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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의 위치 정립
-최남선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중심으로-
宇玄 김민정
시조는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랜 문학양식이다. 거의 천년 가까운 기간동안 시조는 우리 민족의 생활속에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 문학의 최장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현재도 창작이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진행된다고 보았을 때 그것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지극히 중요하고, 쉽게 보고 넘길 수 있는 장르는 아닌 것이다. 그렇게 긴 수명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육당 최남선이 개화기에 있어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제창했음은 그가 우리 민족에게 뿌리내신 시조에 대한 이해가 빨랐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1920년대는 서구의 자유시가 유입되던 시기였고, 자아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지금까지 있던 우리의 시가문학은 뿌리까지 흔들릴 위기에 있던 시기였다. 육당 최남선이 민족지사적인 입장에서 우리문학으로의 시조를 고집하였기에 오늘날 시조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 있어 개화기 육당의 역할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조가 비록 내용면에 있어 고시조의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잇는 근대시조로서 매우 큰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시조문학사에 있어 그의 공헌은 매우 큰 것이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1920년대 개화기의 시조부흥론을 한번 살펴보고, 오늘의 시조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육당의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의 배경과 의의
(1) 배경 - 육당의 생애와 1920년대
육당 최남선(1890~1957)은 189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5세 때에는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에 입학했으나 2개월만에 귀국, 다시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고등사범 지리과에 입학을 하였으나 끝내 졸업은 못하고 만다. 1908년에
「少年」을 창간, 「海에게서 少年에게」「가을뜻」「구작삼편」「꽃두고」등의 신시와 계몽적 내용을 담은 산문을 써서 신문화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14년엔 종합월간지 「靑春」을, 1922년엔 「동명」을 발간하였다. 육당은 3․1운동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체포되기도 했고, 본격 일제 강점기엔 황도신문을 했기 때문에 해방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수감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학작품으로는 수필 「백두산근참기」「심춘순례」 「불함문화론」등 20여편과 80여편의 시, 시조집「백팔번뇌」, 소설「아침」, 평론 8편 등이 있다.
처음 그는 唱歌, 新詩, 時調 등 다양한 시 형태를 시도했으며, 그 중에서 시조에 대해 많은 정열을 쏟았다. 1926년 5월 조선문단에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쓰면서 시조야말로 조선에 있어서 句調․음절․단락․체제의 정형을 가진 유일한 성형문학이라고 하면서 시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國風이라는 이름으로 시조의 창작에 임하였고, 민족문학의 가장 알맞은 전통형식으로 시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少年」「靑春」지에 古時調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열의 결과로 최초의 개인 시조집인 「百八煩惱」가 나오게 되고 「長曲選」「南薰太平歌」「時調類聚」와 같은 고시조집도 편찬하게 되었다.
그가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쓰면서 시조부흥론을 강조한데는 민족주의 문학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1910년 전후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910년
대는 민족문학 의식이 작품의 제작이라는 무의식적 형태로 배태되고 있었다면, 20년대에 들어와서는 춘원의 비평활동을 통해 논리적 의식화의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육당의 시조부흥론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이다.
국민문학운동은 춘원의 민족주의문학론을 기초로 출발된 것이 사실이나, 일부에서는 육당에 의해 처음 제창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현재까지도 그러한 견해가 지배적이다.1) 그만큼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는 설득력을 지녔으며 이 문학운동의 명칭을 제공한 것으로서 그 당시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민족파 진영에 소속했던 최남선은 이 문학운동을 “조선인의 자기성찰운동”이라 규정했다. 또한 그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봄은 조선의 동산에도 조선심의 노목에도 돌아왔다. 조선인의 오래 눈꼽 끼었던 눈이 차차 바로 무엇을 보게 되고, 남의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그림자를 보게 되 고, 그리하야 버렸던 자기를 도로 찾으며 모르던 자기의 새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봄의 큰 불은 겨울에게 지질렸던 온갖 것을 모조리 녹이고야 말려 한다. 땡땡한 얼 음에 눌린 조선심도 自家 本具의 힘을 발휘하야 묵음의 磨光과 새로움의 진취에 구 원한 젊은 기운을 보이기 비롯하였다.2)
또한,
조선의 시는, 조선인의 시는 아무것보다도 먼저, 무엇보다도 더 조선인의 사상․ 감정․고뇌․희원․미추․애락을 정직하게, 명백하게 영탄 상미한 것이라야 하며, 그런데 그 제일조건,근본조건으로 무엇으로든지 ‘조선스러움’이라야 할 것이다…… 조선의 특색을 또렷하게 刻出하고, 조선의 본성을 고스란이 盛出하고, 조선의 실정 을 날카롭게 묘출하되 조선 뼈다귀, 조선 고갱이로써 한 시만이 우리가 세계에 내 어 놓을 뜻 있는 시요, 또한 세계가 우리에게 기다리는 값있는 시일 것이다.3)
라고 하여 가장 우리 민족성이 잘 나타나는 것으로 시조를 꼽고 있으며, 그러한 특색있는 문학이라야 ‘이것이 조선문학’이라 하고 세계에 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일체의 활동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것이었고 그 사상의 전파와 고취를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시작을 포함한 모든 문학적 활동도 이 중에 하나일 따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가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통해 민족의 주체의식과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문학을 발굴해 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시조의 역량과 한계도 잘 알고 있었다.
