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Creek)
그리스는 유럽 남동부 지중해에 돌출한 발칸반도 남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토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에게 해(海)가 있고 서쪽은 이오니아 해(海)가 있다. 따라서 지중해 동부에 면한 해안에는 수많은 섬과 바위가 흩어져 있다.
총면적이 한반도의 2/3 정도이며 수도는 아테네이다. 주요 도시로는 테살로니키, 파트라, 이라클리오, 라리사, 볼로스, 요안니나, 까발라, 로도스, 세레스가 있다.
종교는 전체 국민의 98%가 그리스(회랍)정교를 신봉하고 있어 사실상 국교나 다름없다.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봄가을은 가벼운 자켓이 필요하며 겨울은 서울보다 따듯한 대신 습하다고 한다.
현대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땅은 민주주의와 서양 철학, 올림픽, 서양 문학, 역사학, 정치학, 수많은 과학적ㆍ수학적 원리, 희극이나 비극 같은 서양 희곡 발상지이기도 하다.
다섯 째날(5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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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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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없을 것만 같이 똑바로 뻗친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차창으로 바라다 보이는 그리스의 전원풍경은 지금까지의 터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멀리 구릉진 푸른 들판의 언덕에는 빨간색의 기와지붕과 하얀 벽들의 집들이 빈틈없이 밀집되어 있는 마을 들이 동화 속의 그림과 같았다.
이상하게도 마을들이 평야지에 있지 않고 대부분이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에게해(海)에 가까운 지역은 외세의 침략이 잦은 곳이므로 집들을 낮은 평야에 짓지 않고 멀리 바라 볼 수 있는 언덕에 성(城)을 쌓고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연히 사람들이 성 주변에 집들을 짓고 한 데 어울려 살며 적의 침입을 대비하였을 것이다.
마침 5월이라 도로변은 물론 들판이 온통 노란 로뎀나무 꽃과 붉은 장밋빛과 같은 오리엔털 파피꽃(일명;화초 양귀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녹색의 들판과 어울려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으나 버스가 멈출 수가 없어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까발랴(네압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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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압볼리(까발랴)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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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를 안내해 줄 가이드는 그리스에 와서 산지가 20여년이 된 베테랑 가이드였다. 버스 이동 중에 그리스에 대한 예비지식을 상세하게 안내하는 말을 들으며 그리스 까발랴(네압볼리) 항구가 있는 도시로 향했습니다.
네압볼리(Neapolis)는 마게도냐의 빌립보의 항구인데,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를 출항하여 이 항구에 상륙했다(행 16:11). 오늘날에는 카발라(Kavalla)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두라기움에서 동쪽으로 뻗은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의 터미널로서 수륙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일행은 곧바로 까발랴에 도착하자 네압볼리 바울도착기념교회 앞에서 버스를 하차했다.
바울도착기념교회 앞에서 사진촬영을 한 후에 일행은 부둣가 길을 걸어서 숙소인 호텔(Oceanis Hotel)에서 여장을 풀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까발랴 항 부두 길을 산책하며 그곳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여섯 째날(5월21일)
빌립보 유적지
오전 8시에 호텔을 출발한 일행은 빌립보 유적지가 위치한 마게도냐 스트림몬 강과 네스토스 강의 경계 에게해(海) 내륙 약 16km 지점인 간지테스 강의 강변으로 이동했다.
루디아 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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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디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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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49년에 빌립보는 바울과 실라가 2차 선교 여행 때에 첫 발을 디딘 곳으로 유럽에 전도의 문을 열은 곳이다(행16:). 그 첫 열매의 교인이 자주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신도였다(행16:14).
루디아의 고향은 두아디라이며 루디아라는 이름은 두아디라의 리디아(Lydia)에서 비롯되어진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충청도 출신의 아낙네가 새로 이주해오면 이름 보다는 충청댁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루디아도 이렇게 불렸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유물인 편지가 1972년 빌립보에서 발굴 되었다. 그 내용에는 두아디라 태생의 자주색 염색업자 안티오쿠스에게 빌립보 시의 후원자라는 명예를 준다는 것이다.
