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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제성경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이다윗 목사
흔들리지 않는 믿음
- 이다윗 목사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어 그것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어도 얼마 못 가서 기도의 문을 닫고 마는 것은 응답이 곧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고 열심히 정진했어도 얼마 못 가서 포기 하고 마는 것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마음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8절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위 구절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뭔가를 구하고서 그것이 이뤄질 것에 대해 의심하는마음이 있는 사람은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 구절은 두 단어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믿음’과 ‘의심’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의심하며 구하는 것은 아주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며 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이뤄질 수 없다고 아주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는 야고보 사도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의 선언하심을 보게 합니다.
‘믿음’과 ‘의심’에 이어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두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의심할 것을 작정하고 간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에 있다면 완벽한 시간낭비고 부질없는 아우성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의심’이라는 고약한 놈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조금씩 들어오더니 조금 지나니까 아예 주인과 나란히 한 자리에 앉게 된 것이죠. 이대로 놔두면 아마 이 ‘의심’이라는 놈은 주인인 ‘믿음’까지 밖으로 내 쫓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과 ‘의심’이 나란히 있는 것을 가리켜 ‘두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두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분명히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그 마음에 의심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믿음과 함께 의심이 있으면 아무 것도 간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아무것도 얻어질 것이 없으니 처음부터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연히 시간낭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야고보는 이 두마음을 가리켜 ‘마음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말은 흔들리는 바다 물결을 말합니다. 바다 물결이 가만히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다 물결은 항상 흔들림이 있습니다. 호수 같이 조용히 있어야 그 마음이 정한 것이지요.
믿음과 의심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의와 불의가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하지만 의심하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입니다. 의심이 있는 사람을 의롭지 못하다고 해서 화내지 마십시오. 의심하는 것은 단순히 신앙의 깊이가 낮은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불신의 사람이며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믿음이 없는 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단호하게 그런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하지 말라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운 법칙 중에 그 한가지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것들이 있게 함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엔 짝이 있고 함께 공존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함께 공존할 수 없고 함께 공존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의와 불법이 함께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마귀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전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전도할 목적이 아니라면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자가 불의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로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과 기름처럼 다른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과 물과의 관계입니다. 서로 함께 할 수 없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진리를 이해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마귀, 의심의 존재
왜 우리의 마음이 두 마음으로 변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믿음’만 원하는데 그 속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의심’ 덩어리를 파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의심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의심이 들어 올 때는 단호히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의심의 영은 썩 물러가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의심은 마귀이며 악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의심의 존재’입니다. 마귀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의심하고 자녀가 부모를 의심케 만듭니다. 아내가 남편을 의심하고 남편이 아내를 의심케 만듭니다. 친구가 친구를 의심하고 이웃이 이웃을 의심케 만듭니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의심하고 부하직원이 상사를 의심케 만듭니다. 손님이 가게주인을 의심하고 가게주인이 손님을 의심케 만듭니다.
마귀는 그렇게 이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인간에게 의심을 주어왔습니다. 어떻게 마귀가 인간세상에 의심을 주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창 3:1-2)
마귀는 아담과 이브 중 의심을 넣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브를 선택해서 이브에게 의심의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마귀는 이브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마귀의 질문을 주위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늘 마귀의 음성에는 교묘함이 숨어 있습니다. 그 교묘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약간 돌리면서 이브의 마음에 의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명령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 실과는 마음대로 먹으라’는 것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두 가지 명령을 한 가지로 축약시켰습니다. 그러고는 이브에게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었습니다. 마귀는 마치 하나님께서 먹어도 될 것을 먹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의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아마도 이브는 이런 마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니요,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실과는 먹게 하셨어요”
이브는 처음부터 마귀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브는 마귀의 질문에 대답을 했고 마귀는 이브의 대답을 물고 또 다른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두 번째 마귀의 질문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하셨을까? 혹시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아니니?”
아마도 마귀는 이런 질문으로 이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변질시켰을 것이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변질시켰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은 혼자 먹으시려고 인간에게는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는 생각까지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도 먹는 열매를 나라고 따먹지 말라는 법이 있어’라는 식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질문은 유도심문입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서 상대방의 마음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도 이런 유도심문을 이용한다는 것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마귀에게 유도심문을 당하고 있다고는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혹 당신은 지금 마귀로부터 유도심문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브에게 공략했던 사탄의 유도심문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는 밖에 외출을 하면서 아이에게 “어린이 비디오만 보고 어른들이 보는 드라마는 절대 보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옆집 형이 놀러 와서 TV를 켜고 어른들이 보는 드라마를 봅니다. 아이는 옆집 형에게 “엄마가 그랬는데 어른들 드라마는 보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옆집 형은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엄마가 아무 것도 보지 말라고 하던?”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바로 마귀가 이브에게 사용했던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결국에 “어른들이 보는 드라마는 봐도 좋은 거야”라는 생각이 들도록 유도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는 옆집 형의 질문에 “엄마가 그랬는데 어린이 비디오만 보라고 했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옆집 형은 “왜 네 엄마는 어른들 드라마를 보지 말라고 했을까? 혹시 너 몰래 혼자서 볼라고 못보게 하신 것 아닐까?”라고 유도심문을 할 것입니다. 결국 몇 단계 유도심문을 거치고 나면 아이는 옆집 형과 함께 어른들이 보는 드라마를 보게 될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아이는 엄마를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엄마가 왜 어른들 드라마를 보지 말라고 했는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엄마가 어른들 드라마를 보지 말라고 한 것에만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엄마 혼자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아이는 엄마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며 다시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한번은 교회의 한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상담을 원했습니다. 