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작루( 雀樓)
산서성 평양(平陽)부 포주(浦州)의 성북에 있는 3층 루각. 동남으로 중조산, 눈 아래 황하가 굽어 보이는 명승지.
규수( 水)
산서성 영제(永濟)현 남방. 순 임금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순은 야생코끼리를 길들여 밭을 갈았다고 하는데 규( )지에 위(爲)변이 있는 것도 그가 코끼리를 훈련시켰다는 전설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대(代)
산서성 북부 호다( 다)강 연안에 있는 소도시. 오대산의 서북서 50킬로에 있으며 부근은 농산물 시장이 선다. 전국시대 이래 조(趙)나라의 영토이었던 곳이다. 안문관월(雁門關越)의 소도시로 대원, 대동(大同)의 사이에서 번영하였다.
대동(大同)
산서성의 북부. 옛 이름은 운주(雲州), 평성(平城). 북위의 옛 서울. 군사, 경제, 교통의 요지이며 상건(桑乾)분지의 농축산물의 집산지이다. 사적(事蹟)이 많고 서남쪽에는 탄전지대이며 서쪽 15킬로에 있는 운강석굴(雲崗石窟)의 불상이 유명하다.
벽제천( 泉)
산서성 대동부의 염주에 있는 샘. 여기서 호인(胡人)들이 말에 물을 먹였다고 한다.
분수(汾水)
산서성을 남쪽으로 가로질러 황하로 들어가는 강. 분하(汾河)라고도 한다. 황하지류중 최대의 것으로 산서성의 북부, 관잠산(管 山)에서 발원하여 정락(靜樂), 태원등을 지나 황하에 합류한다. 수정(水程)은 길지만, 뱃길은 강주(絳州)까지 통한다. (???PAGE 55)
분양(汾陽)
산서성의 서북, 태원분지 서단의 도시. 교통의 중심지이며 부근은 토지가 기름지고 농산물이 풍부하다. 섬서성의 북부, 산서성의 남부에서 산출되는 물자의 집산지이며 분주(汾酒)를 특산한다.
불궁사(佛宮寺)
산서성 웅현에 있고 요나라때 건조된 절. 8각 9층 목탑이 있고, 첫층에 상계(裳階)가 있어 그 1변은 1,239센티이다. 높이는 약 115미터에 이른다. 중국의 목조건물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응(應)현에 있다.)
석불사(石佛寺)
산서성 대동의 서쪽 교외에서 약 11킬로 떨어진 운강(雲崗)의 암벽에 있는 석굴. 석굴사라고도 한다. 수백의 석굴이 있는데 제 1, 제 2, 제 3의 3구로 나뉘며, 큰 것은 제 1구에 4굴, 제 2구에 9굴, 제 3구에 7굴이 있어서 이들의 상하 죄우에는 무수한 소감(小龕)이 이루어졌고, 그 내부에는 무수한 석불이 조각되었는데 그 길이는 약 450미터에 달한다. 북위 문제때 사문(沙門) 운요(雲曜)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서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계속하여 판 것이라 한다.
부강(釜岡)
산서성 태원현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양신 염제는 약초에 관심이 많아 그 자신이 각종 약초의 맛을 보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하루에도 70번씩 중독이 되었다고 한다. 부강에는 그 당시 그가 약을 맛보았다고 하는 솥이 있다.
성양산(成陽山)
산서성 태원현에 있다. 염제(신농씨:神農氏)가 자편( 鞭)이라고 하는 일종의 신비한 채찍을 사용하여 각종의 약초를 채찍질하였다고 한다. 이들 약초는 채찍질을 가하게 되면 독성의 여부나 약효등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성양산에는 그가 약초를 채찍질했다고 하는 곳이 있다. 그래서 이 산을 신농원약초산(神農原藥草山)이라고도 부른다.
수양산(首陽山)
산서성의 남부에 있는 산. 수산(首山), 뇌수산(雷首山), 중조산(中條山), 포산(蒲山), 역산(曆山)등의 이명이 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밑에서 굶어 죽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산신은 길신(吉神) 태봉(泰逢)이다.
안문(雁門)
관소의 이름. 산서성 북부, 대(代)현의 서북인 안문산 위에 있다.
