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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대화방 스크랩 저항적 허무주의를 넘어서 있는 니체의 광인에 관한 고찰
강창보 추천 0 조회 55 16.06.12 13: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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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적 허무주의를 넘어서 있는 니체의 광인에 관한 고찰


이주향(수원대학교)


[주제분류] 문화철학, 허무주의 철학.
[주 제 어] 허무주의, 철학적 허무주의, 저항적 허무주의, 광인,안수정등(岸樹井藤)


[요 약 문]
니체의 허무주의는 근대 사회 이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절대적 가치들을 몰락케 하는 논리요, 태도였다. 그렇다면 절대적 가치들이 몰락한 현대에 니체의 허무주의는 무의미할 것인가?

이진우는 니체의 허무주의가 역사에 관한 철저한 성찰이기 때문에 허무주의의 탈역사화는 니체에게서 보여졌던 비판적 성격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기존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근대적 상황이 질료가 되는 했어도 니체의 허무주의는 시대적 상황이 창출해낸 근대철학의 패러다임에 가둘 수 없는 중요한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허무주의가 역사에 관한 철저한 성찰에서 시작했어도 그것은 궁극에서는 삶을 거스르는 것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나는 궁극에서 니체가 본 허무주의는 “우주 운행방식인 영원회귀에서 불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항구적인 것은 없다는 통찰”이라는 정동호에 동의한다. 나는 궁극의 허무주의는 금강경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의 정신처럼 탈역사화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능동적 허무주의의 탈역사화는 니체에게서 보여졌던 비판적 성격의 특징이 실존적인 것임을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다.


니체는 투르게네프를 좋아했으며, 러시아 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우선 니체가 좋아한 투르게네프의 바자로프와 니체의 광인이 어떤 점에서 닮았고 어떤 점에서 다른 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허무주의를 검토하면서 니체가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철학적 허무주의와 투르게네프의 저항적 허무주의, 그리고 궁극의 허무주의가 무엇인지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를 우주 허무주의라는 개념으로 다시 쓰며 허무를 인간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상황으로 본 정동호의 입장에 동의하며, 그것이 바로 불설비유경의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니체의 광인이나 밧줄을 타는 인간이 자유를 본 능동적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니체가 궁극에 추구한 것은 허무주의라기보다 자유라고 생각하며, 허무의 상황은 인간이 자유인이 되기 위해 마주하게 되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1. 시작하면서


삶에도, 역사에도 전면전을 해야 하는 시기, 즉 사자의 시기가 있다.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격렬하고도 공격적인 사자 같은 비판은 기독교적 단죄와 폭력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던 현실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기독교적 폭력을 드러내기에는 더없이 날카로운 논리였다. 기독교적폭력의 핵심엔 ‘죄’가 있고, 그 ‘죄’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죄 ― 가장 명민한 마녀 재판관들은 물론 심지어 마녀 자신들도 마법의 죄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죄도 마찬가지다.”1)

존재하지 않는 죄를 확신하게 만드는 것, 그 헛된 의지의 작용 속에 이미 허무주의의 싹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좋아했다는 투르게네프의 ‘바자로프’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전하는 혁명적 전사였다. 그 전사는 ‘사실’을 무기로 기존의 신앙과 기존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기존 체제에 맞서는 저항으로 긴장된 삶을 살았
다. 그와 같은 전사들의 투쟁 덕택에 지금은 허무주의자라 해서 긴장된 삶을 살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니체의 예언대로 지금 우리 시대는 허무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허무주의가 일상화된 것이다. 한 때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절대적 가치들이 몰락하고 붕괴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기대 살고있는 오늘의 소소한 가치들도 내일까지 우리 삶을 든든히 지지해주는 가치가 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세기를 철저히 지배했고, 그 다음 세기도 규정할 역사적 운동”2)이라는 허무주의에의 예측은 차라리 에언 같기도 하다. 니체의 말대로 허무주의가 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하는 것3)이라면 오늘날은 허무주의라는 역사적 운동이 잘 진행되는 시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 철학은 ‘근대’라는 역사적 정황이 낳은 시대적 철학인가, 아니면 허무주의가 일상화된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세계를 통찰하는 중요한 시선으로 의미 있을 것인가?


