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촌성당 지혜로우신 동정녀 쁘레시디움 박영희 마리아
거울 앞에서 내면을 가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
최태용 레오
경의선과 통일로가 통과하는 교통 요충지로 통일의 전초기지이자 남북교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는 길목을 30여 년 동안 지켜온 금촌 성당의 지혜로우신 동정녀 쁘레시디움 박영희 마리아 자매님을 8지구 희망의 모후 꼬미시움 공기복 다니엘 단장의 소개로 찾아가는 길, 들녘에서 아낙네들이 봄나물을 캐느라 분주했다.
박영희 마리아 자매는 결혼 전까지 개신교에서 청년 활동을 하였다. 결혼 후 단 한 가지 문제가 자매님을 힘들게 했는데, 그것은 바로 불교도인 시어머님과의 종교 갈등이었다, 시어머님 역시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할 전도 대상이므로 자매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대립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는 계명을 마음에 새기며, 사심 없는 마음으로 사랑을 드렸다. 힘든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서도 시부모님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를 앞세워 정작 친정 부모님께는 무심했던 자매에게 친정아버님의 갑작스런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친정아버님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시어머님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직장인 어린이집 근무를 마친 퇴근 후에는 9살짜리 어린 아들을 홀로 집에 두고 병원에서 시어머님 간호를 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처럼 몸이 힘든 것보다도 모든 불행을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말이 들릴 때면 그동안의 수고가 일순에 무너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여느 가족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의지 하나로 살아 왔던 자매는 캄캄한 어둠속을 걷는 듯한 현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며 고통을 이겨나갔다. 어려운 상황에서 지친 자매에게 엠마우스의 집 원장수녀님과의 만남은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수녀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류의 고통과 번민, 아픔을 끌어안으시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성혈을 묵상해보라”고 하였다.
비록 가족으로부터는 소외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께 매달렸다. 개신교 신자였던 자매님은 자신을 인도하고 계신 섭리의 하느님을 체험한 후 천주교로 개종했다.
“레지오 마리애는 사랑에 기초를 두고 이웃에게 봉사하고 선교하는 단체”라는 말씀을 대모님으로부터 몇 번 들었지만 화장실도 혼자서 못가는 시어머님을 놔두고 나갈 수 없었다. 딱한 사정을 알고 대모님이 찾아오셔서 위로하고, 간절히 기도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과감히 시어머님의 재활도전을 감행했다. 열심히 재활 시킨 결과였는지, 시어머님의 상태는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고통을 딛고 보람이 열매 맺고 있었다. 시어머님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고통 속에서 만난 하느님, 고통을 넘어선 하느님!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은총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영원한 도움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하고 간 후 가족들이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완고하던 남편이 성당에 나가 활동하도록 쉽게 허락해 주는 것을 보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었다. 레지오 단원으로 등록하고, 구역 반장과 자모회 봉사를 하면서 아들을 먼저 개종시켰다. 교회 주일학교가 아닌 성당 주일학교로 보내면서 복사 봉사도 하게 했다. 시집살이 시키던 시어머님이 “성당에 보내달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가슴에 몽글몽글 사랑 덩어리가 커지는 것 같았다. 몸이 불편한 시어머님을 위해 수녀님이 직접 가정방문 교리를 시작해주었다. 시어머님이 안나라는 세례명으로 새로 태어나고, 남편도 요셉이란 세례명으로 영세 후 증거자들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으로 입단하는 날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교우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그 후 12년 만에 성품이 온화하고 부부의 장점만 닮은 소중한 예쁜 딸아이(소화데레사)를 선물받았다. 뱃속에서부터 엄마와 함께 레지오 활동에 참여했던 딸은 첫 영성체 후 샛별 소년 쁘레시디움에 입단하여 서기를 맡아 교본 공부와 활동에 관심이 많은 소녀로 자라고 있다.
자매님은 항상 밝은 미소로 먼저 이름을 불러 주던 시각장애인을 교중미사에 동행하던 그때를 회고했다. “사회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적어 가슴이 아팠지만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배려를 시작하여서 기쁘다.”
지혜로우신 동정녀 쁘레시디움은 9명의 단원으로 시작하여 중도에 2명이 퇴단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1년 만에 14명의 단원을 입단시켜 사랑하올 어머니 쁘레시디움을 분단시키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오랜 기간 본당의 각종 단체 활동을 해오며 쌓아온 단원들의 열성적인 선교 활동으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19명을 영세시켰다.
남편 요셉은 상아탑 쁘레시디움 서기, 아들은 주일학교 교사, 딸은 샛별 소년 쁘레시디움 서기로 활약 중이며, 마리아 자매는 상장례 학교 5기생으로 공부하면서 현재 지혜로우신 동정녀 쁘레시디움 단장과 성가정의 모후 꾸리아 서기를 맡고 있다. 회합에 배석한 박찬규 꾸리아 단장과 단원들의 칭찬이 쏟아졌다. 취재가 끝나고 일어서는 기자에게 자매가 한 마디 한다.
“앞을 향하여 걷기에도 바쁘고 힘겨운 삶이지만, 때로 분주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거울 앞에서도 얼굴만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도 비추어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의정부 교구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