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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일 49호
김홍한 목사의 이야기 신학
어떤이가 말합니다.
“김목사, 이야기 신학에 쓰는 글 말인데 … 당신 그 글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어?”
“책임질 수 없어요”
“그럼 그 글들이 거짓이란 말인가?”
“나는 말이오 어떤 때는 나도 모르는 글을 써요. 미친 듯이 써요. 그러니 그 글은 내 글이 아니오. 내 글이 아닌데 어떻게 책임져요?”
“……”
“형님은 형님이 설교하는 것 책임질 수 있어요?”
“……”
“책임질 수 있는 말은 설교가 아니오. 자기 말이지. 자기 말이 어떻게 설교일수 있소?”
言行一致가 된 말이라야 참 말이다. 知行合一된 행위가 참이다. 그러나 그 말은 내가 내말을 할 때 해당하는 말이고 자신이 자신의 행위를 할 때 해당되는 것, 목사는 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남의 말을 빌어서 하는 사람도 아니다. 위로부터 받은 말을 하는 사람이다. 위로부터 받은 말이기에 책임질 수 없다. 언행일치 할 수 없고 지행합일 할 수도 없다.
시대가 바뀌고 해가 넘어 가도 여전히
정치인들은 세상을 설계하는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표를 얻기 위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춘다.
언론인들은 사건들을 꿰어 맞추어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군인들은 전쟁 시나리오를 짜고 학자들은 연구실에 처박혀서 쉬운 말들을 어렵고 내용 없게 바꾸느라 여념이 없다.
아내들은 무능한 남편을 성토하기 바쁘고 안과 밖으로 시달린 노동자들은 파업을 계획한다.
희망이 없는 젊은이들은 자살을 꿈꾸고 늙은이들은 오래 살고자 안달을 한다.
성직자는 제자를 찾지만 세상은 그들을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은지 오래이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깔끔하고 세련되었지만 실상은 더러운 슬럼가의 거지같은 삶들이다.
그리고 나 김홍한은< 이야기 신학>을 쓴다.
아! 이 세상에 소망이 없음은 위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어서다. 고작 한다는 말들이 남의 말들 짜깁기하여 나열하는 것이고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현학적인 말들이며 좀 낫다는 말들이 자기 확신에 찬 자신의 말일뿐. … 세상이 어둡고 소망이 없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말이 없어서이다. 사람들의 꿈이라는 것이 욕심껏 꾸는 망상일 뿐 하나님이 꾸어주신 꿈이 없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야 20:9)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으면 아무리 고집불통이라도 그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처럼.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으면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도망할 수 없습니다. 요나처럼.
거부할 수 없고 도망할 수 없기에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한 그자도 천벌을 받아라.“
(예레미야 20:14)
“예레미야여! 당신은 당신 말에 책임질 수 있소?”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내말했소? 나는 내 말을 한 적이 없소.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오, 나는 내가 원치 않는 말을 해야 한다오. 사람들은 나에게 그 말에 대해서 책임지라 닦달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럴 수 없다오. 나는 그저 메신저일 뿐이라오.”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에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의 성취여부에 대해서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취여부도 하늘이 하실 일....
선지자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말들 중에 부도수표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했건만 그것은 그저 간절한 바람일 뿐 성취된 적이 없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막대기 두 개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통일을 예언했건만 역시 부도수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서는 너무도 뻔뻔하게 부도수표가 되고 만 그들의 예언을 그대로 싣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예언이 참 예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이 무슨 조화일까? 분명히 성취되지 않은 예언이건만 그 예언이 참 예언이라니, 그렇습니다. 참 예언은 성취여부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말이 하늘로부터 온 말이라면 그냥 참입니다. 도무지 말 같지 않는 말이라도 하늘에서 온 말이기에 참입니다.
이제 남의 말을 하지 마시오. 당신 말을 하시오.
당신 말도 하지 마시오 위로 부터 받은 말을 하시오.
듣는 이의 입장은 고려하지 마시오.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염려하지도 말고.
싫어할 것이라고 지레 겁내지 마시오.
