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복음주의 기독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양한 전통을 포괄하는 기독교를 가리킨다. 이 기독교 형태는 현재, 신학적인 측면에서 10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아담과 하와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2. 타락 사건은 존재한 적 없다.
3.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4. 지구와 우주는 오래되었다.
5. 미세 조정은 믿음이다.
6. 구약과 신약의 윤리는 다르다
7. 야훼와 예수의 아버지는 같은가?
8. 복음서는 예수 부활에 대해 역사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9. 바울은 예수를 만난 적이 없고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모른다
10. 신약의 윤리나 정치는 현대에 적용될 수 없다.
1번 아담과 하와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과학을 정상적으로 수용하고, 성서 연구를 학술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적어도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아담이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 아니며, 창세기 1-3장의 내용이 순수한 신화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면, 바울이라는 사람에게로 잠시 건너뛰어보자. 그의 예수 대속 교리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한다.
첫째, 주술적인 사고로써, 신비종교의 의식을 따라 저주나 복이 고백과 의례를 통해 실제로 작용한다고 믿는다.
둘째, 죄와 죽음이라는 저주가 실제로 걸려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아담의 타락 사건을 실제 역사로 보았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사건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고 우리가 주장한다면, 그런 전제 위에 세워진 바울의 교리도 틀렸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바울이 아담의 타락 사건을 비유로 보았다면, 예수의 대속도 비유가 되거나 혹은 비유를 사실로 착각하고 세운 잘못된 교리를 세운 것이 된다.
아담의 역사성을 거부하고 진화를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죄와 죽음이란 자연 속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보아야하며, 예수의 대속 교리가 여기에 끼어들여지는 전혀없고, 그 교리는 아무런 맥락이 없다. 예수의 대속 교리는 바울이 고안한 것이고, 복음서에서도 볼 수 없다.
예수의 부활 이야기와 헬라 문화권 내에서의 부활 이야기의 평행은 노르웨이 종교학자, Endsjø의 책에 대한 요약과 평가를 참고하라. (1부-4부)
http://science-infuse.tistory.com/592
http://science-infuse.tistory.com/594
http://science-infuse.tistory.com/595
http://science-infuse.tistory.com/597
이 내용이 보여주는 것은, 헬라 문화권 내에서 팽배했던 육체에 대한 소망의 또 다른 버전이며, 다른 헬라 문화권 내에서 존재하던 다른 철학, 종교를 능가하는 이야기였기에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그에 비해 유대교와는 너무 달랐다는 이유로 정작 유대교 내에서는 거절당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유대인들 가운데 유행했던 예수 집단은 에비온파였으나, 소수파였기 때문에 그 힘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아담의 역사성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이야기는 마무리될 수 없다.
아래는 현대 랍비들이 구약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를 다루고 있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637
아래는 제리 코인이라는 학자의 아담과 하와 시나리오 비판이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631
아래는 제이슨 로젠하우스라는 학자의 원죄 비판이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632
2번 타락 사건은 존재한 적 없다
피터 엔즈라는 보수적인 신학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책 <아담의 진화>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의 발상의 전환이 되는 창세기 해석을 내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가 먼저고 창세기가 나중이라는 것이다. 창세기든 뭐든,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 내용은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야 이스라엘 바벨론 포로기 그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이야기 자체는 오래된 것일 수 있어도, 그것과 기록물과는 시간적 괴리가 존재한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떻게 되는가? 아담은 최초의 사람도 아니고, 신께 선택받은 유인원 중의 한 사람도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메타포이다. 즉, 아담과 하와의 타락 사건은 이스라엘의 포로기를 반영하며, 신명기적 사고, 즉 율법(선악과를 먹지 말라)을 어긴 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뒤죽박죽이고, 연관성이 없는 것을 억지로 이어붙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편집자의 기술은 그럼에도 탁월하다). 톨레도트라는 단어는 개역 번역 기준으로는 주로 '계보니라'로 번역되는데, 다시말해 창세기는 최소 그렇게 톨레도트로 시작하는 열 가지 이야기를 이어붙인 것임을 보여주며, 심지어 우리는 신의 이름이 둘이나 되며, 같은 이야기의 반복까지도 알고 있고(아브라함과 이삭), 때로는 요셉이 두 번이나 팔려가는 것도 알고 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들어간 것이고, 그것은 시간순서상 그것이 첫 부분에 위치할만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었다. 때로는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를 정복할만한 정당성도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노아가 함의 가나안을 저주하는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스라엘이 영광스럽게 정복할 이들의 이름은 '-족속'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창세기는 민족설화로 가득차 있고, 순서는 다소 엉켜있기까지 하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민족 설화로써 창세기를 읽고 되뇌었을 뿐이며, 창세기도 실제 인류의 타락 사건을 알려주는 책이 전혀 아니다.
