기는 척 눕는 것을 보고난 뒤
지함도 그 옆에팔을 베고 누웠다.
그늘이 닿지 않는 쪽으로 누구의 것인지
제대로손질도 되지 않은 무덤이 오두마니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도 배를 태워준 노인처럼
평생 땅 한 평 갖지않고 살았던
누군가의 무덤일 것이었다.
그래서
죽어서나마 너른 들을 품에 안은 듯
누워있는지도모를 일이었다.
마을 쪽 논두렁으로 자기 몸집 만한 함지를 이고
한손에는 오지병을 든 여인네들이 줄을 지어
숲으로왔다
.해를 보니 벌써 점심 때였다.
"어이. 밥 왔네. 어여 한술들 뜨고 일허소."
허리가 굽기 시작한 반백의 할멈이
늦가을 참새를쫓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자
모를 심던 농부들이
흙투성이 손을 바지에 썩썩 비벼 닦으며 나와 숲속
지함 일행의 바로 곁에 자리를 잡았다.
시커먼꽁보리밥이 군침을 돌게 했다.
"선비님들, 한 술 드실라요?
꽁보리밥이제만시장하시먼 한 술들 뜨시요."
그들이 권해오자마자 지함 일행은 염치불구하고
그들 쪽으로 돌아앉았다
젓갈을 듬뿍 넣고 갓 담근김치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호남 맛이 제일이라더니빈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찬이라곤 김치 한 가지에 넘쳐 흐른 된장국이고작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맛난 점심이었다.
"니미럴. 쌀 한말도 못 얻어왔는갑네.
창고서 썩는쌀인디 좀 주먼 어쩐다고 시커먼 보리쌀이여?"
땅딸막한 키에 다부진 몸을 가진 젊은이가
불퉁스런말을 내뱉었다.
나이 지긋한 노인네가 지함 일행을곁눈질하며
입 다물라고 옷자락을 슬그머니잡아당겼다.
그래도 젊은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도 그냥이나 주간디.
작년에 갖다 묵은 것이나갚으라고 난리를 치는디
갚을 것이 있으먼 뭐한다고빌리러 갔것어.
아침 나절 내동 손이 발이 되게빌었그만.
그나저나 올해는 풍년이 들어야 빚도 갚고그럴 것인디.
빚은 눈뎅이같이 불어가고
우쩨살어야헐지 모르것네."
밥 먹으라고 외치던 할멈이 아들인 성싶은 사내의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따 풍년이 들먼 머 우리한테 떡고물이라도
돌아온답디여?
풍년이먼 풍년이랍시고 싹 쓸어갈것인디…"
불평을 늘어놓는 젊은이 옆에서
노인이 자꾸젊은이의 옆구리를 찔벅거렸다.
화담 일행이 영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하기사 누가 봐도 양반차림이었으니
노인이 켕겨 하는 것이 당연했다.
서슬 푸른 양반이라면 젊은 사내의 말을 듣고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관청으로 끌고가 치도곤을 내도
찍소리하지 못할 불충스런 말이었던 것이다.
"아따, 아부지는. 시방 내가 틀린 말 했소?
뼈빠지게 일하먼 먼 소용이냐 말이요."
젊은이는 아버지에게 심통을 부렸다.
"괜찮소이다.
양반이긴 하오만 양반임을 자랑스레내세우고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올시다.
괘념치마시오
그나저나 여긴 들이 제법 넓은데
그래도살기가 피곤하신 모양이지요?"
화담이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들이 넓으먼 뭐한다요? 일만 많고 뺏기는 것만많제.
차라리 나는 것이 적으먼 굶는 것이사 하늘의뜻이려니 허고
체념이나 할 텐디 가을걷이 때 한번와보씨요.
달구지 수십 대가 줄줄이 서갖고 쌀을 싣고가는디,
그걸 보는 우리 맴이 어떻것소.
불이라도 확싸지르고 싶어진당께요.
봄에 빌어묵은 보리쌀 몇 말이
가을에는쌀 한가마로 둔갑허는 것도 미칠 일이제만
이자는 고래 받아 쳐묵음서 소작료라고 주는 것은
쥐새끼오줌만큼도 안 된다요. 빌어묵을!"
