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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63
1139독, 스님 승(僧) - 두 번째
편지를 보내고 나면, 독자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에게 의견이나 소감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그 덕분으로 힘을 내고, 또 신심을 일으킵니다. 그 중에는 제가 잘못 말씀드린 부분이 있다고 하면서 교정할 부분을 알려오기도 합니다. 지난 편지에 대해서도 그랬습니다. 한 독자분께서 저의 오류를 알려왔습니다. 문제가 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도서천지론가’ 다음에 ‘중화일역지고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중화’는 다 아시 다시피 중국입니다. 중국집을 ‘중화반점’이라고 하는 데에서 가장 분명한 용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역’은 일본을 가리킵니다. 일본 지역이라는 뜻이지요. ‘중화일역지고승’은 ‘중국과 일본의 고승’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정신게」는 ‘인도서천지론가 중화일역지고승’ 이하에서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서 일본에 이르러 온 정토신앙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잘못인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중하일역지고승’이라고 하였는데, 저는 ‘중화일역지고승’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정신게」는 분명 ‘중하(中夏)’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 편지에서 제시하는 「정신게」 원문에도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머릿속에서는 “중국집을 ‘중화반점’이라고 하는” 선입견이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중국 역사에 보면, 왕조의 시작이 ‘하은주(夏殷周)’로 변화되어 갑니다. 최초의 나라가 하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스스로 ‘중하’라고도 부르고, ‘하화(夏華)’라는 말도 씁니다.
이 점을 바로 잡습니다. 오류를 알려주신 독자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기탄없이 알려주시길 빕니다.
이제 「정신게」를 읽어봅니다. ‘스님 승’을 주의해 주십시오. 2번 나옵니다.
귀명무량수여래(歸命無量壽如來) ⟶ 나무불가사의광(南無不可思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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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보살인위시(法藏菩薩因位時) ⟶ 재세자재왕불소(在世自在王佛所)
도견제불정토인(都見諸佛浄土因) ⟶ 국토인천지선악(國土人天之善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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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무상수승원(建立無上殊勝願) ⟶ 초발희유대홍서(超發希有大弘誓)
오겁사유지섭수(五劫思惟之攝受) ⟶ 중서명성문시방(重誓名聲聞十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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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방무량무변광(普放無量無邊光) ⟶ 무애무대광염왕(無碍無對光炎王)
청정환희지혜광(淸淨歡喜智慧光) ⟶ 부단난사무칭광(不斷難思無稱光)
초일월광조진찰(超日月光照塵刹) ⟶ 일체군생몽광조(一切群生蒙光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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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명호정정업(本願名號正定業) ⟶ 지심신요원위인(至心信樂願爲因)
성등각증대열반(成等覺證大涅槃) ⟶ 필지멸도원성취(必至滅度願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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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소이흥출세(如來所以興出世) ⟶ 유설미타본원해(唯說彌陀本願海)
오탁악시군생해(五濁悪時群生海) ⟶ 응신여래여실언(應信如來如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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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발일념희애심(能發一念喜愛心) ⟶ 부단번뇌득열반(不斷煩惱得涅槃)
범성역방제회입(凡聖逆謗齊回入) ⟶ 여중수입해일미(如衆水入海一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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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취심광상조호(攝取心光常照護) ⟶ 이능수파무명암(已能雖破無明闇)
탐애진증지운무(貪愛瞋憎之雲霧) ⟶ 상부진실신심천(常覆眞實信心天)
비여일광부운무(譬如日光覆雲霧) ⟶ 운무지하명무암(雲霧之下明無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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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신견경대경희(獲信見敬大慶喜) ⟶ 즉횡초절오악취(卽橫超截五惡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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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 문신여래홍서원(聞信如來弘誓願)
불언광대승해자(佛言廣大勝解者) ⟶ 시인명분타리화(是人名分陀利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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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불본원염불(彌陀佛本願念佛) ⟶ 사견교만악중생(邪見憍慢悪衆生)
신요수지심이난(信樂受持甚以難) ⟶ 난중지난무과사(難中之難無過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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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현대성흥세정의(顯大聖興世正意) ⟶ 명여래본서응기(明如來本誓應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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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능가산(釋迦如來楞伽山) ⟶ 위중고명남천축(爲衆告命南天竺)
용수대사출어세(龍樹大士出於世) ⟶ 실능최파유무견(悉能摧破有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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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대승무상법(宣説大乘無上法) ⟶ 증환희지생안락(證歡喜地生安樂)