문학으로의 시조, 시로의 시조가 얼마만큼 가치를 가질 것인가, 시조라는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전 용량과 나타낼 수 있는 전 국면이 얼마나 되는가. 대화산(大火山)같 은 우리 심기와 대해조 같은 우리 심와를 표백하기에 얼마만한 푼더분과 탄탄과 맛 깔스러움을 가졌는가. 이것은 물론 다 미지수요, 아니, 의심스럽다 하는 것이 도리어 정직할는지 모른다. 이것을 빌려서 「신곡」을 이룬다든지, 이것을 늘려서 「파우스 트」를 짓는다든지, 여기 웅려심박과 궤기환휼을 수미산처럼 담는 것 같음은 여간한 변통을 더하지 아니하고는 아마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4)
그러면서도 그가 시조를 민족문학이라 내세웠던 이유는 그의 주장대로 소설도 희곡도 발생기라 볼 수 있으며, 완성품으로서는 <시조>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학에 있어 민족주의자였던 당시의 최남선으로선 주체적인 자아인식의 조선문학으로 내세울만한 것이 <시조>밖에 없었던 것이다.
1926년엔 평론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시조집 <백팔번뇌>도 나오게 된다. 이 시조집으로 인해 초기의 전통적 리듬과 외래적 리듬과의 방황에서 전통적 리듬, 말하자면 시조의 형식으로 귀일함으로써 육당은 자기를 찾고 자기의 원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5)는 지적은 시조의 형식이 우리민족과 친숙했기 때문에 그것은 당시 개화기 시대정신과 사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있는 형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4조의 시조형식은 누구나 짓고 부를 수 있고 쉽게 읽히고 전달되는 친숙한 실제적 리듬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우리 말이나 글이 3음절, 4음절로 이루어진 것이 많고 보면 우리 민족의 호흡에 가장 잘 맞는 형식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조는 고려중엽에 발생하여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사대부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나, 후기에 접어들면서 시조창의 성행, 사설시조의 출현 등으로 시조 본연의 특성이 감소되다가 개화기에는 서구에서 밀어닥친 자유시형태의 출현과 식민상태 탓으로 창작활동이 줄어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육당의 창작시조집인 「百八煩惱」가 출간되고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난다. 춘원․가람․노산․위당 등은 시조부흥론을 지지했으며, 창작과 이론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육당이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발표하면서 부흥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육당의 뒤를 이어 횡보와 가람 등도 조선인의 정서를 담을 만한 마땅한 그릇으로서 시조가 부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편 고시조의 틀을 벗은 새로운 형태의 시조를 창작하기도 했다.
세월아 가지 마라 너 좇을 내 아니라
네 발로 너 가는 걸 가거니 말거니 뉘라셔 알이마는
너 가는 길에 내 나이 따라가나니 그를 설워6)
시조나마 내쫓으면 조선문단에는 무에 남을꼬? 몇 개의 小說 몇 개의 詩가, 민중 의 생활의식과 생활감각과는 거리가 먼 구라파의 방계적 혹은 병적 문학사상이, 날 내나는 계급문학의 꽹과리소리가, 이 모든 것이 조선문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악 터>될지라도 그것은 조선적도 아니요 세계적도 아니다.7)
이때의 국민문학은 두 개의 공격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문학을 인생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심미적 환영에 이끌린 예술주의 문학운동이며, 하나는 계급투쟁이라는 편협한 색안경을 쓰고 인생의 의미를 제한, 또는 왜곡하기에 이른 사회주의 문학운동이었다.