위로부터 받은 말이 없으면 말하지 마시오.
그래도 직업상 꼭 말해야 한다면
“내가 위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소”라고만 하고 그만두시오.
그것이 한 달이 될지,
그것이 일 년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시오.
하늘이 당신을 메신저로 세우셨다면
기필코 말씀을 주실 것이니 그때 하시오.
그 때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오.
듣지 않는 자들은 내버려 두시오.
어차피 멸망할 자들이라 주님께서 그들의 귀를 막은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소?.
- 성서 연구-
자유인(自由人) (마21:23-2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마21:23)
“너는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느냐?”는 질문은 종들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자유인은 자기 스스로의 권한으로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나다”하셨습니다. 다른 근거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는 무슨 권한으로 말씀하시는가? 일찍이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이기에 스스로의 권한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우리는 자유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그 갖고자 하는 것에 종이 되었습니다.
- 한국 현대사-
자유선언
- 2000년 6.15 공동선언 -
1972년 7월 4일 남과 북이 분단 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조국 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는데 그 첫 번째 내용이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였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공동선언을 했다. 그 첫 조항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1876년 2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강화도조약이 채결되었었다. 그 첫 조항이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이다. 이것이 웬 말인가. 조선은 자주국이라니? 우리나라 조선이 집어넣은 조항이 아니라 일제가 강제로 집어넣은 조항이다. 우리나라 조선은 감히 자주국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철저히 중국의 속국임을 스스로 강조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중국으로부터 떼어 놓을 속셈이었지만 우리는 중국에 대한 철저한 사대사상으로 병들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제가 고맙다. 우리가 그토록 멸시하고 천대하던 이들이 우리에게 자주국임을 일깨워 주었으니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위 조약들은 우리나라의 자유선언들이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의 자유선언이 진정한 자유선언일 수 없었듯이 7·4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도 진정한 자유선언일 수 없다. 미국이 허락하지 않는 자유선언이기에, 미국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자유선언 이기에 지켜질 수 없는 선언이었다. 강화도 조약은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떼어내어 일본이 차지하겠다는 뜻이었고 7·4공동선언은 그럴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독재정권의 대국민 기만술책이었다면 6.15공동선언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열망이었으리라.
자유란 홀로서기 이다. 홀로서려면 정신이 들어야 한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하더라도 정신을 잃으면 설수 없다. 홀로 서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목과 허리가 곧아야 하고 굳건한 두 다리가 힘을 얻어야 한다. 일을 해야 하니 튼튼한 두 팔이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자유하려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무력으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경제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하고자 함이 종교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 하고자 함이 상식이요, 무력으로부터 자유 하고자함이 평화사랑이요, 경제로부터 자유 함이 근면함과 성실함, 그리고 절약과 나눔이다.
-논어 읽기 -
28장 子曰(자왈): 「知者(지자)不惑(불혹), 仁者(인자)不(불)憂(우), 勇者(용자)不(불)懼(구). 」
(공자 왈 “지자는 미혹되지 않고, 인자는 근심이 없으며, 용기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
공자선생님이 말씀하신 知仁勇이다.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無知함을 알았다. 자신이 무지함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큰 겸손이다. 무지함을 알기에 절제할 수 있고 절제할 수 있기에 유혹됨이 없을 것이다.
仁者는 無敵이라 하지 않았던가? 인자는 욕심이 없기에 경쟁자도 없다. 경쟁자도 없고 다툼도 없으니 근심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근심이 없다함은 일반 사람들이 흔히 하는 그러한 일상에서의 근심과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향한 근심으로는 성인군자의 근심과 걱정이 훨씬 더 크고 심하다.
勇者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는데 뒷골목 불량배들의 용기가 아니다. 자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포기할 수 있음이 용기이다.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할 때 관대하게 용서할 수 있음이 용기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용자는 성인뿐이다.