현시난행육로고(顯示難行陸路苦) ⟶ 신요이행수도락(信樂易行水道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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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념미타불본원(憶念彌陀佛本願) ⟶ 자연즉시입필정(自然卽時入必定)
유능상칭여래호(唯能常稱如來號) ⟶ 응보대비홍서은(應報大悲弘誓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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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조론설(天親菩薩造論說) ⟶ 귀명무애광여래(歸命無碍光如來)
의수다라현진실(依修多羅顯眞實) ⟶ 광천횡초대서원(光闡橫超大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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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유본원력회향(廣由本願力廻向) ⟶ 위도군생창일심(爲度群生彰一心)
귀입공덕대보해(歸入功德大寶海) ⟶ 필획입대회중수(必獲入大會衆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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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지연화장세계(得至蓮華藏世界) ⟶ 즉증진여법성신(卽證眞如法性身)
유번뇌림현신통(遊煩惱林現神通) ⟶ 입생사원시응화(入生死園示應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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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담란양천자(本師曇鸞梁天子) ⟶ 상향란처보살례(常向鸞處菩薩禮)
삼장류지수정교(三藏流支授淨教) ⟶ 분소선경귀락방(焚燒仙經歸樂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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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론주해(天親菩薩論註解) ⟶ 보토인과현서원(報土因果顯誓願)
왕환회향유타력(往還廻向由他力) ⟶ 정정지인유신심(正定之因唯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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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 증지생사즉열반(證知生死卽涅槃)
필지무량광명토(必至無量光明土) ⟶ 제유중생개보화(諸有衆生皆普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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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결성도난증(道綽決聖道難證) ⟶ 유명정토가통입(唯明浄土可通入)
만선자력폄근수(萬善自力貶勤修) ⟶ 원만덕호권전칭(圓滿德號勸專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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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삼신회은근(三不三信誨慇懃) ⟶ 상말법멸동비인(像末法滅同悲引)
일생조악치홍서(一生造悪値弘誓) ⟶ 지안양계증묘과(至安養界證妙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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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독명불정의(善導獨明佛正意) ⟶ 긍애정산여역악(矜哀定散與逆惡)
광명명호현인연(光明名號顯因緣) ⟶ 개입본원대지혜(開入本願大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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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정수금강심(行者正受金剛心) ⟶ 경희일념상응후(慶喜一念相應後)
여위제등획삼인(與韋提等獲三忍) ⟶ 즉증법성지상락(卽證法性之常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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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광개일대교(源信廣開一代教) ⟶ 편귀안양권일체(偏歸安養勸一切)
전잡집심판천심(專雜執心判淺深) ⟶ 보화이토정변립(普化二土正弁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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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악인유칭불(極重惡人唯稱佛) ⟶ 아역재피섭취중(我亦在彼攝取中)
번뇌장안수불견(煩惱障眼雖不見) ⟶ 대비무권상조아(大悲無倦常照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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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원공명불교(本師源空明佛敎) ⟶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진종교증흥편주(眞宗教證興片州) ⟶ 선택본원홍악세(選擇本願弘惡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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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래생사륜전가(還來生死輪轉家) ⟶ 결이의정위소지(決以疑情爲所止)
속입적정무위락(速入寂靜無爲樂) ⟶ 필이신심위능입(必以信心爲能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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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대사종사등(弘經大士宗師等) ⟶ 증제무변극탁악(拯濟無邊極濁悪)
도속시중공동심(道俗時衆共同心) ⟶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
(『교행신증』 제2권)
‘스님 승’이 들어가는 두 번째 구절이 ‘유가신사고승설’입니다. 「정신게」 전체 120구절 중에서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들어가는 게송을 정리해 봅니다.
홍경대사종사등(弘經大士宗師等)
증제무변극탁악(拯濟無邊極濁悪)
도속시중공동심(道俗時衆共同心)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
첫 구절과 세 번째 구절에 주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주어가 바뀌기 때문에, 두 번 들어갑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넓혀주신 대사, 즉 보살과 종사 등”이라 하였습니다. ‘대사’는 마하살(摩訶薩, mahāsattva)의 번역어입니다. 보살마하살이라고 할 때의 ‘마하살’입니다. 즉 보살입니다. 7고승 중에서는 구체적으로 인도의 용수와 천친을 가리킵니다. 두 분 다 ‘용수보살’, ‘천친보살’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종사’는 큰스님입니다. 흔히 ‘대종사’라고도 합니다. 담란스님부터 도작, 선도, 원신, 원공스님들을 가리킵니다. 중국과 일본의 고승들입니다.
이 일곱 분들이 “지극히 혼탁하고 악한 (업을 지어온 중생들을) 구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1-2구의 뜻, 즉 ‘홍경대사종사등’에 대하여, 우리 중생들이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3-4구에 나옵니다.
