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한국통사』: 다시 찾는 7,000년 우리 역사
서설(序說): 국사(國史)를 보는 눈
2. 광복 후 북한 역사학이 걸어온 길
이기백은《한국사신론》서장의〈한국사의 새로운 이해〉에서 '식민주의 사학의 청산'을 첫머리로 내걸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서론과 본론.결론이 다른 따로국밥 역사학의 실체를 시사해준다. 그런데 비단 이는 이기백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남한 강단사학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서술의 전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북한 역사학은 그 관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지를 떠나서 서술이 일관되어 있다. 그 배경에는 남북한 역사학계가 걸었던 사학사史學史가 있다
이기백이 유물사학으로 분류한 학파는 사회경제사학이라고 불렀다. 맑스의 사적유물론을 지지하는 학자들로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 싸운 학자들이었다. 북한은 분단 직후부터 역사학을 체제경쟁의 주요한 수단으로 삼았는데, 그 일환으로 1946년 7월 말경 북한은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역사학자들을 대거 초청했다. 여기에 응해 월북한 백남운ㆍ박시형ㆍ전석담ㆍ김석형 같은 이들이 북한 역사학계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은 1946년 10월 개교한 김일성대학의 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이듬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내에 '조선력사편찬위원회(이하 력사위원회)'를 설립하고, 학술지《력사제문제歷史諸問題》를 발간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아들이기도 한 홍기문은 1949년《력사제문제》에 북한 역사학계의 과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에 성공하자 그들의 소위 력사학자들은 조선력사에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 과연 어떠한 것들인가? 첫째 서기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오늘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요, 둘째 신라ㆍ백제와 함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던 가라가 본래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요."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 상.하〉,《력사제문제》, 1949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조선 총독부의 '낙랑군=평양설(한사군=한반도설)'은 이병도ㆍ이기백이 주장한 '낙랑군=대동강설'과 같은 내용이다. 가야(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이 '임나일본부설'로서 다른 말로 '임나=가야설'이 라고도 한다. 1949년에 북한 역사학계는 이미 '낙랑군=평양설'과 '임나=가야설'을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그 극복에 나섰다.
북한학계는 이 문제를 두고 문헌사학자와 고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벌였다. 문헌사학자들은 처음부터 '낙랑군=요동설'을 주장했는데, 중국의 많은 고대 사서들이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고고학자들은 평양 인근의 유적, 유물들을 근거로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했다. 당시는 일본인들이 고고학 유적, 유물까지 조작했으리고는 생각하지 못할 때였다. 북한은 1958년경부터 리지린을 북경대 대학원에 보내 고사변古史辨학파(중국 고대사, 특히 유학자들이 쓴 고대사는 조작된 것이 많다고 주장하던 학파로서 1926년부터 1941년까지 중국학계를 주도했다)의 중심인물인 고힐강顧詰剛을 지도교수로 고조선사를 연구하게 했다. 리지린은 1961년경 북경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후 같은 해 8~9월 평양에서 열린 고조선 관련 학술 토론회에 참석해 학위논문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북한학계는 '낙랑군=평양설(한사군=한반도설)'을 폐기하고 '낙랑군=요동설(한사군=요동설)'로 정리했다. 1961년에 북한학계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의 핵심인 '낙랑군=평양설'을 폐기하고 '낙랑군=요동설'로 정리했다.
북한학계는 식민사관의 또 하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 즉 '임나=가야설'은 어떻게 정리했을까? 북한의 월북학자 김석형은 1963년 1월《력사과학》에〈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일본군 참모본부의 광개토대왕릉비 조작설을 제기했던 재일사학자 이진희 교수는 이듬해 김석형의 논문을 일본어로 번역시켜《역사평론歷史評論》에 개재함으로써 일본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석형의 주장을 '분국설分國說'이라고 하는데, 이진희는 자서전에서 "'분국설'이란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일본 각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식민지가 존재했다는 충격적인 학설이었다"(이진희,《해협, 한 재일 사학자의 반평생》)라고 분석했다. 분국설은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이 임나라는 주장이다. 김석형의 분국설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북한으로 건너간 조희승이 계승.발전시켰다. 즉 오카야마岡山현에 있던 과거 기비吉備국이 가야의 분국 '임나'라고 특정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그 근처에 임나와 각축하던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의 분국, 소국들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학계는 1961년경 '한사군=한반도설(낙랑군=평양설)'을 폐기시킨 후 '한사군=요동설(낙랑군=요동설)'을 정립하고, 1963년경 '임나=가야설'을 폐기시킨 후 임나는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이라는 '분국설'을 정립했다. 물론 북한학계의 연구성과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1963년경까지 일본 식민사관의 주요 이론구조를 해체하고 자국의 관점으로 보는 새로운 역사관을 확립시켰다는데 의의가 있다.
▲ 왼쪽은 중국 사료에 나온 한사군과 독립운동가 관점의 한사군(漢四郡). 오른쪽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및 한국 강단사학의 한사군. 그리고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을 유일한 정설로 인정하는 한국 강단사학계.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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