프로문학 일파의 문인들은 ‘파쇼화한 사회에서 민심을 과거의 낭만사상으로 퇴각시키는 봉건지사나 일사의 소극적인 노래(송영), ‘평민문학의 정수가 아니라 귀족문학이고 유한문학이며, 관념적이고 국수적’(임선묵)이라고 일축한다. 여기에 대해 부흥론자들은 “프로문학은 민중의 생활의식과 생활감정과는 거리가 먼 유럽의 방계적 혹은 병적 문예사상으로 이루어진 ‘날 내 나는 계급문학의 꽹과리 소리’(염상섭, 시조에 관하여)”라는 혹평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들은 시조만이 조선심, 조선혼을 표출할 수 있고 시조마저 내쫓으면 조선문단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의의
육당은 국민문학운동으로 비로소 사물을 보고 해석하는 새로운 인식능력을 성취하게 되었으며, 오랜 문화적 인습과 타성에서 벗어나 자기탐구의 길을 밟게 되었다는 이 지적은 국민문학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부여한 소중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그의 말마따나 “이만큼 제 정신을 차린 것, 제 본질을 검토하려 하게 된 것, 근저있는 자기로부터 든든히 출발하겠다 하는 것”8) 은 이 땅의 문학이 근대화 과정에서 얻은 최초의 정신적 승리에 값하는 것이기 때문이다.9)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가 그 논리전개의 미숙성이나 내용의 단순성과 소박성으로 말미암아 민족주의 이념의 완벽하게 펴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당시로서는 자기 시대의 문학적 방향이나 목표를 바르게 의식하고 제시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10)
1920년대는 잔악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민족의 문화전통을 근원적으로 말살시키려는 작업을 감행한 시기였다. 이러한 외적 압력에 대한 대응책으로 대두된 것이 국민문학운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국민문학운동은 민족저항운동의 민중화 단계에 나타난 한 시대의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육당의 조선주의 사상과 그 문학적 표현으로 제시된 시조부흥론은 위와 같은 역사적 문맥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또 「時調類聚」서문에서 “朝鮮人이 가지는 精神的인 傳統의 가장 오랜 實在이며 예술적 財産의 오직 하나인 成形”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술적으로는 더 할 말도 없거니와, 도리어 그 餘事라고도 할 文化的․社會的․ 歷史的의 意義로만 하여도 朝鮮人으로는 아득한 源頭로서 發하여 오늘날까지도 涓 涓히 혹 滾滾히 흘러내리는 정신생활의 유일한 溪流인 이 時調에 대하여 상당한 敬 意와 理解와 아울러 그 장래를 북돋우는 誠意와 努力을 가지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시조부흥의 기운은 부흥론자들에 의해 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문단을 풍미하며, 현대화를 위한 시도까지 보여준다. 육당은 그 현대화를 위한 시도로 구조를 변화시키고 조어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가람은 실감실정의 표현, 취재범위 확장, 격조 변화, 연작형태 유지, 부득이 한 경우 자수 파탈 등을 통해 현대시로의 감각적 전환을 강조하고 있으며, 도남은 시조 형식의 본질적 국면이 정형시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연작형태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러한 시조부흥운동은 1930년대를 고비로 프로문학이 퇴조하고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의 강행으로 소강국면에 접어든다. 최남선의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라는 평론은 민족문학의 자아정체성을 찾게 했고, 시조의 맥을 현대에까지 이어오게 하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한국시조문학사에 있어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 현대시조의 창작의 문제점과 발전 방향
(1) 현대시조 창작의 문제점
현대시조의 창작과 부흥논의가 다시 전개된 것은 8․15해방과 한국전쟁을 겪고난 후라고 볼 수 있다. 1960년 이태극이 시조전문잡지인 ‘시조문학’을 계간지로 창간하였으며, 일간지의 신춘문예를 통해 시조시인이 등단하고 시조부흥론이 재론되면서 시조전문잡지들(현대시조, 시조생활, 겨레시조, 한국시조, 열린시조 등) 80~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각 문예지 및 전문잡지, 일간신문의 백일장을 통해 꾸준히 시조창작이 이어지고 있고 새로운 천년을 맞아 지금까지의 모습을 바꾸어 새로와지고자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또한 최근 시조부흥을 위해 ‘우리 시를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하는가 하여, “우리 문화의 진정성과 올곧은 정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표류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정신, 우리 시의 위의를 우리 스스로 일츠며 세우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우리 민족을 우러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소중한 우리 것을 바르게 알고 창조적으로 계승함은 물론 이웃들에 따뜻한 서정의 힘을 북돋기 위해 전국 각지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인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주장하며 열린시조를 표명하기도 하고, 각 시조전문잡지들에서도 시조부흥을 위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현대시조의 창작에 있어 문제점으로는 형식적인 면에서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 그 하나는 고시조의 형태에다 현대적 의식과 감각을 도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통적인 율격까지도 뛰어넘어 현대적 시감각을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두가지 입장에서 시조창작을 하는 시조시인들에게 있어서도 아직까지는 전자쪽이 우세하다. 