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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국토의 면적은 3만 518km2이고 인구는 약 1000만 명이다. 벨기에는 서유럽의 황금의 삼각 지대(Golden Triangle), 혹은 유럽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북으로는 네덜란드, 서로는 북해, 남으로는 프랑스, 룩셈부르크, 동으로는 독일과 접해 있다. 서안 해양성 기후로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하지만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잦아 습도가 높은 편이다. 인구 밀도는 326명으로 조밀하고, 인구의 약 43%가 74세 이상일 정도로 노령화가 심각하기도 하다. 약 580만 명의 인구가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며, 약 320만 명이 프랑스어를, 약 100만 명의 브뤼셀 시민은 두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소수의 독일어 사용 인구도 있다. II. 역사(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관계)* 네덜란드와 벨기에 플란더스는 언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정치적·문화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네덜란드라는 단어는 낮은 나라(Nederlanden:Low countries)라는 의미와 함께 원래 두 지역을 함께 부르던 명칭이었다. 도시 중심의 주 개념으로 발달해 온 이 지역은 1831년 벨기에가 독립해 나오기까지 역사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1815~1830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연합 네덜란드 왕국으로 정치적 연대를 이루었고 그 이전의 카를 5세(Karel V)의 통치 기간에도 통합 왕국에 함께 속해 있기도 하였다. 이 두 나라의 문화적·경제적 발상지는 현재 벨기에의 브뤼헤(Brugge)였으나 안트워프(Antwerpen)에서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역사의 흐름과 함께 옮겨 가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가장 도시가 발달했고 길드를 중심으로 상업이 번창했던 이 지역은 비록 현재 강대국에 속하지는 못하나 최강의 무역 대국이었던 과거를 바탕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III. 정치 1. 개관 벨기에는 입헌 군주국으로 1831년 국가의 창립과 함께 헌법이 제정되었다. 국가의 수반은 왕이며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Leopold I van Saksen-Coburg-Gotha)의 왕위 계승 순서에 따른다. 1951년 왕위에 오른 보두앵 1세가 1993년 죽자, 왕관을 물려받은 그의 동생 알버트 2세(Albert II)가 현재 국왕이다. 벨기에의 국경일은 1831년 레오폴드 1세가 헌법에 선서하여 왕위에 오른 날인 7월 21일이다. 국기는 왼쪽부터 검정색, 노란색, 빨간색의 순이다. 네덜란드어로는 벨기에(Belgie), 프랑스어로는 벨지크(Belgique), 영어식 표기는 벨지움(Belgium)이다. 벨기에는 언어에 의해 크게 네덜란드어권과 프랑스어권으로 나뉘어 있다. 국가의 성립 전부터 뿌리깊게 나뉘어 있었던 두 언어권을 모두 포괄해야 했으므로 중앙 정부는 양측의 압력과 요구를 다 들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오랫동안 다른 언어를 써 왔던 사람들이 한 국가를 이루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1898년 프랑스어와 더불어 네덜란드어가 국가의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고, 1930년 왕립 겐트 대학교가 완전 네덜란드어화 되었다. 북부 플란더스와 남부 왈로니아는 자치 행정을 위해 계속 투쟁한 결과 1970, 1980, 1988~1989년에 각각 개정된 법에 의해 단일 체제가 연방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벨기에는 3개의 언어 공동체(Community:네덜란드어권, 프랑스어권, 소수의 독일어권), 3개의 지역(Region:플란더스네덜란드어권, 왈로니아프랑스어권, 브뤼셀 수도권두 언어권 공유)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 공동체가 사람 중심의 추상적 개념인 데 비해, 지역은 행정적 개념으로 좀더 확실한 구분을 짓는다. 각 지역에는 법에서 인정한 수상과 이에 따르는 행정부가 있고 예산까지도 엄격하게 나뉜다. 즉 벨기에는 국가(Nation), 지역(Region), 언어 공동체(Community), 주(Province), 도시 개념의 다섯 단계로 그 통치 기구를 나눌 수 있다. 2. 의회 입법권은 의회와 왕이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의회는 양원제이다. 하원 212석 가운데 124석이 네덜란드어권, 88석이 프랑스어권이며 상원 184석 가운데 105석이 네덜란드어권, 78석 프랑스어권, 1석은 중립이다. 하원 의원은 25세 이상의 피선거권이 있는 자로서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4년 임기이다. 