N. T. 라이트의 창세기는 어떻게 읽혀졌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ffWo7nzL66o&feature=youtu.be
피터 엔즈의 창세기를 이스라엘 역투사로 읽기
http://biologos.org/blogs/archive/adam-is-israel
3번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땅에서 생명을 경험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특권, 행운, 심지어 은혜라는 말 외에는 내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죽음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존재의 생성, 변화, 소멸은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성서는 죽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분명 그것은 부정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조금씩 인식의 변화가 있다. 초창기 구약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단명에 대한 것이다. 장수, 살아있는 기간 동안의 행복 등이 야훼의 선물, 돌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포로기를 지나며, 페르시아 종교와의 접촉 그리고 한편으로는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동안 마카비 혁명시 수많은 순교자의 목격 등은 내세에 대한 신앙을 키웠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 만약 신이 세계를 창조했을때, 그러한 죽음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 고유한 것이라는 생각이 거부될 때 일어나는 딜레마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글을 참조하라.
바이오로고스의 Common Questions, "Did death occur before the fall"
http://science-infuse.tistory.com/29
로날드 오스본의 미번역 도서 서평
http://science-infuse.tistory.com/11
다만 하나의 질문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이 문제는 다른 섹션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4번과 5번 지구와 우주는 오래된 것이며 미세조정은 믿음이다
지구와 우주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수많은 서로 다른 그리고 독립적인 관측 방법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우주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오래'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과학적 측정 방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성경의 연대를 계산하면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성경의 연대를 계산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일로 볼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물고(출애굽은 이집트 역사 속에서 있었던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심지어 다수의 성경 시대 가늠은, 지구 연대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방법을 취하는 고고학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지구나 우주의 나이를 유추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없다.
그러나 철학적인 질문이 두 가지 떠오를 수 있다.
첫째, 왜 무가 아니라 유인가?
둘째, 미세조정이란 존재하는가?
안타깝게도 성경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조의 두 가지 개념이 존재한다.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창조는 개념이 다르다. 창세기의 창조는 태고의 혼돈과 심연과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한 것처럼 말한다. 고대 신화의 여느 투쟁이 창조 이야기에 존재하지 않을 뿐, 유일신임에도 여전히 투쟁의 대상은 존재한다. 야훼는 심연과 싸우고, 베히못과 싸우고 리워야단과 싸우고, 바알과 싸우고 수많은 투쟁을 한다. 앞서 언급한 출애굽 이야기를 이집트 신들과의 투쟁으로 읽을 수 있다. 즉, 고대 신화의 신들의 투쟁이 당연히 구약에도 존재한다. 한편, 요한복음은 로고스-창조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이미 존재하는 일종의 천상계를 상정하는 것이므로(히브리서를 참고하라),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한다고 볼 수 없다. 요한복음 로고스-창조는 데미우르고스 신화의 반영이다. 다시 말해, 안타깝게도 성경은 무에 대해서 고민을 한 적이 없다. 무에 대한 고민은 최근에 등장한 것이며, 신학에서는 특히 어거스틴이 소극적으로 결핍을, 그리고 최근에는 실존주의 철학 이후 바르트가 무를 일종의 악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이 새롭게 해석된 것이다. 13세기 이전까지 무로부터의 창조는 교리도 아니었고, 당시도 그것은 일종의 신의 전능에 대한 보다 높은 경외감의 반영일 뿐이었다.
