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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리 봉화 정씨 답사자료
⚫ 일정 : 은산2리 입구 봉화정씨 세거비 -> 삼봉 정도전 사당과 기념관의 삼봉집 -> 은산1리 텃골(기동)마을 -> 삼봉 정도전 제단 -> 정진 묘 -> 정호신 댁
⚫ 일시 : 2023년 4월 6일(토) 9시~12시
⚫ 참가자 : 김해규, 장연환, 황수근, 정용훈, 박정인
⚫ 주관 : 평택인문연구소
1.은산리
산대(山垈) 마을은 은산1리 기동(基洞)에서 시작되었다. 기동(基洞)의 자연지명은 ‘텃골’이다. 삼봉(三峯)의 장손 정내(鄭來)는 처인현감을 지낸 뒤 텃골에 정착했고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방촌, 평동, 새터, 통미로 뻗어 나갔다. 그래서 ‘산대(山垈)’의 범위는 은산1, 2리를 벗어나 봉화 정씨들이 세거하는 안성시 원곡면 산하리와 용인시 남사면 진목리의 통산(통미) 일대를 모두 포함한다.
은산리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개편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일제는 산대(山垈) 중에서 기동과 방촌, 은산3리 은정동(미동), 은산4리 상리(말미)를 통합할 때 은정골에서 ‘은(銀)’, 산대(山垈)에서 ‘산(山)’을 취합하여 ‘은산(銀山)’이라고 했다. 은산리는 1983년 행정구역조정 과정에서 남사면 진목리의 월경마을을 은산5리로 편입했다.
은산리 산대(山垈)는 기동(텃골), 방촌(큰말) 외에도 윗말, 아랫말, 겨둔말, 마루태기, 삼괴, 솔무랭이, 주막거리와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은산1리에서 반자울로 올라가는 분토동이나 던지골도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성시 원곡면 산하리지만 생활공간으로는 은산1리라고 할 수 있다.
덕암산과 태봉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는 사낭골과 반자울이다. 사낭골은 큰사낭골과 작은 사낭골로 나뉘고 반자울 위쪽에는 우렁속이라는 골짜기와 은산저수지도 있다. 은산1리와 은산3리 사이의 깊고 넓은 골짜기는 동막골이다. 동막골 입구에는 동안골, 중간쯤에는 가마골이라는 작은 골짜기도 있다. 산대 사람들은 사낭골, 반자울, 동막골의 기름진 옥토를 경제기반으로 삼아 살아왔다.
2.삼봉 정도전
산대(山垈) 사람들은 대부분 삼봉 정도전(1342~1398)의 후손들이다.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안에는 다른 성씨가 많지 않았다. 타성(他姓)들은 외족(外族)이나 처족(妻族)들이었으며 일부는 신분적으로 낮은 사람들이었다.
정도전은 경상북도 영주가 고향이다. 고향의 유허에는 부친 정운경의 묘와 근래 복원된 ‘삼판서 고택’이 있다. 정도전은 부친이 관직에 진출하면서 개경으로 올라왔다. 부친 정운경은 이곡(李穀)과 친분이 깊어 개경 성균관 목은(牧隱) 이색 문하의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과 교유할 수 있었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한 뒤로는 성균관 박사, 태상박사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고려말은 국내외적으로 위기였다. 국내에서는 공민왕이 신돈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개혁세력과 신흥사대부를 중심으로 반원 개혁을 추진했지만 권문세족의 반발로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100년 넘게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가 쇠락하고 명나라가 일어나고 있었다. 국가적으로 매우 중대한 시기였지만 국가정치와 사회를 이끌었던 권문세족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며, 개혁세력으로 부상한 신흥사대부는 세상을 바꿀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
정도전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꿈을 갖게 된 것은 전라도 거평부곡에 유배되었던 힘든 시기로 판단된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라가 곧 백성이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역성혁명(易姓革命)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함주 막사의 이성계를 설득하여 혁명의 동력을 확보한 뒤에는 위화도회군(1388)을 통해 군권(軍權)을 장악했으며 당대의 실세였던 최영을 제거했다. 또 과전법을 실시하여 권문세족에게 집중된 경제권을 신흥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했고 정몽주를 비롯한 개국 반대세력을 제거한 뒤 조선을 건국했다.