상원의 184명 가운데 106명은 직접 선거로, 51명은 주 상원에서, 26명은 지난 회 의회에서 유임된다. 나머지 1명은 법이 정한 왕위 계승 1순위의 왕자이다. 내각은 수상과 장관들로 구성되며 수상은 국무 회의의 의장, 왕이 참석하는 장관 회의의 위원장을 겸직한다. 수상과 외무 장관을 제외한 다른 장관들은 각 언어권에서 동등한 비율로 선출되어야 한다. 중앙 정부는 국제적으로 단일 체제이어야만 할 경우의 대외 정책과 화폐, 사회 보장 제도, 농업, 법 제도만 관여하고 나머지 지역 경제, 환경, 주택, 상수도, 에너지, 고용, 공공 사업, 운송 등은 자치이다. 3. 정당 1846년 자유당(Liberale Partij)의 성립으로 벨기에에 정당 개념이 생겨났고, 오반(Hubert J. W. Orban), 로지에(Charles Rogier), 얀슨(Paul-Emile Janson)과 같은 유명한 자유주의 정치가들을 배출하였다. 자유당은 1961년 자유 진보당(PVV:Partij voor Vrijheid en Vooruitgang)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1년에는 플란더스 계열과 프랑스어권 계열이 각기 분리되었고, 프랑스어권 계열은 1979년 자유 개혁당(PRL:Parti Reformateur Liberal)으로 독립하였다. 두 번째의 움직임은 1870년 카톨릭당이 생겨나면서 시작되었고, 1945년 기독 민주당(CVP:Christelijke Volkspartij)으로, 다시 1968년에는 언어권에 따라 CVP와 PSC(Parti Social Chretien)로 분리되었다. 1885년 창당된 벨기에 노동자당(Belgische Werkliedenpartij)은 벨기에 사회당(Belgische Socialistische Partij)으로 이어졌다. 1978년에는 사회주의 계열로서 독립된 플란더스 사회당과 왈로니아 사회당이 생겨났다. 이 외에도 민족 연합(Volksunie), 환경 문제를 다루는 Agalev, Ecolo, 신설된 극우 민족주의 노선의 플란더스 블록(Vlaamse Blok)이 있다. 4. 지방 자치 플란더스 벨기에에서 가장 크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는 플란더스에는 현재 약 6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총면적은 1만 3512km2이다. 중세의 플란더스는 서유럽 도시 문화의 중심지였다. 아프레스, 겐트, 브뤼헤와 같은 도시는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반 아이크, 한스 멤링크, 피터 브뤼겔과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잘 그려져 있다. 플란더스는 세계 정치와 문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술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플랑드르 화파는 플란더스의 프랑스어식 표기로 그 역사를 자랑하며 안트워프는 유럽 문화의 수도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안트워프는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여 루벤스, 반 다이크, 야콥 죠르댕 등의 화가들이 이 곳에서 활동하였다. 크리스토퍼 플랑탱과 같은 인쇄 업자는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주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근검 절약 정신이 투철한 플란더스 사람들은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플란더스가 이처럼 번창하는 이유는 북해에 인접해 있고 항구가 발달하여 뛰어난 수송 능력에 바탕을 둔 까닭이다. 최근 항공 수송량도 급증 하고 있고, 고속 도로의 가로등 시설을 말하는 한 세계 제일이라는 육로 수송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유망 투자 지원 등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으며 노사는 대화를 통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경제 환경은 매우 양호하다. 플란더스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지역 경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나라 전체의 수출 가운데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구조 재조정 및 첨단 기술에 주력하고 중소 기업 진흥을 도모하고 있다. 경제의 미래 지향적 의지는 플란더스 테크놀로지 인터내셔널에서 엿볼 수 있다. 2년마다 겐트에서 열리는 교역전인 이 행사는 1983년 설립 이래 국왕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외국 투자가들에게 플란더스의 과학, 산업 및 비즈니스의 잠재력을 단시간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정부는 과학 연구 활성화에 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다. 중앙 정부는 최근 플란더스 지방 정부도 국제 조약에 가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권한을 최대로 이용하여 벨기에와 유럽,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할 계획이다. 