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차례, 열병처럼 들떠 지나치는 크리스마스 씨즌이 되었습니다. 너무도 감격스럽고 벅찬 희망으로, 환한 빛으로 우리들에게 온 첫 번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실종된지 오래된 것 같은 분위기 입니다.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엄 부스가 오래전에 "앞으로 언젠가는 그리스도 없는 성탄절,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믿을 날이 올것이다."라고 예언한 그대로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성탄절을 가장 먼저 준비하는 곳은 카드며 선물을 가득 쟁여놓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백화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장 기뻐하는 것처럼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로 무장하고 말이죠. 가장 분주한 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성탄절 카드를 배달하느라 여념없는 우체국이구요. 성탄 전야에 밤을 하얗게 밝히는 유흥가의 불빛은 교회의 성탄장식과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스도 없이도 성탄절은 신나기만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잘 맞이하고 있나요? 예쁘게 트리를 꾸미고, 성탄 헌금중 일부를 가난한 사람 구제에 배당하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화려한 무대를 꾸미고 축하행사를 합니다. 새벽송도 돌지요. 하얀 눈이 와주면 더욱 좋구요. 그러면 성탄을 맞는 의미가 채워진 것일까요?
그리스도 오심의 의미를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밝힌 누가복음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 18-19)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진 교회가 과연 주님이 하신일을 계승하였는가 생각해 볼일 입니다. 그 일을 감당 못하였다면 크리스마스는 교회에게 있어 주님의 평가를 받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마냥 들떠서 정신 못차리고 휩쓸려 즐길 때가 아닌거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왔고 나를 믿는자는 아무도 더 이상 어둠속을 헤메지 않게 될 것이다."(요 12: 46)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지 않고 구원하러 왔다."(요 12: 47) "그러나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내가 말한 진리에 따라 모두 마지막날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 12: 48)
"이 진리는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말하라고 한바를 그대로 전한 것이다."(요 12: 49)
"이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이다."(요 12: 50)
1.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 함은 상대적으로 세상이 어두움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 팔레스틴 땅에 오셨던 시기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 억압과 착취가 난무하던 시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 였고, 경제적으로는 온갖 종류의 세금이 백성을 내리 눌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가진자들의 횡포와 때마침의 흉년으로 농사를 포기하고 나그네가 되거나 강도가 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기가 막힌 시절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깨인 사람은 해방과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때였던 거죠. 흑암의 권세가 온 땅을 칠흑같이 덮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던 시대도 마찬가지 상황이 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사셨던 시절보다 더욱 비참했을 겁니다.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주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주후 70년)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는 무리(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순교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배교의 분위기가 들끓고, 세상과 타협하여 복음을 변절시키는 일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였습니다.
이런 때 예수님이 빛으로 왔다는 선포는 참으로 충격적인 것입니다. 새로운 희망으로 들끓게 하는 힘이었던 거죠. 예수님은 단지 빛으로 왔다는 선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따르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두움에서 놓여나고 구원을 받으리라는 거죠. 이것을 배척하는 사람은 당장은 심판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날에는 심판받으리라고 경고합니다.
2. 철저히 복종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자기가 가르친 진리는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한 것이라고 밝히므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죽기까지 복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얼마전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CA TV 평화방송에서 까르멜 수도회에 대해 소개한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곳 수도원은 한 번 들어가면 평생 문밖으로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가장 오래된 신부님은 그곳에 70년을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입문할 때 수도자들은 청빈, 순결, 복종 서약을 해야 합니다. 매일 단조로운 일상속에서 그들은 오직 하느님께 철저히 복종하는 삶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끌어 안고 평생 씨름을 하며 그 좁을 울타리속에서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일전에 목포 디아코니아 수녀원에 계시는 이현주 목사님을 찾아 뵌적이 있습니다. 광주의 김민해 목사님과 같이 갔었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30분쯤 명상기도를 하고 나서 차를 마셨습니다. 그분이 기거하는 방에 몇개의 글씨가 걸려 있었는데 그중 친필로 새로 써 붙인 글씨가 있었습니다. 아무사어(我無私語)라는 글씨었어요. '나는 내말 한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죠.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철저한 복종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그 성경 구절을 써놓은 것도 아마 하나님께 철저히 복종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도 제 기도방에 그 말씀을 써 붙여 놓았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말씀하시면 써드리죠. 어두운 세상에 굴하지 않고 진리를 따라살겠다는 확고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3. 진리를 따라 삽시다.
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이 진리를 배척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기다린다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흔히 우리는 왜 저 사람은 악을 행하는데 부자로 살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어요.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불교는 전생의 업보로 풉니다. 전생에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이 이생에서 그 보답을 받는 것에 불과 하다는 거죠. 그러기에 이생에서 저지른 과업도 필연코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과응보라는 거죠. 선업의 효력이 다 떨어지면 그시로 부터 악업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라(갈 6: 9)고 권면합니다. 그 대가가 영생이기 때문이죠. 악을 본받지 말고 오직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느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느님을 떠난자라.(요3서 1:11)는 요한 3서의 말씀도 맥을 갖이하는 거죠.
얼마전 전두환, 노태우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감형 조치가 내려졌지만 그들이 저지른 죄업에 대한 사회적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실감이 납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심판은 역사 대대로 그 자손들이 당하게 될 치욕과 그들이 당하게 될 영원한 심판입니다.
진리를 따라사는 삶,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가져준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놀라운 은총과 축복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즐겁게 맞이해야 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성탄 주일에 드리는 말씀이 너무 무시 무시한 건가요? 하지만 우리는 왜곡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바로 잡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첫 번 크리스마스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땅의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고난과 희생의 삶, 십자가의 치욕,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부활의 영광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난에 찬 주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은 쏙 빼놓은채 말이죠. 하지만 그 고난 없이는 절대로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자본주의와 짝하여 어두움에 대하여 빛으로서의 사명을 저버린 교회가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벌써 반세기 전에 이땅의 교회들에 대해 외쳤던 是無言 이용도 목사님의 예언과 경고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며 현대의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 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저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해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肉의 예수, 榮의 예수(영화로운 예수), 富의 예수, 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靈의 예수, 賤의 예수, 貧의 예수, 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찾으라. 인의 예수,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고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할 것이니라."
아기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가겠다는 결단으로 세워진 한울림 공동체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요? 어두운 세상에 참 빛되신 주님의 뒤를 따름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겠노라던 우리의 꿈은 아직도 유효한건가요? 그날 고난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어깨걸고 한걸음으로 달려 가던 우리들의 감동이생생히 살아 있읍니까?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크리스마스의 신비가 그 옛날 유대땅 베들레헴 말구유를 찾은 목자와 동방박사에게 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 속에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