안읍(安邑)
산서성 남부의 성. 운성(雲城)이라고도 한다. 부근에는 유명한 하동염(河東鹽) 산지가 있어서 그 소금의 집산지이다. 우의 도읍지였던 안읍과 위(魏)의 도읍지였던 안읍은 모두 이 근처이다.
망향대(望鄕臺)
안읍의 성남 문밖에 있는 누각. 우임금의 부인인 도산(塗山)의 여교(女嬌)가 안읍에서 고국을 그리워하여 우가 누각을 지어주고는 적적하거나 무료할 때 이곳에 올라 고향을 그리워 하게 했다고 한다.
명조(鳴條)
산서성 안읍현. 하의 걸(桀)왕이 탕왕에 쫓겨 총희 말희( 喜)와 함께 피신한 곳.
살호구(殺虎口)
산서성 삭평(朔平)의 북방 20리 지점에 있는 도시. 만리장성의 한 관문으로 험요(險要)하다.
안탑사(雁塔寺)
산서성 의씨(依氏)현에 있다. 쌍탑이 유명하다.
오대산(五臺山)
산서성 북동부에 있는 불교의 명산. 최고봉은 북대(北臺)의 두봉(斗峯)으로 삼천사십척이라 한다. 문수보살이 수도하던 청량산(淸凉山)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며 아미산, 보타산(普陀洛伽:보타락가)와 구화산과 함께 불교 4대영산으로 꼽힌다. 오대란 중대의 취암봉(翠岩峯), 동대의 망해봉(望海峯), 남대의 천수봉(천繡峯), 서대의 괘월봉(掛月峯), 북대의 두봉을 말하며 대회진(臺懷鎭)의 현통사(顯通寺)가 유명하다.
운강석굴(雲崗石窟)
산서성 대동의 서방 약 20킬로 지점에 있는 북위의 석굴. 대동의 석불로서 유명하다. 무주강(武周江)의 남쪽에 있는 단애에 새긴 것으로 대소 40수 개의 석굴이 동서 1킬로에 걸쳐 산재하여 있다. 제 1기는 대굴, 제 2기는 중굴. 제 1기 초기의 석불은 풍부한 육체로 얼굴 표현도 야성적이다. 소박한 생활력의 표현, 건축적 구조, 장식적 의장은 서방적이다. 석질은 백사암(白砂巖)이다.
용문산(龍門山)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에 있는 산. 예로부터 등용문, 신가백배(身價百培)라는 말로 유명하거니와 용문산이라고 불려진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강이나 바다에서 노닐던 고기떼는 매년 일정한 시간만 되면 이곳 용문산의 절벽 밑에까지 모여들어 높이뛰기 시합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절벽을 넘으면 승천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여전히 물고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용문의 근처에 이어동(魚里魚洞)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는데 이곳에는 잉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동굴에서 빠져나와 3개월 동안이나 역류를 거슬러 용문의 상류로 가게 되는데 용문을 넘으면 용이 될 수 있지만 넘지 못하면 그냥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용문산은 여량산(呂梁山)의 산맥과 접하였는데 이 산이 마침 황하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우임금이 용문산을 두조각으로 동강내고 말았다. 그러자 이 산은 마치 대문을 연 듯 강의 양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황하는 절벽사이를 급류를 형성하면서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장치(長治)
산서성 동남부의 도시. 로안(潞安), 상당(上黨)이라고도 한다. 당삼(黨參:上黨産의 약용인삼), 못(못)은 옛부터 특산이다.
천룡산(天龍山)
산서성 태원의 서남 17킬로 지점에 있는 동위에서 북제, 수, 당, 대를 걸쳐 조영된 석굴. 진사진(晉祠鎭) 서쪽의 산중에 있다. 동위의 건조에 대하여서는 불명하나,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여 용문의 석굴이 일시는 쇠퇴되었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 2동, 제 3동이 가장 고식으로 동위식인데 북제의 굴은 제 10동과 제 16동이고 3벽에 아취모양의 공감(公龕)을 부조하고 5존상이 들어 있다.
