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몇년전에 이곳에 실었던 내용 입니다.
나에 주관적인 생각과 일부 자료를 참고한 내용임.
어찌 우리가 그날을 잊으리오.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난 그해 1977년 7월29일 추석을 지낸 며칠후 광주역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에 입소 빡빡머리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때 같이 입소한 학교동창 정동현(3회). 원종산(4회).김종원(3회) 수용연대에서 1주일가량보내고 30연대 9중대로 배치받아 4주동안 지옥같은 훈련을 마친후 나는 육군 통신학교에서 6개월 후반기교육을 아주 편하게 받았다. 1978년2월 자대배치를 받아 3관구 사령부 통신근무대로 다블백을 짊어지고 정문에서 내무반까지 오리걸음으로 기어간 것이 자대생활의 시작이었다. 무전기 정비병으로 시작된 군생활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어색했던 시간이 지나고 나름대로 독서나 사색의 시간이 많았다. 보초 근무때는 수첩에 메모를 해가며 부모님에게자주 편지를 드렸다. 그동안 미안함을 편지로나마 보내며 부모형제간의 정을 확인 했다. 지금시기인 5월엔 아까시아 향이 가득했던 초소에는 보초를 따블로 자청을 해가며 고향 생각을 해가며 꽃향에 취하곤 했었다. 1978년은 쫄병 생활을 하며 정신없이 한해가 지나서 중고참이 되었지만 줄을 잘못서서 그랬는지 상병이 되어도 밑에 쫄병이 2명뿐이었다. 4개월 빠른 고참병이 20명이 넘었으니 고참 행세하고 제대하는것은 포기했었다. 그나마 웅변을 하며 순회강연을 다니던 나는 동기들 보다는 내무 생활이 편했다. 그때 함께있었던 동기들은 지금도 우정을 돈독히 하고 지내며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지내고 있다. 이친구들과 6월첫주에 산행 약속이 잡혀있다. 부지런했던 친구는 제약회사 대표로, 동기를 대표해서 매를 대신 맞던친구는 삼성전자에 간부로,요령만 피우며 동기들을 고생시킨 철학자 친구는 통신공사에 간부로 다들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는 친구들이다. 1979년의 군 생활은 불안한 생활로 기억한다. 거듭되는 충정훈련(데모대 진압훈련)은 좁은 땅에서 뭔가 일어 날것만 같은 불안 한 마음이 게속 되었다. 연일 메스컴에서 들려 오는것은 데모의 함성소리가 귓전에서 멤돌았던것 같다. 그해 가을은 시국이 어수선 하기만 했던것 같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조용하게 진행되지않고 드디어 궁정동의 총소리는 시작되었다. 10.26 숫자로만 들어도 총성과 핏빛이 연상되는 것이다. 비록 역사 인식이 없는 사람들도 알 수있는 거사 일자 들이다. 한국 60년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숫자로 기억된다. 「8.15, 6.25, 5.16, 10.26」이 그것이다. 이 중 10.26 사건은 30년의 현대사를 재구성했다. 10.26 사건 이후의 정치적 혼돈 속에서 민첩하게 행동한 全斗煥은 군 주요보직을 장악한 하나회를 이끌고 12.12와 5.17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게 된다. 10.26사건이 있었던 그날 나는 계룡산 통신부대 방커에서 무전기 교신으로 긴박한 상황을 접하며 곧바로 비상체재로 돌입했다. 드디어 군복을 입고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들어감을 감지했다. 초조와 긴장의 밤이 흘렀다. 여기서 10.26사건의 내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의 악화를 가져왔고, 1인 장기집권에 대한 강압통치와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인권상황의 개선을 종용한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불화 등 정치· 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0월 16일 부마사태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20일 경남 마산· 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더욱이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부마사태 처리문제로 더욱 커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의 강경노선이 채택되자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위기에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이후 12.12는 전두환의 주도하에 군을 장악하게된다. 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은 朴正熙 서거 이후 범인이 金載圭임을 제일 처음 보고 받았으나 군과 정보 지휘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金載圭가 朴正熙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全斗煥 보안사령관에게 金載圭 체포를 지시했다. 全斗煥은 이 사건에서 가장 긴박하게 움직인 인물이었다. 全斗煥은 합동수사본부 규정을 결제 받고,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제1차장을 불러 회의를 주재했고 이 회의에서 『범인은 金載圭가 아니라 정보부다』라고 말하며 가장 중요한 권력 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손에 넣었다. 全斗煥은 붙임성이 좋고 부하 관리 능력, 조직 관리 능력이 탁월한 군인이었고, 정규 육사출신에 군 사조직인 하나회의 회장이었다. 10.26은 살인 사건이므로 계엄사령관보다 합동수사본부장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 全斗煥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대통령 서거 사건」 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진행했다.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대통령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金載圭에게 이용당하기만 했지 공모하진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鄭총장은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심리적 위축 상태였다. 鄭총장은 훌륭한 군인이었다. 사생활도 깨끗하고 원칙주의자이며 12.12 이후의 행적도 깨끗하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고 반공 정신이 투철했다. 全斗煥은 鄭총장의 무혐의를 알고 있었다. 朴正熙 서거 이후 국민들은 민주화가 올 것으로 기대했다. 국회에서 제명되었던 金泳三 야당 총재가 복귀했고, 金鍾必이 공화당 총재로 복귀했다. 긴급조치가 해제되어 시위 등으로 구속되었던 학생들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金載圭 재판이 진행되면서 朴正熙 시대의 비밀이 하나 둘 드러났다. 