이 편지의 주인공인 안티오쿠스가 루디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이름이 루디아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는 유물이라 여겨진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도바울과 빌립보 지역의 기독형제들에게 자신의 집까지 개방할 정도의 헌신적인 루디아의 생활 태도와 그보다 더 그녀의 가정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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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디아 교회 세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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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도에 세워진 루디아 기념교회당 내부 정면에는 간결하게 사도바울과 루디아가 스테인 글라스로 그려져 있다.
루디아기념교회 앞에는 간지테스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내(川)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물이 많이 흐르고 있었다. 바울은 이 강가에서 루디아를 만나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현재도 그곳 강가 세례 터에서 세례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루디아 기념교회에 들어서자 그곳에 촛불 헌화대가 있어 헌금을 하고 초에 불을 붙여서 헌화하며 기원을 드렸다.
사도 바울과 실라의 감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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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과 실라 옥(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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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장16절에서 40절로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여점장이에게서 귀신을 쫓아 고쳐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인이 자기의 수입이 없어진 것을 원통히 여겨 군중을 충동하여 송사하여 법관에게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
이 감옥에서 사도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나서 문고리가 벗겨지고 문이 스스로 열려 놀라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전도하여 온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했다. 그 감옥 터로 여겨지는 감옥의 유적이 에그나티아 대로의 옆에 남아 있었다.
암비볼리의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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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피볼리의 사자상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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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마게도냐의 두 번째 도시이다. 스트림몬강 유역에 로마의 에그나티아 가도가 있는데, 그 길옆에는 BC4세기경에 세워진 사자상이 있다.
사자상은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형제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로 가는 도중 이 암비볼리의 사자상 앞을 지나갔을 것이다(행17:1).
아볼로니아의 비마(B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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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볼로니아의 비마(강단)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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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볼로니아는 에그나티아 가도의 다른 쪽 끝, 암비볼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그리스의 북쪽 지방 마게도냐의 수도 데살로니가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볼로니아에는 회당이 있었다는 유적과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지라(행17:1)” 라는 성경말 씀이 새겨진 비마(강단)가 남겨져 있었다. 이곳에도 바울기념교회가 있다.
데살로니가(Thessaloniki)
데살로니가는 현재 그리스의 실로니키만에 위치한 옛 마게도냐의 중요 항구로 현재 데살로니키 도시이다.
주후 49년 늦은 가을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왔다(행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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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화이트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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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곧 바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다(행17:1:-3). 이어지는 성경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행17:1-10), 그중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으나 반면에 핍박도 일어나서 바울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했던 아손 일가가 큰 변을 당했고, 기독교인들은 로마황제를 예배하지 않고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를 섬기는 자들이라고 고발을 당했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의 신변을 걱정한 나머지 밤중에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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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디미트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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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역사적인 교회들이 많이 남아 있는 데 그 중 대표적인 교회는 성 디미트리우스 교회이다.
이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직전에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 장소에 세워진 교회라고 한다. 주후 410년대에 건축되었으나 1917년 데살로니가를 휩쓸었던 대화재로 파손되었으며, 지금은 교회의 지하 부분이 원형으로 남아 있다.
데살로니가 시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화이트 망대(The White Tower)이다. 화이트 망대는 15세기에 에게해(海)를 바라보는 연안에 방어를 목적으로 건축된 망대이다. 지금은 데살로니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데살로니가 순례를 마치고 일행은 베뢰아 사도 바울기념유적지를 향했다.
베뢰아 사도 바울 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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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사도 바울 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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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는 데살로니가 서쪽으로 40km 지점 비르미우스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마게도냐의 도시이다. 오늘날의 지명은 베리아로 베뢰아가 데살오니가 처럼 상업도시의 번성함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장색 세공업과 농업, 석공업의 중심지로는 그 이름을 떨친다고 한다.
주후 51년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난 후 베뢰아로 들어가 그곳 회당에서 전도를 했다(행17:10).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12),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13). 많은 베뢰아의 청중들은 말씀을 간절히 듣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했다. 이때 많은 그리스인들도 신자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 소바더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이 방해하고 선동하는 바람에 바울은 또 다시 이 도시에서도 추방을 당하였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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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기념교회에서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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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마음이 너그러운 것 같았다. 사도 바울의 기념유적지가 있는 마을에 거주하는 한 노인이 일행들에게 와서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자 집으로 가서 오렌지를 가져다주며 먹으라고 권했다.
일행은 발걸음을 서둘러서 바울사도 유적지기념교회를 떠나 수도원이 집성촌(村)을 이루고 있는 마테오라로 이동했다.