삼봉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설계자였다. 사대부(士大夫)의 국가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은 삼봉에 의해 다져졌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육전조례를 편찬하여 법과 제도를 정비했으며, 왕도정치, 민본정치의 국가적 이상도 삼봉의 생각에서 나왔다. 한양 도성(都城)을 건설하고 천도를 주도한 것도 삼봉이었다. 왕 한 사람의 국가가 아니라 사대부가 지향했던 유교적 이상이 실현되는 국가, 자기 땅을 가진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국가와 지배층의 억압과 착취가 백성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 나라가 삼봉이 꿈꿨던 조선이었다.
정도전의 이상 정치는 태조 이성계의 지지를 받았지만 방간, 방원을 비롯한 정치적 야심이 컸던 왕자들과는 갈등을 빚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삼봉은 남은, 심효생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함께 있었던 둘째 아들 영(泳)과 셋째 유(遊)는 아버지를 구하려다 죽임당했고, 둘째 동생 도존(道存)과 조카 담(湛)은 집에서 자결했다. 큰아들 진(津)은 태조 이성계를 따라 평안도 안변의 석왕사에 가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9년 동안이나 수군에 충군(充軍)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정진(鄭津)은 높은 학문과 훌륭한 인품을 다시 인정받아 나주목사에 발탁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올랐다.
정도전은 사후 오랫동안 관작(官爵)과 명예가 회복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조 15년(1791) 왕명으로 ‘삼봉집’이 증보되었으며, 고종 2년(1865)에는 경복궁 중건을 명분으로 관작(官爵)이 회복되고 양성현 산하리(현 은산1리)에 사당이 건립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고 쓴 편액이 내려졌으며, 고종 9년(1872)에는 치제문(致祭文)이 내려지면서 죽산 부사 이현경을 비롯해 주변 일곱 고을의 수령들이 함께 제(祭)를 지냈다. 1930년에는 진위면 은산1리 기동마을의 사당 문헌사가 현재 위치로 이건(移建)되었다.
삼봉 정도전이 복권되면서 대종손 계열의 응기(應夔)가 왕명에 의해 제사를 받들 봉사손(奉祀孫)으로 임명되었다. 삼봉의 제(祭)는 1년에 네 번 받든다. 음력 3월 6일에는 춘향제(春享祭)를 올리고, 음력 8월 25일에는 기제사를 지냈다. 음력 9월 9일에는 추향제(秋享祭, 구일제)를 지내며, 음력 10월 3일에는 시제(時祭)로 모신다. 현재 봉사손(奉祀孫)은 정일섭이다. 제향(祭享) 때가 되면 100여 명의 후손들이 참여한다.
3.정도전의 후손들
형조판서 정진(鄭津,1361~1427)은 내(來)와 속(束) 두 아들을 두었다. 정내(鄭來)는 처인현령을 지낸 뒤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에 정착했고, 정속(鄭束)은 진위현령, 직산현감을 지냈다. 정속의 큰아들 문형과 둘째 인형은 부친이 일찍 작고하면서 큰아버지 정내(鄭來)로부터 학문을 배워 관직에 진출한 뒤 각각 우의정과 종3품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에 올랐다. 우의정을 지낸 정문형은 삼봉집을 두 차례 간행하였다.
봉화정씨는 삼봉의 장손 정래(鄭來)의 후손들을 용인공파(대종파)라고 하며 방계에 11개 지파가 있다. 차남 정속(鄭束)의 후손은 직산공파다. 직산공파는 장남 정문형의 후예를 양경공파, 둘째 정인형의 후예를 부정공파라고 한다. 봉화정씨는 오랫동안 용인공파(대종파)가 가문의 맥(脈)을 이으며 중심역할을 했지만 수는 양경공파와 부정공파가 많다.
