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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신앙교리부
메주고리예와 관련된 영적 체험에 관한 공지
평화의 모후
서문
1. 메주고리예의 영적 현상을 둘러싼 길고 복잡한 역사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 이는 여러 주교, 신학자, 위원회, 분석가의 상반된 의견이 분분하였던 역사이다.
이 공지에 표현된 결론은 새로운 「초자연적 현상의 식별 절차에 관한 규범」(신앙교리부, 2024.5.17.; 이하 ‘규범’)에 규정된 내용을 바탕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분석의 관점은 이전 연구에서 사용된 관점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 공지의 결론이 환시를 본다고 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삶에 대한 판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처음부터 명확히 밝혀 두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영적 체험이 시작된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 체험 ‘한가운데에는’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위한 성령의 활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러한 체험과 연관될 수 있는 무상의 은사(gratiae gratis datae)가 이와 관계된 사람들의 도덕적 완벽을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2. 이 영적 체험과 결부된 메시지들을 전반적으로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복음의 요청에 귀 기울이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특정 메시지가 모순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들은 특정 메시지가 환시를 본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욕망이나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일부 메시지의 경우 이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신앙교리부의 규범에 그러한 현상들이 “때로는 혼란스러운 인간적 체험들, 신학적 관점에서 명확하지 않은 표현들 또는 전적으로 합법적이지는 않은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나타날”(‘규범’, 14항) 수도 있다고 명시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는 “악의가 아니라도 현상을 주관적으로 지각함으로써 자연적 질서의 오류”(‘규범’ 제15조 제2호)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메주고리예와 관련된 메시지들 가운데에서(평화의 모후 메시지 모음집 “너희에게 당부한다. 회개하여라!”[Raccolta completa dei messaggi della Regina della Pace. “Vi supplico: convertitevi!”], 이탈리아 카메레타 피체나, 2024 참조; 일부 번역문을 원문과 비교하여 수정) 부정확하고 결정적으로 신학적 오류가 담긴 이러한 신비주의적 언어의 일례로 “한 분이시며 삼위일체이신 나의 아드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017년 11월 2일)라는 별개의 표현을 언급할 수 있다.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 안에 계시는 삼위일체 전체의 현존을 표현하고자 하는 신비주의적 글들에서 이와 같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 경우에, 그 글은 사람이 되신 아드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말을 하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신앙교리부, 빌라 과르디아의 마초 성지와 관련된 영적 체험에 관하여 코모 교구장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 “자비로우신 성삼위”[Trinità Misericordia], 2024.7.15.). 또한 이 글을 읽는 이는 이 공지에서 언급하는 성모님의 ‘메시지’는 모두 ‘주장되는 메시지’를 의미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메주고리예와 관련된 사건들을 식별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라고 주장되는 내용의 분석과 명백히 검증된 결실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결실
3. 메주고리예와 관련된 현상을 둘러싼 즉각적인 효과는, 전 세계적으로 이에 대한 신심을 지닌 신자 수가 점점 더 많이 증가하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순례를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긍정적인 결실은, 교회의 전통에 따른 건전한 신앙생활 실천을 증진하는 데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이전에 신앙에서 멀어졌던 사람들과 외적으로만 신앙을 실천하여 온 사람들에게 모두 적용된다. 이 장소의 특별함은 그러한 결실들, 곧 수많은 회심, 성사 생활(특히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의 빈번한 회복, 많은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와 혼인 성소, 신앙생활의 심화, 더욱 강렬한 기도 실천, 배우자 사이의 많은 화해, 혼인 생활과 가정생활의 쇄신 등이 무수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이른바 발현 현장에 함께하고자 ‘환시를 본다고 하는 이들’과 만나는 상황보다, 오히려 주로 본래 사건들이 발생한 장소들로 순례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4. 메주고리예 현상 때문에 메주고리예 본당의 일상 사목 활동이 더욱 열성적으로 이루어졌다. 날마다 묵주기도의 다양한 신비들을 바치고 (주간 평일에도 많은 전례와 더불어) 미사 성제를 거행하며 성체 조배를 드리고 수많은 고해성사가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본당 성전 밖에는 십자가의 길이 두 군데 있고 교리 교육을 위한 큰 강당과 성체 조배를 위한 작은 경당이 있다. 메주고리예에서는 통상적인 성사-영성 생활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연례 세미나와 청소년 축제 그리고 사제들과 부부들, 순례 조직자들, 평화 센터장들, 기도 모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성 피정 등 통상적인 여러 사목 활동이 진행된다.
수십 년 동안 메주고리예 본당은 계속 주요 순례지였다. 성모 발현과 관련된 다른 장소들과는 달리 메주고리예는 특별한 청원으로 도움을 구하려는 목적보다는 주로 신앙을 새롭게 다지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보인다. 정교회 그리스도인 단체와 무슬림 단체도 이 성지를 방문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5. ‘메주고리예 현상’의 맥락에서, 많은 신자가 사제직이나 축성 생활에 대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해 왔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로 매우 다르지만,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느꼈다는 동일한 영적 체험에서는 일치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기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그저 호기심으로, 또 어떤 이들은 전혀 믿음이 없는데도 메주고리예를 방문하였다. 발현들이 있었다고 알려진 산 위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함께 성소의 은총을 받았다고 보고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또한 성체 조배를 드리는 동안 이러한 부르심을 체험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메주고리예 영성(메시지, 기도, 단식, 성체 조배, 미사 성제, 고해성사 등)을 일상생활 속에 받아들인 다음부터 그들의 삶이 달라졌고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 성소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떤 이들은 메주고리예에서 자신이 이미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키워온 성소에 대하여 결정적인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메주고리예 밖에서도, 메주고리예 영성에서 또는 이에 관한 체험을 적은 서적을 읽으면서 영감을 받은 집단들 안에서 개인들이 특별한 성소를 발견한 사례도 많다.
나아가, 하느님과 교회에서 멀어진 사람들 그리고 죄로 물든 삶에서 벗어나 복음을 향하는 철저한 실존적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진정한 회심 사례도 적지 않다. 또한 메주고리예와 관련하여 수많은 치유 사례도 보고되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많은 이에게 메주고리예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시고자 선택하신 장소가 되었고, 그리하여 어떤 이들에게는 메주고리예의 체험이 영적 여정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메주고리예 덕분에 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어떤 이들은 메주고리예의 영향으로 교회에 순종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깊이 헌신하고자 하는 열의나 본당에서 더욱 열심히 신앙 생활에 매진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깨워졌다고 언급한다. 한편,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메주고리예의 영적 체험에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성모 신심 기도 단체들이 생겨났다. 특히 고아,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온갖 어려움에 놓인 어린이, 장애를 가진 이들을 돌보는 다양한 공동체와 연합회와 연계된 애덕 활동들도 생겨났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님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간 경험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발견한 젊은이, 젊은 부부, 어른이 많다는 사실이다. 메주고리예에서 젊은이들의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증거가 해마다 열리는 청년 축제이다.
