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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7. 폼페이-소렌토-나폴리)
이날은 로마에서 남쪽으로 3시간 거리에 있는 폼페이로 가기 위해 아침을 서둘러 먹고 오전 7시 30분에 버스에 올랐다. 남부지방이라 아무래도 날씨가 더울 것 같아서 복장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햇볕을 가리면서 통풍이 잘되는 개량 한복으로 챙겨 입었다. 마침 전날 피렌체에서 구입한 작은 가죽가방이 개량 한복 복장에 아주 잘 어울려서 더 좋았다. 5월초인데도 이탈리아는 낯 죄고기온이 30도를 오르내렸다. 사계절이 있어 여름에 기온이 높은 것은 우리나라와 같지만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상 겨울이 우기이고 여름엔 건조한 것이 우리와 다르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한 낯의 햇볕은 따가웠어도 그렇게 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진 1) 폼페이, 소렌토, 나폴리 위치도
사진 2) 아침 식사
사진 3) 개량한복을 입고 호텔방에서
호텔을 출발하여 긴 시간 버스를 타고 갔으면서도 그동안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아침 일찍 일어난 관계로 잠이 모자라서 버스에서 내내 졸았던 모양이다. 한참 졸다가 오전 10시경이 되어 눈을 떠서 보니 차창 밖으로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옛날 화산폭발로 폼페이를 집어 삼켰다는 유명한 산이지만 멀리서 봐서 그런지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도시로서 서기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전체와 당시 인구의 10퍼센트인 2,000여명의 주민이 화산재에 파묻히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비운의 도시이다. 버스는 폼페이 시내로 진입하여 오전 10시 25분경에 유적지 입구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매표소를 지나 유적지 안으로 들어섰다.
사진 4) 차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베수비오 화산
사진 5) 폼페이 유적지 입구
사진 6) 폼페이 유적지(진입로)
폼페이는 나폴리만 연안의 고대 항구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했으며 로마시대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지이고 귀족들의 휴양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그 주변으로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쌓이고 용암이 응결하면서 도시전체가 그대로 매몰되었다. 그 후 잔디와 덩굴식물들이 자라 그 자리를 덮게 되고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폼페이란 도시는 그 이름과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小)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화산이 폭발할 때 소(小)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는데,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이렇게 역사에서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그림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지만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 작업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748년에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그 후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비로소 폼페이는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폼페이 발굴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라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진입로를 따라 언덕에 오르니 신전 등 공공건축물의 흔적인 대형 돌기둥이 광장을 둘러싸고 여기 저기 서있었다. 광장으로 부터 아래로는 구획에 따라 잘 정비된 시가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로는 납작한 돌로 잘 포장되어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고 도로 양쪽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의 부서진 벽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차도에는 마차가 지나다닌 흔적이 보였고 인도는 오늘날처럼 차도와 구분되어 조금 높게 설치되어 있었다. 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로변에는 공공 수도시설이 설치되어있고 각 가정으로 물을 보내기 위한 수도관과 주택에 설치된 배수관도 눈에 띠었다. 그리고 여관과 병원, 선술집과 카페, 공중목욕탕과 원형극장 등의 편의 시설도 갖춘 흔적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현대 도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으로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진 7) 폼페이 유적지(공공 광장)
사진 8) 폼페이 유적지(공공 광장)
사진 9) 폼페이 유적지
사진 10) 인도와 구분되어 돌로 잘 포장된 도로
사진 11) 마차가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정지표석
사진 12) 도로변 공공수도시설
사진 13) 수도 배관
사진 14) 주택 벽면에 설치된 배수관
가이드는 폼페이 유적지내의 도로를 따라가며 이것저것을 설명하다가 어느 사거리 모퉁이를 돌아 당시 매음굴(사창가)이었던 집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매음굴에 대해 모두 관심이 많은지 우리 뒤로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줄을 이어 골목을 꽉 메웠다. 예나 지금이나 항구와 사창가는 뗄 수 없는 관계인 모양이다. 매음굴의 존재는 폼페이가 당시 상업이 번창한 국제적인 항구도시였음을 짐작케 하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 선원들과 상인들을 위해 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로 바닥과 사창가 입구에 남성의 심벌을 새기거나 모형을 박아놓은 아이디어가 참 재미있게 느껴졌다. 매음굴 안으로 들어서니 벽면 이곳저곳에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침대로 쓰인 공간도 보였다.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 따르는 성행위와 그 테크닉은 2000년 전에도 지금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사진 15) 매음굴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광객들
사진 16) 매음굴로 가는 길목에 뱀을 그린 벽화
사진 17) 매음굴임을 표시하는 남성의 심벌
사진 18) 포장 도로 돌바닥에 남성의 심벌을 새겨 매음굴의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
사진 19) 2층으로 된 매음굴
사진 20) 매음굴 내부 화장실(?)