미세조정은 우주의 상수가 지금과 달랐다면, 생명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기타의 현을 튜닝해야 제대로 된 음을 낼 수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 조금만 잘못 감으면 음은 엉망이 되고 화음은 더욱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믿음이다. 우주는 우리와 같은 생명체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블랙홀을 생성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며, 따라서 더 나은 미세조정이 있었다면 우주는 지금 우리와 같은 생명체를 위해 보다 호의적인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은' 생명체라는 표현은 워터베어(Hypsibius dujardini)나 박테리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인간이나 일반적인 고등 생명체라면 당장 죽을 환경이라도 앞서 언급한 생명체는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아래 첫 번째 영상 참조)
리처드 캐리어라는 무신론 역사가는 Why I am not a Christian?이라는 서적에서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든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가위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무엇을 위해 설계된 것인지 모른다고 할 때, 당신은 그것이 드라이버라는 역할을 위해 설계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가위로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이버처럼 사용될 수 없는 가위를 설계하는 방법 같은 건 없다. 그런데 곧 누가 나타나서 이 가위가 종이를 자를 때 훨씬 더 유용하게 설계되었음을 보여주고, 드라이버로 설계되었다고 보기에는 최선이 아님을 이야기 해주었다면, 그때도, 그 가위가 드라이버 용으로 설계되었다는 이론을 고집해야 할까? 아니다. 이내 당신은 그것이 종이를 자르기 위해 설계된 것이며, 드라이버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그저 실제 설계의 부산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주를 관찰할 때 직면하는 사실이다. 우주는 생명체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블랙홀을 위해 설계된 것이며, 생명은 그러한 우주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만약 우주가 지적으로 설계되었다면, 분명 그것은 우리를 위한 설계가 아니다.”
미세 조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세 링크를 걸어놓는다.
미세 조정을 긍정하는 바이오로고스의 Common Questions 중, "What is fine tuning of universe, and how does it serve as a pointer of God"의 번역이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32
미세 조정을 부정하는 반박 영상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10fDLfSV88
https://www.youtube.com/watch?v=sh_-e8YC1as
6번 구약과 신약의 윤리는 다르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를 동시에 다루어야 한다. 첫째, 윤리란 무엇인가? 둘째, 구약의 윤리란 무엇인가? 셋째 신약의 윤리란 무엇인가? 논의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 윤리란 무엇에 대한 의무/금지 규정을 말한다. 구약의 윤리란 토라의 규례이며, 신약의 윤리란 예수의 급진 윤리와 목회서신 시민 윤리로 또 한번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구약의 윤리인 십계명을 포함한 토라의 수많은 규정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구약의 윤리를 의식법, 도덕법, 시민법으로 구별하며, 의식법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고, 시민법은 당대의 사회를 반영하며, 도덕법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약 윤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유대교인이 되거나 혹은 율법폐지론자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과연 얼마나 유효할까?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구약의 윤리는 그 셋이 모두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메리 더글라스라는 학자는, 제자리를 벗어난 것을 부정한 것이라 주장한다. 예를 들면 쓰레기가 휴지통이 아닌 길거리나 방에 있다면 그것은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여러모로 사안들에 들어맞지 않는다.
정결과 부정이라는 개념이 구약의 윤리의 규례의 핵심이다. 정결과 부정이라는 표현은 다소 와 닿지 않는다. 청결과 오염이라고 표현해보자. 구약에서 청결의 개념은 실제로 청결한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실제로 제사장의 의무는 청결을 공동체 내에서 유지하는 것과 관계된다. 성관계, 출산, 기타 생리 현상, 피부 질환 등은 ‘부정’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청결’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일종의 종교 의례를 요청한다. 식습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터부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모른다. 이것을 알 만한 정보는 우리에게 없다. 따라서 단순히 구약 윤리를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구별할 수 없다. 더욱이 비록 고대 근동 여느 지역과 달리, 신과의 계약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띌지라도, 계약이라는 형식 그 자체와 내용은 당대의 수메르, 바빌로니아, 이집트, 히타이트, 가나안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구약의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십계명일수 있지만, 그보다 핵심은 할례와 안식일 준수이다. 왜냐하면 당시 윤리는 유대인을 구별해주는 독특한 방식으로도 작용했기 때문이며, 그 둘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소위 ‘무임승차’를 막기 위한 종교적인 조치이다. 따라서 안식일이 4계명에 포함된다면, 십계명과 할례를 우리는 예수 및 바울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윤리가 일치하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예수에 의해 완전히 부인된다. 예수가 신이며, 신의 형상이다. 그리고 예수는 신의 호칭을 스스로 취하고 안식일을 범한다. 만약 신학적으로 십계명이 예수에 의해서 부인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정경 복음서를 부인해야 한다. 부모 공경부터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나머지 여섯 계명은 예수에 의해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혹자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떠올리며,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구절로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주장이며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유대교와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들은, 구약의 모든 규례를 수정해야 했다. 기독교 공동체는 수정 이전의 규례를 지키지 않기 위해 산상수훈을 선포한 것이다. 할례는 힘을 잃고 안식일의 준수의 날짜도 방식도 완전히 달라진다. 다시 말해 예수의 윤리는 유대교의 십계명의 형식을 빌려 전면 개정된 것이다. 의무/금지 규정의 구체적인 실천의 의미에서 구약과 예수의 윤리는 다르다. 그리고 짧게 짚고 넘어가자면, 예수의 급진적인 윤리는 그의 급진적 종말론에서 온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로 알려진 서적들에 나타난 윤리는 예수 윤리와 마찬가지로 급진적 종말론에 기초한 급진적 윤리이다. 그러나 소위 목회서신(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의 윤리는 친사회적인 윤리로 그의 다른 편지와 상반된다(아마도 바울이 이 편지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약의 윤리는 이 땅의 삶이 곧 끝이날 것이라 보는 종말론에 입각한 급진 윤리와, 종말은 먼 이야기이며, 따라서 사회 속에서 적응해야 하는 시민 윤리로 구별된다. 우리는 구약 윤리의 차이뿐 아니라 신약 윤리의 차이조차 해석할 수 없다.