이러한 특별한 결실 외에도, 메주고리예는 큰 평화와 피정의 공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진실되고 깊이 있는 신심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영적 체험과 관련된 긍정적인 결실은 분명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실은 환시를 본다고 하는 이들의 체험과는 구별되고 있다. 이처럼 환시를 본다고 하는 이들은 더 이상 ‘메주고리예 현상’의 주요 중재자들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 현상의 중심에 자리하시는 성령께서는 아름답고 긍정적인 많은 일을 이루어 주고 계신다.
메시지의 핵심 측면
평화의 모후
6. 고스파(Gospa: 크로아티아어로 성모님)께서는 다양한 표현들(교회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 의인들의 어머니, 성인들의 어머니 등)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어머니’라고 가장 자주 언급하시지만, 메시지들 안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호칭은 ‘평화의 모후’이다(1983년 6월 16일 메시지 참조). 이 호칭은 하느님 중심적이고 평화의 참된 의미를 담은 매우 풍요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 가정적, 사회적 의미도 담고 있다. 실제로 이 평화는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또한 선교 노력을 통하여 확산된다. 메시지들에서 드러나는 영성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마리아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통한 하느님 신뢰이고, 이로써 세상에서 평화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메시지들이 매우 많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와서 나 자신을 평화의 모후로 소개한 것은 나의 아드님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너희를 돕고자 한다. 평화가 오도록 너희를 도와주고자 한다”(2012년 8월 10일).
“평화, 평화, 평화! 화해하여라. 하느님과 화해하고 서로 화해하여라”(1981년 6월 26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기도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평화를 위하여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기를 권고한단다”(1984년 9월 6일).
“나는 너희가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유한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세상에 평화가 넘치도록 기도하여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 자녀들의 마음속에 충만한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여라. 그리하여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내 사람이 되어 주렴. 나의 생생한 표징, 평화의 표징이 되어 주려무나”(2013년 8월 5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가 모두 내 평화의 메시지를 듣고 삶 안에서 진지하게 사랑으로 그 메시지를 실현하기를 당부한단다. 많은 사람이 메시지들에 대하여 이야기함으로써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이를 실천하지는 않고 있단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생명으로 또 너희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을 변화시키도록 초대한단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생명을 주는 것이 될 수 있단다”(1991년 5월 25일).
“전쟁, 벌, 악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오산이란다. 언제나 악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미 악을 마주하는 길로 들어선 거야. 그리스도인에게 미래를 대하는 태도는 오직 하나, 구원에 대한 희망뿐이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평화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며 전파하는 것이란다”(1982년 6월 10일).
“오늘날 세상에서 사람들은 극심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재앙으로 향하는 낭떠러지 끝을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단다. 평화를 찾으면 세상은 구원될 수 있어. 그런데 평화는 하느님께 돌아갈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거란다”(1983년 2월 15일).
“나는 평화의 모후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전하려고 여기에 왔단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참평화가 흘러나오는 원천인 참기쁨을 찾을 수 있단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할 것을 당부한다”(1983년 6월 16일).
“너희 마음에 평화를 심으려무나. 물과 보살핌과 빛이 필요한 꽃처럼 이 평화를 자라게 하여라”(2003년 2월 25일).
사랑에서 샘솟는 평화
7. 이러한 평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최고의 그리스도교 가치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이 평화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덕인 사랑의 실천으로 맺는 열매이다. 이는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다툼을 삼가고 심판하지 않으며 용서하는 형제애로 표현되는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형제자매가 되어 모든 다툼을 삼가라”(1981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도 나는 너희를 용서로 초대하고자 한단다. 나의 자녀들아, 용서하려무나!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너희 자신도 용서하여라”(2010년 3월 13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지금은 감사할 때란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사랑을 청한단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실수와 잘못을 찾지 말고 그들을 판단하지 마라”(2020년 5월 4일).
우리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게 하는 이 사랑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향한 사랑도 내포한다. 실제로 이는 종교 혼합주의를 제안하는 것도 하느님 앞에 “모든 종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는다. 이 사실은, 여러 종교가 뒤섞여 있어서 끔찍한 분쟁의 불씨가 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맥락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지상에서 너희는 분열되어 있지만 너희는 모두 나의 아들딸이란다. 무슬림이든 정교회 신자든 가톨릭 신자든, 너희 모두는 나의 아드님과 내 앞에서 평등하단다. 너희는 모두 내 자녀들이야. 이는 모든 종교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평등하다는 의미란다. 그런데 구원받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단다. 곧,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해. …… 적게 받은 사람에게는 적게 요구하신단다”(1982년 5월 20일). “너희가 다른 종교에 속한 너희 형제자매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참그리스도인이 아니란다”(1983년 2월 21일).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필요성도 상기시켜 주신다.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무나”(1984년 2월 19일).
평화의 임금님
8. ‘평화의 모후’라는 호칭은 예수님께 부여된 ‘평화의 임금님’이라는 호칭에 상응한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가 그분과 하나 되는 삶을 살도록 너희에게 당부한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임금이시고 오직 그분께서만 너희가 찾는 평화를 너희에게 주실 수 있단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예수님께 너희를 선물로 바친다”(1995년 12월 25일). “평화의 임금이신 아기 예수님께서 내 품 안에 안겨 계신단다”(2002년 12월 25일). “나는 큰 기쁨으로 평화의 임금님을 너희에게 모셔다드리니, 그분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려 주시리라”(2007년 12월 25일).
오직 하느님
9. 이러한 메시지들은 강력한 하느님 중심의 영적 삶의 전망을 제시한다. 또한 이 메시지들에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라는 당부가 자주 나타난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길 것을 권유한단다.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려무나. 그러면 만물의 임금님이신 하느님께서 너희 삶 안에서 다스리실 거란다. 두려워하지 마라!”(1988년 7월 25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 나는 이번 주에 너희가 다음과 같은 말을 실천하며 살아가라고 너희를 초대한단다. 바로 ‘나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이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사랑이 있으면 너희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너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1985년 2월 28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하느님께 전부 내어 맡기라고 너희에게 당부한단다. 너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겨 드리렴. 오직 이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너희 마음에 기쁨이 찾아올 거야.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가 가진 모든 것에 기뻐하려무나. 그것들은 전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선물이니 하느님께 감사드리려무나. 그렇게 할 때에 너희는 삶 속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고 모든 것 안에서, 심지어 가장 작은 꽃 안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1989년 4월 25일).
10.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으시고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를 온전히 지향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 메시지들의 핵심을 알아볼 수 있다.
“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이유는 너희를 가르치고 하느님 사랑에 더 가까이 이끌기 위함이다”(1999년 5월 25일).
“나는 너희에게 무엇보다도 너희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권고한단다. 그러면 너희는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 뵙고 사랑할 거란다”(1992년 11월 25일).
