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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화의 삶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민들레
호암 문일평에 의하면,여성의 지위가 차차 낮아진 것은 경제의 관계와 아울러 특히 유불의 윤리적 사상이 성생하게 될 때라고 말한다.1)즉 삼국시대까지는 여성중심의 사회적 유풍이 남아있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대인이 숭사하던 神중에 유화부인과 선도성모와 같은 여신이 흔히 있을 뿐 아니라 그 봉사의 성직을 맡은 이도 역시 여성이었음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고려 이전 불교중심사회에서의 여성은 비교적 남녀간의 행동이 자유스러웠으며 제약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녀관계는 자연스러워 남녀 무리가 쌍쌍춤과 노래로 한때를 즐겼다3)고 한다.
그러나 고려말 주자학의 전래는 여성의 지위를 낮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를테면 왕권강화를 위하여 유교적 충신관을 강조하여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군신간의 철학으로 여기게 하였고 이러한 철학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여자에게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열녀관을 강조하였다. 전제왕권하의 남자는 왕을 섬기는 신하이고 여자는 남편을 섬기는 신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자의 활동범위는 자연 가부장적인 가정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부장제적인 가족제도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남녀칠세부동석, 부부유별,부창부수,삼종지도 또는 칠거지악 등에 두었다. 이러한 여성관은 주자가 지은 [소학]에 주로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이는 유교적인 남녀윤리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여성의 지위는 아주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4)
이렇게 여성들의 활동범위는 가정에 국한되었는데 이 가정의 가족제도는 철저한 봉건주의에 입각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조시대의 유교문화 도입은 더욱 남계 위주의 가(家一 가족제도)를 형성시켰고 이에 따라 家는 장남의 호주상속을 통해 계승되고 이러한 전통적인 가족제도하에서는 남존여배의 사상 속에서 부계 혈통을 이어주기 위한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이 여성의 임무로 되었다."5) 그러나 가족제도 안에서의 모권이 긍정적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없었던 측면을 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을 단위로 하는 조선조 사회의 사회윤리 질서는 오로지"효"에 두었는데, 이 효의 대상이 父와 母였으며, "부부유별관"에 따라 夫의 업과 婦의 내업인 가정관리를 父가 간섭하거나 참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6) 물론 전통사회에서의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가정내 역할은 매우 광범위하고 중요하였으며,넓은 친척관계 속에서 보다 많은 가족 및 친척과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주부들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가사를 관리해 나갔음을 인정할 수 있다.7)
그러나 여성이 가정내에 제한되어 있고 사회적인 일에 관여하지 못할 때, 그것은 여성의 지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이 못 된다. 생산활동과 가사노동의 이분 속에서 여성의 역할을 가사노동에 한정시키는 것이야말로 여성불평등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피지배게층에 속하는 대부분의 여인들은 남자와 더불어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하고 베를 짜고 장날이면 장에 나가 일용 필수품을 구하기 우해 물물교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즉 이 여이들에 의하여 이조사회의 산업경제가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5) 서구사회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이와 유사한 분석을 로버타 해밀톤(Roberta Hamilton)은 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중세장원 경제사회가 보다 여성의 지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즉 여성의 일이 가정 내에 제한되지 않고, 가정과 작업장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에 비해서는 여성은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남성과 거의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9)
그러나 여성이 사회활동,경제활동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하더라도 그 사회, 문화, 정치, 경제를 주도하는 지배층의 누군가를 밝혀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사회에서 가사노동의 연장선상의 성격을 띤 노동을 할 때 또한 그 노동에 대한 자신의 주체적 관리가 결여되었을 때, 과연 그러한 여성의 노동이 여성의 지위에 얼마만한 긍정적 역할을 했는지를 물을 수 있다.