무주의의 탈역사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궁극에서 니체가 본 허무주의의 탈역사화는 니체에게서 보여졌던 비판적 성격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라고 한다.4) 그러나 나는 기존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시대적 상황이 질료가 되는 했어도 니체의 허무주의는 시대적 상황이 창출해낸 근대철학의 패러다임에 가둘 수 없는 중요한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니체는『반시대적 고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사람들은 성숙해지기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역사를 더 존경하니까. 그렇다. 이제 우리는 학문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하다.”5)

전통을 익히고 역사를 해석하고 특정 지식체계를 쌓고 또 쌓기만 하는 현대인의 특징을 니체는 “외면과 일치하지 않은 내면 그리고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외면이라는 기묘한 대립”6)이라고 한다.

욕망을 거슬러 과도하게 포식한 지식은 삶을 바꾸는 변혁적 동기가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니체는 지식이 아니라 본능과 망상이 지배했던 과거의 삶보다 훨씬 적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7)
이렇게 볼 때 니체에게서는 학문보다는 삶이고, 역사보다도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 비판에서 시작한 니체의 허무주의가 역사에 관한 철저한 성찰이라기보다 삶을 거스르는 것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고, 그렇기 때문에 허무주의의 탈역사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궁극에서 니체가 본 허무주의는 “우주 운행방식인 영원회귀에서 불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항구적인 것은 없다는 통찰”이라는 정동호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나는 궁극의 허무주의는 금강경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과 같이 탈역사화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능동적 허무주의의 탈역사화는 니체에게서 보여졌던 비판적 성격의 특징이 실존적인 것임을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허무주의란 “우리가 모든 생기에서 그 안에 없는 하나의 ‘의미’를 찾을 때: 그래서 찾던 자가 결국 기백을 상실할 때 등장”8)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살며 사랑하며 추구해왔으나 원래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이기에 찾을 수 없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속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헛됨의 고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러한 것을 심리적 상태로서의 허무주의라고 한다.


정동호는 니체 허무주의가 적어도 러시아 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허무주의의 경전으로 불렸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1)이 프랑스를 거쳐 서구로 들어왔는데, 니체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
에서 기존의 신앙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바자로프에 주목했으며, 『즐거운 학문』의 ‘광인’이 바로 니체의 바자로프였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니체는 바자로프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자로프는 니체가 약함의 징후가 아니라 강함의 징후라고 하는 상승된 정신력의 징후로서의 능동적 허무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투르게네프의 바자로프와 니체의 광인이 닮은 점도 있지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연 투르게네프의 바자로프와 니체의 광인은 어떤 점에서 닮았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1) 니체, 『즐거운 학문』, 안성찬, 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년, 245쪽.
2) 하이데거, 『니체와 니힐리즘』, 박찬국 역, 지성의 샘, 2000년, 24쪽.
3)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0년, 22쪽.

4) 이진우, ?21세기와 허무주의의 도전?, 『니체이해의 새로운 지평』성진기외 지음, 철학과 현실사, 2000년, 397-398쪽.
5) 니체, 『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년, 348쪽.
6) 위의 책, 318쪽.
7) 위의 책.

8)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342쪽.



2. 바자로프의 저항적 허무주의와 ‘철학적 허무주의’


허무주의란 사전적 정의로는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은 존재하지도, 인식되지도 않고, 또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태도를 일컫는다. 이 일반적인 정의가 존재론과 인식론과 가치론을 넘나들고 있는 것은 허무주의가 정교한 이론이라기보다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태도는 삶을 긍정하는 것일까, 부정하는 것일까?


투르게네프의『아버지와 아들』은 허무주의가 일파만파로 번져가던 19세기 러시아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허무주의적 태도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제목이 암시하듯 세대 간의 갈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갈등의 중심에 바로 허무주의가 있고, 주인공 바자로프는 스스로 니힐리스트임을 천명하며 아버지 세대의 공공의 적이 되고 있다.
귀족 청년 아르카디가 시민 계급 출신인 그의 친구, 바자로프를 아버지와 삼촌에게 소개하는 대목이 상징적이다.


“ “니힐리스트라고? … 그러면 …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

“아무 것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말해.”

파벨 페드로비치가 말을 받아 넘기면서 다시 빵에 버터를 바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지요.”

아르카디가 말했다.


“니힐리스트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아무리 주위에서 존경받는 원칙이라고 해도 그 원칙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 9)


여기서 니힐리즘은 가치론적인 개념이겠다. 아버지 세대에게 니힐리스트는 문명이 이룩해놓은 사회적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지 않고 파괴하는 인물들이다.