崔圭夏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유신체제의 개헌을 약속했다. 정규육사 출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朴正熙로부터 애호를 받던 이들은 유신을 부정하고, 金載圭가 영웅시 되는 분위기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全斗煥은 이들 하나회의 대표였다.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하나회를 좋지 않게 생각했다. 오만한 군인들이라 생각했다.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교체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장역시 예고도 없이 교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어수성한 분위기속에 군말년에 긴장감으로 나날을 보내고 전쟁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룰것같은 상황이었다. 경제 불황, 정치적 불안, 勞使 문제 대폭발, 사북 사태 등 5.16 직전의 불안감과 비슷한 불안감이 사회 곳곳에 팽배했다. 결국 全斗煥은 5.17 계엄 확대 조치를 통해 3김을 연행하고 국회 활동을 정지시키고 국보위를 설립해 대통령과 총리를 무력화시켰다. 군인들이 다시 정치 전면으로 나서게 되었다. 10.26 이후 민주화를 열망하던 세력과 조국 근대화의 기수가 무너졌다고 불안해 하던 세력 간의 경쟁에서 後者가 승리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세력으로 학생들의 데모는 매일 계속되고,데모대의 무리한 진압은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이어진다. 매일 부대에서는 충정훈련이 계속되고 군인들 역시 학생들에게 훈련에대한 불만으로 개새끼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데모만 한다고 죽일놈들이라고 하는측과 우리가 군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고 직장인들은 돈을 벌어야 하니까 학생들이 나라를 위하고 우리를 위해서 데모는 꼭 해야 한다는 측의 공방이 있기도 했다. 서서히 제대 할날이 다가왔다. 1980년6월18일이 군복무를 마치는 날이었다. 그러나 시국이 이러니 연장근무를 할것만 같았다. 전시에 제대 시켜줄것인가. 1980년 5월 15일자 말년휴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졸병생활만 하다가 제대 한것도 억울 한데 휴가마져 찾아 먹지 못할것 같아 너무 억울 했다. 나라일보다 내일이 더 중요한것은 사실이었다. 5월 15일 아침 휴가 준비를 하고 인사계상사에게 휴가증을 달라고 했다. 역시 인사게 상사는 시국이 어느시국인데 휴가를 가느냐고 했다. 그냥 포기할 내가 아니다. 뇌물공세를 폈다. 약효는 즉방이었다. 15일 오후 늦게 광주에 도착해서 다도 집부터 들렀다. 오랜만에 온 집은 포근하기만 했다. 친구들에 안부를 수소문했다. 치성이.대우 용현이.형도.동현이...등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용현이는 5월 18일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 17일 광주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집에서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하셨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찾아 광주로 향했다. 그런데 이럴수가. 터미널에(대인동) 내리자 마자 헌병이 잡더니 공부는 안하고 어디를 가느냐고 다짜고짜 머리박고 꼬라 박으라는것이다. 군복을 벗고 사복이었고 군인주민증은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나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니 학생으로 오인을 한모양이다. 아무소리 못하고 총부리앞에 무기력 할 수밖에 없었다. 구호소리가 쟁쟁하다. 거리에 나부끼는 프랑카드에는 '전두환이 도둑놈을 죽여라!" '최돼지 물러가라!' '김대중선생을 석방하라! 이미 5.18의 폭풍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다도 집으로 향했다. 분명 엄청난 일이벌어 지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있었다.군복입은 군인을 폭도들이 송정리 부근에서 낫으로 난도질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5.18일 용현이의 결혼식이 있다고 형도. 대우 몇몇 친구들이 봉황으로 가기로 했다. 하필 어수선한 난리통에 결혼식을 치룬다고 불만이 많다. 택시를 잡아타고 봉황 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속에서 치루는 결혼식이 아닌가. 용현이 그친구는 지금 세상에 없다. 댐에서 고기를 잡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집안에 있었다. 광주에서 학교다니는 두동생 (창배 9회.신배 10회)의 안부가 궁금해서 부모님은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다음날 걸어서 광주까지 가셨다. 교통도. 통신도 .방송도 모두 두절된 상태로 답답했다. 그때 방송채널을 뒤지다 북한 방송이 생생하게 들렸다. 폭도로 내몰린 순진한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끝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 휴가는 귀대일자가 다가왔다. 5월 29일이 휴가 끝나는 날이었다. 나는 광주까지 택시를 얻어타고 왔다. 군복은 가방에 넣고 사복을 입고 시내로 접어 들었다. 피비린내 나는 상황은 조금은 정리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것같은 눈초리가 역역 했다. 나는 눈을 마주치기 무서워 곧바로 역으로 향했다. 무사히 귀대일자에 맞추어 대전 부대에 와보니 곧바로 인사 참모부에서 호출이다. 게시판에는 호남지역 휴가자들에 명단이 게시되어 있었다. 부대에서도 내심 걱정을 했나보다. 주의 사항을 주지시켰다. 광주에서 보고 들은것을 일체 동료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년 휴가를 보내고 1980년6월18일 육군병장으로 전역 했다. 여기서 광주 민중항쟁의 일지를 참고해볼 필요가있다. 