그 사회에서의 여성노동의 성격은 결국 남성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이런 이원론적 사고에서 나온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조로 된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시대의 여성의 지위가 그 이후의 여성의 지위보다 높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즉 한국의 여성들은 부권제, 부계제 가족으로서 가부장권이 철저히 확립되어 있는 부계 혈통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제도 하에서, 순종과 인내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다.10)
이러한 여성들의 상황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해 내려오는 속담들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즉 속담에 나오는 여인이야말로 한국인들이 오랜세월 동안 간직해왔고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것이라 하겠다. 당사자인 여성들도 이 속담에 나오는 "여성상"이야말로 자기들의 실체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여성에 관한 속담은 146개를 뽑아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본 것과 긍정적으로 본 것을 나누어 보니까 135개의 속담이 부정적인 것이고 억지로 좋게 해석해서 긍정적인 것이 11개 정도였다. 속담들의 대부분은 여자를 무능력자로,종속적이고 의존적인 성격이 강한 존재로, 집에 가두어 놓고 길들여야 하는 존재로,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정조만을 강조하며 애완물로 질투하는 존재로 그려놓고 있다.11) 전통사회의 여성들이야말로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차적인,천한 존재들로 대우받으며 한많은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기독교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선교사들이 대하게 된 여성들이야말로 바로 이런 인내와 순종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물론 이들 선교사들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더구나 그 여성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문제로 삼아야 한다. 어느 사회나 다 그 나름대로 다른 척도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척도에 비추어서 우열을 판단할 수 없고 그 나름대로의 문화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선교사들의 입장, 태도 즉 문화적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생성된 것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면 누구나가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 즉 동등한 인격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존엄성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자는 남자의 반려가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고, 쾌락이나 노동력의 연장에 불과하며, 법률과 관습은 여자에게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고, 말하자면 아무런 정신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남편이나 부모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여자는 누구나 주인없는 짐승처럼 먼저 차지하는 사람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을 널리 인정되고 법정에서도 공인된 원칙으로서, 논박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2) 는 한 외국인의 평가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도록 자극하고 격려한 두가지 계기가 개신교 전래 이전에 있었으니 동학과 천주교의 여성 이해가 곧 그것이다.
15세기 말엽에서 16세기 초기에 걸쳐 동서를 횡단하는 큰 탐험여행들과 이에 따른 지리상의 대발견들은 거의 정지상태에 놓여있던 천주교의 포교 활동을 부활시켰다. 일본은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원 프란치스꼬 시베리오(Franciscus Xaverius)신부에 의하여 1549년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소개되었고, 중국에서도 16세기 말엽에 천주교가 다시 전래되었다.
조선 왕조의 철저한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해마다 정기적으로 또는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청조에 파견하던 부경편행은 북경에 체류하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접촉하게 되는 게기가 되어 주었다. 이 북경의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선교사의 입을 통해서 직접 천주교를 선교하지는 못하였지만,자기들을 찾는 사신들에게 그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서적들을 수시로 선물함으로써 서학에 관한 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전래된 서학에 관한 서적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남인계 학자들에게 환영되었다. 그들은 우선 서학서를 호기심과 지식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대하였다.
그러나 이익의 뒤를 이은 일군의 기호 남인학자들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진리에 대한 갈증과 인생의 해답을 얻으려는 구도심에서 천주학을 대하게 되었다. 이벽은 특히 그의 친구 이승훈과 함께 이승훈이 북경의 선교사로부터 받은 [천주실의]등 서적들을 가지고 불충분한 교리지식을 보충함으로써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13)
한국 천주교 초창기의 남인 양반들의 서학운동이나 교회창설의 활동에 있어서 여성들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이를테면 이벽 선생의 부인인 유한당 권씨의 [언행실록]을 [내훈]이나 [여논어]에 비추어 볼때,전자는 창조주에게서 받은 인격체로서의 여성의식을 강조하면서,모든 여성들이 실행해야 하는 예의범절의 내용을 내면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14)
이러한 의식을 갖게 된 여성들은 함께 모여 동정녀들의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동정생활이나 독신생활은 조선 유교사상과 전연 상반되는 사상구조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즉 유교사회에서 남녀가 반드시 혼인을 해야 한다는 관념과 제도에도 불구하고 부녀자 모두가 맹종해야 하는 가부장권적 가족생활과 후사중시사상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15))
