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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문학 제22호]
시인 허형만의 문학세계 - 그와 함께 걸어온 길 (송수권 시인)
그와 함께 걸어온 길
송수권(시인, 순천대 명예교수)
허형만의 시 세계는 대략 3기로 나누어서 그 변모 양상을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개인 순수 서정으로 그 출발점을 삼은 1973년 둥단으로부터 첫시집 「청명」(1978)을 출간한 시기이고, 제2기는 그 이듬해(1979) ‘목요시’ 동인회가 조직되면서 화동한 시기다. ‘목요시’ 동인회는 강인한, 고정희, 국효문, 기종, 허형만 시인 결성하였고, 이후 김준태, 장효문 시인이 참여하여 그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서울의 ‘반시’, 대구의 ‘자유시’와 더불어 1980년대 동인지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서두자의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인 과주의 ‘오월시’, 그 다음 세대인 ‘5세대’를 탄생시키는 데 영향을 미칠 정도로 우리 사회의 모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필자는 1980년 3월에 광주 입성(광주여고), ‘목요시’에 참여하였고 몸으로 겪었다. 당시는 이른바 비판적 리얼리즘이 ‘목요시’의 운동 개념으로 자리 잡았던, 광주를 밥 떠먹고 광주를 살 부비고 살았던 시기다. 대다수 시인들이 광주 중심부에서 활동하면서 피를 흘렸고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들을 썼다. 따라서 허형만의 제1기의 시적 명제도 그의 고백(『서정과 사상』대담, 2008)대로 ‘진솔한 삶의 역사와 향토적 서정’으로 일관된 시기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1970년부터 제9시집「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까지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 기간에 주목할 시점으로는 「풀잎이 하나님에게」(1984)와 「供草」(1988)를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모기장을 걷는다」(1985),「입 맞추기」(1987),「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1988),「진달래 산천」(1991)등 일곱 권의 시집을 상재하는 가장 왕성한 의욕을 보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태풍이 몰아쳐도 뿌리 뽑히지 않게 하시고
들불이 번져 와도 타지 않게 하소서
비록 어둠 속에서도 두 눈 크게 뜨게 하시며
나팔을 높이 불어 쓰러진 동족을 일으키소서
-「풀잎이 하나님에게」(영언문화사, 1984)부분
위의 시에서 보듯 태풍, 들불, 나팔, 동족 등 수직적인 언어로 모든 시들이 쓰인 알레고리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알레고리(Allegory)란 도덕적 · 교훈적 · 정치적 목적의식이 수반되는 문학적 테마로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시대의 관통이라 볼 수 있다. 상처받고 피 흘리는 억압 속에 서는 낮은 목소리가 세상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높은 목소리, 즉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세상을 깨운다는 시적 진실이 통용된 시대가 곧 광주 시대였기 때문이다.
손님이 와도 짖지 않는 개는
개가 아니다
잡상인이 와도 짖지 않는 개는
개가 아니다
(…중략…)
무엇이 목청껏 짖지 못하게 할까?
무엇 때문에 시원스럽게 짖을 수 없을까?
-「개로 인하여」(『供草』)부분
위의 시, 짖는개를 따라 짖지 않는 개는 개도 아니라는 시 창작 원리에서는 ‘개 논리’가 있지만 이 혼탁한 시대의 논리야말로 따라 짖지 개는 개도 아니라는 시적 역설이 바로 그 시대를 대변해 주고 있다.
여기서 ‘供草’란 동학혁명의 주도자 전봉준에게서 온 공초를 말한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동학도를 비적(匪賊)이란 용어로 남기고 있지만, 광주항쟁이 일어나면서 그 동학은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한 걸음 역사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참고로 필자의 서사시「동학란」이 광복 30주년 기념 장편 서사시 공모(문화공보부)에서 입상하였는데 이 해가 1976년 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동학란」을 동학혁명서사시집「새야 새야 파랑새야」(1984, 나남)로 개작하고 5 · 18민중 의식으로까지 승화시켜 역사적 부담을 덜 수 있었다면 동학혁명(1894)-광주학생의거-3 · 1운동-4 ·19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 광주의 역사 정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허형만과 함께 ‘목요시’를 했던 그 시기를 나는 감히 죽마(竹馬)시대, 또는 청죽(靑竹)의 시대로 술회한 적이 있다. 죽마고우(竹馬故友)란 글자 그대로 대막대기를 타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놀이다.
광주(남도)가 아니면 이 놀이를 할 수가 없다. 소월의 시세나 백석의 시세계에서 청죽을 논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008년 늦가을 원서 문학관에 가서 ‘나의 시에 나타난 농부’에서 남도 3대 정신 중 하나인 ‘청죽’을 말한 적이 있었는데 사석에서 고형진이 백석의 시에 ‘청대놀이’가 나온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그 시의 배경은 고향이 아니라, 백석이 애인을 찾아서 통영에 자주 갔는데 그곳에서 대를 소재를 쓴 시라는 것을 알고 안신하였다.