왈로니아 철과 석탄의 매장량이 풍부한 왈로니아는 중세기 이래 산업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유럽 대륙에서 산업 혁명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 당시 왈로니아 경제의 추진력은 중공업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첨단 기술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재조정하고 있다. 혁신적인 2500여 개의 중소 기업들이 신설되어 정부와 함께 이 같은 도전에 참여하고 있다. 나뮈르(Namur)는 자체 정부 청사 및 왈로니아 의회가 있는 도시이며 농업 대학과 연계하여 첨단 농업 기술 발전에 힘쓰고 있고, 리에쥬(Liege)는 우주, 컴퓨터 프로그램, 전기 통신 및 신소재 관련 산업의 발전에, 샤를르루아(Charleroi)는 항공, 석유 화학 산업의 중심지이다. 몽(Mons)은 신소재 세라믹 산업에 주력하고, 아르덴느(Ardennes) 지방은 농업 등 1차 산업의 근간이 되고 있다. 삼림은 총 60만 8000헥타르로 왈로니아 전체 면적의 30%를 차지한다. 첨단 컴퓨터 시스템으로 관리되는 삼림은 유럽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여 총생산도 1000억 벨기에 프랑(약 2조 7000억 원)을 웃돌고 있다. 이 지역은 EU(유럽 연합) 면적의 7%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20%, GDP(국내 총생산)로는 약 25%를 차지하고 있어 유럽 단일 시장의 관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왈로니아는 공공 시설 및 각종 지원을 제공하여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기간 시설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185개 구역이 산업 및 서비스 지역, 과학 단지, 저장 시설 등으로 나뉘어 지방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현대적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어 나가고 있다. 이 지역 인구는 유럽 인구 100명 중 1명 꼴이지만 세계 무역의 1%를 차지하고 있고, 인구 3명당 1명이 수출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왈로니아의 고요한 전원 풍경, 소박한 모습의 첨탑, 뿌리깊은 민속 행사 등은 화려하지는 않으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멋이 배어 있다. 브뤼셀 브뤼셀은 유럽의 수도이자 벨기에의 수도, 플란더스, 왈로니아의 수도이다. 이 곳의 모든 게시물 및 행정 관청의 서류, 심지어는 영화 포스터까지도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두 개씩 되어 있다. 아이스크림 행상도 3개 국어는 거뜬히 하는 도시가 바로 브뤼셀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반경 400km 이내에 수천만 명이 밀집되어 세계 최대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데, 쾰른,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등이 여기에 속하며 거리는 모두 두 시간 이내이다.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해저 터널 통과 철도가 하나는 파리로, 또 하나는 브뤼셀로 이어진다. EU,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등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것에 힘입어 이 곳의 경제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정부 및 민간 차원의 국제 기구 1000여 개가 밀집되어 있어 국제 회합의 중심지 및 금융 시장으로서 각각 세계 4위와 7위를 차지하고 있다. 제2의 국제 회의 도시라는 명성에 맞게 브뤼셀 시내 250여 개 호텔에서는 각각 한꺼번에 1만 명씩 수용할 수 있는 국제 회의장 시설을 완비하고 있으며 특히 금융 방면은 유럽 5위이기도 한데 외국인 투자 은행이 60여 개에 달하고 있다. 유럽의 심장 브뤼셀에는 120여 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EU뿐만 아니라 유럽 공동체 위원회(The Council of European Community), 경제 사회 위원회, 유럽 의회의 본부이자, 얼마 후에는 유럽 사법 재판소까지 브뤼셀로 옮겨 올 예정이다. 이에 관련하여 1만 5000여 명의 전문 인력이 활동하고 있다. 총 1490여 개의 국제 기구 외에도 250여 개의 외국 기업의 유럽 기지이기도 하다. 상업 및 서비스 분야는 큰 자랑거리이며 컨설팅, 정밀 기계 공학, 전자, 화학, 제약, 컴퓨터, 식품 가공, 통신, 음향, 영상 산업 등에서 수출이 두드러지고 있다. 5. 외교 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EEC (유럽 경제 공동체)의 전신인 베네룩스 관세 동맹을 체결하고 1952년 EEC 창립 멤버로서 주춧돌의 역할을 하였으며, 지금도 EU 실현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벨기에의 열성은 영국에 의해 비난의 화살을 맞기도 했는데 1994년 8월 차기 EU집행 위원장 선거 당시 드한느(Dehaene) 현 벨기에 수상이 단일 후보로 11개국의 지지를 받았으나 영국이 그의 EU 체제 구상에 반대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상테르 현 룩셈부르크 수상이 선출되었다. NATO, 세계 노동기구, EU 통화 기구의 사무 총장직을 모두 벨기에인이 맡고 있어 유럽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6. 