시조의 생명은 정형성에 있으며, 형식의 파탄은 시조자체의 존립근거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형식의 자유를 고집한다면 구태여 시조를 쓸 필요가 없고 자유시를 써야 한다. 시조가 형식을 해체한다거나 전통적인 율격을 경시하면 구태여 시조라 이름 붙일 필요가 없는 자유시의 아류가 되거나 자유시와 유사한 기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형성을 조금씩 파괴해가는 시조를 젊은층에서 많이 쓰고 있다. 또한 사설시조쪽으로도 많이 기울어져 짧은 시형에 담기 힘든 내용들을 사설시조를 통해 나타내려는 현상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조선후기의 사설시조에 나타나는 해학성이나 풍자성 등 날카로운 현실비판 의식등이 결여된 경우가 많으며 이럴 경우 형식면에서 자유시와 다를 이유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또한 내용적인 면에서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택하고 있으나 자유시만큼 시정신이 치열하지 못한 점이 지적되고 있다. 시조집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없다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시조시인들이 안일하게 형식을 위한 자수 맞추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현대시조의 발전 방향
시조가 시대의 능동성 위에 거쳐를 마련하고 창작적 성과를 계속적으로 산출해야만 그것은 가치있는 국민문학으로 이 땅에 존재할 것이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현대생활에서 환경부적응의 시조, 즉 화석된 문학으로 남지 않고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하는 문학이 되게하기 위해서는 시조에 대한 형식이나 내용에 대한 변화의 모색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시조는 자수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꼭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조 전체가 가지는 일반적 질서이지 개인에 따라 특이하게 있 는 질서는 아니다. 사실 시조의 형식은 그 자체 굳어진 자족적 질서는 아니다. 한 시인 내지 작품이 지닌 개인적 경험에 의하여 시조의 질서에 대한 추가 또는 생략 등 변형은 가능하다. 그만큼 시조의 질서는 상당한 유연성을 갖는다. 고산의 「어 부사시나」나 사설시조 등 시조의 흐름을 보면 그것은 자명해진다. 그러므로 현대 시조가 과거의 시조와 다른 것은 정형이라는 틀에 구속될 수 없는 변화를 누리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 다. 그리하여 가람은 시조는 定型이 아니라 整形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시조창작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쓸까’와 ‘무엇을 쓸까’라고 할 수 있다.‘어떻게 쓸까’는 형식론과 방법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시조의 형식적 문제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조가 정형시이므로 시조의 본래적 틀인 평시조의 자수율만을 수용하자는 보수경향의 측과 그것을 광역화시켜 사설시조 등의 보다 능동적인 형식의 기능을 수용하자는 진보적인 입장이다. 시조 창작의 형식적 허용은 시조라는 틀에다 시조시인 개개인의 시적 역량을 가장 적절하게 담아낼 수 있는 범주를 수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시조의 방법적 문제는 시조의 장르적 문제로서 자유시와 대결의지를 갖추고 경쟁력있는 장르가 되기 위한 치열한 시정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시조는 우선 새로운 시대를 조망하는 성장기의 장르라는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조망할 성장기의 장르라는 말은 우리 시대의 시조는 그만큼 젊고 패기만만한 장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시조는 세계적인 것에 상대할 민족 정서의 운율화를 감당해야 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라고 보아야 한다. 시조의 형식적 체험기간이 지나간 천년이고 보면 새롭고 감동적인 부분이 무디어졌고, 독자들에게 진부하거나 낡았다는 인식을 주기 쉽다.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김종은 <지나간 천년, 새로운 천년>이란 글에서 시조를 허구화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시조창작에서는 작품을 창작한 사람이 작중화자나 인물이 되었는데, 앞으로는 제3자적 관점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조의 제3자적 관점은 그것이 문학적 감동을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허구화의 관점이며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시적 대상을 사실이 아닌 진실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시조에서 허구적 화자의 출현을 돕고 역사와 현실에서 체험된 진실의 깊은 속내를 관념이나 구호화가 아닌, 리얼리티와 감각으로 표출해 내야 한다. 리얼리즘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시선을 열어두고 거기에서 진실의 갖가지 양상을 시조의 형식속에 담아 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쓸까’는 시조의 주제적 측면으로 시조를 창작하기 위한 소재적 차원의 시적 관심사 모두라고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사실까지 두루 소재가 될 수 있고, 주제도 과거의 역사적 사실부터 현대감각에 맞는 것까지 다양할 수 있다. 여기에다가 언어를 부리고 구사하는 시인 개개인의 시적 능력에 따라 공간도 시간도 모두 광대무변의 그것처럼 커질 수 있다.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을 가지고 신선한 언어구사의 표현력까지 곁들여 가야지만 시조가 우리의 참다운 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언어에다가 저마다의 다양한 정서를 얹어 인간의 감정과 정신과 미감을 노래하는 것이고 시조가 또한 그러하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충분히 형상화 하였을 때 가치있고 빛나는 문학으로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