5 · 18이야말로 그 청죽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허형만 供草」로 시집을 내까 하다 그냥 「供草」(문학세계사, 1988)로 하였다는 허형만의 술회처러므 광주시대의 한복판에「供草」가 있었음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새가 삔 뼈를 가지고 있는 것은
혁명을 꿈꾸기 때문이다
꽃이 절명의 순간에 흙을 껴안는 것도
혁명을 꿈꾸기 때문이다
용정의 뒷골목
허름한 시당 벽 한쪽에 걸린
체 게바라의 예리한 눈빛이
혁명을 꿈꾸는 있는 것처럼
-「꿈꾸는 혁명」전문
이시는 열한 번째 시집 『첫차』(시안황금알, 2005)를 읽다가 발견한 시다. 서문에서 그는 “이제 귀가 순해진 나이에 다다랐다……. 먼 길 왔다. 열심히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그렇게 살 일이다. 마음이 아늑하다”고 쓰고 있다. “용정의 뒷골목/ 허름한 식당 벽 한쪽에 걸린/체 게바라의 예리한 눈빛”, 즉 혁명을 꿈꾸는 체 게바라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대목에서는, 그가 제2기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수용시기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새삼 연민의 정이 솟는다. 제2기야말로「供草」와 더불어 ‘체 게바라’의 혁명의 눈빛이 곧 광주의 화두가 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기 개인적 순수 서정에서부터 제2기 비판적 리얼리즘의 수용 시기야 말로 사회의식의 충만한 ‘비판적 서정’의 시기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기야말로 몰개성의 시대였으며 ‘나’가 아닌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적 명령어를 竹馬 또는 靑竹의 시대라고 정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도 예술도 가락도 죽창에서 빛났다. 더 언급한다면 동학혁명에서 항일의병, 5 · 18정신에 이르기까지 죽창의 언어로 일관된 알레고리의 언어였다. 죽창이란 무엇인가? 이는 남도 풍류의 전통 정신이면서 이 풍류 또한 밥상에서 나온다. 이를 고품격으로 말해서 식탁의 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누구든 밥상을 엎으려고 넘보면 광대들의 고향 사람은 손쉽게 죽창을 들고 나설 수 밖에 없다. 그 대신 태평성대가 오면 이 축의 정신은 가락, 즉 민중의 산조(시나위)로 빛난다. 그것이 이른바 3중의 정신으로 대금, 중금, 소금의 가락으로 뜬다. 이것이 남도의 의리정신이면서 풍류정신이고 시의 정신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제3기는 강정구가 지적한 대로 비판적 서정의 시대를 지나서 ‘존재서정’의 한 흐름으로 파악한 시대로 볼 수 있다. 구체적 논거로는『비 잠시 그친 뒤』(문학과지성사, 1999),『영혼의 눈』(문학사상사, 2002), 『첫차』(시안황금알, 2005) 그리고 제7회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한 시집『눈먼 사랑』(시와 사람, 2008)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시세계는 내면의 극기와 풍경을 이루는 시세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 새벽은 안개를 낳고 떠다니는 영혼, 그중에서도/상처받은 영혼들을 감싸주고 있으리”「안개」「비 잠시 그친 뒤」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에 대한 시인의 위로 서정의 방향이 현실 비판에서 개인 존재의 서정으로 향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여기서부터 그의 언어 절제되고 형식 또한 짧아진다.
이태리 맹인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쇠를 느티나무 속잎 틔우 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 그늘도 본다. 바람가는 길을 느리게 짜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 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내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울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빤작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영혼의 눈」전문
또한 미세한 눈으로 이처럼 사물의 깊이를 들여다보면서 영혼을 흔드는 감각의 언어로 내면 풍경의 창을 열어 놓기에 이른다. 시의 본질이 ‘서정과 상상’이라고 볼 때, 침묵을 흔들지 못하는 언어는 별 쓸모가 없다는 시적 진실을 깨닫기까지 ‘16년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고백은 그래서 더욱 진솔하게 들린다. 4 · 19를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 버렸다”(김수영)고 평가한 그 이상의 아픔이다. 더구나 이순의 나이에 이르러 낸 열한 번째 시집 『첫차』의 짧은 글인 서문을 보았을 때 나의 가슴 또한 송곳으로 저민 듯 아팠다. 다섯 살 터울로 「수권 형!」이라고 곰살궃게 살아오면서 모두에게 말한 竹馬를 타고 靑竹의 암울한 시대를 함께 걸어왔기에 더욱 그렀다. 이는 초록은 동색이 아니라 친영적 관계로 내가 고백할 말을 그가 먼저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샅은 세월, 같은 시간, 같은 전통 정신을 대물림하면서 광주 콤플렉스가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내 뱉은 말이라 생각된다. 아마도 프로메테우스가 목에 뒤집어 쓴 맷돌 같은 무게로 질눌러 온 것은 아니었을까.
