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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층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박성현
식물의 서쪽
식물이 창백한 표정을 짓는다.
저 식물의 잎에 그 잎만큼의 넓이로 알몸을 비볐던 바람이 가만히 멈추어 그 표정의 안쪽을 살펴본다.
비어 있으므로, 서쪽은 그늘이다. 그늘의 호수다.
사람이 걸어가고 호수가 뒤척인다. 발자국이 뒤엉켜 반쯤 넋 나간 얼굴로 무딘 무릎을 세우고 있다.
사람의 뒤에서 문이 닫힌다. 햇빛 쏟아지는 창문으로 식물이 기울어진다.
그늘이 오그라들며 호두처럼 단단해진다.
식물의 고단한 오후가 드나들던 서쪽은 무자위가 멈추는 순간이다.
사람의 입술이 석류의 그것처럼 툭, 벌어진다.
잎 없는 나무는 혀가 없는 입으로
귀가 열리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바람은 아무 때나 젖은 손을 내밀어 꽃을 움켜쥐었고, 우악스러운 악력握力으로 목을 잘라냈다. 무기력하게 떨어지는 기척들— 꽃의 잘려버린 반생이 저기 서늘한 그늘에 얹혀 있는 것이다. 한 잎 뒤척일 때마다 꽃은 살기를 흘려보냈고, 바람은 더욱 사나워졌다. 떠밀려 가는 군중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낮의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면도날과 거품 사이로 슬그머니 끼어드는 왼손, 그늘에 서서히 밀려나버린 햇빛, 그리고 표정을 숨긴 채 엉망으로 취해버린 나무들이 뒤죽박죽 섞였다. 혀 없는 입이 먼지 더께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포도나무
환갑을 지나면서 아버지는 버려진 물건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동맥에 쇠파이프를 꽂은 후에 목뼈가 어긋난 것들의 무질서를 제 손으로 거둬들이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이 더 많다고 말렸지만, 그의 침묵은 무겁고 완강했다.
사람마다 눈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물건의 값어치는 제각각이다. 세상을 찌르듯이 보았던 이유가 내 눈의 서늘하고 날카로운 모양새 때문일까.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들이 황사에 말라가며 화석이 되었고 화석은 겹겹이 쌓여가며 빙하기의 내륙을 지나고 있었다.
폐허는 폐허 속에서만 제 속을 여는 것이다.
그의 발바닥 바깥에서 앰뷸런스 문이 다시 닫혔다. 나뭇가지에 좁쌀만 한 흰 이물들이 들어찼어도 끝내 자르지 않았던 포도나무가
낡고 병든 몸을 뒤채며 그의 발바닥을 바라보았다.
*
아침 무렵 문득 포도나무는 목이 말랐다.
바람을 타고 오는 습기를 향해 앙상한 손가락을 뻗었으며 뜨거운 아침 햇살을 위해 더 큰 그늘을 만들었다.
작고 여린 잎은 굳은살을 밀어냈고, 굳은살은 땅으로 떨어져 잎과 줄기로 태어났다.
청록색 알의 군집이, 포도나무가 모든 것을 쏟아내 버린 적멸(寂滅)의 그늘 속에서 새까맣게 타올랐다.
지금 이곳의 쓸쓸함
외투를 집어 들자 살얼음이 떨어진다. 우울은 커피잔 속에 넣을 만큼 충분히 가볍다. 대답은 절박하고 질문은 간단하다.
계획서는 의도적으로 묵살된다. 찢어졌으므로 그 무엇도 확인할 수 없다. 의자에서 쫓겨난 사람은 넥타이를 풀지 못하고 복도 끝 재판관은 결과에 만족한다.
─ 칸마다 붉은 선이 그어져 있군요. ─ 모자이크가 감춘 건조한 목록도 있네요. ─ 무성영화처럼 소리를 잃어버린 분쇄기는 없나요?
도무지 종적을 알 수 없는 도둑처럼 게시판에 걸린 몽타주는 수많은 얼굴이 집약된 것 우리 중 누가 지목되어도 그만이다. 몇 명은 제시된 수수께끼에 골몰했지만
해답은 치밀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유보된다. 누구도 막다른 골목에서는 내리지 않는다. 인쇄되기도 전에 신문은 유효기간이 지나버린다. 수화기 속의 유령처럼 알리바이 없는 우리는
문득 자신이 늙어버렸음을 알아버린 서류철이다. 연극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는 채 앉아 있는 연출가다. 길이는 다르지만 같은 트랙을 질주하는 비명 모든 것이 뚜렷한 창문, 창문의 명랑한 예감이다.
개와 쥐에 관한 농담
살구죽
겹겹이 엉켜 붙어 짓물러버린 미련한 날씨였다. 오줌을 누면 누런 생강 냄새가 났다. 통증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껍고 마른 부스럼이 생겼다. 통증에게 지불한 값이었다. 아침부터 살구죽을 끓이는 할머니는 잠시라도 부엌을 뜨지 못했다. 나는 재봉틀 밑에 웅크려 앉아 재미삼아 실을 풀었다. 재미는 없고 도통 어지럽기만 할 뿐이었다. 목이 잘린 개와 쥐들이 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잠깐이지만 지독한 꿈이었다. 허기진 신발만 몇 켤레 뒤죽박죽. 생강 냄새가 나는 마당의 구정물은 조금씩 길을 내며 흐르다가 시궁 어디쯤에서 합쳐질 것이다. 내심 하수구 속에라도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나는 개나 쥐가 아니어서 불가능했다.
흉터가 생긴 까닭
쥐가 파먹은 듯했다. 긴 앞니로 손등을 꽉 물어버린 생김새였다. 아파도 천 번은 아팠어야 했는데 도무지 통증이 다녀간 기억은 없었다. 저녁은 늘 바쁘게 왔고 밥상머리에서는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입이 있지만 묵묵히 숟가락만 들락거렸다. 밥을 삼키면서 밤새 새끼를 물어 죽인 어미를 생각했다. 사람 손이 탄 것들은 병신으로 자랄 거라 수군댔다. 짐승이 아닌 까닭에 그 마음을 다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을 닫았을 때는 이미 목숨도 끊어졌을 것이다. 개는 며칠 째 마루 밑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처마 어디쯤 묵은 쌀 씹는 소리가 났다. 말벌들이 금간 서까래에 집을 짓느라 소란한 것이다.
얼룩들
똥지게꾼이 다녀갔다. 할머니는 잠결에도 냄새를 맡으시고 숭늉 두 사발 챙기라 하셨다. 뒷간에서 문 앞까지, 문에서 마당 너머 가파른 계단까지 일정한 보폭으로 똥물이 떨어졌다. 개들은 징검다리 건너듯 출렁거리며 뛰어다녔다. 그 소란에 마루 밑에 숨어 있던 집쥐들이 부엌으로 돌아갔다. 큰 놈 뒤에 작은 놈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어디선가 살구죽 끓는 냄새가 났다. 천식이라도 앓는 모양이었다. 소나기가 퍼붓겠다고 생각했다. 얼룩이 마르면서 느릿느릿 땅 밑으로 스며들었다.
박성현 ∥ 1970년 서울 출생 2009년 중앙일보 등단, 서울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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