태원(太原)
산서성의 성도. 분하(汾河)상류에 있는 천연적 요새지로 양곡, 태원, 문수, 교성등 인근 십현을 관할하는 관청소재지이며, 하북, 산서지방 일대의 요충지이다. 시가는 14킬로의 성벽으로 둘러 싸였으며 그 안에 내성도 있다. 춘추시대로부터 진양(晉陽)으로 알려졌고 성내에 진사(晉祠), 낭자관(娘子關)등의 명승지가 있다. 거리는 산지사방에서 모여드는 객상, 유람객들 그리고 온갖 사람과 수레와 기마로 붐비고 길 양옆은 주루, 찻집, 형형색색의 점포등 번잡하고 호화롭기 그지 없었다. 특히 성의 남쪽에 있는 취선루는 유명한 객점이다. 양곡(陽曲).
태행산(太行山)
산서성 진성(晉城)현 남방의 태행산을 주봉으로 하여 서는 분수(汾水), 동은 갈석(碣石)에 이르는 산맥. 거의 남북으로 달리고, 산서성과 하남, 하북 두 성의 경계를 이루고, 만리장성 근방에서 대흥안령의 남단으로 연결된다.
회남자(淮南子)에서 오행지산(五行之山)이라 불리며, 열자(列子)에서 대형(大形)이라 불리운 천하의 허리라고 일컬어지는 수 천리의 대산맥이다.
태행산은 전설에 의하면 왕옥산(王屋山)과 맞붙어 있었는데 통행이 불편하여 과아씨( 娥氏)의 두 아들이 태행산은 삭동(朔東)으로, 왕옥산은 옹남(雍南)으로 갈라놓았다는 우공이산(愚公離山)의 신화가 있다. 태행산 일천리(太行山一千里)라 할만큼 거대하다.
평양(平陽)
산서성 남부에 있는 도시. 웅대한 성곽이 있으나 성내는 논밭이 많다. 이곳은 옛날 요임금이 도읍한 곳이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그 사묘(社廟)가 있다.
평정(平定)
산서성 동부의 도시. 상, 하의 2성이 있으며 성 경계의 요지였다. 도자기가 성하며 정요(定窯)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풍릉도(風陵渡)
산서성 남서 경계의 도시. 황하를 사이에 두고 동관(潼關)과 대립한다. 황하에 주교(舟橋)가 있어 왕래가 손쉽다.
항산(恒山)
오악중의 북악. 내장성(內長城) 혼원(渾源)현에 있으며 높이는 이천이백십구척. 최고봉은 천봉령(天峯嶺). 태상노군(太上老君), 옥황대제(玉皇大帝), 원시천존(元始天尊)을 모시는 도관이 많고 현공사(縣空寺)가 유명하다.
산기슭에 북악묘(北岳廟)가 있고 일명 상산(常山)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거대한 새가 한 마리 살고 있는데(새매) 네 마리의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이 광야와 하늘임을 어미가 알고 있어 더 이상 그들을 곁에 둘 수도 없어 슬피 울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그의 울음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고 한다.
해현(解縣)
산서성이 있는 현. 황제가 치우를 쫓아가 죽인 곳이라 한다.
감천(甘泉)
섬서성 돈화현( 化縣) 감천산에 있는 궁. 진이 세우고 한무제가 증축하여 피서지로 쓰이던 별궁.
경조(京兆)
섬서성 장안일대를 차지하는 행정구획. 한나라 무제때 설치, 경조윤(京兆尹)을 둔 이래, 수, 당, 송, 금을 통하여 원초에 이르기까지 행정구획이었으나 원초에 봉천로(奉天路)로 개명하였다. 경조는 천자 소재의 땅이라는 뜻.
경하(涇河)
섬서성 위하(渭河)의 지류. 경수(涇水)라고도 한다. 감숙성 농산( 山)에서 발원하여 위하평야를 거쳐 위하로 흐른다. 역사상 유명한 진(秦)의 정국거(鄭國渠), 한의 백거(白渠)는 경하를 이용하여 구축한 관계시설이다. 지금의 간거(幹渠)와 지거(支渠)와의 총 길이는 300킬로.
고장(高掌)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화산과 수양산(首陽山:중조산)은 원래 한 산이었다고 한다. 황하신이 손으로 밀고 발로 차서 두 산으로 쪼개고 물이 통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손자국과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곤명지(昆明池)
장안 상림원(上林苑) 안에 있다. 그 안에는 한 대에 돌로 만든 고래인 석경(石鯨)을 만들어 놓았는데 크기는 삼장으로 천둥이 칠 때는 꼬리나 지느러미를 흔들며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과부산( 父山)
화산의 옛 이름. 전설에 의하면 옛날 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할 때 동원하였던 여덟 필의 준마를 유명한 어자(御者)(말몰이꾼)인 조부(造父)가 잡아 주목왕(周穆王)에게 바쳤다고 한다. 산의 북쪽으로는 수백리에 달하는 광대한 수풀이 있고 거의 복숭아 나무로 도림(桃林)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가 바로 고대의 유명한 도림새(桃林塞)라고 한다.