마게도니아에서 마테오라까지는 상당히 먼 길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버스로 4시간(약 270km)은 걸렸지 않나 생각된다.
더욱이 가는 길이 우리나라 강원도 대관령보다도 더 높은 해발 2900m의 올림보스 산의 험준한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가야 했다. 고지대의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현기증과 멀미가 날 지경이었지만 다행한 것은 고가의 그리스 버스 승차감이 좋아서인지 견딜 만 했다.
가끔 굽이가 심한 곳에 1m 높이의 조그만 집 모양을 한 구조물들이 눈에 띠어서 가이드에게 물어봤더니 그 곳은 차량사고지점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모시는 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의 시골길 도로변에는 가끔씩 볼 수 있었다.
해가 서편 산 너머로 넘어가고 주변 산들이 석양의 놀빛에 잠길 무렵 드디어 높이 치솟은 바위들이 심상치 않은 마테오라에 도착했다.
일행은 깔람바카 마을에 있는 호텔(Antonias Hotel)에 투숙하여 저녁식사를 한 다음 마을을 산책했다. 그리스에서는 오후 6시에는 일반 상가들이 모두 문을 닫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은 관광지라서 그런지 늦도록 장사를 하고 있었다. 거의가 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었다.
일곱 째날(5월 22일(주일))
마침 오늘이 주일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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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호텔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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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오전 7시에 호텔 옥상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목사님 네 분이 돌아가면서 예배순서를 맡았다.
호텔 옥상에서 동쪽 하늘에 아침햇빛에 길게 실루엣을 그리고 있는 마테오라의 바위봉우리들이 위엄을 드러내 보였다.
예배를 마치고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에 곧바로 일행은 마테오라 수도원이 있는 곳으로 버스로 이동했다.
마테오라 수도원(Meteora)
얼마 전 美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마테오라 수도원을 ‘세계 10대 불가사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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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마테호론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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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떠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마테오라(Meteora) 수도원은 그리스의 기암괴석 위에 세워진 수도원으로 11세기에 지어졌다. 마테오라 수도원들이 기기묘묘한 절벽 위에 불가사의한 형상으로 서 있는 곳으로 그리스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1980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테오라의 바위봉우리들은 몇 만 년 전 이곳이 바다였었는데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바닷물이 급속히 빠지면서 바닷물의 소용돌이와 압력으로 지금의 형상과 같은 사암(沙岩)으로 된 바위봉우리들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11세기이후로 중세의 수도사들은 일반인이 쉽게 근접할 수 없는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이 곳 마테오라의 바위산 정상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수도승들은 세속화된 중세 교회에 반발과 핍박을 피하여 외떨어지고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마테오라를 찾게 되었다. 그들은 바위동굴이나 깨진 바위의 틈에서 운둔생활을 하며 경건한 신앙의 삶을 실현했다. 수도승들은 그곳 바위꼭대기에서 최소한의 생명유지를 위한 양식을 먹으며 수도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들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15세기에 오토만 투르크의 그리스 점령시기에는 많은 은둔자들이 이곳을 찾아왔으며, 고립된 암벽 위에 24개나 되는 수도원을 세웠다. 따라서 이곳 수도원들은 종교적 전통과 헬레니즘 문화가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 수도원 벽과 천장에 그려진 16세기의 프레스코화와 비잔틴 후기의 회화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바위마다 출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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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원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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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줄을 타고 오르내리며 수도원을 지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는 사람마다 그 신비감에 감탄을 했다.
협소한 바위봉우리에 지어진 수도원이지만 수도원 안에는 수도사의 개인 기도실과 물탱크, 교회당, 휴게실 등을 모두 갖추어져 있어 수도원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 중에서도 수도사들의 식당(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이 흥미를 끌고 있으며, 아기오스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1510년 세워졌으며 내부에 잘 보존된 프레스코화가 있음)과 아기아 모니 수도원(1315년경 세워짐)에는 수많은 필사본과 희귀본이 보관되어 있는 도서관도 있다고 한다.
일행들은 24개 수도원 중 대 메테오른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Great Meteoron, Megalo Meteoro)을 순례했다.
대 마테오른 수도원은 아토스 산(Mt. Athos)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나 투어버스가 수도원이 있는 바위절벽아래까지 갈 수 있도록 도로가 있었다.