물론 뻔한 윤리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그러한 보편적 윤리는 진화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러한 것을 동물계에서도 유효하게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윤리는 기본적으로 동물적인 것이며, 그것의 구체적인 적용은 시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정신’의 일치를 찾는다면, 그것은 구약과 신약 뿐 아니라 어디에서라도 ‘정신’의 일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천적인 의미에서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아래는 네덜란드 동물학자 프란스 드 발의 테드 강연 영상이다
https://www.ted.com/talks/frans_de_waal_do_animals_have_morals
아래는 호프스트라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존 티한의 도덕 및 종교인지 과학에 대한 서적에 대한 요약 및 서평이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402
http://science-infuse.tistory.com/403
7번 야훼와 예수의 아버지는 같은가?
예수의 ‘아버지’는 구약 내러티브와 달리 결코 실제로 ‘등장한 적 없다’는 사실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야훼는 적극적으로 나타나 수많은 행위의 주체가 되고, 말하고, 계시하고, 자연을 움직이는 등, 이야기 속에서 적극적인 하나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의 아버지는 단 한 번 예수의 세례가 받을 때 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비교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또한 야훼와 예수가 아닌, 야훼와 정경 복음서 속 예수가 말한 ‘아버지’를 비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야훼에 대한 예수와 바울의 충실함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야훼를 자신의 아버지로 주장했고, 바울도 역시 새로운 계시를 받았을 뿐 여전히 이스라엘의 야훼를 자신의 신으로 섬긴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야훼는 바벨론 포로 이후 형성된 유대교의 신일 것이다. 다만 성전이 파괴된 이후 자연히 다양한 신 이해가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바울 시대의 유대교의 다양성에 대한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당시 유대교는 ‘다양했다’는 결론만 내리게 할 수 있을 뿐, 당시 유대교는 ‘어떠했다’고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단, 그 다양한 유대교 공동체의 인식에는 이스라엘의 야훼가 여전히 유일신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은 예수와 바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 이해의 관계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와 바울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같은 신을 섬기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며, 동시에 이슬람교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사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신론이 각각 기독교와의 신론보다 제일 가깝다)
기독교의 신론, 삼위일체는 따로 논의할 주제이다. 안타깝게도 신구약 통틀어서 삼위일체는 성경 그 자체가 주장하는 바가 전혀 아니다. 만약 마태복음과 고린도후서의 구절을 들어 누군가 삼위일체를 주장한다면, 말씀보존학회같은 편견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래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알라’라는 책의 서평이다.
아래는 스탠포드 철학백과의 삼위일체 교리 발전사 번역이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390
http://science-infuse.tistory.com/392
http://science-infuse.tistory.com/396
http://science-infuse.tistory.com/401
http://science-infuse.tistory.com/407
http://science-infuse.tistory.com/409
http://science-infuse.tistory.com/410
8번 복음서는 예수 부활에 대해 역사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사람의 책, “누가 돌을 옮겼는가?”는 그 책 내용 뿐 아니라 바로 그 저자의 저술 동기도 큰 인상을 남긴다. 모리슨은 서론에서 밝히길, 자신은 예수 부활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조사를 했지만, 마침내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책을 완성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리 스트로벨이라는 기자도 몇몇 기독교 학자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몇 권의 시리즈 서적을 출판하여 예수의 육체 부활의 역사성을 변증했다. 스트로벨도 모리슨처럼 본래 예수의 육체 부활의 역사성을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그것을 믿게 된 사람이다.