곽거병묘( 去病墓)
한나라 무제때의 명장인 곽거병의 묘. 무제는 그를 총애하여 그가 죽자 장안의 서북쪽에 조영중이던 자신의 능묘인 무릉(茂陵) 옆에 그가 활약한 무대였던 기련산(祁連山)의 모양을 본뜬 분묘를 만들어 주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그 분묘 옆에는 오늘날에도 흉노를 발로 짓밟고 있는 말의 석상등이 남아 있다.
관중
진나라가 도읍한 섬서의 장안일대는 동은 함곡(函谷), 서는 산(散) 남은 요(嶢) 혹은 무(武), 북은 소(蕭)의 4개관문에 둘러쌓여 있어 관중(關中) 혹은 관내(關內)라 불렀다.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記)에 "관중은 산하(山河)가 막히어 사색(四塞)하고, 땅은 비옥하여 도읍하여서 패(覇)가 될 지니라."라고 적혀 있다. 진, 한, 당의 각 왕조가 도읍했으므로 사적이 많다. 일명 진천(秦川).
구맥(九陌)
한나라 서울 장안의 성 안에 있던 동서남북에 통하는 아홉 큰 거리.
기(岐)
섬서성 기산(岐山)현 이북 일대. 주나라를 세운 문왕이 처음 국도로 정한 곳이라고 한다.
낙수(洛水)
섬서성의 중부에 있는 강. 정변(定邊)현의 백어산(白於山), 동성의 서북으로 발원하여 황하로 흘러간다.
남전(藍田)
장안 동남의 명승. 경옥(硬玉)의 산지이므로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농관( 關)
섬서성 농주( 州)의 서쪽에 있는 관. 지금은 대진관(大震關)이라 부른다. 농산 아래의 요애(要隘)에 설치되어 한나라때부터 서방과 통하는 요충지의 하나로 되었다.
농주( 州)
섬서성의 서부에 있는 도시. 명나라와 청나라때 농주라고 불리웠고 현재는 농현이라고 한다. 농주는 봉상(鳳翔)의 서북쪽에 있고 이 시의 서북은 농산산맥을 넘어 감숙성에 통하는 요충지대가 되어 있다. 농업과 축산이 발달하였고 말과 양은 옛부터 명산지로 알려졌다. 그 밖에 여러 가지 한약재가 산출되고, 부근에 임연성(臨衍城), 영신성(永信城), 농관등이 있어 역사상 유명한 곳이다.
대산관(大散關)
섬서성 보계(寶鷄)현 남동부에 있는 옛 관소. 일명 산관(山關)이라고도 하며 봉현(鳳縣)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 관소는 한 대이래 군사상 요지로 유명하며 섬서, 사천 두 성 사이의 교통로에 해당하는 관계상, 특히 삼국시대에는 위, 촉 양국의 교전지로서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
동관(潼關)
섬서성 동부에 있는 현. 화산의 동북 기슭에 있으며 황하의 급굴곡점에 있다. 산서, 하남, 섬서의 3성의 교통요지이다. 위수분지로 들어가는 곳은 서북 관계 수출입 화물을 옮겨 싣는 중계지이다.
마외파(馬嵬坡)
장안의 서북쪽, 위하 북안의 지명.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양귀비와 함께 이곳에 왔다가 강압에 못 이겨 양귀비가 죽은 곳. 양귀비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명봉령(鳴鳳嶺)
장안의 서쪽에 있는 산.
무릉(茂陵)
장안의 서북 40킬로에 있는 전한의 황제 무제의 묘. 근처는 황제들의 묘가 열 한 개나 있으나 그중 가장 크다. 저변의 길이는 240미터, 높이 46.5미터로, 외형은 사각형이고 꼭대기 부분은 평평하다. 무제 즉위 다음해부터 건조하여 53년이나 걸려서 완성시켰다.
