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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즐기지 못하는 사회
[시사저널 2006-05-25 09:41]
신광영
영국 축구 명문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귀국 인터뷰에서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여 한국 사람들의 왜곡된 월드컵 축구 열기를 꼬집었다.한국 축구 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이야 누가 탓할 일이겠는가? 그러나 K-리그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과 2006년 월드컵 축구 대회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에게 보내는 관심과 기대는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중·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은 물론 대학 선수들까지 맨땅에서 공을 차고 있다.먼지가 휘날리는 운동장에서 미래의 월드컵 출전 선수들이 축구 연습을 하고 있다.초등학교 시절부터 잔디 구장에서 연습하는 유럽 선수들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프로 선수가 되기까지 맨땅에서 공을 차는 선수들이 2002년 월드컵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둔 일은 정말로 기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청소년 축구 선수들이 사용할 잔디 구장은 없지만, 골프를 하는 성인들이 이용할 잔디 골프장은 전국 방방곡곡에 널려 있다.수도권에서는 교외 골프장과 도심 골프연습장이 아주 흔하게 눈에 띈다.한국의 국토가 협소하다고 말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되묻게 될 정도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형 골프장은 그리 많은지 모를 일이다.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많은 골프장으로 인해 한국은 골프장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다.그런데, 정작 잔디 구장이 필요한 축구 선수들은 잔디를 밟지 못하고, 취미로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푸른 잔디밭은 활짝 열려 있다.정말로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잔디 구장은 없어도 골프장은 넘쳐나고
이러한 조건임에도 국민들은 월드컵 출전 한국 선수들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 16강전, 8강전 더 나아가 2002년처럼 4강 진출까지 기대하고 있다.이러한 기대는 과정보다는 오직 좋은 결과만을 중시하는, 결과 지상주의적인 사고의 산물이다.한국 사회에서 결과 지상주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편법주의를 낳았다.
이제라도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를 인지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과정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고,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에 대한 합리적인 사고가 강조되어야 한다.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과정과 조건을 무시하게 만든다.편법과 불법이 있더라도 국가에 도움이 되면 용서된다는 사고도 결과 지상주의의 산물이다.
축구에서 과정을 중시한다는 것은, 축구를 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승패보다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축구 선수부터 축구를 즐기고, 축구 시합을 관전하는 사람들도 축구를 즐길 수 있다면, 축구는 진정한 국민 스포츠가 될 것이다.
축구 자체가 즐김의 대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경우, 축구는 다양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당하게 된다.축구를 즐기지 않고 승리만을 즐기는 경우, 축구는 쉽게 감정적 민족주의를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전락되기도 했다.엘살바도르의 축구 대표팀이 온두라스 대표팀을 몇 차례 꺾으면서 일어난 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두 나라의 군사 정권은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하여 축구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박지성 선수와 이영표 선수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축구를 즐기라’는 것이다.사실 이것은 축구 선수들과 축구 팬 모두를 겨냥한 말이다.그리고 더 나아가 축구를 즐기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해보라는 뜻도 담겨 있다.지금은 프리미어 리그의 선수들이지만, 흙먼지 날리는 맨땅에서 공을 차며, 시합에 지면 코치에게 구타까지 당했던 어린 시절의 선수 생활을 이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월드컵 축구 열기에 들떠 있는 이때, 우리의 축구 열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자. 그리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축구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자. 축구가 스포츠를 넘어서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시청률 1위작가 죽음과 작가의 고통 [배국남칼럼]
[마이데일리 2006-05-25 11:56]
충격이자 슬픔이었다. 그리고 믿지 못할 사실이었다. 25일 밤 김승수 전MBC 드라마국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의 내용이 진원지다. 작가 조소혜씨가 그녀가 사랑하는 드라마와 세상과 긴 이별을 했다는 것이다. 불과 몇 달전 드라마 제작발표회장에서 잔잔하게 웃던 건강한 모습 때문에 한동안 그녀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탁월한 한 이야기꾼의 상실로 그녀의 작품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슬펐고 그녀가 겪었을 창작의 산고와 시청률의 압박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조소혜, 그녀의 이름앞에는 조건반사적으로 수식어 하나가 붙는다. ‘시청률 1위 드라마 작가’라는. 그녀가 1996년 집필한 최수종, 이승연, 배용준 주연의 KBS 드라마 ‘첫사랑’는 역대 드라마 최고 회당 시청률 65.8%를 기록했다. 이 시청률은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기록이다.