전통적 질서 내에서 인정받고 누리며 살아온 그들에게 니힐리스트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계급과 권위를 인정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건방지고도 위험한 인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허무주의는 무시하고 경멸해도 좋은, 아니 무시해야 하고 경멸해야만 하는 공허하고 천박한 병적 태도다.

반면 아들 세대의 허무주의는 가치론적 기반과 존재론적 기반이 섞여있다. 그들의 허무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허무이고, 또한 그들 스스로도 어떠한 전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허무다.

한편 그들의 허무주의는 기성세대가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실은 근거가 없는 것임을 폭로하기 위한 논리요 태도이기도 하다. 아들 세대에게 기성세대의 도덕이나 문화적 양태는 대부분 무지와 편견에 의해 보호된 거대한 허위의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허무주의는 무지와 편견이 낳은 거대한 허위의식과 싸우는 힘 있는 태도고, 어떠한 권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당당하고도 건강한 태도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의 허무에는 저항이 있다고 하겠다. 저항적 태도가 그들의 허무주의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왜 제가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까? 그리고 뭘 믿어야 합니까? 사실을 말해주면 저는 동의할 뿐입니다.”10)

이렇듯 믿도록 요구된 가치들의 허무를 선언하는 바자로프가 방패로 삼는, 그 ‘사실’이란 것은 무엇일까?


“중요한 건 둘에 둘을 곱하면 넷이 된다는 거야. 다른 모든 건 시시해.…자연도 자네가 이해하는 그런 의미에선 시시하네. 자연이란 사원이 아니라 공장이야. 인간은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지.”11)


자연은 사원이 아니라 공장이라는 이 선언은 바자로프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분명한 명제라고 하겠다. 그에게 신앙은 망상의 체계이고, “아리스토크라시즘(aristocratism), 리베랄리즘(liberalism), 프로그레스(progress), 프린치프(principle)” 등은 “쓸데없는 외국말”12)이며, 관습적 결혼과 사랑은 위선적인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13) 기존의 믿음체계들을 그대로 수용하지않고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따져본다는 점에서 그의 허무주의는 ‘상승된 정신력의 징후’14)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자로프가 최후의 보루로 믿고 있는 ‘사실’이란 것은 믿을만한 것인가? 『즐거운 학문』55

‘사실주의 화가’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과 전체에 충실하라! ― 하지만 어떻게? 일찍이 자연이 그림에 완전히 들어간 적이 있었던가?

세계의 가장 작은 한 조각조차도 영원하다. 그가 그 리는 것은 결국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그릴 수 있는 것.”15)


사실을 표방하는 사실주의 화가의 그림에도 자연이 완전히 들어간 적이없듯 해석되지 않은 사실은 없다. 사실은 이미 해석된 것이다. 바자로프가 친구인 아르카디에게 자연도 자네가 이해하는 그런 의미에선 사시하네, 라
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 믿는 것이 이미 ‘사원’적 관점에서 해석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장으로서의 자연을 믿는 바자로프는 분명 해석되지 않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에 기반하여 그는 기존의 가치를 탈가치화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사실에 기반하여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관습에 저항하는 바자로프를 좋아한 이유는 비록 그가 철학적으로 거친 논증 방식을 채택하고 있더라도 그 시대의 숙명으로서 허무주의를 인지하고, 그 허무주의에서 능동적 힘을 발견, 그 힘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 하는 삶의 태도때문이었으리라 믿는다. 바자로프는 그 당시 도덕과 신앙과 관습을 옹호하고 귀족주의를 대변하는 아버지 세대 파벨16)과 대척점에 서 있다. 아버지 세대가 그에게, 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파괴하고 있다고, 건설도 필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하자 그건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우리는 먼저 터전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힘이기 때문에 우리가 파괴하는 거에요. …힘은 해명 같은 걸 하지 않아요.”17)


바자로프의 저 문장은 얼마나 니체적인가. 힘은 흐를 뿐이다. 힘의 작용은 동시에 힘의 상실이지만 전체에 관점에서 보면 결국엔 모든 것이 흘러 경직된 정지는 없다. 나는 이 힘에 대한 통찰과 지향성이 니체가 바자로프에게 주목하고 『아버지와 아들』에 주목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바자로프는 차라투스트라의 사자를 닮은 열정과 지향성을 가졌다. 그는 그 스스로가 힘이라는 것을 알며 힘은 해명해야 하는 피고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생기임을 안다.

