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의 동명 유래 - 봉천동(박재궁, 독적골, 원당, 산막골) |
|
|
박재궁 박재궁은 지금의 봉천10동 봉천중앙시장 부근에 있던 마을이다. 재궁이 있었다 하며 박지궁 또는 박자궁이라고도 한다. ‘재궁(齎宮)’은 지방의 분묘나 무덤을 지키려고 그 옆에 지은 집을 가리킨다. 이곳 마을은 24호의 주민들이 살았으며, 옛날부터 밀양 박씨들의 묘가 수십기 있었으며 봉천동 47번지 1호는 여흥 민씨들이 묘소로서 이조말엽 민충식 대감의 묘가 자리잡고 있었다. 박재궁 뒷산을 넘어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어리골 고개라 불렀으며, 관악로 고개는 살피재 고개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인적이 드물고 해가 지면 도적들의 행패 때문에 여러 사람이 모여 주위를 살피면서 넘어야 한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갯마루에는 성황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이 고개를 넘나들던 사람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이 고개를 넘으면 숭실대학교가 있는데 이곳에 미륵당이 있으며 숭실대학교 부근을 진부람이라고 칭했다. 박재궁 앞쪽에는 넓은 벌판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일본인 소부천이가 소유하던 땅이 수만평으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소작인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독적골 독적골은 현재 봉천6동에 있는 원당초등학교 부근의 자연부락으로 예부터 이곳에서 옹기를 만들어 쌓아 두고 팔았다는 것에서 유래된 옹적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변해서 생긴 명칭이다. 독적골 마을 북쪽으로 넘어가는 길을 지루레라 불렀으며 이 길을 따라 살피재를 넘으면 상도동이다. 현재는 독적골 앞을 지나 탑골을 거쳐 서울대 후문을 통해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도로이다. 원당 원당은 봉천6동 낙성대역에서 장미원아파트를 지나 사당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부근의 마을이며 원댕이라고도 하였다. 예전에 사당이 많이 있었다 하여 사당동이라 칭하였고, 원당은 사당 윗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이 마을에는 주로 김해 김씨들이 살고 있다. 원당 마을 서편의 골짜기를 감나무골이라 하며 민가 3채가 있었고 수십 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또 원당은 현재 남부순환도로를 통하여 남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까치고개라고도 불렀다. 까치고개는 매우 험악한 골짜기로 인적이 드물어 낮에도 이 고개를 넘을때는 무서운 마음이 앞섰다고 한다. 그러나 예부터 이 고개에는 까치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어 까치들이 지저귀면 무서웠던 마음이 위로되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까치고개를 넘어 사당동 쪽으로 조그만 고개가 있는데 일명 ‘가추개’라 불렸으며 지금의 장미원아파트 뒷길을 넘으면 사당동으로(총신대학 쪽) 넘어가는 고개 왼쪽에는 효동 정씨의 묘소와 사당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산막골 산막골은 현재 봉천11동에 해당되었으며 산골로 막을 두른 것처럼 아늑한 골짜기였다. 이곳은 1920년경까지 일본인 ‘야마모도’의 소유였으나 1930년경 일본인 ‘무정’이 옮겨와 이곳에 약 1천5백여평의 과수원을 경영하였고 과수원 밑으로는 약 4천여평의 커다란 연못을 만들어 주로 잉어, 붕어 등을 길렀다. 현재 봉천11동 현대아파트 자리이다. 이곳 산막골 골짜기에는 약수터가 있어 1970년대까지도 인근 주민들의 식수와 약수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오염으로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서 낙성대 쪽으로 안산이라는 동산이 있었는데 현재 인헌초등학교 자리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