우리 나라와의 관계 1892년 우리 나라와 최초의 접촉을 가진 벨기에는 파리의 주재 공사를 통해 왕래하였고, 1900년 초대 총영사가 우리 나라에 부임하게 된다. 이후 경제 협력을 위주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오던 양국 관계는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인해 1918~1945년까지 단절되었다. 1948년 대한 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첫번째로 우리 나라를 승인한 나라이기도 한 벨기에는 UN(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국제 사회에서 직접적으로 우리 나라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전통적인 우방 국가로서 우호 협력 관계를 계속하고 있다. 사당역 사거리에서 서울대 방면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1903년께 세워진 벨기에 총영사관 건물이 사적 제254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어 양국의 외교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IV. 경제 1. 역사적 배경 영국에 이어 산업 혁명이 시작된 이 지역은 풍부한 석탄을 바탕으로 공업을 일으켰고, 19세기 철강 산업에 이어 기초 화학 공업, 유리와 크리스탈, 아연, 납, 제련, 전차 및 기차 바퀴 제조 등이 발달하였다. 1835년 유럽 최초로 철도가 건설된 이래 증기 기관의 혁신적 개선으로 영국보다 앞서 기관차의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되어 19세기 중반에 가서는 세계 철도 산업의 리더가 되었고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의 열차 대부분을 공급하였다. 동세기 말에 가서는 러시아의 오데사, 상트페테르부르크, 중국의 톈진, 상하이에 보급하였고, 1900년 파리의 초창기 지하철은 모두 벨기에산이었으며 이후 바르셀로나, 나폴리, 플로렌스, 부다페스트에도 수출하였다. 3741km에 이르는 철도망은 전 유럽 대륙을 거미줄같이 연결하고 있다. 플란더스는 영국보다 훨씬 앞서 직조 기술이 발달하여 방직, 기성복 산업이 유명하였다. 특히 벨기에산 카펫은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수입품 가운데 일부는 질이 낮은 제품이 있어 그 명성에 흠을 내고 있다. 전통적인 벨기에산 카펫은 프랑스 왕실에서 고집할 정도로 최고급품이었다고 한다. 동·서 플란더스 주에 밀집되어 있는 카펫 업체들은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낮은 임금 수준을 가진 나라와의 경쟁 때문에 위축되고 있으나 기타 직물의 직조 기계는 아직도 세계 제일이다. 축산업, 농업은 2.2%, 2차 산업은 29.8%, 서비스업이 67.3%를 차지하며 3차 산업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2. 최근의 산업 경향 벨기에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훌륭한 항구 시설이다. 안트워프와 브뤼헤제이브뤼헤(Brugge-Zeebrugge) 항은 빠른 성장을 보이며 준설 기술 홍보에도 힘을 쏟고 있다. 외화 획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창고 시설인데, 유휴지를 활용하는 것에 그쳤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유럽 제2의 항구 안트워프를 물류, 유통 시설에서 만큼은 세계 제1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유럽에서 장사를 하는 기업치고 안트워프에 물류 센터를 안 갖고 있는 데가 없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리 나라처럼 부존 자원이 거의 없고 주변 강대국 틈에 끼여 끊임없는 침략을 당해야 했던 유럽의 소국 벨기에가 이처럼 잘 살게 된 것은 바로 유럽 최고의 항만 시설을 바탕으로 한 물류 기지로의 특화 작전이 성공한 때문이었다. 벨기에는 16세기 국제 우편 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우편, 전신, 전화의 발명 후 우선적으로 도입하여 정보 통신 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한편, 고속 도로에서도 일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독일의 아우토반이 무제한 속도로 유명하다면, 벨기에는 그 시설로 유명하다. 우리 나라의 30%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국토에 2만 4000km나 되는 도로망, 이 중 1613km는 고속 도로로서 전 유럽의 주요 도시와 연결된다. 고속 도로뿐 아니라 일반 도로에도 밤새 가로등이 켜져 있어 야간에 라이트를 켜지 않아도 될 정도이며 어느 나라의 차량도 통행료를 내지 않는다. 야간에 인공 위성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을 보면 유난히 눈동자 모양으로 반짝이는 곳이 벨기에라고 한다. 