그런 점에서 바자로프는 “모든 생기가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며: 무의미하고 헛된 존재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18)하는 ‘철학적 허무주의’와 구별된다. 저항적 허무주의자로서 철저히 부정과 파괴의 길을 걸은 바자로프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9)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이항재역, 문학동네, 2011. 39쪽.

10) 투르게네프, 위의 책, 43쪽.
11) 투르게네프, 위의 책, 70쪽.

12) 투르게네프, 위의 책, 79쪽.
13) 바자로프를 좋아하지만 귀족적 습관과 니힐리스트의 매력 사이에 있는 아르카디는 혼자 된 아버지가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만 하는 것을 보고 바자로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녀는 정당하지만, 아버지는 … 아버지가 그녀와 결혼해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때 니힐리스트적 태도로 일관된 바자로프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래, 자네는 아직도 결혼에 의미를 부여한단 말인가?” 투르게네프, 위의 책, 69쪽.
14) 니체, 앞의 책, 22쪽.
15) 니체, 『즐거운 학문』, 57쪽.

16) 파벨은 바자로프의 친구 아르카디의 삼촌이다.
17) 투르게네프, 앞의 책, 85쪽.
18)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341쪽.



니체는 철학적 허무주의를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철학적 허무주의자는 덧없음의 가치를 꿰뚫어보지 못해 생기를 잃어버린 자들이다.
덧없음의 가치를 소화하지 못해 덧없음에 버거워하는 자의 노래는 병적이다.


“덧없음의 가치: 지속적이지 않으며 모순적인 어떤 것은 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이라 믿는 것들은, 그것이 지속한다는 이유 때문에 순전한 허구들이다. 만일 모든 것이 흐르고 있다면, 덧없음은 하나의 특질이며, 지속과 불멸은 단지 가상일뿐이다.”19)


그런 의미에서 저항적 허무주의는 철학적 허무주의보다 니체적이다. 철학적 허무주의가 덧없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못해 결국 기백을 상실하는 것이라면, 바자로프적 허무주의, 즉 저항적 허무주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통용되는 권위나 원칙이 근거 없음을 인지하고, 그 인지를 바탕으로 의지를 세우는 강한 정신의 상태다. 그 의지란 인간을 사회적 권위와 질서의 노예로 만드는 삶에 대항하여 싸우는 힘 있는 삶의 태도다. 나아가 니체가 본능동적 허무주의는 덧없음이 존재하는 것의 특질임을 인지하고 깊이 받아들이고, 그 인지와 수용을 바탕으로 의지를 세울 줄 아는 강한 정신의 상태다.


이렇게 본다면 저항적 허무주의는 철학적 허무주의보다 진화된 것이고, 능동적 허무주의는 저항적 허무주의보다 실존적이라 볼 수 있겠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허무주의란 ‘헛됨!’에 대한 고찰만도 아니고, 모든 것이 몰락할만하다고 믿는 것만도 아니다. : 이는 강한 정신과 의지의 상태며…”20)


19) 니체, 위의 책, 342쪽.
20) 니체, 위의 책, 358쪽.



3. 니체의 광인에 대한 해석들


정동호가 문학적 허무주의자인 바자로프가『즐거운 학문』의 광인의 모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바자로프가 신적 질서 등 기존의 정신세계에 대한 반발의 에너지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였다. 그렇게 러시아 허무주의에 의해 고무된 니체가 러시아 허무주의와 궤를 함께 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를 정동호는 니체의 관심사 때문이라고 한다. “그(니체)의 주관심사는 인류의 미래였다. 과거의 유산에 대한 거부는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절차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에 그는 늘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21)고 한다.
그러나 니체가, 허무주의가 하나의 역사적 운동으로서 서구 문명 전개의 역사적 운명이라 진단했다고 해서 니체의 주관심사가 인류의 미래였다고 할 수 있을까? 니체의 주관심사는 생명력이며, 삶을 거스르는 세력에 대항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그가 방점을 찍은 것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 예측이라기보다 살아있는 대지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대지가 내 껍질을 삼키듯이/ 내 안의 뱀은 대지를 갈망한다./

벌써 나는돌과 풀 사이를 기어/굶주림에 몸을 비틀며 나아간다./

내가 항상 먹어온 것을 먹기 위해/ 너 뱀의 음식이여, 너 대지여!”22)


니체의 광인이 안주를 거부하고 몰락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대지적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지적 삶은 삶의 위험한 줄타기를 마다하지 않는 에너지다. 대지를 갈망하는 뱀은 대지를 살고 대지를 먹기 위해 삶의 위험한 줄타기를 마다하지 않는 과정적 존재다.