"어느 세상에는 안 그랬드냐.
세상살이가 다고역이제.
부자고 가난뱅이고 양반이고 쌍놈이고 다마찬가지다."
노인은 잡초가 무성하게 웃자란 무덤을 덧없이바라보았다.
"노인장의 말이 옳소. 양반이나 상민이나 무어다르겠소
똑같이 흘러가는 강물일 뿐."
"양반이시라 멀 모르는갑는디
양반과 상민은 하늘과땅 차이요.
뭐가 똑같다요?
양반은 따신 이밥에호의호식허고,
상놈은 실컨 일하고도
두 끼 밥도챙겨먹기 어려운디 뭐가 똑같소?
선비님도 한번 배를곯아보시오
이놈의 세상이 똑같이 보이는가."
젊은 사나이가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화담의 말을 쏘아부치고는
그 지긋지긋하다는 일을찾아 가버렸다.
화담의 눈 가에 잔잔한 주름이잡혔다.
"미안허요. 피가 끓는 나이라 불퉁거려 쌓지만
심성은 고운 애니 이해하시씨요이."
"아닙니다. 외려 제가 속끓는 말만 했나 봅니다."
화담은 여전히 그늘진 기색으로 봇짐을 챙겼다.
"덕분에 점심 잘 했습니다. 그럼 고생들 하십시오."
꽁보리로 헛부른 배를 문지르며
농부들은 다시못줄을 잡거나
허벅지까지 걷어붙인 차림으로 논에들어섰다.
화담은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길을재촉했다.
오월의 바람은 제법 선선했지만
태양만은한여름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수양버들이 휘늘어진가지를 흔들고 있는
너른 들 사이로 황톳길이아스라히 이어져 있었다.
**
벌써 땅거미가 내렸다.
"아니, 아직도 안 오셨나?"
남궁두가 낮잠을 실컷 자고 나서 하는 말이었다.
"안 오셨네."
정휴는 가슴을 졸이며 계속 두륜산 쪽을 바라보고있었건만
지함 일행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걸음이 늦어도
장사꾼들이 지나간 지가 벌써 얼만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길이 갈린 것 같네."
"뭐라고? 그럴 리가."
남궁두가 낭패한 얼굴로 말했다.
전우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어쩌는가? 만나기는 아주 틀렸는가?"
"아니네. 방법을 찾아보세."
"그래도 하룻밤은 여기서 지내보세.
혹 아는가.늦게라도 이 길을 지나가실지."
정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더 기다리자고 하자,
두 사람도 따르기로 했다.
내일부터 걸어도 크게 늦을일이 아니었다.
노숙을 하기에도 별 무리가 없을성싶은
초여름 날씨였다.
밤새 정휴가 눈을 붙이지 못하고 길손을 일일이살폈으나
지함은 이튿날 날이 밝도록 지나가지않았다.
"틀렸네. 다른 길로 가신 게 틀림없네."
전우치가 아쉬워하는 정휴에게 말했다.
"그러니 이제는 어쩌겠는가?
어디로 갔는지 무슨재주로 안단 말인가?"
정휴가 낙담하여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남궁두도 손으로 턱을 괴고 곰곰이생각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을 하던 남궁두가 손뼉을 딱하고 쳤다.
"됐네. 만약 그 노인이 화담 선생이시라면."
"화담일 리가 없네. 여기 책이 있지 않은가?"
정휴가 남궁두의 말을 자르면서 <진결>을꺼내보였다.
<홍연진결> 겉장에는 틀림없이
화담이 이지함에게준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정휴가
화담이살아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있는 것이었다.
"내게 좋은 수가 있네.
화담 선생님이 틀림없다면
다음에는 분명 지리산으로 가실 걸세."
남궁두가 자신있게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예측하는가?"
전우치가 묻자 남궁두가 대답했다.
"화담 그분하고 지리산 산천재의 조식 선생하고는
막역한 친구 사이라네.
두 분이 어찌나 친한지
한번만났다 하면 밤이 되는지 해가 뜨는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셨다네.