그녀는 1984년 KBS 단막극‘드라마게임-선택’으로 데뷔한 이래 ‘젊은이의 양지’(1995년), ‘억새바람’‘종이학’ ‘회전목마’ ‘엄마야 누나야’ 등 시청자의 가슴과 머리에 남을 숱한 드라마를 시청자에게 선사했다. 그녀의 땀과 눈물, 그리고 숱한 밤의 고민과 고통들이 낳은 자식 같은 작품들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귀를 때린다. “전 쉽게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사 한 줄을 100번 고쳐본 적도 많아요.”조소혜, 그녀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창작의 산고 끝에 드라마를 내놓았던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작가였다.
한창 작가로서 꽃피울 50의 나이에 이세상과 긴 이별을 한 조소혜의 이말은 오늘도 드라마 극본을 쓰며 불면의 밤을 보낼 작가들의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드라마는 쉽게 쓰는 것이 아니며 생명을 걸만큼의 치열함이 있어야한다”한국 드라마사의 산증인인 김수현작가의 말이다. ‘전원일기’ ‘그대 그리고 나’의 작가 김정수는 “아이가 정말 힘든 방송 작가는 절대 안 되겠다고 하네요. 엄마에게 자라면서 들었던 말은 “나가 놀아” “조용히 해”였다“는 겁니다”며 작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은실이’ ‘지평선 너머’ 등을 집필한 이금림씨는 “내가 아이들을 키운 것이 아니라 세월이 키웠다”는 말로 방송 작가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드라마 극본을 쓰는 동안 피조차 검붉은 색으로 변한다는 작가들의 말은 시청자는 편안한 안방에서 프로그램을 보지만 작가는 그 시간을 수많은 고통으로 수놓아야한다는 것을 체감하게 해준다.
조소혜작가를 비롯한 드라마 작가는 인간에게 유용한 불을 건네주고 신들의 미움을 받아 절벽에 걸려 끊임없이 독수리들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을 감내하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존재이다. 그동안 피조차 검붉은 색으로 변했을 작가 조소혜씨의 작업의 순간들을 떠올리면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작가에게 있어 그 창작의 고통보다 더 한 것이 시청률의 압박이다. 난공불락의 시청률 1위를 갖고 있었던 조소혜 작가역시 시청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는 지난해 가을에 방송된 일일극 ‘맨발의 청춘’의 낮은 시청률로 조기종영이라는 작가로서 견디기 힘든 상황을 겪었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간암의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이 시청률의 압박이었다.
시청률 지상주의가 유일한 미덕이 돼버린 여의도 방송가에선 삶의 진정성과 드라마의 작품성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창작의 고통과 시청률의 압박이라는 이중고를 안고 산다.
하지만 시청률의 압박을 이겨내며 삶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대신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당초 의도했던 작품 세계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극단의 자극성과 선정성, 폭력성으로 완전무장해 시청자의 눈을 어지럽히는 작가들,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는 것도 모자라 재탕, 삼탕하는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 작가들, 프로그램이 무슨 예술이냐며 의미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작가의식 하나 없는 작가들이 브라운관을 주도하며 종횡무진하고 있다.
그래서 의미있는 작품 세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조소혜 작가의 죽음이 더욱 더 애닯고 슬픈 것이다.
작가들은 분명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밭에 정서와 감성의 씨를 뿌리는 농부다. 만약 농부가 뿌리는 그 씨가 사람을 해하는 독초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심전(心田)에는 독초가 자란다. 그리고 그 씨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약초라면 약초가 된다. 요즘 우리 마음의 밭에 독성이 너무 강한 수많은 독초가 자라고 있다. 그 독초를 뿌리는 작가들의 홍수 때문이다. 그 독초로 인해 나날이 정신은 혼탁해지고, 정서는 황폐화되며, 감성은 자극적이 돼가고 있다.
조소혜작가는 분명 우리에게 마음에 유의미한 약초를 뿌리려 노력했던 작가중 한사람이다. 작품성과 진실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했던 한 작가, 조소혜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다. 그녀의 명복을 빌며 시청률 없는 저세상에서 쓰고 싶은 드라마를 원 없이 쓰기를 기원해본다.
<PCST-9> |“과학기술=진보, 등식 끝났다”
[이코노믹리뷰 2006-05-25 08:15]
마틴 바우어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
PCST-9은 총 4차례 기조강연이 있었다.
첫날의 1회 기조강연은 ‘왜 세계시민주의를 위한 과학적 문화인가’, 2회 기조강연은 ‘대중을 위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팅’, 3회는 ‘하이테크망과 사회’, 폐회식을 앞두고 열린 4회 기조강연은 ‘PCST의 현재와 미래’ 등을 주제로 한 것이다.