그 외에도 미국에서 대중적인 토론가로 활동 중인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다방면으로, 무신론자나 기타 영역의 학자들과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 토론에 나서는 자로, 주로 신의 존재, 고통의 문제, 예수의 육체 부활의 역사성을 두고 토론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독일에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라는 신학자의 지도 아래 예수의 육체 부활의 역사성 논증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기에, 그의 가장 자신 있는 토론 분야는 예수의 육체 부활의 역사성일 것이다. 그 외에도 비교적 국내에 잘 알려진 부활의 역사성을 논증하는 인물로는 톰 라이트, 리처드 보쿰, 게리 하버마스, 마이클 리코나 등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논증은 빈약한 근거와 논리비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복음서를 오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복음서가 예수 부활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기록했는지, 아닌지 다루어보자.
오늘날 정경으로 분류되는 네 권의 복음서는 너무도 다른 제각각의 부활절 이야기를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동일한 사건을 네 명의 기자가 각자의 시각으로 쓴, 즉 같은 사건에 대한 네 가지 기사에 비유하며 사소한 혹은 표면적 차이는 실제 사건을 부정하지 못한다고 논증한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과 그의 시체가 드물게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져서 유대인에 의해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도무지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의 기록이라 할 수 없는 불일치가 있다.
사본학적으로 볼 때, 마가복음의 본래 결말은 16장 8절로,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갔으나,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두려워’ 도망친 것으로 끝난다.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가 부활했음을 극적으로 보여줄 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초기의 기록은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갔으나 비어있었고, 무엇보다 여자들이 ‘불순종했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은 여자들이 천사가 돌을 굴려내는 것을 목격했고, ‘갈릴리’로 가라는 천사의 명령을 듣고 ‘기쁨’으로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났으며, 열한 제자가 ‘갈릴리의 한 산’에서 예수를 만나고 소위 대위임령을 받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세상 끝 날까지’라는 말과,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는 표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마태복음은 아마도 명령 후 곧바로 예수가 승천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갈릴리로 가라’는 명령이, ‘갈릴리에 계실 때’했던 말씀이 기억나지 않느냐로 바뀌었고, 엠마오의 두 제자뿐 아니라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열한 제자가,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만난다. 요한복음은 너무도 다른 이야기라 굳이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동일한 기사라면, 세부적인 묘사는 다를 수 있어도 ‘목격자’의 반응과 ‘목격 장소’가 이렇게 다를 수 없다. 단순히 관점의 차이로 얼버무릴 수 있는 성격이 전혀 아니다.
이런 차이는 신학적 관점 때문에 발생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산’이 중요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이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 외에도 마태복음의 예수 십자가 처형을 기술하는 장면에서, 예수의 부활 이후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라는 기술이 있는 것처럼(역사적 사건이라 하기 가장 어려운 서술 중 하나), 즉, 각 부활절 이야기는 어떤 신학적 가르침을 주려는 목적으로 ‘각색된’ 서술이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정경’의 기록을 역사 기술로 오해했을 뿐 아니라 분석에도 실패했다. 이것을 초기 기독교 문서들, 외경이나 나그 함마디 문헌 등으로 확장할 때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아래는 최근 영화화된 리 스트로벨의 문제점에 대한 텍사스대학교 종교학 교수 브렌트 란도가 쓴 비판 사설이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586
아래는 게르트 뤼데만의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성 요약 및 리뷰이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572
http://science-infuse.tistory.com/575
http://science-infuse.tistory.com/576
http://science-infuse.tistory.com/578
http://science-infuse.tistory.com/580
http://science-infuse.tistory.com/582
9. 바울은 예수를 만난 적이 없고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모른다
제임스 테이보라는 학자는 자신의 최신간, Paul and Jesusl의 서문에서 “바울은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Paul never met Jesus)라는 한 문장(정확히는 네 단어)을 설명하기 위해 그 책을 썼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예수를 만난적이 없다는 것은 성서 그 자체의 기록에 의존한 것이기도 하다.
