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의 교파들
1. 머리말 2. 여러 개신교 교회 3. 종파 분열의 원인 4. 한국 기독교의 분열 5. 맺음말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천주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뒤를 이어, 개신교 각 종파들이 앞을 다투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개신교는 1884년 매클래이 선교사에 의해서 전해진 감리교이다. 그를 필두로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 성결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대부분 1900년대 초에 들어왔다. 이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교육과 병원 사업에 주력하여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끌게 해주었다. 1909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져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많은 개신교들도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순교도 하고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개신교에서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일본의 종교인 신교를 믿도록 강요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광복을 맞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는 이제부터 분열의 아픔을 겪기 시작한다. 개신교는 다양한 이유로 많은 분열을 겪는데, 특히 장로교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현재 49개의 교단이 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생겨났는데, 그 당시 시대 분위기가 가톨릭을 반대하던 분위기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학을 들고 자신의 교회를 세웠다. 독일에서는 루터,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칼빈,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 등이 각자 자신의 교리를 내세우고, 가톨릭을 비판하면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박해를 심하게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를 피해 여러 나라로 피신하게 되었다. 유럽 안에서 돌고 돈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가 신대륙 즉, 아메리카로 피신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독자적인 교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을 가리켜 우리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한다. 이 미국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교리와 신앙을 가지고 건너와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 우리나라로의 개신교 전파는 대부분 미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면서 천주교가 한국에 전파된 지 100년 늦은 19C말에 한국에도 개신교가 생겨났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는 60여개의 종파로 나누어진 개신교회가 있다, 지금부터는 이 개신교회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언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장로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감독(bishop) · 장로(elder) 등과 같은 의미로, 장로교는 이러한 장로들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를 말한다. 창시자는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빈으로, 그는 16세기 중엽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1559년에는 프랑스에서만 2,000여 교회가 장로 제도를 채택하였고, 이어 네덜란드 · 스코틀랜드에서도 많은 장로교회가 생겨났다. 1660년 청교도혁명이 끝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뒤 잉글랜드에서는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세계 장로교의 규범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헌법·예배지침 등을 청교도혁명 기간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장로교 역사상 중요한 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1706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노회가 조직되고, 1789년에는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노예문제·신학·전도방법 등의 이견으로 여러 교단이 출현하였다. 하나의 행정조직으로 운영되던 한국 장로교회는 광복 이후 신앙과 신학노선 등 여러 갈등 요인으로 인해 분열되기 시작해 2002년 현재 40개가 넘는 교단이 활동하고 있다. (2) 침례교 청교도 혁명 전에 네덜란드로 간 분리주의 청교도 중 일부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해 살았는데, 지도자 존 스미스는 옆에 살던 재세례파 메노나이트교인들의 영향을 받고 성서에는 영아 세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여, 스스로 성서대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고 교인 전원에게 모두 그런 침례를 주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1612년경 영국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영국 가지로 퍼지고 1639년에 미국 로드아일랜드 침례교회를 설립하면서 미국 각처로, 특히 남부로 많이 퍼졌다. 현재 미국 남침례 교회는 미국 개신교파 중 가장 크다.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도 이 교파에 속했으나 몇 년 전 교회가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채택한 데 반대하여 교회를 떠났다. 한국에는 1890년 캐나다의 M. 