사진 21) 성행위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매음굴 내부 벽화
사진 22) 성행위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매음굴 내부 벽화
가이드는 다음으로 공중목욕탕 시설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그 시대에 폼페이에는 공중목욕탕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도 놀라운 일인데, 예술적이고 과학적으로 꾸며진 목욕탕 내부시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했다. 화산 폭발로 도시전체가 매몰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그 이후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덕분에 2000년이나 지난 오늘날 우리들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해외여행 중 이와 같은 유적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 역사도 다시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서양에 2000년 전에 이 정도의 문명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단군조선의 역사도 분명히 사실이며 그 흔적이 틀림없이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23) 공중 목욕탕 입구에서 내용을 설명하는 가이드
사진 24) 공중목욕탕의 원형욕탕
사진 25) 공중목욕탕 욕실
사진 26) 공중목욕탕 대리석 용기
사진 27) 공중목욕탕 욕탕
사진 28) 공중목욕탕 벽면 장식
사진 29) 폼페이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
사진 30) 폼페이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
우리는 오전 11시 40분경에 폼페이 유적지 관람을 마치고 출구를 통해 언덕아래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하여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 후 오후 일정은 카프리섬 선택 관광이 예정되어있었지만 우리일행 8명은 선택 관광에 참여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나폴리 시내를 한번 둘러보기로 하였다. 외국에 나가면 돈이 좀 들더라도 가급적 많은 것을 보는 것이 좋기는 한데, 1인당 120유로(약 15만원)라는 추가 비용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만한 해안 풍경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카프리섬 관광을 위해 폼페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배가 있는 소렌토항으로 이동하는 시간에, 잔류자인 우리는 식당 부근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대기하다가 오후 1시 40분에 버스를 타고 소렌토가 보이는 언덕으로 이동하였다.
사진 31) 폼페이 유적지 관람을 마친 후 언덕 아래 식당가로 내려가는 중
사진 32) 점심을 먹은 식당
사진 33) 점심
사진 34) 점심을 먹고 인근 카페에서
세계적인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Come back to Sorrento)"로 잘 알려진 소렌토(Sorrento)는 소렌타인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나폴리 근처의 도시로서 해안 휴양지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버스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 산등성이를 관통하는 터널을 지나 구부구불하고 아찔한 절벽위의 고갯길에 들어섰다. 우리는 오후 2시 경에 고갯길 중간지점에 있는 전망대에 내려 아름답게 펼쳐진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해안절벽 위에 형성된 소렌토 시가지를 관망하였다. 우리는 소렌토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그곳 노점에서 차를 마시며 40여 분간 시간을 보낸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나폴리로 이동하였다. 소렌토항에서 배를 타고 카프리섬 관광을 떠난 사람들은 관광 후 나폴리항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사진 35) 소렌토 전경
사진 36) 소렌토를 배경으로
사진 37) 소렌토 반대편 까마득한 절벽위의 집을 배경으로