민중항쟁의 발발 5월 17일 (토요일, 맑음)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24시 00분 :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5월 18일 (일요일, 맑음) ·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10시 00분 :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10시 15분 :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10시 20분 :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15시 40분 :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19시 02분 :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3시 00분 : 증파된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4시 40분 :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16시 30분 :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의해 부상 ·20시 00분 : 수만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8시 00분 : 고등학교 휴교조치 ·10시 20분 :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20시 10분 :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21시 05분 :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 광주MBC건물 방화 ·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 사망 계엄군의 발포와 무장봉기 5월 21일 (수요일, 맑음) ·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 ·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 남로에 등장 ·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 ·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10시 15분 :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교체 ·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11시 10분 : 대형헬기, 도청광장에 도착 ·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14시 15분 : 도지사, 경찰헬기에서 시위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16시 00분 :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해방 광주 5월 22일 (목요일, 맑음) ·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 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08분 : 서울서 대학생 5백여명 광주 도착, 환영식 거행 ·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 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11시 45분 :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 ·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비) ·11시 00분 :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15시 00분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조치 시킴.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최후의 항쟁 5월 27일 (화요일, 맑음) ·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 ·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역사의 사건 속으로 5.18민중항쟁전의 역사 1979년 · 10월 4일 : 국회,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 10월 16일 : 부산민주항쟁 부산대, 동아대생의 '정권타도' 교내시위 및 시민 합세한 가두시위 전개 · 10월 18일 : 마산민주항쟁 학생시위와 관련하여 부산 비상계엄령 발표 ·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 11월 19일 : 전국 대학 휴교 해제 · 12월 6일 : 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긴급조치 9호 해제 · 12월 12일 : 12·12군사반란 발생, 신군부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 1980년 · 2월 29일 : 윤보선, 김대중 등 정치인 687명에 대한 복권 조치 단행 · 3월 13일 : 대통령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발족 · 4월 14일 :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 · 4월 30일 : 계엄사령관 지휘관회의, 노사분규, 학원소요 등 폭력 엄단키로 결의 · 5월 6일 : 학원자율화 입영훈련철폐 요구하며 대학가 가두시위 전개 · 5월 14일 : 광주지역 대학생 등 1만여명 가두진출, 도청광장에서 '민주화 성회' 진행 · 5월 15일 : 서울역 광장에서 학생, 시민 20여만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요구 · 5월 17일 : 비상계엄 전국 확대 · 5월 18일 : 5·18민중항쟁 발발 1980년 5·18 이후 · 5월 29일 : 5·18사망자 129구의 시신을 망월동 시립묘지 3묘원에 안장 · 5월 30일 : 서강대생 김의기 '학살정권 타도'를 외치며 투신 · 6월 9일 : '광주시민항쟁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유서를 남기고 노동자 김종태 분신 · 12월 9일 : 광주 미문화원 방화 끝까지 읽으시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이젠 광주에도 정치의 희생양이 더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 전두환시절에 탄생한 프로야구 그토록 맹목적으로 해태편이되어 있던 우리들 해태는 우리에게 무엇을 ... 김대중선생은 광주시민에게 ..... 자녀들에게 산 역사를......
첫댓글 1980년도의 오월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그렇게 찢기우고 어느새 29년이 지났군요. 지난번 KTX를 타고 돌아오며 보는 영화속의 계엄군을 맞는 시민군들의 마지막 밤 모습을 상기해봅니다.
벌써 가물 가물해진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며 머리가 다시 빡빡해 졌습니다. 암튼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1980년도의 오월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그렇게 찢기우고 어느새 29년이 지났군요. 지난번 KTX를 타고 돌아오며 보는 영화속의 계엄군을 맞는 시민군들의 마지막 밤 모습을 상기해봅니다.
벌써 가물 가물해진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며 머리가 다시 빡빡해 졌습니다. 암튼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