그 곳에서 암벽 경사지를 파서 만든 바위터널과 계단을 이용해 올라갔다. 이 길이 있기 전에는 도르래를 타고 올라갔다고 한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은 마테오라의 수도원들 중 가장 크고 높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다.
14세기 중반(약1340년)에 아토스 산에서 수도하던 학자이며 수도승(아타나시오스?)이 최초로 마테오라에 수도원을 지었으며, 그 후에 수도사 요하사프(St. Iosaph)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수도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14세기 중반에 세워진 24m 높이의 둥근 천정의 교회(Katholikon)가 있습니다. 그리고 4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본당이 있으며, 천정에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기간 중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탄생과 변형,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 그리고 참혹한 죽음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마테오라에서 수도를 하다 죽은 이름 없는 수도승들의 해골 들을 안치한 곳도 있으며 이곳을 신성시하여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나는 그곳 앞에 마련된 촛불 헌화대에서 헌금을 하고 초에 불을 붙이며 마음속으로 서원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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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헌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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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메테오른 수도원에는 이곳의 설립자인 수도사 아타나시오스와 요아사프의 전신 초상화가 걸려 있다. 16세기에 사용된 돔으로 된 식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중세의 생활 집기와 도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무기까지 전시되어 있다.
마테오라에는 대 마테오론 수도원 외에도 두 번째로 큰 수도원인 16세기에 은둔자 발람이 세운 발람수도원이 있다.
발람수도원은 주황빛의 지붕으로 유명한 이 건축물은 마테오라 수도원 건물 중 주변풍경과 가장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 수도원에도 세 명의 주교를 기리는 돔으로 된 십자형 교회(katholikon)가 있으며, 벽면에는 1548년 잘 알려진 성화가인 프랑고스 카텔라노스가 그린 성화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마테오라 수도원 건물 중 가장 오르기가 힘든 성 트리니티 수도원이 있다. 트리니티 수도원은 1476년 수도사 도메티우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마치 바위산의 일부인양 보일 정도이다. 이곳을 가기위해서는 계곡을 지나 좁은 계단을 이용하여 직접 올라가야 한다.
1981년 제임스 본드의 영화 "For Your Eyes Only"의 클라이맥스 추격 장면에 이 수도원이 등장하여 유명세를 타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마테오라의 수도원 중 자연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루사노 수도원,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등이 유명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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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라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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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종교적 목적에 의해서 모진 고난을 감내해야 되는 그들이었지만, 자연은 그들의 은둔적 삶에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현재 그곳은 자연과 인간의 삶, 그리고 종교적 성스러움이 융화된 또 다른 세계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세외적(世外的)인 생각과 경건함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자연의 빛이 사라지고 불빛만이 허공에 반짝이는 마테오라의 야경은 그야말로 공중도시를 연상하게 한다고 한다.
마테오라 수도원의 순례를 마치고 다시 버스로 하산하여 마테오라 지경의 입구에 있는 현지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 후에 일행은 아테네를 향하여 출발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지와 노천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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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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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로 가는 도중 국도변에 위치한 테르모필레(Thermopylae)는 기원전 480년에 당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터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노천에 온천수가 흘러 개울이 된 곳도 있다고 하여 잠시 들렸다.
테르모필레 전투(Battle of Thermopylae)는 기원전 480년에 스파르타가 이끄는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과 크세르크세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의 싸움이었다.
병력 7천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백만 명에 이르는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테르모필레 언덕에서 이례동안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막았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은 언덕에는 기념물이 있으며 그곳에는 방문객들이 놓고 간 듯 시들은 들꽃들이 놓여있었다.
그곳 언덕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에 노천온천수가 흐르는 시냇물이 있었다. 지나가던 여행객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온천욕을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도 노천온천욕으로 여행의 피로를 풀고 싶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빠듯하여 다시 버스에 올라 아테네로 가던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아테네에 도착한 일행은 도시외곽에 위치한 호텔(Fenix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 식사 후에 잠시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외곽지역이라서 그런지 거리에는 차와 사람들이 드물어 한적했다. 호텔 인근에 그리스정교회의 교회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문이 잠겨있었다. 교회가 건물외관에서 입구와 주변을 우유 빛 대리석자재로 건축되었고 외곽에 조명을 밝혀두고 있어 아담하고 아름다운 교회였다.