그 뱀 같은 존재인 니체의 광인은 신을 찾고 있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신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의 행위는 진짜로 신을 찾는 행위라기보다 신이 사라진 세상의 허무가 얼마나 감당하기 버거운 것인가를 일깨우는 등에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웃음거리가 됨으로써 그들에게 신의 죽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선포할 수 있었다. 그는 신이 죽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겁고 캄캄한 일인지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에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인간이 신을 살해한 사건은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라 실존의 중심축이 바뀌는 무서운 사건인 것이다.


 “광인― …신이 어디로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살인자다!”23)


광인의 입을 통해 니체는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우리 모두가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고 선언한다. 이에 대해 이서규는 이 광인의 외침은 소박한 무신론이 아니라 유럽문명 속에서 더 이상 신의 존재가 영향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하는 사건이라고 한다.24) 이서규의 이 해석은 자연히 하이데거를 연상시킨다.

하이데거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초감각적인 세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초감각적인 세계는 삶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우리는 초감각적인 세계를 믿고 있기나 한 것일까? 신을 믿는다면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신을 모르면 천국에 갈 수 없다며 기독인과 비기독인을 편 가르는 사람의 문제는 초감각적인 세계를 믿고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믿지도 않는 초감각적 세계를 방패로 교회의 교리에 갇혀 자기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은 아닐. 교리에 대한 의심만 품어도 그것을 죄라 규정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감옥에서 초감각에 대한 기질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을까?


22) 니체, 앞의 책, 39-40쪽.
22) 니체, 앞의 책, 39-40쪽.

23) 니체, 『즐거운 지식』, 200쪽.
24) 이서규,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 그리고 위버멘쉬?, 『니체연구』 제8집, 2005년 가을, 41쪽.



광인의 외침에 대해 이서규와 하이데거의 해석은 이제는 상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통한 것이다. 이진우는 “신은 죽었다”는 명제가 이제는 불온한 전복(顚覆)의 대명사가 아니라 진부한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고 정확하게 진단한다. 더구나 해체주의와 상대주의가 힘을 얻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신의 죽음과 결부된 허무주의가 본래 가지고 있는 파괴적 성격을 많이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는 로티가 니체의 관점주의를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받아들여 종족중심주의(ethnocentrism)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는 바깥에 있어도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로티의 종족중심주의의 전제는 진리는 없다는 주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진리허무주의로의 귀결이 자연스러운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또 다른 독단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삶과 세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도록 형이상학적 독단론에 대한 파괴와 해체로 시작하였던 허무주의가 이제는 거꾸로 합리적 비판과 검증을 용납하지 않는 독단론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25)

그 결과가 관용과 다원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소속되어있는 문화의 지배적 구조의 절대화하는 것이다.


나는 이진우의 논리대로 니체의 허무주의가 로티의 종족중심주의를 거치면 그렇게 귀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진우가 지적했듯 실용주의적 종족중심주의는 사회의 내재적 비판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진우는 절대적인 것의 상실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현상의 내재적 비판과 관련된 해석의 가능성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이성과 합리성의 맥락에서 해석되는 한 나는 그것이 러시아 허무주의의 관점을 넘어서지 못할 뿐 아니라 광인의 외침 또한 무의미한 헛소리로 무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기독교적 질서가 더 이상 삶의 방패가 되고 있지 않은 현대인들에게는 광인의 외침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헛소리일 뿐일까?


25) 이진우, 앞의 논문, 396쪽.