그래서 벨기에는 `지구의 눈'이라고도 불린다. 브뤼셀의 자벤템(Zaventem) 국제 공항에는 국영 항공사 사베나(Sabena) 이외에도 60여 개의 외국 항공선이 드나들며, 1995년 아시아나 항공이 여객 직행편을, 대한 항공은 화물기 운항을 개시하였다. 연간 1000만 명의 여행객이 왕래하고 화물 처리 능력은 60만 톤에 이른다. 벨기에는 휴일을 제외한 근무일 기준으로 일일 평균 120억 벨기에프랑에 상당하는 재화와 용역을 수출하고 있으며 산업 근로자 세 명 중 두 명이 수출 상품 생산에 종사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 때문에, 근로자의 수준과 자질이 높아 외국 기업들이 활동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인프라 구조의 발달, 고기술 노동력의 풍부 등 일반적 투자 여건 이외에도 우리 나라를 비롯한 외국 기업의 진출에 유리한 조건은 벨기에 당국의 투자 지원 정책이다. 일찍부터 외국인 투자를 장려해 온 벨기에는 무역 회사에게 3년 동안 면세 혜택을 주는 등의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1만 4400여 개의 업체가 벨기에로 진출했으며, 대기업 3515개 가운데서 약 30%가 외국 기업이다. 부가 가치 생산 가운데서 43.8%가 외국 기업이 창출한 것이어서 그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3. 주요 산업 분야와 기업들 벨기에의 유명 기업을 살펴보자. 발 생 람베르(Val Saint Lambert)의 크리스탈 제품은 세계 제1의 수준을 자랑하며 다이아몬드 가공 및 연마 기계 역시 유명하다. 세계 시장의 다이아몬드 90%는 이 곳에서 가공되는데 연마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 바로 벨기에인 베르켐(Berchem)이었다. UCB, 비듬 치료제 `니조랄'로 유명한 한국 얀센(Janssen Pharmaceutica), 프로파르마(Profarma) 등의 제약 회사들로 해서 벨기에는 세계 최대의 의약품 생산국이 되었다. 필름 및 인쇄, 복사 기술을 자랑하는 아그파(Agfa-Gevaert)는 독일에 그룹 본부를 둔 벨기에 회사이며, 화학 공업의 결정체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살뤽(Saluc)의 아라미스 당구공은 세계 당구공 시장의 80%를 점유하여 `벨기에 당구공'의 명성을 날리고 있다. 아섹(Acec Transport)은 벨기에라는 이름을 내걸지는 못하지만 프랑스 TGV 사업에 참여하여 우리 나라 경부 고속 철도 건설에 첨단 기술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며, 1876년 벨이 전화를 발명하고 나서 6년 후인 1882년 설립된 알카텔 벨 텔레폰(Alcatel Bell Telephone)은 1888년 이미 장거리 전화를 개통하였고, 미국의 AT & T를 제치고 세계 1위로 부상한 유수의 전기 통신 기업이다. 이 외에도 사냥, 사격용 브라우닝(Brouwning)의 총기류, 가정용 린넨 제품, 레이스, 자동차 부품, 우육, 돈육 및 가공품, 만화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출을 하며, 최근에는 생물 공학, 마이크로 전자 공학, 로봇 공학, 의료 기기, 대체 에너지 등의 분야가 세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1인당 GNP(국민 총생산)는 2만 달러에 이르며 국토 및 인구는 작지만, 룩셈부르크 대공국과 연합하여(BLEU:Belgium-Luxembourg Economic Union) 세계 수출 시장에서 3% 이상을 점유함으로써 세계 9위의 수출 대국의 자리에 올랐고, 1인당 수출액은 1990년을 기준으로 미화 9298달러로 세계 1위를 차지하였다. 우리 나라의 대 벨기에 수출입 상황을 살펴보면 1995년 한 해 수입은 7억 2400만 달러, 수입은 5억 6600만 달러로 각각 43.1%, 37.5%의 신장을 기록했다. 전자 부품이 주요 수출품이고, 벨기에로부터는 화학 제품의 수입이 압도적이다. V. 문화와 생활상 1. 국민성과 의식 구조 플란더스는 게르만족, 왈로니아는 라틴족으로 각각 민족이 틀리기 때문에 언어를 가지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출신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도시의 전통적인 가치에 상당한 집착을 보인다. 특히 가족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벽돌을 뱃속에 넣고 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짓거나 소유물을 만드는 것을 긍지로 삼고 있다. 그들은 작고 소박한 규모일지라도 자신과 가족의 생활 환경을 최상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카톨릭 교회는 일상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정신적 배경이 되고 있다. 플란더스 지방에서는 중앙 정부에 대한 약간의 불신 풍조와 더불어 지역주의, 민족적 이기주의, 냉소주의, 준법 정신의 결여 등이 팽배해 왔다. 이들은 겉에서 보기에는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손발을 맞추어 단합된 모습을 보인다. 남부 왈로니아인들과 비교해서는 정확하고 합리적·개인적 성격이 돋보인다. 