보경사(寶慶寺)
섬서성 서안의 남문 내 보경사에 있는 불전과 전탑 벽면에 있었던 석제의 부조 불상. 이들 부조는 본디 당시대에 같은 장안의 광택방(光宅坊)에 있었던 광택시 안, 특히 측천무후의 조영에 걸린 누각칠보대(寶대) 등의 내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원래는 130석여(石餘)가 있었다고 한다.
보계(寶鷄)
섬서성의 서부 위수평야의 서쪽 끝에 있는 도시. 옛 이름은 진창(陳倉). 감숙, 섬서, 사천의 3성의 물자교류의 중심지이다.
보제사(菩 寺)
장안의 평강방(平康坊) 남문의 동쪽에 있는 절. 수나라때 농서공( 西公) 이경도(李敬道)와 중 혜영(惠英)의 상주로 이 절을 세웠다 한다. 마지의 아랫쪽에 있어 향적사와도 가깝다. 안록산의 난때 왕유(王維)가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봉상(鳳翔)
섬서성 위하유역에 있는 도시. 섬서성 서부의 중요 시장이며 감숙성 동부와의 사이에 성행하고, 한구와도 거래가 있다.
삼문협(三門峽)
산서의 용문산과 인접해 있는 계곡. 우는 황하를 가로막고 있던 산을 몇조각으로 나누어 지류를 만들었는데 산사이를 흐르는 물이 마치 세 개의 문을 지나는 것 같다고 하여 삼문(三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삼문에는 각기 고유명칭이 있는데 귀문(鬼門), 신문(神門), 인문(人門)이 그것이다. 화산삼문협잡기(華山三門峽雜記))에 보면 이곳의 풍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하 양안의 절벽에 서서 하곡을 내려다보노라면 멀리 상류 쪽에서 힘차게 들려오는 황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은 동쪽으로 갈수록 수세가 급해지는데 삼문협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중간에 서 있는 두 개의 석도(石島)에 부딪혀 물길은 순식간에 세 가닥의 급류로 변하고 만다. 이들 급류는 다시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양안에 돌출해 있는 바위에 부딪혀 순식간에 한 가닥으로 모이게 되며 넓이가 1백 20미터쯤 되는 계곡을 박차고 나가는데 우뢰같은 소리가 협곡을 진동시킨다.'
이곳에는 우의 치수를 말해주는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우가 삼문협을 뚫을 때 팠던 우물이라는 칠구석정(七口石井)이 그것인데 그래서 삼문협을 칠정삼문(七井三門)이라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귀문도(鬼門島)의 절벽 꼭대기에는 두 개의 둥근 원이 마치 한쌍의 말발굽처럼 파여 있는데 그 크기가 우물보다 크다. 이것을 마제와(馬蹄窩)라고 한다. 옛날 우가 지주(砥柱)를 뚫을 때 말이 삼문(三門)을 뛰어넘으면서 앞발로 이곳에다 발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삼문협의 상류에는 우묘(禹廟)도 있는데 옛날 삼문협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향을 피우고 자신들의 소원을 우에게 빌었다고 한다. 또 폭죽을 터뜨리면서 실컷 먹고 마신 다음 급류를 저어가는데 도중에는 화살같이 뾰족한 바위가 많아 순간적인 판단으로 생사가 갈릴만큼 위험한 곳이다. 따라서 현지에는 '나루터에는 불러도 대답없는 사공, 울다 지친 과부'라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옛날 용감했던 중국 사람들의 피눈물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서안비림(西安碑林)
서안의 문묘(文廟) 뒤쪽에 모아놓은 석비군(石碑群)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개성석경(開成石經), 현종황제 어주효경비(御注孝經碑), 안진경(顔眞卿)등의 석비를 세운데서 비롯되었다. 명, 청대에 수차 수리를 하여 당, 송 이후 근대까지의 석비와 저명한 서가(書家)의 법첩(法帖)을 석각한 것을 500여개 모았다.
삭성(削城)
화산기(華山記)에 산 4면이 절벽으로 되어 깎아 만든 것 같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소릉(昭陵)
당태종의 능으로서 장안의 서북쪽 예천(醴泉) 근처에 있다.