순례여행을 시작한지 일곱째 날에 이르자 나이 탓인지 심신이 점차 무거워지고 피로감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가 곧바로 잠이 들었다.
팔일 째날(5월23일)
오전 8시 호텔을 출발한 일행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신전들의 유적들이 남아있는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대형버스가 다니기에는 좁은 그리스의 뒷길을 비집고 찾아 간 곳이 아크로폴리스이다. 아크로폴리스에는 관광객들이 아침부터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아레오바고(Areopagys)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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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바고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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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이 도착한 곳은 아크로폴리스로 가기 전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바위언덕이다. 그곳이 바로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예수와 부활의 복음을 강론했던 아레오바고 언덕이었다.
아레오바고는 헬라 수도 아덴에 있는 고등 재판소인데 건물은 없이 산위에 공개적으로 운동장 같이 계단으로 좌석을 만들고 원고 피고를 중앙에 세우고 재판관이 심문 판결하는 곳이었으므로 사도 바울이 잡혀가서 변론 하게 되었던 것이다(행17:19).
성경에 의하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22.23)” 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섰던 자리에 대리석 표지석이 있었지만 몰지각한 사람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아테네 시민들이여,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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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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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24-31)” 고 외치는 사도 바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도바울의 행적을 성경에서 살펴보았다(행17:16-21).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사람들이 바울을 핍박하고 괴롭혔다. 특히 유대인들이 바울을 쫓아다니며 많은 고난과 고통을 주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 지경까지 따라와 바울은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긴박하게 당시의 철학의 도시인 아덴으로 피하게 되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는 동안에 아덴의 도시를 살펴보며 기독교의 변론과 당시의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은 성령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인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안디옥을 중심으로 소아시아로 확산되고 이때 예루살렘교회는 핍박을 받았다.
소아시아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성령은 마게도냐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통해 바다를 건너 유럽에 복음이 전해졌다. 그리고 본문에서 당시에 세계의 중심지인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성령의 역사일 것이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선교의 여행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다.
일행들은 아레오바고 언덕을 내려와 바로 왼쪽 언덕위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로 발길을 옮겼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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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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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높다’는 뜻의 아크로(Acro)와 ‘도시’라는 의미의 폴리스(Police)가 합쳐져 ‘높은 곳에 있는 도시’라는 뜻의 아크로폴리스는 기원전 6세기쯤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높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향교산(해발280m)의 높이 보다 낮은 것 같았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하는 언덕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지어진 듯 하다.
그곳에는 많은 신전들이 지어져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크고 유명한 신전이 파르테논 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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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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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신전은 B.C 447 - B.C 438 페리클레스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로 현재 유네스코 문화재보존고적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전은 기둥이 46개이며 도리아양식으로 지어진 세계적인 건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진 건물 더미에 당시 위엄을 자랑했을 기둥만 서 있을 뿐이며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진 프로필라이아는 페리클레스가 여신 아테나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아테나 신전의 건축물에는 여섯 명의 여인상이 조각된 기둥이 바치고 있다. 이 신전 안에는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우물’이 있다고 한다.
그밖에 아크로폴리스의 정문 오른쪽 경사진 성보의 남서쪽에 승리의 여신 니케(Nikis)의 신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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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니케아 신전(왼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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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하고 아름답게 조각된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나 신전, 니케 신전 등은 2천 년 전 로마와 터키의 지배와 페르시아 전쟁으로 파괴되었으며 이제는 여기저기에 깨어지고 부서진 잔재들이 유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인간의 역사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아고라(Agora)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들에 있었던 열린 '회의의 장소'였다고 한다. 초기 그리스 시대에(BC 900-700년 경)에 고대 그리스의 시민으로 분류되던 자유민인 남성은 아고라에서 국방의 의무에 대해 모으거나 왕, 의회의 통치의 발언을 듣곤 했다. 후기 그리스 시대에, 아고라는 상인들이 콜로네이드 아래에서 그들의 상품을 팔기 위한 노점, 상점 등을 운영하는 시장의 기능을 제공했다.
일행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90km 떨어진 고린도로 이동했다.