위크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元山)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두 그룹은 1959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영국 교회 신부의 열 다섯째 아들이었던 요한 웨슬리(1703-1791)는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고 일정한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임하심을 직접 체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회심(回心)’을 통해 사물을 보는 안목과 삶 자체가 바뀌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의 동료들은 그들을 ‘절도주의자(節度主義者)’라 부르며 놀렸다. 1735년 요한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가는 도중 배 위에서 모라비아 형제단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회심’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웨슬리는 전도 여행을 마치고 런던에 돌아가서 스스로 이런 회심을 경험하고, 자기의 경험을 주위 사람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영국 교회를 떠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열성적인 전도로 그를 따르는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자연히 하나의 교파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가 죽을 때 그를 따르는 이가 영국에서만 7만이나 되었고 더욱이 미국에서의 성장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 엄청났다. 감리교는 미국에서 침례교단 다음으로 큰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루터교회는 신약·구약성서를 신앙과 생활의 절대규범으로 믿으며, 사도신경·니케아신경·아타나시우스신경·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및 《루터 소교리문답서》를 교리로 여기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를 말한다. 한국에 루터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32년(순조 32)으로, 독일인 선교사가 원산도에 상륙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루터교 미주리의회에서 선교사 3명을 파견한 1958년 1월의 일이다. 이듬해 2월 서울 YMCA 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갖고, 같은 해 5월 처음으로 세례 및 입교식을 가졌으며, 역시 같은 해 11월 기독교방송 전파를 이용해 '루터란아워' 방송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업에 들어갔다. 이후 한국의 루터교회는 1969년까지 한국루터교선교부로 있다가, 1971년 한국루터교선교회로, 1973년 한국루터교회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0년부터 기독교한국루터회로 부르게 되었다. 1960년 5월 기독교 통신강좌 보급 및 컨콜디아출판사를 통한 문서선교를 시작하였고, 1961년 3월부터는 월간 《새생명》을 발간하였다. 1972년 루터교세계연맹(LWF)에 가입해 국제 교류를 시작하였고, 같은 해 국제루터교협의회(ILC)에도 가입하였다. 1981년 6월에는 경기도 용인시에 루터신학대학교를 설립해 전도사업과 지도자 양성을 위한 기초를 확립하였다. 총회는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산하에 컨콜디아사 · 기독교통신강좌부 · 사회사업부 · 루터란아워방송(국제복음방송) · 베델성서연구원 · 루터신학대학교 · 북방선교위원회 등이 있다. 4중복음, 즉 중생·성결·신유·재림을 주요 명제로 삼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영혼 구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일본 도쿄에 있던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정빈 두 사람이 1907년 동양선교회 선교사 C.E.카우만 부부와 E.A.킬보른의 도움으로 서울 종로 염곡(현재: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911년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을 설립하고, 1921년에는 '기독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듬해부터 기관지 《활천(活泉)》을 발간하였다. 그 후 유지재단 설립, 총회 조직 등 교세확장에 힘써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구세군과 더불어 다른 교단보다도 심하게 탄압받아 강제 해산되었으며, 많은 교역자와 신도가 순교하거나 추방당하고 또는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후에 재건되어 1949년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나 다시 6·25전쟁으로 많은 목사가 납북되는 등 남다른 수난을 겪었다. 1951년 미국에 본부를 둔 동양선교회 주한선교부가 활동을 개시하였고, 1957년에는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관을 설립하는 등 많은 기념사업을 펼쳤다. 1961년 연합기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의 탈퇴문제로 일시 교단이 분열되었으나 1965년에 다시 합동을 이룩하고 교세확장에 힘썼다. 2001년 현재 교회 3,101개, 목사수 5,010명, 교인수 62만 3,813명이다. 교육기관으로 서울신학대학교가 있으며, 기타 사회사업기관이 있다. 한편, 인도·타이 등 해외선교활동도 활발하다. 기구편성은 총회·총회장 밑에 각 위원회와 학교법인·유지재단 등 많은 부서가 있고, 교단 산하에 해외·국내·특수전도·농어촌부를 비롯한 각종 부처가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890-56번지이다
1830년대 말에서 40년 초에 걸쳐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윌리엄 밀러 주도하에 일어난 예수재림의 대망을 강조하는 운동이 그 효시가 된다. 당시 200여 교회의 목사와 5만여 명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 후 그들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창세기》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 중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넷째 계명, 즉 제7일 안식일의 준수를 회복하고 실천하는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와 ‘믿음만으로(Sola fide)’의 두 원리 위에 입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십계명을 준수할 것을 역설하고, 십계명의 넷째 계명인 안식일이 제7일에 해당되므로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지키는 한편, 그리스도가 개체를 가지고 재림할 것을 고대하며 그 사건을 가장 큰 소망으로 바라고 있다. 이 교단은 현재 210개국(거의 전세계)에서 567개 방언으로 전도사업·교육사업·의료사업·출판사업·구호사업 등을 전개하며, 대총회라는 이름으로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세계를 13개 지회로 나누어 연합회·대회·교회의 순서로 조직체를 이루고 있다. 이 교단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04년 손흥조가 일본에서 교리를 전해 듣고 이를 임기반에게 전하여, 여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일본의 구니야히데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회를 연데서 비롯되었다. 1905년 스미스 목사가 첫 선교사로 내한하여 같은 해 순안에서 교육사업과 출판사업이 시작되었다. 1908년 한국 미션, 1919년 한국연합회가 조직되었고 특히 1915년에는 이근억·정문국이 최초의 한국인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는 한국연합회는 산하에 5개 지방 대회를 두고 600여 교회가 있으며 기관으로 삼육대학을 비롯한 27개의 각급 학교, 서울·부산의 위생병원, 8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선교잡지 《시조(時兆)》 및 각종 출판물을 발간하는 시조사, 삼육식품공장 등이 있다.