소응(昭應)
섬서성 임동(臨潼) 여산(여산(驪山))의 서북쪽 기슭에 있다. 원래는 회창(會昌)이라고 하였으나 현종황제때 여산 화청궁의 조현각(朝玄閣)에 노자가 강림하였다는 말이 전해져서 이것이 길조라고 하여 이래 소응이라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소릉육준(昭陵六駿)
예천의 서북, 구준산(九峻山)에 있는 소릉의 석조(石彫). 처음에는 현무문(玄武門)에 있었으나 지금 서(西) 제 1석은 미국에, 다른 5석은 서안의 비림에 있다. 높이 1.5미터, 넓이 1.8미터의 각각 한 필의 말을 부조하였다. 유래는 태종이 전쟁에서 승용한 애마를 추억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한편 마찬(馬讚)의 제자(題字)는 구양순(歐陽詢), 은중용(殷仲容)이 쓴 것이라 한다.
신풍(新豊)
장안의 북동쪽에 있는 술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
아방궁(阿房宮)
진시황제의 궁전. 궁지는 섬서성 장안의 서북, 위수의 남쪽에 있다. 그 규모는 2층으로 아래층에는 5장의 깃발을 세울 수가 있고 위층에는 일만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이다. 시황제는 위수의 남쪽에 상림원(上林苑)에 조궁(朝宮)을 짓고자 하여, 먼저 그 전전(前殿)인 아방궁을 지은 것이라 한다. 동서의 길이가 약 990미터, 남북의 길이가 약 152미터다. 당시 이 궁전의 노작(勞作)에 당하였던 형도(形徒)의 수는 70만명에 이르렀으며, 그 밖에도 여러 궁궐을 만들어 관중(關中)에는 3--개, 관외에는 4백여개 그리고 함양부근 2백리 안에 세운 궁전은 270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사를 당한 인가가 8만호나 되었다고 한다. 아방궁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항우에 의하여 불태워져 버렸다.
여산(驪山)
섬서성 서안부에 있는 산. 여산(廬山), 회창산(會昌山)이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이 높다. 주나라때 여융(驪戎)이 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온천을 이용하려고 각도(閣道)를 만들었고 당의 태종은 온천궁을 지었고, 현종은 온천궁을 화청궁(華淸宮)으로 고치었다.
여산릉(驪山陵)
섬서성 임동현에 있는 여산 기슭에 있다. 사기에 의하면 시황제는 70만명을 동원하여 38년 걸려서 이 능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는 75미터, 봉상(봉상(封上))의 한변이 560미터의 방형(方型)묘이며 주위에는 3,000미터나 되는 흙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묘내에는 궁전이 있고, 문무백관의 자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궁중에서 엄선된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고, 묘도둑이 접근하면 노시(弩矢)가 저절로 발사되도록 되어 있었다. 묘실의 천장은 천체를 본떠서 야광(夜光)의 옥(玉)을 박은 밤하늘이 보이고, 중국의 지형을 본뜬 바닥에는 수은의 강이 흐르고 있다. 묘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인어(人魚)의 고(膏)를 쓰는 촉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공사에 종사한 공장(工匠)들은 능묘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조리 묘내에 갇혀 버렸다고 사마천은 적고 있다.
용지(龍池)
장안 흥경방(興慶坊)의 한 민가에 작은 못이 있었다. 이 못이 점점 커져서 아주 넓게 되어 늘 구름이 일고 용이 노는 것을 본 사람까지 있었다. 드디어 당의 현종이 이곳에 흥경궁을 짓고 용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위교(渭橋)
장안 북방을 흐르는 위수에 놓은 다리. 서역에 통하는 요로로 횡교(橫橋), 중위교(中渭橋)라고도 부른다.
위하(渭河)
감숙, 섬서의 두 성에 걸쳐 흐르는 강. 위수(渭水), 위천(渭川)이라고도 한다. 감숙성 위현의 조서산(鳥鼠山)에서 발원하여 남동으로 흘러 섬서성에 들어와 봉상, 서안, 조읍(朝邑)을 거쳐 동쪽으로 동관을 돌아 황하에 이른다. 도중에 견수(견水), 경수(硬水)의 지류를 합친다. 옛날에 흑룡이 이 물을 마셨다 하여 음룡천(飮龍川)이라고도 한다. 주의 문왕은 위하의 북쪽에 있는 반계(盤溪)에서 사냥하다가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呂尙)을 만났다. 그는 여상을 군사로 임명하여 주의 국권을 맡겼다. 이때 여상의 나이는 팔십 세였다.