“너희 마음이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에 열릴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하느님 앞에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전구 기도를 드린다”(2000년 3월 25일).
“나는 너희 모두가 따스한 봄 햇살을 느끼는 한 송이 꽃과 같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나기를 바란단다”(2008년 4월 25일).
“혼자이고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믿음에 흔들리거나 ‘왜’라고 묻지 마라. 오히려 마음을 열고 기도하고 굳게 믿으려무나. 그러면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될 거야. 하느님께서는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매 순간 내 옆에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거야”(2019년 12월 25일).
11. 이러한 이유로, 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일상생활 속에 언제나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라고 당부하신다.
“너희는 표징과 메시지를 찾지만, 아침 해가 뜰 때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회심하여 진리와 구원의 길로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구나”(1998년 9월 25일). “밀밭이 너희에게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 자비에 관하여 말해 주기를 바란다”(1999년 8월 25일).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구원하고자 하시고, 사람들과 자연을 통하여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다른 많은 것을 통하여 너희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하신단다”(1990년 3월 25일).
그리스도 중심
12. 마리아의 전구와 활동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은총과 구원의 영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분명히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아들딸들아, 나는 특별한 방법으로 너희를 예수 성심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자 한다. 그러니 나의 자녀들아, 오늘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기도드리고 너희의 마음이 온전히 그분 마음이 되도록 당부한단다”(1988년 10월 25일). “세상의 빛이 너희를 유혹하지 못하게 하여라. 하느님 사랑의 빛에, 내 아드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어라. 그분을 위하여 마음을 굳건히 하여라. 그분은 사랑이시고 진리이시다”(2016년 5월 2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 내가 너희를 부르는 이유는 너희가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예수님을 뒷전으로 밀어내며 예수님께 소홀해졌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예수님을 위하여 마음을 굳건히 하고 예수님을 너희 삶의 첫 자리에 모시기를 당부한단다”(2017년 4월 24일). “나는 너희를 새롭게 하고자 하며, 내 마음을 다하여 오늘날도 너희를 위하여 고통받으시고 너희를 회개로 초대하시는 예수 성심께 너희를 이끌고자 한단다”(1996년 10월 25일). “너희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라야만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가늠할 수 있을 거란다”(1998년 2월 25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너희의 마음을 더 열절히 불타오르게 하기를 바란단다. 또한 그분께서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2007년 9월 25일).
13. 마리아께서는 전구해 주시지만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마리아께서 어머니로서 펼치시는 모든 활동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힘과 기쁨을 주실 거란다. 그리고 나는 전구를 통하여 늘 너희 곁에 있단다”(1993년 11월 25일). “나는 너희에게 내 손으로 정화수의 샘이신 나의 아드님을 바친단다. 그분께서 너희의 믿음을 되살리고 너희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실 거란다”(2014년 10월 2일). “마음을 열고 예수님께 너희의 삶을 내어 맡기려무나.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 마음을 통하여 일하시고 믿음 안에서 너희가 강해지게 해 주실 거란다”(1985년 5월 23일).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에 효과적인 생명의 말씀이신 영원한 말씀에 비해서는 당신 말씀에 관하여 겸손하게 이야기하신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에게 소박한 말로 이야기한단다. …… 반면에 영원히 현존하시는 나의 아드님께서는 너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이야기하시며 열린 마음 안에 사랑의 씨를 뿌리신단다”(2017년 10월 2일).
성령의 활동
14. 다음과 같은 많은 메시지가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라고 초대한다.
“무엇을 청하기 위하여 성인들에게만 의존한다면 잘못된 일이다. 성령께서 내려오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단다. 너희가 성령을 모시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란다”(1983년 10월 21일).
“날마다 성령께 청원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여라. 성령께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려오시면 모든 것이 변모하고 뚜렷해지기 때문이란다”(1983년 11월 25일).
“미사를 드리기에 앞서 성령께 반드시 기도해야 한단다. 성령께 바치는 기도에는 언제나 미사가 함께해야 한다”(1983년 11월 26일).
“사람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기도하곤 한단다. 물질적 은총을 청하러 성당과 성지를 찾아가지만, 정작 성령의 선물을 청하는 이들은 지극히 적단다.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기를 간청하는 것뿐이야. 성령의 선물을 얻는다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1983년 12월 29일).
회개로의 부르심
15. 메시지들에서는 세속적 삶의 방식과 세상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포기하라는 지속적인 부르심이 드러난다. 동시에, 이 세상의 참평화를 가능하게 해 주는 회개로의 부르심이 자주 드러난다. 회개는 메주고리예 성모님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는 듯하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회개로 부른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너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1996년 2월 25일).
“나의 마음은 너희를 향한 사랑으로 타오르고 있단다. 내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마디란다. 회개하여라, 회개하여라. 너희는 내가 오직 회개만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나의 모든 아들딸에게 알려라”(1983년 4월 25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내 망토로 감싸안아 모두 회개의 길로 이끌고자 한단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부디 너희의 모든 과거와 너희가 마음속에 쌓은 모든 악을 주님께 봉헌하여라”(1987년 2월 25일).
“너희는 완전히 회개하였노라 말할 수 없다. 너희 삶은 날마다 회개하는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993.02.25.).
“너희는 영혼의 고단한 잠에서 깨어나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예’라고 말하여라. 회개와 성덕을 위하여 결단을 내려라”(2001년 3월 25일).
“나의 아들딸들아, 회개하여라. 그리고 침묵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라. 하느님을 너희 삶의 중심에 모셔라”(2001년 5월 25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도 나는 큰 기쁨을 마음에 품고 너희를 회개로 부른단다. …… 하느님께서는 온 누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신다. 또한 온 세상을 구원으로,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끝이신 당신 자신을 향한 길로 부르기를 바라신다”(2007년 6월 25일).
죄와 악의 무거운 짐
16. 그와 동시에, 죄와 악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악과 사탄의 영향에 맞서 싸우라는 하느님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끊임없는 권고도 나타난다. 시련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호소 또한 빈번하게 나타난다. 때때로 이 시대는 은총의 때이자 시련의 때라고 선포되기도 한다. 때로는 시련의 때라고 매우 강력한 어조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도처에 절망이 도사리고 있고 모든 것이 붕괴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하느님과 멀어져 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때 바로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에서, 은총과 내적 위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부르심이 생겨난다.
“나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남김없이 흘리시며 돌아가셨는데도 그로부터 나의 아들딸들이 아무 혜택도 얻고자 바라지 않기 때문에 운다”(1983년 4월 1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주위를 둘러보면 이 땅에 만연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승리하시도록 기도하자꾸나”(1984년 9월 13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평화의 오아시스를 약속한 것을 너희는 알고 있다. 그런데 다음 사실도 알아 두어라. 오아시스 옆에는 사탄이 숨어 너희 저마다를 유혹하려 하는구나.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사탄이 너희 삶의 자리에 끼치는 온갖 영향을 이겨낼 수 있단다. 나는 너희와 함께하지만 너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단다”(1986년 8월 7일).