고린도 유적지(Ancient Cori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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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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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에는 고린도 운하와 사도 바울의 초대 교회(겐그레아 항구), 고린도 아크로 폴리스, 아폴론 신전, 비마터(사도 바울이 재판 받던 곳), 피래네의 샘, 박물관(인류 최초의 모자이크인 디오니소스에 상이 있음)등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솝 우화의 이솝과 괴짜 철학자 통 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고린도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국제적인 도시였다고 한다. 고린도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 해(海)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 해(海)로 나아 갈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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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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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3년 동안 머물면서 고린도 전서를 집필했고, 주후 57년경 그리스의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고린도 후서를 써 보냈다.
아테네에서 펠로폰네소스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며 이 마을은 지진으로 2번이나 파괴되어 한번은 땅딸막한 콘크리트 건물로 재건되었었다. 고대 고린도의 유적은 마을에서 7Km 떨어진 곳 시지포스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시시포스 또는 시지푸스(Sisyph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서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고 한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는데,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는 전국토가 유적지이며 신화의 발상지인 것 같았다.
겐그레아 항구(Cenchrea)
일행은 고린도 동쪽으로 11.2km 에 있는 겐그레아 항구로 순례의 길을 향했다.
겐그레아는 사도 바울이 서원이 있어 머리를 깎았던 곳이다.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사도행전18장18절)"
바울과 신앙의 자매인 뵈뵈를 이곳 교회 사역자로 천거를 했다.(롬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롬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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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그레아 교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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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겐그레아는 오늘날 케크리아이스(Kechriais)라고 부르는 현대 마을로 폐허지 근방에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겐그레아는 물에 잠겨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옛 폐허지에는 바실리카풍의 교회 잔해만이 일부는 바다에 잠겨진 채 조금 남아있었다.
바울 당시는 이곳은 대도시인 고린도를 지원하는 두 항구도시 중 하나로 아시아 지역과의 무역항구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들의 흔적도 없이 조용하고 물결마저 잔잔하여 한적한 바닷가였다. 다만 여름 휴가철에는 해수욕을 즐기러 찾아오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휴가객들을 위해 문을 연다는 바닷가에 있는 작은 상점 옆에 '이발소 표지판' 만이 이곳이 바울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당시 사도 바울이 왜 머리를 깎고 서원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에베소로 떠나기 전 그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있은 자신의 사역을 위해 특별한 서원을 하고 나실인의 규례를 지켜 머리를 길렀다가 서원 기간이 지나자 머리를 깎은 듯하다.
바울은 겐그레아에 오기 전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겐그레아에 교회를 세웠는데 뵈뵈는 이 교회의 여집사 였다. 뵈뵈에 대한 바울의 추천서라고 불 수 있는 롬16;1~2에서 바울은 뵈뵈를 향해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추천하면서 그에게 소용되는 것을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또한 그는 많은 겐그레아 지방 여행자들의 보호자와 후원자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롬6:2에 의하면 뵈뵈는 여집사로서 바울이 쓴 로마서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였던 것 같다.
나는 그곳 겐그레아 교회터가 물에 잠겨있는 바닷가에서 작은 돌을 하나 주어서 기념으로 간직하여 가져왔다.
고린도 유적 박물관과 아폴론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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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아폴론신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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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유적지의 핵심은 아폴론 신전과 로마 시대의 화장실에 있다. 특히 아폴론 신전은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유적지에는 로마 시대의 화장실도 있는데 이곳은 입구의 바로 왼쪽에 위치해 있다. 돌이 깔린 레케온 거리가 끝나는 곳에 계단이 있는데 이곳을 빠져나오면 넓은 광장이 있다. 이 광장 정면에는 기원전 4세기에 상점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로마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동쪽에는 피레네의 샘이라고 불리는 로마 시대의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자연적으로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고대에도 이곳은 저수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지금은 샘이라기보다는 물이 흐르는 도랑에 불과했다.
고린도 유적지는 유네스코 선정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로마의 모든 건축물의 원조 격으로 그 섬세한 아름다움에서는 로마 건축물을 압도한다고 한다.
오늘날 고린도에는 바울 기념 교회가 있는데 사도 바울을 제 1대 담임교역자로 시작하여 아볼로, 실라, 그리고 현재는 88대 판뗄리몬 신부가 담임하고 있다고 한다.
고린도에 거짓 교사들이 와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였고 사태가 다급함을 인식한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찾아 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여 그를 맞아 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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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과 동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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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에베소에 돌아와 번민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눈물의 편지를 써서 고린도로 보냈다(고후 2:4).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어 이 눈물의 서신을 보내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디도를 기다렸다.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도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바울에게 순종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신으로 나온 편지가 ‘고린도후서’ 이다.