바울이 실제로 쓴 것으로 볼 수 있는 편지는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후서(일부),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로마서, 빌레몬서뿐이며, 나머지는 바울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편지들에서 우리는 바울이 주장하는 예수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명확한 단서는 있을까? 그것 역시 하나도 없다! ‘명확한’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그의 편지 중 세 구절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로마서 1장 3절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갈라디아서 1장 19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갈라디아서 4장 4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것은 ‘명확한’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단서처럼 보이지만, 헬라어 원문을 분석할 때 문제는 다소 복잡해진다.
우선 로마서 1장 3절과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는 ‘나셨고’ 혹은 ‘나게 하시고’ 라는 같은 동사가 공통적으로 문제시 된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기노마이’로써, 일반적으로 become 혹은 be born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아담이 ‘생령’이 될 때 사용되었던 동사이기도 하다. 바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만들어졌다인지, 태어났다인지 우리는 모호함에 놓일 수 밖에 없다. (바울은 실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할 때는 '겐나오'를 사용한다. 로마서 9장 11절, 갈라디아서 4장 23절 등)
한편,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은 여러모로 또한 모호하다. ‘아델포스’는 일반적으로 문자그대로 형제를 뜻하지만, 바울의 어법을 보면, ‘형제’는 혈육이라기보다 꽤나 종종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을 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9장 5절은, ‘주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물론 특정 교리를 위해 야고보를 친형제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논외일지라도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에게서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서 암시하는 ‘명확한’ 단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에 대한 역사적 사료로써 ‘어느 정도’의 가치만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바울이 기록한 편지와 사도행전의 기술이 간혹 불일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바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예수에 비해서는 훨씬 많이 알고 있다. E. P. 샌더스는 바울이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났다고 보고, 대략 62/64년 로마 감옥에서(혹은 그 이후 풀려나) 죽었으리라 본다. 바울의 회심은 역사가들에게 꽤나 중요한 지점이다. 그가 다마스커스에서 회심을 했다는 사도행전 기록을, 바울 자신의 고백과 일치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바울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닌 ‘천상의 존재’(celestial being)라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우선, 바울의 회심에 대한 역사적, 심리적 분석은 잠시 제쳐두고서라도, 우리는 바울이 기술하는 예수는 전적으로 ‘천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스스로 예수에게서 ‘계시’를 따로 받았다고 주장한다. 누가는 바울이 본 예수는 부활-승천 후, 빛 가운데 혹은 아버지의 우편에 있는 존재임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여준다. 누가의 기록이나 바울의 고백에서 이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바울의 이 예수 경험이 ‘사도직의 조건’으로 작용하며, 실제로 바울 스스로도 자신의 그 경험을 다른 제자들과의 경험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바울의 편지보다 아무리 빨라도 십수년 뒤에나 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의 ‘천상의 예수’ 경험은 다른 사도들의 경험과 동일시 되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원초적인 기록은 가설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들이 가설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예수 어록이라 불리는 가설적인 문서 Q일 뿐이다. 즉, 시간상 아마도 바울뿐 아니라, 다른 신약의 서신들, 그리고 심지어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편집자들도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도마-유아복음(Infancy Gospel of Thomas)이라는 2세기 나그함마디 문서가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예수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 그것이 실제 예수의 어린 시절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왜 이런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생애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성행했을까? 이것은 추측이지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도마-유아 복음뿐 아니라, 초기에는 훨씬 더 많은 버전의 예수의 생애에 대한 다양한, 그리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며, ‘부활’이라는 내러티브는 가장 인기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바울대로 또 다른 ‘천상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다음은 제임스 테이보의 Paul and Jesus(2013)에 대한 서평이다.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92150
다음은 E. P. 샌더스의 Paul(2015)에 대한 서평이다.
http://science-infuse.tistory.com/48
http://science-infuse.tistory.com/49
다음은 리처드 캐리어의 ‘신화적 예수’에 대한 강의이다.
10번 신약의 윤리나 정치는 현대에 적용될 수 없다
기독교인은 수많은 행동 근거, 특히 거의 대부분의 윤리의 근거나 논리를 성서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 문제는 윤리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부터 실제 같은 성서를 읽으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갈등을 일으키는 현실에서의 정치적 조정까지 굉장히 복잡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하게, 선과 악, 그리고 그것의 실제 실천으로 윤리나 정치라는 단어를 국한해서 사용해보고자 한다.