이렇게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서 대우하는 교리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삶을 사는 그들에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고, 유교의 관습에 얽매여 있던 그 당시의 여성들에게 이제까지의 삶에 회의를 품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천주교 부녀자들은 공동체를 통하여 천주교의 교리나 진리를 배워서 교회행사인 미사나 첨례를 더욱 잘 볼 수 있게 되었고 남에게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 집회에서는 자연히 남녀통성을 하게 되고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교리교육에 참여하고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16)
예를 들어 강완숙의 열성적인 전교활동은 전통사회의 제약하에 살고 있던 여성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랄만한 활동이었다. 이 강완숙은 내포 지방의 양반가에서 태어났고 성장해서 덕산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가 되었으나 남편이 용렬하여 마음에 맞지 않아 항상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면서 속세를 떠날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충청도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천주교"란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天主'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敎의 이름이 바르니 기울여 믿어 항상 광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먼저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을 교화시키면서 이웃 여러 마을에까지 전교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에게도 온 힘을 다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음을 알고 신해년 박해때 고향이 소란해지자 전처의 한 아들과 시모를 데리고 상경하여 교히 내에서 대소사를 막론하고 도왔다고 한다.17) 이렇게 남편의 뜻을 하늘처럼 받들어야 하는 사회 속에서 강완숙은 남편을 버리면서까지도 자신의 뜻을 주장하여 독립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강완숙의 활동은 그 이후 천주교에 가해진 수많은 박해사건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여교우들에게서 그 흐름이 이어졌다. 즉 일단 전통적인 제약을 넘어선 교우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하고 새로이 맛본 세게를 지켜나갔다. 이렇게 해서 박해시에 신앙을 지키고 그 자손들에게 신앙을 이어 내려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여성들이 담당했던 것이다. 18)
동학은 경상도 경주의 몰락양반 출신인 제1대 교조 최제우(1824-1864)에 의해 1860년 4월에 창시되었다. 최제우의 아버지는 최옥금이고 유학자로서 경상도 일대에 이름을 떨쳤지만 그는 16세에 부친을 여윈 이래 사는 집도 없이 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아 20년간 전국을 방랑하면서 기도와 사색을 계속하여 드디어 동학의 교리를 터득하여 제창했다. 동학은 당시 국내에 침투하고 있던 서학(천주교)에 의한 위기상황을 기성의 유교, 불교,도교로는 구할 수 없다는 인식에 뿌리박고 있다. 동방에서 나서 또한 동방에서 산다. 도는 천도라 하여도 무슨 까닭으로 서를 동이라 하고 동을 서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도는 이곳에서 받아 이곳에서 넓힌 것으로 서학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동학이 창시된 1860년 전후의 시기에는 천주교의 국내 침투와 영불연합군의 북경 침입에 의해 서양 열강에 대한 국내의 불안과 경계심이 높아졌고 이러한 민중의 감정을 잘 파악한 최제우는 "서양은 전승공취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진멸하면 진무의 한탄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서양의 침입에 대한 보국안민이 동학사상을 시작한 결정적 동기이다.
다음 19세기 전반기 한국의 양반.중인.상인.천민이라는 신분적 질서와 그에 따른 천직관념이 와해되고 상품화돼 관계를 매개로 붕괴되는 계층분화 과정이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사회적 변동 속에서 양반의 절대적 권위는 그것을 강화하려는 그들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점차 무너져 서민의 반봉건적 반항의식은 높아져 갔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 과정은 동학사상에도 반영이 되어 동학의 기본 사상을 "천심 즉 인심","오심 즉 여심"(吾心卽汝心)을 총괄한 "人乃天"의 교리로 들고 있다. 이는 인간의 귀천이 선천적으로 규정지어진 봉건적 신분제도와 양반계층의 상민,천민에 대한 비인간적인 수탈과 박해에 대한 부정의 사상 즉 인간 평등의 사상이다.
이러한 동학사상이 그 당시 산발적으로 일어난 지역적 농민봉기와 결합이 되자 하나의 혁명적인 갑오농민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평등의 사상에는 곧 남녀평등의 포함되는 것이다.19)
최제우는 도의 초보를 유교의 수신제가, 삼강오륜의 실천에 두었다. 그는 여기서 이들의 실천방법의 변화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가도화순"으로써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부인에게 위압적이고 폭군적인 가부장권을 행사함으로써 복종케 하는 종래의 무조건적인 부창부수를 부정하고 남자가 진실과 겸손의 온언순사로써 여자를 입도의 길로 선도하는 것이다. 이는 유교의 상하적 남녀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근대적 남녀평등 사상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제우는 득도 후 여비 두 사람을 해방하여 한 사람을 며느니로 한 사람을 양딸로 삼았는데, 이는 그의 평등사상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0)
최제우의 侍天主 사상을 보다 발전시킨 것은 그의 제자이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이다. 그가 "나는 비록 부인,소아의 말이라도 또한 天語로 알고 배울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삼을 것은 스승으로 삼았노라"고 한 것은 유교질서 안에서 억압되고 下待되었던 여성과 여린이에게도 "인시천"(人是天)으로서의 인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1)
이러한 동학의 여성관은 예를 들면 장흥부의 관군에게 취박당했던 22세의 이소자라는 여인에게서 행동적으로 드러난다. 즉 그녀는 일찌기 꿈에 나타난 천신으로부터 고정을 받았다하여 동학교도 사이에서 오랫동안 신녀로 존숭을 받아왔으며 동학군이 장흥부를 공략할 때는 수령으로서 말을 타고 총지휘를 했다고 한다.22)
이렇게 동학 역시 여성에게 전통적인 여성적인 삶 외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