버스에서 깜박 졸다가 눈을 뜨니 오후 3시 20분경에 버스는 나폴리 해안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라고 잘 알려져 있기에 그 모습이 무척 궁금했는데, 울퉁불퉁한 도로와 도로변의 지저분한 아파트의 모습에 우리는 크게 실망하였다. 철도와 병행한 차도는 노면상태가 불량하였고 아파트 창틀에는 널어놓은 빨래로 가득하였으며, 벽면은 퇴색하거나 미장의 일부분이 탈락하여 전체적으로 우중충하였다. 이곳이 과연 유명한 나폴리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폴리항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평소에 외국인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도시의 미관과 시설관리가 그 정도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진 38) 나폴리 해안도로 풍경
사진 39) 나폴리 해안도로변 아파트 풍경(1)
사진 40) 나폴리 해안도로변 아파트 풍경(2)
우리는 오후 3시 30분경에 나폴리항 여객터미널 주차장에서 내려 나폴리에서 유명하다는 피자집을 찾아 나섰다. 누오보 성(Castel Nuovo)을 지나 플레비스시토 광장 쪽으로 걸어가니 여러 개의 피자가게가 보였다. 우리는 그 중 한 가게에서 피자 한판을 주문하여 한 조각씩 나누어 먹었다. 오후 4시경이 되어 배가 고파서 그런지 상당히 맛이 있었다. 피자를 먹고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경험을 위하여 해안에서 시가지 쪽으로 방향을 바꿔 나폴리의 번화가인 토레도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거리를 걷는데 어느 건물사이 매점에서 물건을 팔며 뜨개질을 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여인은 뜨개바늘로 모자를 뜨고 있었다. 이를 보자 아내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뜨개질하던 것을 달라고 하여 짧은 순간에 한 바퀴를 돌려 포인트를 넣는 손기술을 선보임으로써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사진 41) 플레비스시토 광장
사진 42) 피자가게
사진 43) 피자 한판
사진 44) 나폴리 토레도 거리
사진 45) 어느 매점에서 뜨개질을 지도하는 아내
우리는 토레도 거리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다가 오후 5시경에 다시 누오보 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누오보 성(Castel Nuovo)은 ‘새로운 성’이란 뜻으로 나폴리의 상징적인 존재이며, 1282년 프랑스 양주 가문의 샤를이 세운 4개의 원통형 탑을 가진 프랑스풍의 성이다. 15세기 때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이 양주 가문을 격파하고 이 성을 개축하면서 오른쪽의 두 탑 사이에 개선문을 세웠다. 성 앞에는 파란 잔디가 깔려 있어 나폴리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파란 잔디 위 화단에는 병 닦는 솔 모양의 빨간색 꽃이 아름답게 피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정문인 개선문을 통하여 성 안을 들여다보니 성벽 건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외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아치형의 개선문 안쪽 벽면에는 양쪽으로 이 성을 정복한 병정들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었다.
사진 46) 누오보 성 전경
사진 47) 누오보 성 개선문 앞
사진 48) 누오보 성 앞 병닦는 솔처럼 생간 꽃
우리는 누오보 성 안팎을 여유 있게 관람한 후 나폴리항 여객터미널로 돌아가 카프리 섬으로 간 다른 일행들의 귀환을 기다렸다. 도착예정시간보다 조금 늦은 오후 6시 20분이되어서야 배가 선착장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로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카프리 섬 일행과 합류한 우리는 곧 바로 터미널 주차장에 세워둔 버스를 타고 로마로 이동하여 전날 저녁과 같은 식당에서 오후 9시경에 삼겹살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10시가 넘어 전날 묵었던 호텔로 돌아왔다. 이때 아내는 뭐가 급한지 한 외국인 남자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동승하여 먼저 숙소로 올라갔는데, 잠시 후 뒤따라 방으로 가보니 아내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기에 나는 아내가 혹시 납치된 것이 아닌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호텔지하와 옥상사이를 정신없이 오르내리며 아내를 찾았고, 아내는 또 나를 찾아 헤매는 해프닝이 있었다. 서로 길이 엇갈려 한참을 헤맨 후 호텔로비에서 눈이 마주친 우리는 감격의 포옹을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하였다.
사진 49) 나폴리항 여객 터미널
사진 50) 저녁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