2회 기조강연은 김학수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장이 사회를 맡고, 영국 런던 정경대학교 마틴 바우어 교수,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누수야 친샤미 튜란 케이프타운대학교 교수, 영국 애니타 스미스 브리티시협회 디렉터 등이 강연에 나섰다.
이 중 바우어 교수의 강연을 요약했다.
“황우석 사건은 과학기술 상품화의 결과다.
허풍과 거짓말이 범람하고, 사실이 나오기 전에 영웅이 먼저 등장했다.”
지난 1998년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콘퍼런스 이후,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조건이 바뀌고, 과학기술에 대한 여론의 비판적 태도가 늘어났다. 즉 이제는 과학기술은 곧 진보라는 등식이 끝났다는 것이다.
계몽주의·현대화·세계화의 결과로 과학기술은 혁신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몇 가지 있다.
과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인간의 행복이 실현됐는가, 인간의 삶을 보다 완전하게 하고 생활 수준의 격차를 줄였는가 하는 질문이 내 제자의 논문 요지다.
이는 ‘과학기술이 곧 진보’라는 등식이 이미 끝났다는 증거의 하나다.
과학을 통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기아와 질병 등 인류를 괴롭혀 온 고통들을 과학으로 해결한다는 이상주의, 이런 생각들이 17세기 이래 도전을 받고 있다.
1970년대부터 이러한 도전은 더욱 거세졌다. 특히 과학은 사회적 차원에서, 과학계 외부의 기준에 의해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외부 기준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요구 높아져
외부 기준은 첫째, 과학기술 상품의 안전을 위해 소비자운동을 통해 상품을 테스트해야 한다는 것으로, 과학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안전성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해 자연환경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셋째는 공정성·형평성의 문제다. 과학기술은 여기에 공헌해야 한다.
넷째는 문명적 비판으로, 과학기술은 하나의 솔루션일 뿐 본질은 아니라는 철학적 차원의 비판이다. 우리가 과연 과학기술로 진정한 진보를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생산성(실용성)의 문제가 있다. 과학은 너무나 중요하기에, 과학자에게만 맡겨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외부적 평가기준은 1970년대 이후 과학의 독립성에 제약이 되고 있다. 특히 마지막 생산성의 문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요즘 과학기술 연구개발을 위한 펀딩은 지식의 창출을 훨씬 더 사적 영역인 일종의 ‘상품’으로 만드는 추세를 낳았다. 오늘날 과학기술 상품들은 효율적인 생산과 마케팅으로, 시장에서 포지셔닝되고, 수요자에게 팔린다.
지식이나 과학기술을 상품처럼 마케팅할 경우, 2가지의 리스크 시나리오가 있다.
해리 펭포드는 2005년 ‘허풍들’이라는 논문에서,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허풍이 돼버리는 경향의 3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거짓말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배제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진실한 사기》라는 책에서는 “강력한 시장체제는 국가의 권한을 약화시킨다. 그러면 사기를 파악하고 정의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최근 과학기술 상품화의 2가지 리스크 시나리오, 즉 사기성+허풍이다. 민간 차원의 지식창출은 이러한 리스크 시나리오가 있다.
과학커뮤니케이션과 마케팅기법이 주목받으면서, 연구소도 PR를 하고 과학언론인은 PR 컨설턴트로 일한다. 미국의 대학들은 더 많은 홍보를 위해 할리우드에 연락사무소도 설치했다.
그러나 PR를 할 단계가 되기 전까지는 더욱 더 기밀을 유지하게 된다. 특허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밀리에 개발해서 특허를 취득한 후, 일방적 PR를 통해 공개하는 방식의 단점은 동료 과학자들의 검증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PR는 연구소마다 집중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메시지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거짓말이 범람하고, 사실이 나오기 전에 영웅이 먼저 나온다. 최근 논란이 된 황우석 사건이 그 예다.
GDP 높을수록 과학기술 낙관론에 비판적
요즘 과학계에는 이런 문제가 있으므로, 대중의 비판적 시각이 필요하다.
최근 영국에서 조사한 언론의 과학에 대한 보도태도 지표를 보면, 1960년대에는 과학에 긍정적이고 1970∼80년대는 비판적이었으며, 1990년대는 다시 긍정적이 되는 등 파동이 있다.
EU의 도움으로 지난해 32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첫 번째 질문은 “과학기술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론, 메시아적 시각에 동의하나?”라는 것이었다.
국가별로 최소 12%, 최대 85%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GDP가 높은 나라일수록 비판론이 많았다.
두 번째 질문은 공리주의적인 것으로 “과학의 결과물이 비용보다 많은가?”하는 것이다. 이 경우도 국가별로 편차가 크다.