들어보니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딸이 갑자기 자신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괜히 화만 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들어 봤답니다. 그런데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슨, 부모님이 너무 억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활에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 부모는 용돈도 많이 주고 시간 제약도 없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부부에게 마귀의 계략에 대한 얘기를 들러줬습니다. 그리곤 따님의 생각이 마귀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라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그 딸을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창세기의 마귀의 계략에 대한 구절을 읽어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곤 부모님이 친구의 부모보다 더 훌륭하고 더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귀가시간에 제약이 있고 입고 다니는 옷에 제약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딸로서 당연히 필요한 제약임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그 딸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훌륭한 아이로 성장했고 신앙안에서 잘 생활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의 상황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의심을 집어 넣습니다. 마음에 의심이 들어가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중동지역에 어느 한 상인이 물건을 팔기 위해서 낙타에 짐을 싣고서 길을 떠났습니다. 가는 도중에 밤을 맞아 결국 험한 사막에서 텐트를 쳐야만 했습니다.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뭔가 텐트 속으로 쑥 하니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보니까 낙타의 발이었습니다. 낙타가 추워서 텐트에 발 하나를 걸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주인은 ‘그럴수도 있지’하는 생각으로 내버려뒀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 낙타의 다른 발이 들어왔습니다. ‘오죽 추우면 그러겠느냐’ 생각하며 이번에도 그대로 내 버려뒀습니다. 피곤한 여행길이라 잠이 쏟아져 곤히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 추워서 일어났습니다.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니 사막이었습니다. 자신이 텐트 바깥에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깜짝 놀라 텐트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낙타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낙타와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한 발을 집어 넣지만 나중에는 우리의 영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리곤 우리를 내 쫓아 버리고 맙니다. 당연히 이브는 마귀의 유도심문에 빠져 선악과란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첫 번째 잘못은 마귀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잘못은 마귀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한 것입니다. 세 번째 그녀의 잘못은 마음에 의심이 들어오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고 나면 어느새 우리의 마음엔 의심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의심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마음은 요동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동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잘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질문인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의심은 알 수 있습니다. 의심은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의심은 낙심입니다. 의심은 절망감입니다. 의심은 두려움입니다. 의심은 수치심입니다. 의심은 좌절감입니다. 마귀의 계략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의심케 만들어서 저들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 불안과 공포, 근심과 걱정, 수치와 우울증을 가져다 줍니다.
마귀에게 의심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의심이 들어오는 순간 선포하십시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의심의 영은 썩 사라져!”
베드로가 얼마큼 물 위를 걸었을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사실을 아실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물 위를 걸었을까요? 특별한 상품이 준비된 것은 아니지만 정답을 맞춰보십시오. 맞추고 나면 너무나 귀한 상품이란 것을 아실 겁니다.
정확하게 베드로는 의심이 생겼을 때까지 걸었습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베드로는 의심이 생기자 마자 물에 빠지지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봅시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베드로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원합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저의 능력은 한 설교에 수천 명을 회개시켰으며 저의 치유는 그림자라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겸손은 십자가를 거꾸로 매달려 죽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자 마자 베드로의 소원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순순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이 ‘믿음’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베드로는 저의 믿음대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마 14:29). 한 발 한 발 풍랑이 몰아치는 험난한 물길 위를 마치 밑바닥에 벽돌이라도 깔아놓은 것처럼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신이 나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보세요. 제가 걷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딘가에서부터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발이 물에 빠지기 시작하니까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30)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고 베드로를 건지셨습니다. 그리곤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순간 몸이 물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했던 것이 바로 ‘의심’이었습니다. 바람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눈으로 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느끼는 것이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보는 것이 느끼는 것보다 확실합니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보는 것이 백 번 듣는 것보다 더 힘이 있는 것은, 그만큼 사람은 보기를 원하고 보는 것에 마음을 쏟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의심의 실체를 느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눈으로 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엄청난 의심이 베드로의 마음 속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은 그 능력을 잃었고 의심의 힘이 풍랑처럼 거세진 것입니다.
의심치 않는 믿음의 소유자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章)”이라고 불릴 정도로 믿음의 거장들에 대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으뜸은 역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75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이 장성해 지고 나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늙었고 아내 사래 역시 늙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 엘리에셀이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그렇게 고백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시겟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2-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 별을 보여 주시면서 “너의 후손이 이와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라고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났습니다. 사라의 하인이었던 미갈에게서 아들을 하나 봤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가 되었습니다. 아내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뭇 별을 아브라함에게 보여 준 때로부터 13년 이상이 지난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친근감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6-19)
99세가 된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때까지만 해도 별 볼일 없는 시원찮은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이 완전한 믿음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18-22)
99세의 아브라함은 분명히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아브라함을 가리켜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몸이 늙어 더 이상 정자가 생산되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이라고 말합니다. 태가 죽어 더 이상 그 태에서는 아이를 생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믿음입니다. 저들의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보십시오. 조금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의심이 들어 갈 틈도 없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흔치 않습니다.
분명히 99세 이전까지만 해도 의심 많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웃음을 지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이 완전히 ‘믿음의 거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마도 당신은 아브라함의 별볼일 없었던 믿음처럼 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바라보십시오. 오래도록 별 볼일 없는 그였지만 어느 순간에 거대한 믿음의 소유자로 변화되었던 그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십시오. 지금 책을 놓고 그 결심을 선포하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내 믿음은 그렇게 될지어다!”
당신도 아브라함처럼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에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