“내가 가는 곳마다 나의 아드님께서 나와 함께하시지만 사탄도 함께 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탄이 너희를 넘겨받아 지배하도록 허락하였구나. …… 나의 자녀들아, 굴복하지 마라! 너희가 하는 일을 보면서 흘린 눈물로 얼룩진 나의 얼굴을 닦아 다오. 너희 주위를 둘러보아라! 교회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 나아갈 시간을 내어라.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오너라. 한 가족으로 모여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시간을 가져라. …… 빵 한 조각을 청하는 불쌍한 걸인을 경멸의 눈으로 보지 마라. 너희의 풍성한 식탁에서 그 걸인을 쫓아내지 마라. 그를 도와주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너희를 도와주실 것이다 …… 나의 자녀인 너희는 이 모든 것을 잊었고 사탄도 너희가 그렇게 하도록 부추겼다. 굴복하지 마라! …… 나는 더 이상 너희를 꾸짖고 싶지 않고 오히려 기도와 단식과 참회로 다시 한번 부르고 싶구나”(1987년 1월 28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지금 특별한 방식으로 너희 모두를 기도와 자기 포기로 부른다. 사탄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가능한 많은 이를 죽음과 죄의 길로 유혹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의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이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려무나”(1991년 9월 25일).
“사탄이 너희를 잡아끌어 그가 원하는 대로 너희를 다루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나는 너희가 책임감과 결단력을 갖추고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초대한다”(1998년 1월 25일).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사탄은 전염력 강한 증오와 불안의 바람을 불어넣어 인간과 그 영혼의 숨통을 조이려 한다. 이리도 많은 이들의 마음에 기쁨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 마음 안에 하느님도 기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오와 전쟁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른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희 가운데 왔으니, 너희는 성덕과 애덕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열정적으로 새롭게 시작하여라.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오직 인간적 사랑만으로 사랑을 알고 사랑하기 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 함께 사랑과 용서가 되자꾸나”(2015년 1월 25일).
17. 성모님께서는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기회임을 강조하시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목숨을 바치는 협력이 필요하다. 이는 책임 의식을 지니라는 강한 요구를 함축한다. “너희는 말만 하지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 나의 자녀들아, 바로 그러한 까닭에 전쟁이 이리 오래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 드려 하느님을 너희 마음에 모시고 함께 살아가기를 요구한다. ……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가 하느님 명령에 따라 살지 않고 미사를 생활화하지 않으며 죄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를 도울 수가 없구나”(1993년 10월 25일). 그런데 넉 달 뒤에는 신자들의 협력의 가치를 강조하시며감사를 전하셨다. “최대한 빨리 이 전쟁이 끝나도록 너희 모두가 나를 도와주었구나”(1994년 2월 25일). 믿는 이들의 협력의 중요성은 다른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너희는 모두 너희 삶과 표양으로 구원 활동에 협력하여야 한다”(1996년 5월 25일).
기도
18. 기도는 이 여정의 토대이다. 메시지들에는, 항구하고도 지속적으로 기도하라는 권고가 들어 있다.
“기도를 결심하도록 다시 한번 너희를 초대한다. 너희가 기도를 통하여 회심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각자는 단순함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열려 있는 어린이와 같이 될 것이다”(1996년 7월 25일).
“너희의 하루를 짧지만 간절한 기도로 채우도록 초대한다. 기도를 드리면 너희의 마음이 열리고,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시고 특별한 은총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은총의 때를 잘 활용하여 이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 새롭게 하느님께 바쳐라”(2005년 7월 25일).
19. 기도와 더불어 단식하라는 부르심도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단식은 육체적 본성의 희생일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바치는 봉헌이라고 설명된다. “너희가 환난에 빠지거나 궁핍할 때에 나에게 오너라. 너희에게 빵과 물을 단식할 기력이 없다면 다른 것들을 끊을 수 있다. 음식 외에도 텔레비전과 같은 것을 끊어도 좋을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에는 산란해서 기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과 담배 그리고 다른 즐거움들을 끊을 수도 있다.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지 너희 자신도 알고 있다”(1981년 12월 8일).
미사의 중심성
20. 믿는 이들의 기도는 성찬례 거행에서 정점을 이룬다.
“미사는 최고의 기도이다. 너희는 그 위대함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1984년 1월 13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도 나는 특별한 방식으로 너희를 성체성사로 초대하고자 한다. 미사를 너희 삶의 중심에 두어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특히 성찬례를 너희 가정의 중심으로 삼아라. 가족이 함께 미사성제에 참례하여 예수님을 기려라. 예수님이 너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2018년 6월 15일) “습관적으로 미사를 드리지 말고 미사성제를 삶이 되게 하여라. 날마다 거룩한 미사를 살아감으로써 너희는 성덕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1998년 1월 25일). “신앙의 핵심인 성체성사 안에 나의 아드님께서 언제나 너희와 함께하심을 잊지 마라. 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너희와 빵을 쪼개어 나누신다. 나의 아들딸들아, 바로 너희를 위하여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시어 다시 오시는 것이기 때문이다”(2016년 5월 2일).
21. 다음 메시지는 크나큰 영적 보화인 성찬례에 비하면 발현의 가치는 미미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는 발현보다 미사 때 너희에게 더 가까이 있다. 많은 순례자가 발현이 일어난 작은 방에 있으려는 바람으로 사제관 주위로 몰려든다. 순례객들이 지금 사제관 앞에 모여들듯이 감실 앞에 모여든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현존을 이해했을 것이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환시를 보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1986년 11월 12일).
형제적 친교
22. 메주고리예의 영성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순례나 기도 모임처럼 특히 공동체 행사에서 체험되는 영성이다. 또한 메시지에는, 기도와 더불어 형제애, 곧 동반하고 내어 주며 섬기고 용서하며 가난한 이들 곁에 있어 주는 사랑으로의 끊임없는 부르심도 담겨 있다.
“이것이 유일한 진리, 곧 나의 아드님께서 너희에게 남기신 진리이다. 너희는 이를 많이 헤아려 볼 필요가 없다. 너희가 해야 하는 일은 사랑하는 것, 내어 주는 것이다”(2015년 1월 2일).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에게 청한다. 누가 너희의 영적 물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살펴보아라.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느님의 펼친 손이 될 것이다. 인류는 하느님의 손길을 찾고 있다”(1997년 2월 25일).