유림(楡林)
섬서성의 북부에 있는 도시. 본래 한나라의 구자(龜滋)현 및 수나라 초기의 정덕진(靜德鎭)이었고 명나라때에 유림채(儒林寀)를 두었는데, 그것을 다시 유림위(楡林衛)로 고치고 청나라때 부와 현을 두었다. 산물은 보잘것이 없고 토량도 각박하고 기후까지 한랭하고 우량도 적다. 주로 모피의 집산만이 성하다.
육반산(六盤山)
섬서성에서 영하성에 이르는 산맥. 섬서성의 가장 서쪽끝의 위수의 북쪽에서 일어나 감숙성의 동부를 남으로 달려 영하성에 들어가 황하에 이른다. 준험하여 교통에 큰 장애가 된다. 주봉인 육반산은 약 3,000미터이며 징기스칸이 죽은 곳으로 유명하다.
자은사(慈恩寺)
당나라때 건립한 장안의 명승지. 장안 진창방(進昌坊)에 있으며 당 태종때 창건. 고종이 황태자때 그의 어머니를 위해 이 절을 지었기 때문에 자은이란 이름이 붙었다. 곡강의 북쪽에 위치하며 현장이 서역의 제도를 따라 오층탑을 건립, 측천무후때 다시 세운 것이 유명한 대안탑(大雁塔)이다. 대안탑은 삼백 척에 달하며 탑 입구는 흑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문인묵객들이 끊임없이 찾아가는 장안의 명소중의 명소다.
장릉(長陵)
한나라 고조의 능. 섬서성 장현(長縣), 위하 북쪽에 있다. 황후 여씨(呂氏)의 능은 그 동쪽에 있다.
장안(長安)
섬서성 위수의 남안에 위치한 고도. 진한이래 당의 소종(昭宗)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특히 한, 당시대에 번영하였고 그 이후에는 지방도시가 되었다. 당때의 장안은 수의 문제가 지은 대흥성(大興城)을 고쳐 쌓았다. 성내에 천복사(薦福寺) 소안탑, 자은사 대안탑, 분묘 등과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卑)가 있다. 부근에 현장삼장탑(玄 三藏塔), 향적사 전탑(香積寺塼塔), 진시황제능, 곽거병묘등 고적이 많다.
정국거(鄭國渠)
정국거는 전국시대 말의 진왕 정(政)(시황제)때, 위수로 흘러가는 경수(涇水)의 물을 끌어들여서 만들어진 큰 관개용수로이다. 그런데, 이 이름높은 수리시설은, 7국쟁패에서 통일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는 세상에서 따지고 보면 한(韓)나라의 대진정책(大秦政策)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진나라의 동쪽에 이웃하고 있는 한나라는 호전적인 진나라의 대한진공(大韓進攻)을 두려워하여 어떻게 하든 그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수리관개의 기술이 뛰어난 정국을 진나라에 보내어 경수에서 물을 끌어서 중산(中山)의 서쪽에서 호구(瓠口)에 이르고, 다시 동쪽 낙수(洛水)로 흐르는 3백여리의 거(渠)(큰도랑)을 만들어서 전답을 관개하도록 은밀히 역설케 했다. 과연 진은 그 건언을 받아들여서 착공했는데, 공사의 중도에서 한나라의 책략이 발각되었다. 그러나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뻔한 정국은, "나는 한나라의 첩자로서 시작했지만, 거가 이룩되면 진나라에 있어서 큰 이익이 됩니다." 라고 그 만대의 이익과 공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10년을 걸려서 거를 완성시켜, 염분이 함유된 석로( 鹵)의 땅 4만여 경(頃)(일경은 백무(畝))에 물을 대고, 불모의 황무지는 1무마다 백 종(鍾)(6곡(斛) 4두(斗))의 수확을 올리는 옥야(沃野)가 되고, 흉년도 없어졌다. 정국거라는 이름은 이 수리관개사업을 완성시킨 수공(水工) 정국(鄭國)에서 온 것으로, 진왕 정은 이 비옥한 땅을 배경으로 국력을 축적시켜 마침내 부강(富强)으로써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정국거는 후에 한나라 무제가 그 남쪽에 만든 백거(白渠)와 함께, 그 다한 역할이 크며 중국 고대에 있어서의 수리관개의 유산으로서 오늘날까지도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