그것도 모자라서 지리산에서 한번 만나고,
그다음에는 속리산에서 한번 만나고 그런다네.
그러니화담이 여기까지 왔다면 지리산에 가지 않을 까닭이없네.
거기 가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걸세."
세 사람은 지리산으로 가서 화담 일행을 기다리기로했다.
정휴는 이지함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
화담일 리가없다고 생각했으나
별 다른 수가 없어 남궁두의 말을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함을 만날 수있다면,
그래서 이 엄청난 내용이 적힌 화담의
<진결>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화담이 살아서 돌아다니는지야
아직 눈으로 확인한것이 아니지만,
화담이 지함에게 준다는 글이 적힌책이
엄연히 있는 바에야 그런 것은 따질 필요도 없었다.
**
어부의 말로는
이틀이면 갈 수 있다고 한 화순이었다.
그러나 해사 마을을 돌아오느라
꼬박하루 반이 더 걸렸다.
화순땅은 그저 평범한 지세였다.
높지도 낮지도않은 산들이 동서남북을 걸쳐
병풍처럼 두르고 서있어서 더 아늑해 보였다.
지금까지 거쳐온 강진이나보성과는 달리
평야라 부를 만한 변변찮은 들조차보이지 않았고,
어디나 고적한 산속 같았다.
산은 제법 웅장하고 험준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위압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이 깃들어살기에 마침 맞은 정도였다.
험준한 고개를 몇 개 넘어 능주현에 도착한 것은
점심 때가 약간 지나서였다.
고적한 뻐꾸기 울음소리사이로
드문드문 돌쪼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불천탑을깎는다는 스님이 내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산이 질박한 것처럼
절도 대웅전 하나에 요사채하나만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대웅전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떠받치듯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스님. 스님."
운주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선 일행이
몇 번스님을 불러 보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지함 일행은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쓸쓸한 향내가가득한 법당엔
자그마한 미륵불 한 좌가
고적한어둠을 지키고 있었다.
무심코 미륵불을 쳐다보던 지함은
이상한 생각에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바라보았다.
여느 사찰에서는 보지 못한 특이한 불상이었다.
가사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가사는 미륵불이깔고 앉은 범종 위에 얹혀 있었다.
자비가 철철넘치는 다른 불상들과 달리
얼굴을 반쯤 찡그리고있었고,
그 얼굴 가득 세상사 번뇌를 담고 있었다.
"선생님. 미륵불인 것 같은데 좀 이상하지않습니까?
처음 보는 형상인데요."
"흠. 그렇군."
열린 문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미륵불의 고뇌에 찬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는 바람에
미륵의 고통이 더욱 선연히 드러났다.
"언젠가 이 불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예서 만나게 되는구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건 신라때 만들어진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일세.
석가불 다음에세상에 나타나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한다는미륵불이지."
화담이 미륵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륵불은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크나큰 뜻을 세우고
이 세상에 내려왔지만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네.
내가미륵불이다 하면서
도탄에서 건져주려 했더니
외려중들은 미륵불을 알아보지 못하고
달려들어 죽이려 한것일세.
그러니 미륵불은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고만 거지
그래 화가 치민 미륵불은
온 절에서 아침저녁으로 자기를 불러내던 범종을
종각에서끌어내렸다네.
그러고는 미륵의 형상인 가사를 벗어종 위에 얹어놓고
그 위에 다리를 꼬고 올라앉았지.
도대체 이 불쌍한 중생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이 미륵불상일세.
어떤가? 신라적 조상들의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그생각의 깊이가 천길 만길 깊지 않은가?
타락한 불교를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꼬집을 수 있다니
가히놀라운 기지일세."
성리학자인 화담은
지금껏 단 한번도 불상 앞에절을 하거나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화담은 정중하게 옷깃을 여미고
향통에서 길다란 향을세 개 뽑아 불을 붙인 뒤
허리를 굽혀 세 번 예를올리고 향로에 꽂았다.
화담이 사룬 향은 짙은 향기를 뿜으며 타올랐다.
지함도 고뇌하는 미륵불에 대한 진한 애정으로
절을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