“그런 다음에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골라 이날을 가난한 이들과 아픈 이들에게 바쳐라. 그들을 잊지 마라”(1984년 1월 23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이웃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너희에게 해를 끼치는 이들을 사랑하여라. 그럼으로써 너희는 마음의 지향을 사랑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기도하고 사랑하여라! 너희는 불가능해 보이던 일조차 사랑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1985년 11월 7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 나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너희를 부른다. 나의 아들딸들아,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준다. 그러니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하느님께서 너희를 도우러 오시도록 기도하여라. …… 이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너희 삶을 빚어 주실 수 있고 너희의 사랑이 자라날 것이다. 나의 아들딸들아, 때가 찰 때까지 날마다 너희 안에 하느님 사랑이 자랄 수 있도록 ‘사랑의 송가’(1코린 13장)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여라”(1988년 6월 25일).
“너희는 나의 아드님께 자비를 구하는데, 나는 반대로 너희에게 자비를 청한다. 너희는 성자께 너희의 유익과 너희 죄의 용서를 청하는데,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에게 애원해 왔는지 모르겠구나.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가 만나는 모든 이를 용서하고 사랑하여라”(2019년 3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메시지의] 공동체적 측면은 그리스도교 생활 안에서 가정이 지니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애원한다. 부디 너희의 가정 생활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여라. 가정을 화목한 꽃으로 만들어라. 나는 그 꽃을 예수님께 드리고자 한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모든 가정이 열심히 기도하기 바란다. 나는 그 열매가 가정 안에서 무르익을 날을 바라 마지않는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 나는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위하여 마치 꽃잎과 같은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1986년 5월 1일).
23. 이러한 영성에는 분명 교회적 차원의 일환인 온 교회와 이루는 친교, 목자들과 이루는 친교, 특히 교황과 이루는 친교가 포함된다.
“너희의 의무를 잘 이행하고 교회가 너희에게 청하는 일을 하여라”(1983년 2월 2일). “나의 아드님께서 사랑으로 당신을 통하여 너희가 하나 되게 해 주시도록 나는 그분께 간구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 가운데 그리고 목자들과 일치를 이루도록 그분께 청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아드님께서는 목자들을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당신 자신을 너희에게 내어 주시고 너희 영혼을 새롭게 해 주신다. 이 사실을 잊지 마라”(2014년 8월 2일). “나의 아들딸들인 너희에게 청한다.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너희의 목자들인 교회의 봉사자들을 위하여 많은 기도를 바쳐라. 그리하여 나의 아드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맑은 샘물과 같고 사랑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라”(2018년 3월 2일) “내가 사랑하는 교황과 그의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014년 8월 17일).
기쁨과 감사
24. 메주고리예의 영성은 기뻐하고 기념할 만한 영성이며 생활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든 좋은 것에 감사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쁨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담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너희가 자신을 하느님께 열어 드리도록 초대한다. 나의 아들딸들아, 자연이 자신을 열어 주고 생명을 주며 열매를 맺는 것을 보아라. 그러하기에 나는 너희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며 온전히 그분께 의탁할 것을 청한다. 나의 아들딸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또한 너희를 끊임없이 삶의 기쁨으로 인도하고 싶구나. 나는 너희 각자가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기쁨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1989년 5월 25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가 삶에서 발견한 모든 선물에 대하여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을 너희에게 요청한다. 나도 너희와 함께 감사를 드린다. 또한 너희가 모두 이러한 선물들의 기쁨을 체험하여 하느님이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기를 바란다”(1989년 9월 25일).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그리하여 기도가 너희의 삶이 되게 하여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여는 이들에게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너희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2007년 8월 25일).
“나의 아들딸들아, 기도하는 이들은 하느님 자녀가 가지는 자유를 느끼며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 형제자매들의 선익을 위하여 봉사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자 자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의 형제자매가 너희를 속박하고 이용하고자 한다면 이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며 모든 피조물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기 때문이다”(2021년 10월 25일).
“자연 안에서 평화를 찾아라. 그러면 너희가 창조주 하느님을 발견할 것이고 세상 만물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 것이다”(2001년 7월 25일).
“나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지상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1987년 5월 25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기도하여라. 또한 너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그리하여 너희가 뿌린 선행의 씨앗이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하여라”(2024년 2월 25일).
“나는 너희가 나의 아드님과 일치하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2015년 5월 2일).
믿는 이들의 증언
25. 이 메시지들에는 개개인의 증언을 요청하는 긴급한 호소가 담겨 있다. 통상적으로 이는 신앙과 사랑을 삶으로 증언하라는 초대에 해당한다. 메주고리예의 선교적 메시지는 그러한 초대로 요약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매달 메주고리예 본당에 주시는 메시지 안에서 신자들을 ‘내 사랑의 사도들’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에게 애원한다. 나의 사도로 계속 머물러라. …… 나는 너희가 나의 아드님을 본받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증언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나의 아들딸들아, 하느님 사랑의 증인이 되는 크나큰 은총이 너희에게 주어졌다. 너희에게 주어진 그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라. 어머니인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마라. 어머니로서 나는 나의 자녀들, 나의 사도들에게 의지하기를 바란다”(2012년 11월 2일).
“내 사랑의 사도들아, 나의 아들딸들아, 내 아드님의 사랑의 온기로 주위의 모든 이를 따뜻하게 하는 햇살처럼 되어라. 나의 아들딸들아, 세상은 사랑의 사도들을 필요로 한단다”(2018년 10월 2일).
특별히 아름다운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눈에 띄는 표징을 덜 중요하게 여기고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라고 타이르는 것이다. “너희는 나의 현존에 대한 믿을 만한 표징을 나에게 청하였다.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 표징이 필요하지 않다. 너희 스스로 다른 이들에게 표징이 되어야 한다”(1982년 2월 8일).
영원한 생명
26. 이 많은 메시지는 하늘 나라를 향한 열망, 곧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찾으려는 열망을 일깨우라는 강력한 요청을 담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 나는 너희 모두가 천국을 위하여 결단을 내리도록 초대한단다”(1987년 10월 25일)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너희를 돕고 너희의 목적지인 천국으로 인도하게 하셨다”(1994년 9월 25일). “나는 너희를 영원을 위하여 마련된 아름다운 꽃다발로 만들고 싶구나”(1995년 7월 25일). “그분 없이는 미래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무엇보다 영원한 구원도 없단다”(1997년 4월 25일). “나의 아들딸들아, 성덕에 이르겠다는 결심을 하고 천국을 생각하여라”(2006년 5월 25일). “너의 마음속에 하늘 나라를 향한 열망이 생겨나고, 기쁨이 너희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2006년 8월 25일). “너희는 세상 것들에 눈멀고 얽매여 있으며 지상의 삶을 생각하는구나.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너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게 하셨다”(2006년 10월 25일). “너희는 영생으로 가는 길을 걷는 순례자임을 잊지 마라”(2006년 11월 25일). “너희가 들에 핀 꽃 한 송이처럼 지나가는 나그네들임을 잊지 마라”(2007년 1월 25일). “너희는 이 지상의 순례자임을 잊지 마라”(2007년 12월 25일). “나의 아들딸들아,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언제나 계신다”(2008년 3월 25일).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이 너희의 미래인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게 되기를 나는 바란단다”(2009년 1월 25일).