결론적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현대 기술발전의 필수요인이다. 특히 사적 지식생산에 동반되는 리스크 완화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과학기술에 대해 더 비판적이며, 문화적 토양 및 국가발전속도에 따라서도 다르다.
즉 바우어 교수는 과학만능주의, 지나친 경쟁주의, 상품화와 특허취득 및 연구비를 타내기 위한 연구, PR중심의 과학, 과학기술의 사유물화를 경계하고 있다.
과학의 지적자산은 공공의 자산인데, 특허 등 사유의 영역으로 너무 나가고 있다며, 과학자 중심의 사고에서 대중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WT논평]테러집단의 인터넷 활용
[세계일보 2006-05-25 01:09]
As today’s generation of terrorists are ferociously hunted by counterterrorist organizations, they possess a distinct advantage that their older predecessors lacked: access to computers, the worldwide Internet and cyberspace’s myriad technological benefits in conducting communications and warfare.
Attesting to the pervasive use of the Internet by modern terrorist groups, Gabriel Weimann’s groundbreaking and important book points to the exponential growth in such use since 1998, when less than half of the world’s 30 active terrorist organizations had established a presence on the Net, compared to today when the 40 active groups have more than 4,300 Web sites serving them and their supporters.
In “Terror on the Internet,” Mr. Weimann writes, “As new communication technologies have emerged, terrorism has kept pace, constantly changing its character and modes of operation, so that today’s postmodern terrorism has a new face. It is less centralized, less structured, and less organized, yet far more dangerous than the terrorism of the late twentieth century.”
According to Mr. Weimann, terrorists have established a sophisticated and dynamic presence on the Net, one that has completely transformed the way they communicate, obtain information, conduct propaganda and issue threats. They use it to radicalize and recruit new members, raise funds and train, organize and carry out warfare, and then broadcast such incidents. No longer relying solely on guns and bombs, terrorists exploit virtual cyberspace using computers, CD burners and e-mail accounts.
Also, the Net gives terrorist groups the capability to extend their virtual community to any part of the world. In such a way, al Qaeda’s dream of establishing a pan-Islamic caliphate, which so far has failed to be implemented on the ground, is taking shape in cyberspace.
Mr. Weimann also discusses the threat posed by cyberterrorism and effective responses to terrorism on the Internet, taking special note of the balance governments must strike between their need to monitor the Net and maintain civil liberties. All of this makes Mr. Weimann’s book an indispensable resource for formulating solutions to terrorists’ exploitation of the Internet for their communications and warfare. (TUE.)
오늘날 테러 단속기관들의 맹렬한 추적을 받고 있는 테러분자들은 그들의 과거 선배들에게 없었던 뚜렷한 이점이 하나 있다. 즉 통신과 전쟁에 컴퓨터를 이용하고 사이버 공간의 수많은 기술적 이점을 활용하고 있다.
현대 테러집단들에 만연한 인터넷 사용을 증언하는 가브리엘 바이만의 개척적인 중요한 저서는 1998년 이후 그러한 이용의 지수적 성장을 지적한다.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활동 중인 30개 테러단체 가운데 절반 미만이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여 운용한 데 비해 현재는 40개의 테러집단이 자기네 조직과 지지자들을 위한 4300개 이상의 웹사이트를 운용하고 있다.
바이만은 ‘인터넷의 테러’에서 이렇게 쓴다. “새로운 통신 기술들이 등장함에 따라 테러 활동은 이에 보조를 맞추어 작전의 성격과 방식을 계속 바꾸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포스트모던 테러는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되었다. 오늘의 테러는 덜 중앙집중화하고 덜 구조적이고 덜 조직적인 반면 20세기 말 테러보다 훨씬 더 위험해졌다.”
바이만에 따르면, 테러분자들은 인터넷에서 첨단 기술을 이용해 역동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그들의 통신, 정보수집, 선전 활동 수행, 협박의 방식을 완전히 변형시켰다. 그들은 과격화와 새로운 조직원 선발, 자금 모금 및 훈련, 전쟁의 조직과 수행, 자기네가 벌인 사건 홍보에 인터넷을 이용한다. 이제 전적인 총기류와 폭탄류 의존에서 벗어난 테러분자들은 컴퓨터와 CD 버너(리코더), 이메일 계정을 이용하여 가상의 사이버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또 인터넷은 그들의 가상공동체를 전세계 구석구석까지 확대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범이슬람 칼리프 왕국을 창설하려는 알 카에다의 꿈은 현재까지 지상에서 실현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그러한 방식으로 사이버 공간에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바이만은 또 사이버 테러가 제기하는 위협과 효과적인 인터넷 테러 대책에 관해서도 논의하는 한편 인터넷 감시의 필요성과 시민의 자유 유지 사이에서 각국 정부가 취해야 할 균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바이만의 책은 테러분자들의 통신과 전쟁에 대한 인터넷 악용의 해결책을 고안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원천이 되고 있다.