4. 광인의 실존적 외침과 새로운 가치의 내용


우리는 너무나 단선적으로 신이 죽은 시대여서 우리가 니체가 비판한 세상 바깥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과연 본질적인 것이 변했을까?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보, 행복, 공리가 신성을 대체해도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진단하는 들뢰즈는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본질적은 것이 그 자리를 보존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과연 신을 살해한 것일까?”26)

들뢰즈는 “항상 복종하도록, 짐을 짊어지도록, 오직 생의 반동적인 형식들과 단죄하고 비난하는 사유의 형태들만을 인정하도록 권유”27)된다는 점에서 신을 설정하고 짐을 지는 것이나 인간이 스스로 짐을 지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신에 복종하는 대신 사회에 복종하며, 교회가 요구하는 가치체계 대신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체계를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짊어지며 전파하는 시대는 여전히 생을 재단하고 제한하며 단죄하고 있다. 니체는 맹목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체계를 수용하고 그 대가로 온통 금칠을 해대면서 스스로를 귀족이라 칭하는 자에 대해 천민이 ‘귀족’을 참칭했다고 하고 있다.

 “진정, 금으로 온통 칠을 해대고 요란하게 화장을 한, 우리들의 저 가증스러운 천민들과 더불어 사는 것보다야 은자와 염소치기를 벗하면서 사는 것이 그래도 낫겠다. 천민들이야 저들의 사회를 상류사회라고 부르고 있지만.”28)


본질적인 것이 달라지지 않은 세상이라면 허무주의는 여전히 힘이 있다.
하이데거는 허무의 힘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허무는 염세적 부정29)이 아니라 힘 있는 부정으로 존재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이서규는 니체를 따라 능동적 허무주의와 수동적 허무주의를 구별하면서, 독단적 역할을 했던 가치들을 해체하는 힘인 능동적 허무주의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30)

이서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로서 자기를 극복하는 존재인 위버멘쉬를 그냥 설명할 뿐 새로운 가치의 내용은 회피하고 있다. 아마도 내용이 제시되는 순간 새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새로운 가치의 내용은 무엇일 것인가? 새로운 가치의 내용은 들뢰즈가 비판했듯 단순한 내용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실존적 태도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태도의 원형을 광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우리가 더 이상 대중을 관찰하지 않고 다시 개개인, 즉 생성의 거친 강물 위에서 일종의 다리가 되는 개개인을 관찰하는 시대가 올 것”31)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의 과정도 아니고,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과정도 아니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에 의해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역사는 위대한 자가 나올 수 있는 동기와 힘을 부여하는 장으로 의미를 갖는다.32) 그 개인은 물론 자기를 극복한 자 위버멘쉬이겠으나, 위버멘쉬는 니체를 연구하거나 좋아하는 누구나가 말하지만 도달한 적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존재라 하겠다. 오히려 광인이 위버멘쉬 이전의 위버멘쉬인 것은 아닐까.

그는 “감옥 속에 감추어져 있을 뿐 아직 시들어 죽은 것은 아”33)닌 삶을 일깨우는 존재일 것이다. 나는 정동호가 그 광인을 적확하게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동호는 궁극적 목표라는 것이 없는 우주적 공허를 느끼고 수용한 존재로서 광인을 묘사하며 그를 영원회귀를 알고 있는 우주허무주의자로 인지하는 듯하다.

그가 능동적 허무주의라는 니체의 개념을 쓰지 않고 우주허무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든 것은 허무를 궁극에서 마주해야 하는 실존의 상황으로 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정동호의 우주 허무주의는 생의 덧없음을 보면서도 그 삶을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운명애(amor fati), 무의미한 영원의 회귀와 그것에서 파생되는 우주허무주의를 자신의 운명으로, 자신의 존재법칙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허무주의를 극복한 자의 여유인가, 아니면 허무적 정황 속에서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사랑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허무적 체념의 표현인가?”34)


26) 질 들뢰즈,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옮김, 철학과 현실사, 2007, 36쪽.
27) 위의 책.
28)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옮김, 책세상, 2000년, 404쪽.
29) 염세적 부정이란 현존재에 대한 깊은 불만에서 오는 것을 말한다. 니체, 『즐거운 지식』, 206쪽.

30) 이서규, 앞의 논문, 52쪽.
31) 니체, 『반시대적 고찰』, 369쪽.
32) 위의 책.
33) 위의 책, 383쪽.

34) 정동호, 앞의 논문, 55쪽.