필요한 설명
27. 메시지들은 전반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고 다양한 말로 복음의 항구한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메시지는 이러한 긍정적이고 바르게 이끌어 주는 내용에서 벗어나 심지어는 모순되기까지 한다고 보인다. 따라서 이 혼란스러운 요소들이 전체 메시지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메주고리예의 이 보물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일부 사항을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사항은, 특히 메시지를 부분적으로 읽는 경우, 몇몇 소집단들이 이 영적 경험의 귀중한 제안을 왜곡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결정적인 원칙을 떠올리도록 이끌어 준다. 곧, 영적 경험의 한가운데에서 성령의 활동이 인식될 때, 그 경험에 포함된 모든 것이 모든 부정확성과 불완전함과 혼란의 여지가 있는 영역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현상들이 “때로는 혼란스러운 인간적 체험들, 신학적 관점에서 명확하지 않은 표현들 또는 전적으로 합법적이지는 않은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규범’, 14항). 이는 “악의가 아니라도 현상을 주관적으로 지각함으로써 자연적 질서의 오류를 덧붙였을 가능성”(‘규범’, 제15조 제2호)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자들은 추정되는 성모 메시지를 해석하고 전파하는 데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이며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침을 제시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대부분 메시지 전체에 비추어 볼 때에 적절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다루어야 하는 일부 메시지를 짚어 보려 한다.
질책과 위협
28. 어떤 경우들에서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 가운데 일부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불쾌함을 드러내시는 듯 보인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위협적 표징들에 대하여 그리고 발현의 중단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하신다(그러나 이후에도 메시지들은 계속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회개를 요청하러 온 것이다. 이후에 나는 더 이상 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나의 마지막 발현이다”(1982년 5월 2일).
“서둘러 회개하여라. 약속된 표징이 언덕 위에 드러날 때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1982년 9월 2일).
“오늘 너희에게 마지막으로 요청한단다. 이제 사순 시기이니, 본당 [공동체]인 너희는 이제 나의 사랑의 요청을 따를 수 있다. 너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에게 더 이상의 메시지를 주고 싶지 않구나”(1985년 2월 21일).
이러한 메시지들은 다음과 같은 바오로 성인의 말을 유념하며 회개를 미루거나 늦추지 말라는 요청으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실제로 한 메시지는 우리가 언급한 다른 메시지들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한 바른 빛을 비추어 준다.
“재앙을 예언하는 이들은 거짓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그해, 그날에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하고 말한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징벌은 이 세상이 회개하지 않을 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하기에 나는 모든 이에게 회개를 요청한다. 모든 것은 너희의 회개에 달렸단다”(1983년 12월 15일).
본당에 관한 메시지
29. 잘못 해석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다른 표현들도 있는데, 본당에 관한 메시지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 메시지들에서 성모님께서는 (단식 날짜 요청이나 다양한 전례 시기를 위한 구체적 노력에 대한 지침 등) 본당의 영적 사목적 여정의 세부 사항을 통제하시려는 듯 보이며 참여를 위한 통상적인 본당 구조를 대신하고 싶어 하시는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 잇따르는 메시지들에서 볼 수 있듯, 성모님께서 본당에 주고 싶어 하시는 ‘특별한 관심’은 당신의 사목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질책으로 이어진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이 본당을 특별한 방법으로 선택하였고 이끌고자 한다. 나는 사랑으로 이 본당을 보호하고 있고, 모든 이가 나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 오늘 저녁에 여기에 와 주어서 고맙구나. 나는 더 많은 이들이 나와 내 아드님과 함께 있기를 원한단다. 나는 너희에게 매주 목요일마다 특별한 메시지를 줄 것이다”(1984년 3월 1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내일 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진리의 영께서 오시도록 기도하여라. 본당 신자들은 특히 그렇게 하여야 한다. 너희가 나의 메시지들에 아무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내가 준 그대로, 본연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너희에게 진리의 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1984년 6월 9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이 [대림] 시기 동안에 나는 너희를 가정 기도로 초대한단다. 나는 여러 차례 하느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메시지들을 주었지만 너희는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메시지들을 너희가 받아들인다면 이번 성탄절은 너희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다”(1984년 12월 6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너희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 싶구나. 그래서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메시지들을 삶으로 실천하고 받아들이도록 요청한단다. 나의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나를 보내셨을 때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이 본당을 내가 기쁘게 머물 장소로 선택하였다. 그러하기에 나는 너희에게 요청한단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나를 받아들여 다오. 나의 메시지들을 들어 다오! 나에게 귀를 기울여 다오!”(1985년 3월 21일)
“일부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오늘 나는 너희에게 메시지 주는 것을 그만두고 싶었단다. 그러나 본당이 [한 걸음] 나아갔고, 나는 너희에게 이 세상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유례없는 메시지들을 너희에게 주기를 원한단다”(1985년 4월 4일).
본당 신자들에게 반복적으로 권고하는 것은, 환시를 본다고 하는 이들의 본당 공동체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모님의 메시지들은 공동 식별의 주제가 되는 결정들과 관련한 본당 사제와 사목 평의회와 공동체의 시노달리타스 활동의 통상적인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이를 통하여 본당은 신중함, 형제적 경청,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 대화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메시지 경청에 대한 끊임없는 촉구
30. 본당 신자들에 대한 잦은 권고를 넘어 전반적으로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들에 귀를 기울이도록 끊임없이 장려하시는 듯 보이는데, 때로는 이러한 요청이 메시지 그 자체의 내용보다 더욱 강조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너희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을 알지 못하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시지만 너희는 이해하지 못한다”(1984년 11월 8일). “너희는 내가 주는 모든 메시지를 다 알지 못한다”(1984년 11월 15일). 이는 신자들에게 의존성과 과도한 기대를 낳아 결국 계시되신 말씀께서 지니시는 핵심적인 중요성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촉구가 나타나는 예는 다음과 같다. “나의 메시지들을 삶으로 실천하여라”(2010년 6월 18일). “나의 메시지들을 전파하여라”(2010년 6월 25일). “내가 주는 메시지들을 삶으로 실천하여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줄 수 있게 해 다오”(2011년 5월 27일). “나의 메시지들을 따르거라. …… 나의 메시지들을 새롭게 하여라”(2011년 6월 17일). “나의 메시지들을 받아들이고 삶으로 실천하여라”(2011년 6월 24일).
다음과 같은 메시지에서 그러하듯 일부 메시지에서는 이러한 촉구가 더욱 거세진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오늘도 역시 너희 어머니가 너희를 기쁨으로 부르고 있다. 나의 증거자가 되어라, 이 지친 세상에서 나의 메시지들의 증거자가 되거라. 책임감을 가지고 나의 메시지들을 삶으로 실천하고 받아들이도록 하여라.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나의 계획들을 위하여 나와 함께 기도하자꾸나”(2011년 12월 30일).