신구약으로부터 윤리를 찾는 사람들 중, 이전에 언급한 보편적 윤리 정신과 실제 당대의 실천간의 착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약자에 대한 환대의 정신이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급진적 태도까지,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성서에서만 드러난 가르침이라는 착각을 한다. 우리는 전혀 유대교-기독교적 교류가 없는 묵자에게서도 겸애를 발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성서가 말하는 윤리와 정치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 많은 이가 구약과 신약의 윤리의 차이를 말하기에, 여기서는 신약만 다루어보자. 이것이 현대에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신약의 윤리는 앞서 이야기했듯, 자체적으로 예수와 바울의 급진적 윤리와 바울 후대의 시민(혹은 브루주아) 윤리로 구별될 수 있다. 간혹 신약의 윤리를 다루는 서적들에서, 불일치를 발견하는 경우는 이 둘을 억지스럽게 조화시킬 경우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신약은 ‘군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급진적 윤리는 군대를 거부한다. 그러나 시민 윤리는 정의로운 전쟁을 인정한다. 신약 성서 속 이 둘의 신학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삶의 가치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립’할 수 밖에 없다. 이 대립을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나 상반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주장해야 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둘째, 시대적 상황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노예제도, 여성차별, 성소수자 혐오, 독재에 대한 충성 등, 우리는 그것이 성서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할 수 없다. 과연 해석이 성서를 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해석에는 편견이 들어가기 마련이라 할지라도, 현대에 전혀 맞지 않는 가치를 이끌어내는 것은 굉장히 수고스러운 작업이다. 만약 성서가 처음부터 오늘날의 윤리적 사고보다 훨씬 나은 것이었다면, 애초부터 로마 세계에서 인권의 문제 등은 이미 애초에 해결되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수많은 해방신학‘들’이 존재하기에, 그것들이 일종의 세계 속에서 인권과 윤리와 정치적인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것은 주도적인 역할이라기보다, 성서에 기반한 기존 신학의 해체라는 소극적인 부분에서 작용했다. 우리는 ‘인권’이라는 것이 다소 신화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 인권의 담론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주관적인 개인과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공감’이라는 비논리적인 정서이다. 성서를 윤리나 정치 결정의 주된 권위로 삼는 일은 때로는 방해 내지는 무익한 언어가 된다. 실제로 우리는 인권과 종교의 자유의 갈등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있다.
셋째, 예수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폭력성에 대한 문제이다. 기독교는 신의 속성을 사랑과 정의로 규정하기 위해 십자가를 ‘요청’한다. 안셀무스 이후, 천년 간 기독교는 이러한 당위성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으나, 이것이 주술과 폭력에 의거한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르네 지라르의 분석, 그리고 그의 분석을 품은 라이문트 슈바거 이후, 최근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는 한스 부르스마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폭력적 속죄’(nonviolent atonement)에 대한 논의는 꽤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이것이 어떻게 다른 기독교 신학과 조화를 이룰지, 아니면 기독교 신학 전체를 해체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페미니즘 신학에서 대리적 형벌 교리를 신의 아동학대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페미니즘’에서 완성(일관성있는 체계를 잡는다는 의미)될지, 아니면 페미니즘 ‘신학’에서 완성될지 알 수 없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작고한 기독교 비판가이자 신무신론가로 유명하는 이는, 이를 ‘천상의 독재 국가’ 내지는 ‘전체주의’라고까지 표현한다. 사형, 처벌, 심지어 무고한 자의 필연적 죽음을 당연한 교리로 받아들이는 바울의 근본 정신 자체가 윤리적으로 문제시 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는 배타성을 버릴 수 없는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다. 즉, 겸손과 관용의 정신은 우월한 자의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위선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윤리는 개인, 상황, 정서와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 텍스트 자체는 현대 윤리/정치 담론에 무의미할지라도, 성서를 읽는 개인은 그렇지 않다. 성서 그 자체가 아닌 성서를 읽는 개인은 분명 이 현대 윤리/정치 담론에서 마땅히 자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고, 심지어 그 개인은 성서를 자기 주장의 근거 중 하나로 내세울 수도 있으나, 그것은 다른 개인이나 개별 상황에 대한 고려가 있고,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 때, 유효하게 작용하지만, 성서 텍스트 그 자체는 그럴 수 없다.
아래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기독교의 비윤리성에 대한 비판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S9cw2pb0ok
아래는 속죄의 폭력성에 대한 개요와 중도적인 책을 소개하는 로저 올슨의 네 편의 포스팅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