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베토벤과 치아모
지은이 : 조수철( 서울대학교 병원, 소아 청소년정신과의사 )
필자가 치아모라는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약 3개월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모임의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한 치과 의사가 주동이 되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뜻을 같이 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다. 우연히 너무나도 우연히 그 치과의사와 자리를 함께 할 기회를 가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 글을 쓸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소중하면서도 뜻 깊은 일이다.
인간(人間)이란 사람(人)+관계(間)라는 의미이다. 즉 모든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부모자녀관계, 형제자매관계, 친구관계, 선배후배관계, 스승제자관계,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노래를 듣는 사람과의 관계,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과의 관계, 등등 모든 것이 관계 즉 대극적인 상황하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 흑과 백, 동과 서, 남과 북, 높고 낮음, 길고 짧음, 넓고 좁음, 귀하고 천함, 앞과 뒤, 행복과 불행, 있고 없음, 아름다움과 미움, 더러움과 깨끗함, 선과 악, 전쟁과 평화 등, 모든 것이 이러한 대극적인 관계 하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즉 대극적인 상황에서 모든 인간이 가장 효과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대극관계의 상대적 차별상을 없애고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어려움이나, 고통에 대하여는 아주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나와 남의 차별상”이 없어진다면, 타인에 대한 존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해결하듯 남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며 타인에 대한 진지한 자세, 타인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타인에게 봉사하는 마음, 타인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 등 긍정적인 심성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치아모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는 바로 이 “하나정신”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즉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과 여유 있는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가치를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한가지 방법은 함께 음악을 사랑하는 일이다. 함께 노래를 부름으로써 쉽게 가까워지고 '하나'가 됨을 우리는 늘 관찰한다.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국민을 하나로 단결시키기 위해 국가를 만들고, 학생들이 서로 마음을 합치도록 하기 위해 교가를 부르도록 한다. 모든 음악에 이러한 기능이 있지만 필자는 특히 베토벤의 음악을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베토벤 음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이 “하나정신”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베토벤은 “성악과 기악”이라는 대극적인 관계를 하나로 통합하였다. 베토벤 이전의 모든 작곡가들은 “성악과 기악”이라는 대극적인 모델로 작곡에 임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너무나도 유명한 ‘제9번 교향곡’에서 마지막 4악장에 “합창”을 포함시킴으로서 성악과 기악을 하나로 통괄하고 있다. 베토벤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眞․善․美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깨뜨리지 못할 규칙은 없다”라고 갈파하였다. 바로 하나정신의 음악적인 표현인 것이다.
둘째, 베토벤은 “聖과 俗”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베토벤은 종교음악을 그리 많이 작곡하지 는 않았다. 중기의 미사곡, 후기의 장엄미사곡,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후기의 ‘장엄미사곡’을 작곡할 때 베토벤은 자신의 친구들을 모두 풀어서 비엔나의 모든 도서관에서 과거에 작곡된 미사곡의 악보를 전부 수집하고 이를 열심히 탐구하였다. 그런 후에 장엄미사곡의 작곡에 착수하였는데 이 곡의 상당부분은 세속적인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토벤 이전의 음악가들은 ‘종교와 세속’을 대극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작곡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에게 있어서는 종교와 세속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세속이 없는 종교란 존재할 수 없고, 종교가 없는 세속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성과 속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본 것이다.
셋째 베토벤은 “강함(强)과 부드러움(柔)”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교향곡에서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베토벤은 모두 9곡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하나같이 모두 불멸의 교향곡들이다. 이중 홀수번호(1,3,5,7,9번)는 강렬하고 남성적인 곡들이며, 짝수번호(2,4,6,8번)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곡들이다. 전체 9곡의 교향곡들에서 “强과 柔”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가 되고 있다.
넷째 베토벤은 “투쟁(鬪爭)과 평화(平和)”를 하나로 통합하였다. 전형적인 예가 ‘제5번 운명교향곡’과 ‘제6번 전원교향곡’이다. 제5번 운명교향곡은 가혹한 운명과의 처절한 투쟁, 이 투쟁 끝에 이끌어내는 인간승리“를 그리고 있는 곡이다. 그러나 제6번 전원교향곡은 ‘자연에 순응하며 더불어 사는 인간의 평화로운 모습, 이에서 느끼는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이 두 곡은 거의 동시에 작곡된 곡들이다. 투쟁과 평화라는 대극적인 가치가 베토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토벤은 “전통과 개혁”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음악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통틀어 베토벤처럼 개혁을 성공적으로 성취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은 전통(보수)적 가치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후기 현악4중주곡’들이다. 베토벤은 여러 분야에서 혁명적인 곡들을 남겼지만 특히 ‘현악4중주곡’들은 중요한 분야이다. 베토벤은 사망하기 전 2년 동안은 오로지 ‘현악4중주곡’ 한 분야의 곡들만 작곡하였다. 이것은 베토벤이 자신의 음악적인 사상을 ‘현악4중주곡’을 통하여 총정리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현악4중주곡’들에서 베토벤은 인간심성의 가장 깊은 부분을 노래하였으며 신앙심을 자극하는 종교적인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곡들이다. 혁명적인 시도를 수없이 하였지만 이 곡들에서 한 악장은 반드시 모차르트나 하이든 풍의 악장으로 작곡하였던 것이다.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전통을 중요시한 베토벤의 ‘대극의 합일사상(Gegensatzvereinigen)’을 느낄 수 있는 곡들이다.
치아모는 이미 이러한 “하나정신”을 훌륭하게 실천할 수 있는 바람직한 모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고 또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치아모 내에 베사모(베토벤을 사랑하는 모임)를 만들어 베토벤의 음악적인 사상-하나사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