종종 반복되는 이러한 호소는, 선의를 지니고 복되신 어머니의 회개와 평화로의 부르심이 무시당할까 우려하였던 환시를 본다고 하는 이들의 사랑과 관대한 열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촉구는, 메시지들이 초자연적인 기원이라고 볼 수 없는 요청들을 언급할 때, 예를 들어 성모님께서 특정한 날짜나 장소, 실현 가능성과 일상적인 문제에 관하여 내리는 결정 등을 언급할 때 더욱 문제가 된다. 메주고리예에서 이러한 종류의 메시지들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메시지들 가운데 일부가 환시를 본다고 하는 이들의 단지 개인적인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될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음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러한 메시지의 명확한 예시이다.
“이번 8월 5일은 나의 탄생을 기념하는 2000주년이 될 것이다. …… 나는 3일 동안 열심히 너희 자신을 준비시키도록 요청한다. …… 그날에는 일하지 말도록 하여라”(1984년 8월 1일).
신자들은 신중함과 상식을 발휘하여 이러한 세부 사항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이러한 영적 경험 안에서 (다른 영적 경험이나 초자연적이라고 주장하는 현상에서도 그러하듯) 긍정적이고 교화적인 요소들은 무시해야 하는 다른 요소들과 언제나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메주고리예의 제안 전체의 풍성함과 유익함을 거부하도록 이끌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에 올바른 가치를 부여하신다
31. 사실, 당신의 메시지를 전체적인 관점에 두도록 우리에게 요청하는 이는 바로 메주고리예 성모님 당신 자신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반드시 복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해 주신다. 성모님께서는 자주 당신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것을 요청하시지만 또한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 말씀의 비교될 수 없는 가치 안에 당신의 메시지들을 종속시키신다. 다음의 권고들은 이 지점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고, 메시지들에 관하여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의 중심적인 기준이 된다.
“이례적인 일들을 찾아 나서지 말아라. 대신에 성경을 들고 읽어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1982년 11월 12일).
“왜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느냐? 모든 대답은 복음 안에 있다”(1981년 9월 19일).
“거짓과 거짓된 빛에 대하여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거짓 목소리들을 믿지 말거라. 내 자녀들아, 성경으로 되돌아오너라!”(2018년 2월 2일)
32. 성경을 읽으라는 성모님의 요청은 가장 많이 반복된 요청 가운데 하나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오늘 너희에게 날마다 집에서 성경을 읽도록 요청한다. 성경을 눈에 보이는 장소에 두어라. 그러면 성경이 너희를 이끌어 이를 읽고 기도하게 할 것이다”(1984년 10월 18일). “성경을 가정 안에서 눈에 띄는 장소에 두거라. 성경을 읽고 삶으로 실천하여라”(1996년 8월 25일). “성경을 가정 안에서 눈에 보이는 장소에 두거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배우거라”(1999년 1월 25일). “나는 너희에게 가정 안에서 성경을 읽어 너희의 기도를 새롭게 하도록 요청한다”(1999년 9월 25일). “나의 아들딸들아, 성경 읽기를 잊어버리지 마라.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너희가 믿고 삶으로 실천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너희의 삶으로 증거하여라”(2006년 1월 25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라. 그러면 성경에 쓰인 말들이 너에게 생명이 되어 줄 것이다”(2012년 2월 25일). “성경을 너희 가정 안에서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읽거라”(2014년 1월 25일). “나의 아들딸들아, 복음서를 읽거라. 복음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복음서는 나의 모든 자녀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태어나신 나의 아드님에게 너희를 결합시켜 주는 것이다”(2019년 11월 2일).
33. 다른 한 편으로, 성모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그 메시지들보다도 세상에 참 빛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이라고 하였다.
“나는 너희들이 메시지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삶에서 실천하며 전파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특별히 나는 너희가 모두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이 신심 없는 세상을 밝히는 예수님의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 모두가 모든 이를 위한 빛이 되고 그 빛을 증언하기를 바란단다”(1986년 6월 5일).
34.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성모님께서 거듭 요청하시는 메시지들이 결국,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며 당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평화를 구하라는 줄기찬 요청이라는 점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메시지들 가운데 아무것도 우리를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복음에 대한 우리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메주고리예의 참된 정신에 충실히 머물기 위하여 놀라운 사건들이나 성모님께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메시지들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면 안 되고, 하느님 말씀과 함께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흠숭하며 형제자매들을 섬기고 어디에서든 평화를 이루는 데에 우리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한다.
성모님의 ‘자기 현양’
35. 성모님께서 주신 이러한 메시지들에서도 ‘나의 계획’ 또는 ‘나의 과업’과 같은 표현들에서 분명한 문제의 소지가 있음이 드러난다. “너희 각자가 나의 구원 계획에 중요하다”(1993년 5월 25일).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가 인류를 위한 나의 구원 계획에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2022년 6월 25일). “나는 너희에게 …… 나의 계획들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요청한다”(2004년 10월 1일). “그리고 오늘 밤 나는 너희에게 나의 계획들 …… 나의 과업들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요청한다”(2005년 9월 2일).
이러한 표현들은 다소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사실, 마리아께서 성취하시는 모든 것은 언제나 주님의 계획과 그분의 거룩한 구원 계획에 봉사하는 것이다. 마리아께서는 세상과 교회를 위한 당신의 고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 메시지들은 오직 다음과 같은 의미로만 해석될 수 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당신 자신의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 계획을 온전히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36. 이러한 맥락에서, 성모님을 지칭할 때 ‘중개자(mediatrix)’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할 가능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전체적인 메시지가 모든 것이 예수님께 비롯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리아께서 당신의 모성적 전구로 협력하시는 동안 전체적인 메시지와 일관되지 않는 듯 보이는 특정 표현들이 드러난다. “나는 너희와 하느님 사이의 중개자이다”(1986년 6월 17일). “나는 너희와 천상의 아버지 사이의 연결 고리, 너희의 중개자가 되기를 원한다”(2012년 3월 18일).
‘중개자’라는 표현이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된 경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자리를 마리아께 드리는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확증하는 것, 곧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1티모 2,5-6)라는 내용과 사실상 모순될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설명하셨듯이, 이 추정되는 성모 메시지들도 마리아의 중재 협력이 그리스도의 중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한다(「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 39항 참조). 이러한 방식으로, 어머니의 협력은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존엄과 능력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고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2항).
그러나 동일한 2012년 3월 18일 메시지를 보면 마리아의 중재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하다. 마리아의 중재는 다음과 같이 오직, 우리를 위한 ‘모성적 전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는 너희의 어머니, 너희의 변호자가 되고 싶어 너희들 가운데에 온단다.”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향하여
37. 전체적인 메시지들이 강력하게 하느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인 강조를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몇몇 메시지들은 이러한 점에서 도움을 준다. 마리아께서 어머니로서 바치는 전구가 그분의 고유하고도 언제나 종속적인 역할의 핵심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특히 명확한 메시지들은 다음과 같으며,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도 없고 대신하지도 않을 것임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내가 직접 베푸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도를 통하여 청하는 것을 하느님께 받는단다”(1982년 8월 31일).