우리 중생들을 가리키는 말이 ‘도속시중’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실 선도대사의 관경소 제1권 현의분(玄義分)의 앞머리에 나오는 게송(=권중게/勸衆偈)의 첫 구절입니다. “도속시중등(道俗時衆等) 각발무상심(各發無上心)”. 즉 “도속의 시중들은 각기 위없이 높은 마음을 발하라”고 하였습니다. ‘도속시중’에서 ‘도속’은 스님과 재가자를 말합니다. 스님은 ‘도인’이고, 재가자는 ‘속인’입니다. ‘시중(時衆)’은 ‘지금 대중’이라는 뜻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읽으신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만, 잇펜(一遍)스님은 시종(時宗)의 개조입니다. 그런데 이 시종이라는 종파 이름은 나중에 붙여지는 것이고, 잇펜 스님 당시에는 ‘시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시중’이라는 말의 연원 역시 선도대사의 관경소 현의분입니다.
도속시중들은 다 한 마음으로, ‘도속시중공동심’으로 ‘유가신사고승설’하라는 것이 신란스님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오직 이러한 (일곱) 고승들의 말씀(=가르침)을 믿을 지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지금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렇게 마지막 게송의 맥락에서 보면 ‘인도선천지론가’로부터 시작되는 7고승에 대한 신란스님의 찬탄을 맺음하는 말입니다.
‘인도서천지론가’ 바로 앞 구절은 ‘난중지난무과사’입니다. ‘어렵다 어렵다 해도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 어려운 것을 이제 우리가 신요(信樂)하여 수지(受持)한다면 공덕이 매우 클 것입니다.
‘난중지난무과사’는 ‘귀명무량수여래’에서 시작하는 전반부에 대한 종결(終結)입니다. 그리고 ‘유가신사고승설’은 ‘인도선천지론가’에서 시작하는 후반부에 대한 종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유가신사고승설’이 커버(cover)하는 것은 「정신게」 전체가 아니라 「정신게」 중에서 7고승을 말하는 부분까지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신게」는 두 부분의 노래를 하나로 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유가신사고승설’이 마지막 구절이니까, 7고승만이 아니라 무량수경의 말씀에 대한 찬탄까지를 맺음하는 것으로 한다면, 즉 「정신게」 전체를 맺음하려고 한다면 ‘유가신사고승설’이 아니라 ‘유가신사불조설(唯可信斯佛祖說)’이라 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신란스님은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유가신사고승설’에서 ‘가’는 ‘옳을 가’라는 뜻이지만, 문장 안에서는 가능을 의미하는 조동사로 쓰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구절에서 그렇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can’이 아니라 ‘must’입니다. ‘믿을 수 있다’가 아니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바로 탄이초 제2조에서 하신 신란스님의 말씀입니다. 멀리 동북지방에서 제자들이 교토까지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신란에게 있어서는 다만 염불하여 아미타불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하신 좋은 분의 가르침을 입어서 믿는 것 외에, 다른 특별한 방법(仔細)이 있는 것이 아닙니 다.
염불이 참으로 정토에 태어나는 씨앗이 될지, 또는 지옥에 떨어질 업이 될지, 그 모두를 알지 못합니다. 가령, (스승인) 호넨스님(法然聖人)에게 속아서 염불하 여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염불) 이외의 다른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몸이 염불을 해서 지옥에 떨어진다 고 한다면야, 속았다고 하는 후회도 있을 터이지만, 그 어떤 수행도 할 수 없는 몸이었기에, (어차피) 지옥에 간다는 것은 필연적(一定)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란스님은 이러한 믿음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스스로의 업연(業緣)을 생각한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호넨스님의 가르침, 즉 무량수경에서 시작된 경전의 말씀이나 용수보살에게서 시작된 고승들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염불을 하라는 말씀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서,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 선재(善財)동자처럼 몸을 던지는 신란스님이 여기 계십니다. 이러한 믿음은 스승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스승이 말씀하신은 가르침에 대한 믿음입니다. ‘고승설’에 대한 믿음이지, ‘고승’에 대한 믿음은 아닙니다.
정토불교에서는 ‘고승’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제는 어차피 아미타불만 할 수 있고, 아미타불의 가르침인 염불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고승들은, 스승들은, 그 가르침을 펼쳐서 제시하는 존재입니다. 등대가 없으면, 등불이 없습니다. 하지만, 등대가 곧 등불이 아닙니다. 등대 속에서 밝혀지는 것이 스승입니다. 스승의 존재는 그런 것입니다.
긴 편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월이 되어서 생기가 돕니다. 활기찬 하루하루 보내시길 빕니다. 아미타불의 광명 속에서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2024년 3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