29장 子曰(자왈): 「可(가)與(여)共(공)學(학), 未(미)可(가)與(여)適(적)道(도); 可(가)與(여)適(적)道(도), 未(미)可(가)與(여)立(립); 可(가)與(여)立(립), 未(미)可(가)與(여)權(권). 」
(공자 왈 “같이 공부한다 하더라도 도를 적용하는 데에는 같지 않다. 같이 도를 적용한다 하더라도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입장이 같더라도 일에 비중을 둠에는 다르다.”)
* 權(저울추 권, 일의 경중에 따라 판단하는 저울과 같은 기준)
한 부모에게 난 형제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한 부모에게서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역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필자와 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이들 중에는 교사가 된 이, 공무원이 된 이, 일반 회사생활을 하는 이, 자영업을 하는 이, 학자가 된 이 등 다양하지만 그중에는 불교 스님이 된 이도 있고 증산교에서 그 사상의 체계를 세우고 있는 이도 있고 필자처럼 기독교의 목사가 된 이도 있다. 반면 어떤 이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작했는데 오늘날에는 같은 점에 동료로 서있는 이들도 있다.
기독교의 목사라 해서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자가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가 있다. 사회구원을 주장하는 자가 있고 개인구원에 중점을 두는 자가 있다. 기독교만이 완벽한 진리라는 근본주의자도 있고 타종교에 대해서 관대한 이도 있다. 또한 꼭 禪僧같은 목사도 있고 완고한 유가의 선비 같은 목사도 있으며 신기 들린 무당 같은 목사도 있다. 성격이 불같이 급한 목사도 있고 마음씨 고운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목사도 있다. 항상 깔끔한 정장차림의 목사가 있는가 하면 시골 촌부나 막노동꾼 차림의 목사도 있다. 밤낮으로 엉덩이가 문드러지도록 경전에 파고드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무릎에 굳은살이 붙도록 밤낮으로 기도에 몰두하는 목사도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좌우의 대립이 극심하던 때에 어떤 이는 서북청년단이라는 우익테러단체를 구성하여 그 정점에 있었던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좌익에 투신하여 대구 10월 항쟁을 이끈이들도 있었고 북한에서 고위직에 오른 목사도 있다.
목회활동을 함에 어떤 이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처럼 교회를 이끄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이는 작은 공동체를 꾸려 가족처럼 살아가는 이도 있고 개인교사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에 관심 갖는 이도 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목회관을 갖고 있는 목사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높은 담이 있음을 경험한다. 그래서 아예 처음서부터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회피한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스님이나 다른 종교의 성직자에게도 똑같이 볼 수 있다.
향당 1장 孔子(공자)於(어)鄕黨(향당), 恂(순)恂(순)如(여)也(야), 似(사)不(불)能(능)言(언)者(자). 其(기)在(재)宗(종)廟(묘)朝(조)廷(정), 便(변)便(변)言(언), 唯(유)謹(근)爾(이).
(공자께서 향당에 계실 때는 신실하고 겸손하여 마치 말을 못하는 것 같고 종묘와 조정에서는 변론이 바르고 정확하되 오직 신중하였다.)
* 鄕黨(향당/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곳), 恂恂(순순/ 信實한 모습), 便便(편편/ 변론이 바르고 정확한 것)
공자께서는 가까운 이웃과 친척에게는 지극히 공손하였고 정계에 나가서는 거침없이 변론을 하였다. 마치 오늘날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구민들에게는 겸손하고 친절하지만 정계에서는 거침없이 정쟁을 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필자는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가 이러한 면에서 참 긍정적이라는 생각이다. 과거 봉건사회시대나 권위주의 시대에는 정치인들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지만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는 정치인들이 국민을 섬기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적어도 자기 지역구민들에게는 겸손하고 또 겸손한 모습이다. 비록 민심을 얻어 표로 연결시키겠다는 속셈이지만 권력의 기반이 民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2장 朝(조), 與(여)下(하)大夫(대부)言(언), 侃(간)侃(간)如(여)也(야); 與(여)上(상)大(대)夫(부)言(언), 誾(은)誾(은)如(여)也(야). 君(군)在(재), 踧(축)踖(적)如(여)也(야). 與(여)與(여)如(여)也(야).