“기도하여라,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나의 아드님을 만나거라. 그리하여 그분께서 너희에게 힘을 주시고 은총을 베푸실 수 있게 하여라”(2017년 6월 23일).
“예수님을 위하여 결단을 내려라. 그리고 그분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거라. …… 나는 너희 모두를 나의 아드님께로 이끌기를 원한단다. …… 예수님을 위하여 결단을 내리고 너희의 삶에서 그분을 첫 자리에 모셔라”(2012년 6월 22일).
“너희가 나의 메시지들을 삶으로 실천하게 하여 너희를 나의 아드님께로 이끌고 싶단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는 이 모든 세월 동안 나의 손가락은 나의 아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단다. 나는 너희 모두를 그분께 인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2012년 12월 28일).
다음의 내용은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드러난 복음 메시지의 요약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는 예수님과 그분의 상처 입은 성심에 그 어느 때보다 너희를 더 가까이 이끌기를 원한단다. 그리하여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헤아릴 수 없는 그 사랑을 너희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단다. 그러니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사랑의 샘이 너희 마음에서 모든 이에게, 너희를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이들에게까지 흐를 수 있도록 기도하여라.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사랑으로 너희는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희망이 없는 고통스러운 이 세상의 모든 비참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1991년 11월 25일).
따라서 메주고리예에 관련된 전반적인 사건들이 복음의 가르침에 관하여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본질이고, 성모님의 메시지에서 드러나는 세부 내용이 아니라 위대한 권고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덜 중요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일부 메시지들은 신중하게 읽어야만 한다.
결론
38. 영적 사건에 주는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통하여 신자들은 “신중하게 그것을 따를 수 있다”(‘규범’, 제22조 제1항; 참조: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14항). 해당 현상이 초자연적 성격을 띤다는 선언을 의미하지 않고(‘규범’, 제22조 제2항 참조), 신자들이 그 현상을 믿을 의무가 없음을 상기시키는 한편, 장애 없음은 신자들이 이러한 영적 제안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생활에서 긍정적인 격려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공적인 신심 행위를 허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이 영적 경험 가운데 많은 긍정적 열매들이 두드러진 반면 부정적이고 위험한 결과들이 하느님 백성 가운데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우 아름답고 긍정적인 풍성하고 널리 퍼진 이 열매들을 평가한다고 해서 초자연적이라고 주장된 사건들의 진정성을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이는 그저 메주고리예의 이 영적 현상 ‘한가운데에서는’ 성령께서 신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활동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이에게 이 영적 제안의 사목적 가치를 깨닫고 나누도록 초대하는 것이다(‘규범’, 17항 참조).
나아가, 메주고리예의 메시지들이 대부분 교훈적이라는 긍정적 평가는 이것의 직접적인 초자연적 기원을 선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언급할 때에는 ‘추정되는 성모 메시지’라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39. 이 공지에 취합된 요소들은 장애 없음 결정을 내리기 위한 조건들이 충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모스타르-두브노 교구장 주교는 이에 상응하는 교령을 발표할 것이다. 메주고리예 본당에 파견될 특별 사도좌 순시관은 그에게 맡겨진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이고, 메시지들을 모아 놓은 어떤 종류의 출판물이든 그 서문에 이 공지가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특별 사도좌 순시관은 위의 설명에 따라 앞으로 나올 어떤 메시지든 –또는 이전에 나왔지만 아직 공표되지 않은 메시지들을- 식별할 것이고, 그 어떤 출판물이든 출판 전에 승인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특별 사도좌 순시관은 필요하다고 여기는 조치들을 취하고,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상황들에 대처하기 위한 사목적 식별을 이끌며, 신앙교리부에 계속 보고할 것이다.
40. 이 영적 체험 일부의 사실이나 특정 측면들의 진정성에 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더라도, 그러한 체험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교회 권위는 “그 사목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 영적 제안의 확산을 촉진하도록 권장할”(규범, 17항) 것을 요청받는다. 그러나 자기 관할 지역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신중하게 평가하고 그 사안에 관하여 고유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각 교구장 주교의 권한은 여전히 굳게 유효하다(규범, 제7조 제3항 참조). 이러한 영적 현상의 긍정적 열매들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적 현상을 오용하여 잘못된 방법으로 행동하는 집단이나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각 교구장 주교는 자기 교구에서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신중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다.
41. 어떠한 경우든, 메주고리예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순례는 환시를 본다고 하는 이들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화의 모후이신 마리아를 만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동정 마리아께서 다양한 칭호로 공경받고 있는 세계 곳곳의 수많은 성지에서 그러하듯 아드님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충실히 따라 말씀 묵상과 성찬례 참여와 성체조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께 귀 기울이기 위한 것임을 강하게 권고하여야 한다.
42. 이제 메주고리예 메시지의 귀중한 그리스도 중심적 의미를 요약하고 그 가장 참다운 정신을 드러내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읽어 보도록 하자.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나의 말은 간단하단다. …… 나는 너희를 나의 아드님께로 부른다. 오직 그분께서만 절망과 고통을 평화와 평안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단다. 오직 그분께서만 가장 깊은 슬픔 중에 희망을 주실 수 있단다. 나의 아드님께서는 세상의 생명이시다. 너희가 그분을 더욱 잘 알게 될수록 그분께 더 가까이 가며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나의 아드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단다. 사랑이 없으면 너희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조차 사랑이 있으면 가장 아름답게 된단다”(2018년 9월 2일 메시지).
평화의 모후시여, 메주고리예의 영적 제안을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더 하나 되어 살아가고 그분 안에서 마음의 참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
어머니께 또한 ‘산발적인 제3차 세계 대전’에 무릎 꿇는 이 세상을 맡겨 드리나이다. 평화의 모후시여, 어린이들과 젊은이들, 가난한 이들과 선의의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간절한 청원을 들어주소서.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죄 없으신 당신을 바라보며, 사랑이 미움을, 진실이 거짓을, 용서가 분노를, 평화가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저희가 계속 믿고 희망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프란치스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 2022.12.8.)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4년 8월 28일, 아래에 서명한 신앙교리부 장관과 교리 부서 차관에게 허락하신 알현에서 이 공지를 승인하시고 그 공표를 명하셨다.
로마 신앙교리부에서
2024년 9월 19일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
교리 부서 차관 아르만도 마테오 몬시뇰
2024년 8월 28일 알현에서
프란치스코
<원문: Dicastery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Note about the Spiritual Experience Connected with Medjugorje, “The Queen of Peace”, 2024.9.19., 이탈리아어도 참조>
영어:
이탈리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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