일행은 고린도 유적지를 들러보고 그곳 마을에 있는 현지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마침 그 가게에서는 집에서 직접 짠 신선한 올리브유를 1.5리터 피트 병에 넣어 팔고 있어 일행 중에는 산지의 올리브유를 사기도 했다.
점심식사 후에 일행은 그리스의 순례를 모두 마치고 이태리로 가기 위해 파트라 항구로 이동했다.
고린도에서 파트라 항구까지는 3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파트라(Partra) 항구와 성 안드레 교회
파트라 항구는 아테네 서쪽으로 약 230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부 상단에 위치한 도시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심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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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리 수퍼패스트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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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오는 페리 호의 승객들을 파트라 항구를 통해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리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해운의 요충지이고, 이오니아 해의 섬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의 관문도시라고 할 수 있다.
파트라에 도착한 일행들은 승선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파트라에 있는 안드레기념교회를 순례했다.
나는 그곳에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촛불헌화를 하며 기원했다.
사도 안드레는 베드로의 동생이며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살았다.
안드레는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그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나중에는 그의 형 시몬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음을 말하여 함께 예수님께로 나오자 예수님은 시몬을 장차 ‘게바’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을 말씀했다.
안드레가 사도로 된 이후에는 성서에 세 곳에서 언급되었다.
하나는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으며(막13:3-4),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에 안드레가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든 일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기 얼마 전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 온 헬라인들을 빌립과 함께 예수님에게로 안내했던 일이다(요 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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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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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안드레는 형 베드로와는 달리 성실하며 온건하고 신중한 성격을 가졌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에 의해서 러시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도 안드레는 초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주후(AD)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에 따라 파트라에서 체포되어 X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X자 형의 십자가는 사도 안드레가 원했던 것으로 X자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사도 안드레는 X자 형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들면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 곁으로 가게 해 다오!”라고 기쁨에 넘치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를 상징하는 그림이나 조각상에는 X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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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자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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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안드레아의 유해는 원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다가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의 지시에 따라 그리스의 파트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후 1208년에 이탈리아의 아말피에 있는 성 안드레성당으로 옮겨졌으며, 15세기에는 그의 두개골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옮겨졌다. 그러다가 1964년 9월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 정교회와 화해를 하고 친교를 나누기 위해 그의 유해를 다시 파트라에 보내 오늘날 파트라에 사도 안드레 기념교회에 안치되었다.
안드레기념교회 순례를 마치고 일행은 파트라 항구의 여객터미널로 가서 승선 수속을 마쳤다. 카페리 내 선실이 4인 1실이며 너무도 협소하므로 여행용 가방은 모두 선내 화물칸에 싣기로 하고 간단한 세면도구만 챙겨서 승선하기로 했다.
마침내 일행은 그리스 순례를 모두 마치고 그동안 가이드로 수고한 가이드 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승선을 했다.
일행이 승선한 카페리는 수퍼패스트Ⅰ(SuperfastⅠ)의 명칭을 가진 그리스 선적의 정기 카페리이다. 수퍼패스트Ⅰ 카페리는 최대 승객수용인원이 800명이며 차량을 적재하며, 선체 길이가 199.1m, 폭이 27m이며 8개의 데크와 시속 24.2km라고 했다. 오후 6시 파트라 항구를 출발하여 다음날 오전 8시30분에 목적지 이태리 바리 항구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15시간30분이 걸렸다. 승선요금은 4인1실이 바리 항구까지 편도 112유로(한화 188천 원 정도)였다.
승선을 완료한 일행은 배정된 선실을 확인하고 선내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아홉 째날 (5월24일)
오전 7시에 일행들은 선내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하선준비를 했다.
오전 8시30분경에 바리항구에 도착한 일행들은 여행용가방과 개인소지품을 챙기고 하선하여 바리항구 부두에서 대기 중인 버스로 이동하여 승차를 했다.
곧이어 이태리 담당 가이드(여)의 소개와 안내를 받게 되었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바리 항을 출발하여 이태리 반도를 동에서 서로 횡단하여 폼페이로 향해 달렸다.
필자
*** 다음은 이탈리아와 로마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