수능 D-174 대비 핵심 개념 총정리 /
주의해야 할 띄어쓰기
[규정] 제5장 제2절 제42항 : “의존명사는 띄어 쓴다.” (예) ‘아는 것’, ‘먹을 만큼’
[풀이] 동일한 형태의 단어라도 환경 및 의미의 차이에 따라 그 기능이 다르다.
[교정의 원칙]
1. 체언 뒤에서는 ‘조사 또는 접미사’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체언 뒤에 쓰이는 한자어 ‘간(間), 차(次), 판(板), 중(中)’ 등은 접미사로 처리할 수 있다.
2. 용언 뒤에서는 그것이 '어미'인지 '의존명사'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용언이 관형사형 전성어미(-ㄴ/-ㄹ, -은/-는, -을/-를)와 함께 쓰이거나 용언 뒤에서 조사를 붙여 쓸 수 있다면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3. 용언 뒤에서 그 이외의 경우에는 ‘어미’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01) ‘간’은 ‘이틀간’처럼 체언 뒤에서 ‘동안’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접미사이므로 붙여 써야 하지만, ‘부모 자식 간에, 이러나저러나 간에’처럼 체언 뒤에서 ‘사이, 관계없이’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02) ‘대로’는 ‘법대로, 약속대로’처럼 체언 뒤에서는 조사이므로 붙여 써야 하지만, ‘아는 대로, 약속한 대로’처럼 용언 뒤에서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03) ‘데’는 용언 뒤에서 '그런데'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연결어미이므로 '먹는데'처럼 붙여 써야 하지만, 용언 뒤에서 ‘장소, 일, 처지’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먹는 데에서'처럼 띄어 써야 한다.
(04) ‘만’은 ‘하나만, 그것만’처럼 체언 뒤에서 ‘한정, 강조’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조사이므로 붙여 써야 하지만, ‘사흘 만에, 1년 만에’처럼 체언 뒤에서 ‘경과한 시간’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05) ‘만큼’은 ‘남자만큼, 나만큼’처럼 체언 뒤에서는 조사이므로 붙여 써야 하지만, ‘볼 만큼, 애쓴 만큼’처럼 용언 뒤에서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06) ‘만한’은 ‘나만한’처럼 체언 뒤에서는 조사이므로 붙여 써야 하지만, ‘일할 만한’과 ‘볼 만한’처럼 용언 뒤에서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07) ‘바’는 ‘확인한바’처럼 용언 뒤에서 ‘하였더니, 어떠어떠하니까’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어미이므로 붙여 써야 하지만, ‘어찌할 바를, 알 바가’처럼 용언 뒤에서 ‘방법, 일’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08) ‘뿐’은 ‘남자뿐, 셋뿐’처럼 체언 뒤에서 ‘한정’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접미사이므로 붙여 써야 하지만, ‘웃을 뿐, 만졌을 뿐’처럼 용언 뒤에서 ‘따름’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09) '상, 하'처럼 체언 뒤에서 구체적인 '위치'의 개념을 나타낼 때에는 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하지만, '법률상'이나 '역사상'처럼 위치 개념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또는 '그것에 있어서'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접미사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10) ‘중’은 ‘회의 중에’처럼 체언 뒤에서 ‘동안, 그 사이’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지만, ‘부재중, 무의식중, 은연중, 한밤중'처럼 일부 체언 뒤에서는 이미 굳어진 말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11) ‘지’는 ‘떠난 지가, 죽은 지가’처럼 용언 뒤에서 어떤 동작이 있었던 ‘그때로부터’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즉, 시간을 나타낼 때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바람만 불지, 비는 안 온다.”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실을 견주되, 앞말을 시인하는 경우나 ‘큰지 작은지’처럼 ‘상태’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어미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12) ‘차’는 ‘연수차’처럼 체언 뒤에서 ‘-하려고’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접미사이므로 붙여 써야 하지만, ‘고향에 갔던 차’처럼 용언 뒤에서 ‘어떤 기회에 겸해서’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13) ‘측’은 의존명사이므로 ‘변호인 측’처럼 띄어 써야 하지만, ‘상대측, 서방측, 매도측’처럼 이미 굳어진 표현에서는 붙여 써야 쓴다.
-김기홍샘
☀ 흘린 땀만큼 열매는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