(조정에서 하대부와 말할 때는 화락한 모습이었고, 상대부들과 말할 때는 치우침이 없이 엄정하였고, 임금이 있는 곳에서는 신중경건하고 위엄과 예의가 있었다.)
* 侃侃如(간간여/ 和樂한 모양), 誾誾如(은은여/ 中正의 모양), 踧踖如(축척여/ 愼重敬虔의 모양), 與與如(여여여/ 威儀敵中의 모양)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르틴 루터 킹은 흑백의 差別(차별)을 없애고자 노력하였고 또 다른 흑인 운동가 말콤 엑스는 흑백을 엄연히 區別(구별)하자고 하였다. 차별과 구별의 개념은 큰 차이가 있다. 차별을 없애자는 것은 흑인이 백인에 비해서 낮은 대우를 받는 것을 없애자는 운동이다. 그러나 구별은 서로의 다름을 분명히 하여 흑인은 흑인으로 백인은 백인으로 살아가자는 分離(분리)를 말하는 것이다.
공자의 사람대함 속에서 필자는 차별과 구별을 생각해 본다. 공자는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분을 구별하여 대하였다. 부처님도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를 말씀하셨는데 이는 사람을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차별 없이 대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별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처님도 노인과 아이는 구별하여 대하셨다.
5장 執(집)圭(규), 鞠躬(국궁)如(여)也(야), 如(여)不(불)勝(승). 上(상)如(여)揖(읍), 下(하)如(여)授(수). 勃(발)如(여)戰(전)色(색), 足(족)縮(축)縮(축), 如(여)有(유)循(순) 享(향)禮(례) 有(유)容(용)色(색) 私(사)覿(적) 愉(유)愉(유)如(여)也(야).
(집규 시에는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몸을 굽혔다. 들어 올릴 때는 읍하듯이 하였고 내릴 때는 주듯이 하였다. 발걸음을 좁게 딛었으며 발끝으로 살살 걸었다. 예물을 바칠 때는 그 안색이 부드러웠고 사적인 예물을 드릴 때는 편하고 유쾌하였다.)
* 圭(규/ 사신이 외국에 파견될 때 가지고가는 옥으로 만든 패와 같은 것으로 지금의 신임장의 역할을 함), 鞠躬(국궁/윗사람이나 위패 앞에서 존경의 뜻으로 몸을 굽힘), 勃(발/ 얼굴색이 긴장하여 변한다.), 戰色(전색/ 너무 긴장하여 그 얼굴색이 전율하듯이 하는 듯한 안색), 縮縮(축축/ 발걸음을 좁게 딛는다.), 如有循(여유순/ 발걸음을 땅에서 떼지 않고 밀어서 걷는 품), 容色(용색/ 부드러운 안색)
필자는 아내와 아이들로부터 예의 없다는 핀잔을 자주 듣는다. 식당에 들러서는 모르는 음식에 대해서 종업원에게 묻고 가벼운 농담도 건네는 나의 모습이 영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다.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다” 하였더니 아내의 대답이 다른 이들은 다 아는 것을 당신만 모르고 물으니 저들은 당신이 저들을 놀리는 줄 알 것이라고 한다. 내가 건네는 농담에 대해서 아이들은 말하기를 “아빠의 농담은 전혀 재미있지 않고 어색하다”고 한다. “아빠는 늘 그러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였더니 아내와 아이들의 표정 속에서 걱정하는 모습이 분명 하다.
내가 대인관계에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지내왔는데 아내와 아이들의 걱정이 의아하다. 아마도 그들과 나의 세대차이와 만나는 사람들의 문화가 다름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다음호가 50호입니다. 그동안 <이야기 신학>은 거의 저의 글로만 채웠습니다. 50호는 독자들의 글을 싣고 싶습니다. 어떤 내용이든 좋습니다. 글의 양은 한 줄 도 좋습니다. 다만 A4용지 한 장 반을 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1월 12일까지 부탁드립니다.
<이야기 신학>은 82분께 우편발송하고 이렇게 저렇게 만나는 분들에게도 한부씩 드리고 있습니다. E-mail로도 약 30분께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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