조숙조숙 조으는 사람들
눈송이와 개똥벌래처럼 아름다운
난쟁이 은하의 푸른 별들이여
-「첫차」전문
열한 번째 시집 『첫차』첫머리에 나오는 시다. 옌타이 대학으로 가면서, 더 정확히 말하면 북극 열차를 타면서 그의 첫 결행이 친숙하게 다가오는 시다. ‘꾸벅꾸벅’이 아니라 “조숙조숙 조으는”이라는 조어를 탁월하게 운용하는 말결의 섬세함이 농익어 나오는데, 이는 ‘서마서마’(정지용)나 ‘애끈한’ ‘조매로운’(김영랑) ‘바자 울타리-울바자-울파주’(백석) ‘욜랑 욜랑’(오탁번) 등의 운용에서 보듯 근처어의 그 예를 들 수 있다.
매트휴 아놀드(Matthew Amold)의 양가정신, 즉 작품의 성취도를 언어미학적 성취와 정신의 성취도로 나누어 볼 때 언어 미학적 측면에서는 모국어의 숨결을 다독이는 것이 모국어에 바쳐진 순장자, 또는 사제가 똗 시인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는 예기치 못한 새로운 의ㅇ미의 세계로 떠나는 첫차를 탔을 때처럼 정서의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인은 언어의 사제요 모국어의 순장자라는 인식이 허 시인으로 하여금 영랑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했고 첫차를 타면서 좀 더 확실한 언어의 인식의 체계로 들어서게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런 가락의 시인에게 영량의 몫이 바쳐짐은 지극히 당연한 시대적 소명이기도 하다
언어냐 실천이냐 하는 문학적 화두에서 혀형만이 언어 인식 체계로 들어온 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사숙하고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는 실천에 앞서 실존(본질)에 대한 강력한 대응 방안, 즉 거멀못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언어는 말한다」- 즉 언어는 사물(본질)이 깃들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저 햇살, 저 달빛, 저 우주의 온갖 소리들
-『눈먼 사랑』서문에서
그리고 여기에 한 구절을 덧붙인다면 열한 번째 시집『첫차』의 서시에 보이는 “난쟁이 은하의 푸른 별들”이라는 우주적 감각 또는 그 상상력이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7년 12월 5일은 대전 어느 호텔에서 애지문학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신인 문학상 시상을 해달라는 전갈을 받고 나도 참여했는데 그 자리에 허형만도 와 있었다. 갓 등단한 여류 시인이 내게 전했다. 대여섯 명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중량 초과로 삐-익 소리가 나서 주군가 “우리가 너무 무거운가 봐”했더니 한 남자가 “왜 안 무겁겠어, 햇빛과 바람과 흙과 나무와 꽃, 우주가 탔는데……”하더라는 것이다. 뒤에 알고 봤더니 허형만 시인이었단다. 캡슐을 타고 우주로 나는 상상을 했을 정도라면 최근 허형만의 시적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정신분열증으로 반생을 불운 속에 보낸 프리드리히 횔덜린(Fiedrch Hölderlin)의 시가 하이데거를 만남으로써 지각 변동을 일으켰듯이 허형만이 하이데거를 만난 것은 횔덜린에게 부여된 ‘디오니 소스의 司祭’라는 말만큼 올림이 크다. 존재 탐구란 이 같은 지각 변동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오십 세가 되셨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 가보좌 틀고 계셨다
수많은 사리들을 거느리시며
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이시지만
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 되는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
어찌나 한기가 드는지 벌떡 일어나
두 손 모으고 우듬지가 보일 때까지 우러렀다
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
휘추리와 애채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
멧새의 깜찍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
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샘백오십 세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 한 분 계셨다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 체로 걸러내시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사리를 거느리신분」(『눈먼사랑』)전문
허형만의 시세계는 그리움의 시학으로 보편적 사랑을 노래하며 절망을 치유하지만 위의 시는 그 보편적인 인간의 사랑을 우주적 연민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곰살맞은 언어의 숨 고르기로 근원적 사랑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언어의 집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애련리에 나이와는 무관한 사리를 거느리신 한 분’은 애련리 원서 문학관 앞에 서 있는 느티나무의 은유다.
인간계와 우주계가 한 몸이 되어 함께 있다는 것, “갈림성 운석박물관에서 8백만 년 전에 길을 잃은 별 하나 어루만지며(…중략…)사랑하는 당신”(「운석(隕石)을 어루만지며」)을 그리움의 사랑으로 꿈꾸듯이 그 애련리 느티나무 또한 사리를 품은 초월자적인 힘(촘촘한 이파리)으로 싱그럽게 다가온다.
언어가 그늘을 친다는 것은 느티나무가 그늘을 치듯이 은유의 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은유의 그늘을 파고들었을 때 비로소 ‘존재의 집짓기’가 가능하리라 믿는다. 열두 번째 시집이 이루어낸 성취는 바로 이 부분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