정동호는 위와 같은 물음의 문장으로 확신은 피하는 것처럼 보이려 하고 있으나 그는 니체를 허무주의 속에서 허무를 응시하며 철학을 한 사람으로 읽은 것이 분명하다.35) 물론 니체의 광인에게는 아직 허무주의를 극복한 자의 여유가 없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집착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개인에게 허무적 정황이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일인지 알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신을 죽였다는 것을 선포한 광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제 지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일까? 밤과 밤이 연이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낮에 등불을 켜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것이다! …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속죄의 제의와 성스러운 제전을 고안해낼 것인가?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없었다.”36)


허무에의 인지는 슬픈 드라마를 한편 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건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진리여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다. 그 진리는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지구처럼 방향축을 잃어버리는 혼돈이고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허무 뒤에 새로운 가치 창조가 올 것이라고 쉽게 기다릴 수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것은 뒤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광인의 매력은 화두를 목숨처럼 챙
기고 있는 선승처럼 그 막막하고 위험한 상황을 오롯하게 보고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광인은 실존적이다. 나는 그 광인이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 나오는 밧줄 타는 사람으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37)


편견과 아집의 태양이었던 신을 살해한 존재는 삶에는 목적이 없다는 것을, 삶은 목적 없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 그 과정은 화려하게 빛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과정은 차라리 몰락 위에 있는 과정이고, 그러므로 위험한 과정이다. 오죽 하면 심연 위에 있는 밧줄일까. 과정의 인간은 그 밧줄을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고,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35) 위의 논문.

36) 니체, 『즐거운 지식』, 200-201쪽.
37)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1쪽.



영원회귀가 우주의 운행법칙이라면 우주 속에서 불변의 실체는 없다. 개체로 존재하며 본대로, 들은 대로, 규정해가는 대로 살며 사랑하는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의 통찰은 무서운 것이고 위험한 것이다. 불변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은 인간의 몰락 이전에 ‘나’의 몰락을 예견하며 그 몰락이 어쩔 수 없다는 점에서 개체는 언제나 위험하다. 무주의는 무엇보다도 ‘나’의 몰락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속에 있다.

정한 의미의 허무주의는 허무 속에서 체념하지도, 좌절하지도, 무기력해지지도 않는다. 그는 허무 속에서 자유롭다. 일을 하지만 일에 매달리지 않고, 사랑하지만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다. 끔찍이도 건강을 챙기는 일 없이 건강하든 병들었던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안다.

그에 대립해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교양으로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고, 혼돈을 싫어하며, 소일거리로서의 일에 매달리고, 조촐한 쾌락을 즐기며, 건강을 끔찍이도 챙기면서 행복에 집착하는 인간이 아닌가.38)

니체가 병은 자기를 서서히 해방시켰다고, 그것은 그에게 모든 격렬하고 위험한 분주함을 면해주었다고 하는 말을 곱씹어볼 만하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39)


위험과 몰락이 인간의 조건임을 아는 존재가 광인이고, 그 광인이야말로 자유로운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한다.


38) 니체, 위의 책, 24-26쪽.
39) 니체, 위의 책, 21쪽.



5. 마무리 하면서-안수정등(岸樹井藤)의 상황과 허무주의적 자유


니체가 궁극에 추구한 것은 허무주의도 아니고, 반허무주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추구한 것은 자유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며,40) 스스로에 대해 권리를 지니는 것이다.41) 니체는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악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더 낫다고 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자연의 수치라는 것이다.42)

“자유를 획득했다는 징표는 무엇인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43)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통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허무의 상황은 인간이 자유인이 되기 위해 마주하게 되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그 상황은 극복할 수 있다고, 극복해야 한다고 섣부르게 설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 상황은 빈손으로 나서 빈손으로 가는 인간이 정직하게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라 생각된다. 절체절명의 허무가 인간이 마주해야 하는 상황임을 알았던 광인의 상황은 안수정등(岸樹井藤)을 이야기하는 『불설비유경』44)의 정신과 그대로 통한다고 하겠다.


『불설비유경』은 소위 안수정등(岸樹井藤)이라고 알려진 하나의 이야기만 들어있는 경전이다. 안수정등은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선사들의 법거량에 종종 등장하는 이야기다.


나그네가 들판에서 성이 난 코끼리를 만났다.

두렵다고 생각할 정신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던 나그네는 우물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우물가에 있는 등나무 넝쿨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그런데 완전히 내려갈 수도 없는 것이 우물 속 사방엔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나그네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물속에서는 독룡이 나그네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그가 잡고 있는 넝쿨을 흰 쥐, 검은 쥐 두 마리의 쥐가 쏠고 있는 것이다.