구세군의 해외선교는 1880년부터 시작되어 유럽 여러 나라와 캐나다, 미국 등에 전파되었고, 동양에는 1895년 처음으로 일본에 전파되었다. 한국에 구세군이 전파된 것은 1907년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암 뿌드 대장의 일본 순회 집회 때 참석했던 조선 유학생의 요청에 따라, 1908년 10월에 정령 허가두 사관에 의해 한국선교가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나라를 잃은 민중들에게 제복 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어, 1908년 11월 22일에 한국 구세군의 첫 번째 교회인 서울 제일영(현 서대문 영문)이 당주동에 개영하게 되었다.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초대 한국사령관인 허가두 정령의 8년간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교회) 78개소를 개척하였다. 1909년부터 문서선교로 구세공보가 발행되었으며, 절제호라는 특집호를 발행하여 금주, 금연의 절제운동의 시작하였다. 한편 이로써 무르익은 절제운동이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두캠페인과 문서 선교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사회사업은 1918년 한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서대문구 충정로에 아동구제시설인 혜천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윤락여성을 위한 여자관과 교육사업인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24년부터 천재지변에 구호를 실시하는 긴급구호를 시작하는 등 선교에 못지않게 사회사업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한편 1928년부터는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에 자선냄비운동이 시작되어 전국민적으로 사랑 심기운동을 펼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 하에서의 선교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탄압이 시작되었고, 1941년 일본에 의해 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해외 사관들은 모두 귀국조치 시키는 등 일본 구세군에 의해 운영되었다.1943년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 구세군은 강제 폐쇄 조치되어 지하교회로 그 명맥을 이어오던 중, 해방 이후 1947년 새로운 사령관의 부임과 더불어 사업이 재개되었다. 이때 시작한 의료사업(영동 구세병원)은 미국인 리차드 박사의 적극적인 참여로 사회사업에 새로운 장을 여는 듯 했으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당시 구세군 사령관이던 로오드 부장은 피납되었고, 진주영문 담임 사관이던 노영수 참령이 순교당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많은 피해를 당하는 수난이 계속되었다. 올해로 95주년을 맞는 한국구세군은 그동안 20명의 사령관이 바뀌어 오는 동안 현재 220여개의 영문(교회)과 100,000여명의 교인, 지역사회복지 시설 220여개, 전문 사회사업시설 47개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등 선교와 사회사업에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은 전부 해방 이후에 일어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의 억압과 박해로 분열 할 틈이 없었지만, 해방 이후에 일제 시대동안 박해를 받아왔던 교회를 정리하면서 교회 분열의 문제가 하나둘씩 대두 되었다. 물론 일제에게 협력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교회가 분열하지는 않았다.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은 복합적인 이유로 분리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원인 세 가지를 알아보겠다. 어떤 교회의 분열은 첫 번째로만, 또 다른 교회의 분열은 이 세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분열되었다.
첫째로, 일제에 협력하였던 자들과의 대립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천주교와 개신교에 신사참배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모든 이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좀 더 강경한 방법으로 신사참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1938년 장로교측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가결안을 따르지 않은 이들은 순교하거나 투옥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면서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교회는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의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들을 도와주었다. 신사참배를 하거나, 복음서이외의 성서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개신교와 신도(神道)를 결합시키려고 했다. 해방 후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과의 대립으로 여러 교회가 분열되었다. 이는 일제로부터뿐만 아니라 가톨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때 로마 제국의 대박해에 순교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배교하거나 박해를 피해 달아났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해가 끝난 후 개혁자 문제로 가톨릭교회도 진통을 겪었다. 이러한 일제 시대에 일본을 협력한 자들의 문제로 개신교 교회는 분열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장로교측에서 고려파장로교가 분열하였고, 감리교회도 이 문제 때문에 분열하게 되었다.
둘째, 교회 안에서 신학적 노선의 차이로 인한 분열이다. 한국개신교회는 신학적 배경과 유산으로 미국의 보수주의적 근본주의를 가진다. 근본주의 신학이 이식되었고, 독단주의적이며 배타주의적 정신, 절대적 권위주의적인 교회제도들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사고양식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좀 더 자유스러운 신학을 하는 분위기가 한국개신교회에 유입되었다. 즉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신학 노선을 따를 것인가에 대하여 대립하면서 교회가 분열했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분열, 예수교장로회의 합동, 통합의 분열, 예수교장로회 합동의 진보, 보수 분열 그리고 성결교 분열을 들 수 있다.
셋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교권 싸움이다. 개신교회는 어느 한 사람이 모든 권력과 권위를 쥐고 있지 않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를 통해서 해결한다. 이 총회의 위원들은 모두 투표로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총회 밑에 노회라는 것이 있어, 이는 우리 가톨릭의 교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조직체계는 매우 민주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신학적 노선 문제, 일제 협력자들 문제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어느 누가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대립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감리교회의 분열, 침례회의 분열 등이 있다.
(1) 장로교의 분열 한국 장로교회는 1951년, 1953년 고려파와 기장파, 총회파라는 세 분파로 분열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총회파는 1950년대 말에 통합과 합동 두 교단으로 다시 분열하였다.
①고려파 장로교의 분열
③통합파와 합동파의 분열
④예장 합동측 분열
⑤기타장로교단의 분열 대한예수교호헌장로회 : 1962년 9월 제47회 합동 총회에서 분립하여 11월 19일 호헌총회를 창립하였다. 이들도 대한예수교성경장로교와 마찬가지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 가입하였다.
(2) 성결교의 분열
(3) 침례교의 분열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대전파)
(4) 감리교의 분열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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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주의 향기를 원문보기 글쓴이: 에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