용인공의 후손들 가운데 관직에 진출하여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있다. 삼봉의 4세손으로 의흥위 부장을 지낸 정백종, 동중추부사에 오른 정연종이 있고, 5세손 정인창은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折衝將軍), 그의 막내아들로 정3품 당하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오른 정수가 있다. 8세손 정잠은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9세손 정동준은 종2품 가선대부, 정동망은 정3품 통정대부, 정동원은 종2품 가선대부, 10세손 정연은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 정왕장은 종2품 가선대부를 지냈다.
근·현대에는 조선 말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내고 기로사에(耆老社) 든 정옥진, 정3품 통정대부 사직서령을 지낸 정응기(봉사손), 국권 피탈 후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중추원 의관 정응설이 있다. 이밖에 3.1운동 때 은산리 산대마을 만세운동을 전개한 정경순, 원곡·양성 3.1운동에 참여했던 세 분의 독립유공자도 있다.
4.봉화 정씨의 학문과 교육
정치능(1792~1866), 정옥진(1825~1905), 정일영, 정회식은 4대에 걸쳐 학문으로 일가를 이뤘다. 예학에 밝았으며 조선후기 낙론(洛論) 계열의 대학자 홍직필-임헌회를 사숙하고 교유했다. 홍직필은 조선후기 낙론(洛論)의 대가다. 간재 전우의 『관선록』에 따르면 홍직필의 학통은 이이(李珥)-김장생-송시열(宋時烈)-김창협(金昌協)-김원행(金元行)-박윤원(朴允元)-도암 이재(1680~1746)-매산 홍직필(洪直弼)-고산 임원회-야우 서정순, 전우(田愚)로 이어졌다. 후학 교육에도 힘을 쏟아 산대마을 일대에서는 겸와 정회식으로부터 한문 공부를 한 사람이 많다. 정회식의 손녀 정중임 댁에는 정치능(1792~1866)의 『소리당집』, 정옥진(1825~1905)의 『화강유고』, 정일영의 『석음유고』, 정회식의 『겸와유고』 등 4대에 걸친 문집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봉화 정씨와 정치능을 비롯한 4대의 학문수준과 넓이를 가늠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교육 열풍이 불었다. 신분이 낮았던 사람들도, 가난해서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도 어떻게든 글자와 셈이라도 익히려고 애썼다. 해방 후 초등교육이 의무화되고 경제발전이 이뤄지면서 중등교육, 고등교육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산대마을 주민들의 근대교육 열망은 남달랐다.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진학을 시켰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그래서 산대마을에서는 80대 전후 중에도 서울대학교나 연·고대를 졸업한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정회식의 손자 정호신은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대우중공업 부회장을 지냈다. 교장(校長)이나 면장(面長)을 지낸 사람도 수두룩하다.
산대분교는 산대 주민들의 근대교육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냈다. 학교 건립을 주도한 인물은 산하리 평동마을의 정종호다. 일제강점기 양정고보를 졸업한 농촌지식인으로 공도면장과 양묘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정종호는 한국전쟁 직후 산대초등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스스로 학교 부지를 기부했고, 봉화 정씨 종중도 위토(位土)를 매각하여 학교 설립을 도왔다. 주민들도 형편에 따라 일정 금액을 기부했다. 정종호는 학교 설립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우선 공회당에 야학을 열었다. 학교건물을 지을 때는 주민들과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 힘을 보탰다. 1954년 주민들의 열망과 각고의 노력 끝에 산대분교가 개교했다. 3년 뒤에는 6년제 산대국민학교로 승격했다. 학교 건립 후 재일교포 실업가 정동순은 학교 비품과 학생들의 학용품을 매년 지원했다. 실험기자재, 운동기구, 악기를 구입하여 교육 활동의 질을 높여주기도 했다. 학교시설을 증축할 때는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평택인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