내려갈 수도 없고, 올라갈 수도 없고, 멈춰서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 상황이야말로 차라투스트라가 본 밧줄 타는 사람의 상황이 아닌가.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있는데 갑자기 이마에서 입속으로꿀이 흘러들어간다. 나무의 벌집에서 꿀이 흐른 것이다. 나그네를 매달린 채로 꿀맛에 취해있다. 『불설비유경』은 그 상황을 인간의 상황, 중생의 상황으로 본 것이다.


근대 이후 우리 선불교의 최고의 선승이라고 하는 용성선사가 전강선사에게 물었다.

우물 속에 갇힌 나그네가 어찌하면 출신활로(出身活路)할 수 있을까. 전강선사는 이렇게 답했단다.

“달다!”45)

전강의 “달다!”는 살 궁리를 하면할수록 까마득한 절망만 찾아드는 허무의 상황에서 동요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인의 태도와 통한다고 하겠다.

독룡 같은 삶이 굶주린 창자를 벌리고 ‘나’를 기다릴지라도, 달려드는 코끼리 같은 몰락이 그 큰 힘으로 ‘나’를 치려할지라도, 쏘의 뿔처럼 당당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한다.


40)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250쪽.
41) 니체, 위의 책, 170쪽.
42) 니체, 위의 책, 170쪽.
43) 니체, 위의 책, 251쪽.
44) 당나라 때 의정 스님이 번역한 『불설비유경』은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로만 된 경전이다.

45) 田岡大宗師法語, 『言下大悟』, 용화선원, 1999, 20-22쪽.



참고문헌


니체, 『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년.
______,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0년.
______, 『즐거운 학문』, 안성찬, 홍사현옮김, 책세상, 2005년,
______,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옮김, 책세상, 2000년.
이서규,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 그리고 위버멘쉬?, 『니체연구』 제8집, 2005년 가을.
이진우, ?21세기와 허무주의의 도전?, 『니체이해의 새로운 지평』 성진기외 지음, 철학과 현실사, 2000.
정동호, ?니체 허무주의의 전개?, 『니체연구』 제11집, 2007년 봄.
田岡大宗師法語, 『言下大悟』, 용화선원, 1999, 20-22쪽.
질 들뢰즈,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옮김, 철학과 현실사, 2007.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이항재역, 문학동네, 2011.
하이데거, 『니체와 니힐리즘』, 박찬국 역, 지성의 샘, 2000년.



【 Abstract 】

Nietzsche’s Consideration of the Madman Beyond the Resistant Nihilism

 

Lee, Juhyang

(The University of Suwon)


Nietzsche’s Nihilism was the logic and attitude of the fall of absolute values, which were showing powerful strength before modern society. If today, where the absolute values are ruined, is Nietzsche’s Nihilism meaningless?

Lee Jin Woo says that Nietzsche’s Nihilism is a thorough introspection about history. But even though the modern situation became substance where the existing value system is crumbling, I believe Nietzsche’s Nihilism is providing an important view which can not be locked on the paradigm of modern philosophy. Because, even though Nietzsche’s Nihilism was starting at the thorough introspection of history, it is a serious introspection about ultimately going against life.

Nietzsche was paying attention to the value of brevity. I think Nietzsche’s Nihilistic view came from a discernment which means nothing is eternal and unchangeable truth does not ultimately exist.

Nietzsche was influenced by Turgenev, and it is told that he was influenced by Russian Nihilism. So, first in this thesis, we will examine in what ways Bazarov of Turgenev, by whom Nietzsche was influenced, and the madman of Nietzsche are how different and how similar. After that we will review philosophical Nihilism in which Nietzsche is writing negatively ,Turgenev’s resistant Nihilism, and what Nihilism is in finality while reviewing the Nihilism of Korean scholars. And I agree with the stance of Jung Dong Ho, who wrote actively Nietzsche’s Nihilism into the concept of universe Nihilism and saw futility as an ontological situation with which humans are faced.

I think what Nietzsche sought through madman was freedom, rather than Nihilism, and the situation of futility is the rite of passage humans have to face in order to become free men.



[Key Word] Nihilism, philosophical nihilism, Resistant Nihilism, Madman


■ 투고일: 2014.02.15. 심사일: 2014.03.09. 게재확정일: 201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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