천성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며 특히 요리 등의 가사일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음식과 미각에 관한 한 `프랑스 요리'보다 더 다양하고 까다롭다는 사실은 이미 유럽에서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에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까지 도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같은 게르만족이기는 하지만 라틴족 문화의 영향을 조금 더 받아온 벨기에인들은 스칸디나비아 문화권인 최북단 몇 주 네덜란드인들과 한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며 한때 청소년 보호 차원에서 나이트 클럽과 주택가를 연계하는 셔틀 버스를 운행했을 정도로 개방적인 분위기이다.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소득 주체로서 독자적으로 영업 행위를 할 수 있어 독립을 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언어권 출신과의 결혼을 꺼리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결혼하기 전에 동거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세이며, 벨기에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기업이 많은 관계로 국제 결혼을 터부시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층은 20~22세로 조혼이나, 중산층은 30세 이후에 결혼을 하는 경향이 많다. 이혼율은 대도시, 소도시, 시골에 따라 20~25%로 차이가 많다. 몇몇 아랍권 사람을 제외하고는 외국인, 특히 동양인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다. 아시아인들은 비교적 잘 살고 현지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별로 주지 않으므로 오히려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이라고 호평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 생활에 있어서 벨기에인들은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내적인 신앙 생활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종교색을 지나치게 나타내면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작은 영토 안에서 다른 문화와 언어를 항상 접해야 하는 벨기에인들의 특징은 비즈니스를 할 때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타협 정신이 탁월하고 편견 없이 개방적이며 겸손하다. 우리 나라 업체들이 처음 거래를 하고자 하는 외국 기업에 대해 신용도, 창립 연도, 규모, 정부 기관과의 연계성 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 비해 그들은 상대 회사의 유명도 등을 문의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선입관을 가지지 않고 우선 접촉해 제품의 품질이나 기술, 거래 신용도 등을 실제로 체험한 후 거래를 계속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이들의 관습이다. 벨기에 기업 중 중소 기업이 90% 이상이며 소기업이라 해도 기술이나 상술에 있어서 첨단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업체가 상당수이기 때문에 종업원 수가 적은 중소 기업이라고 해서 거래를 꺼린다거나 중요시하지 않는 것은 큰 착오가 아닐 수 없다. 2. 언어 젊은 세대들의 대부분은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영어뿐만 아니라 기타 외국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데 1960년 이후 중등 교과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어는 기본이며 심지어 중·고생들도 평균 3.7개의 외국어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플란더스인과 네덜란드인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은 편은 못 된다. 플란더스인은 네덜란드인이 언어의 종주권을 행사하며 문화에도 우위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네덜란드 입장에서 볼 때는 플란더스의 언어가 자신들의 언어의 방언이라고 생각하며 약간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면서도 공식적으로는 네덜란드어라고 간주하고 있으며, 플란더스인은 굳이 플레미쉬(Flemish)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사실 두 언어는 남한과 북한의 언어만큼 많은 차이는 나지 않지만 몇몇 단어들은 서로 쓰지 않거나 억양과 발음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고자 양측은 언어 연합(Nederlandse Taalunie)을 만들어 대외적으로 네덜란드어로 통일하되 서로를 존중한다는 내용에 합의하였다. 3. 통화 벨기에의 화폐 단위는 벨기에프랑(Belgische Frank:BF 혹은 BEF)이다. 1BEF는 한화로 약 27원이며 동전은 50센팀, 1, 5, 20, 50프랑짜리가 있고 100, 500, 1000, 5000프랑 지폐가 있다. 중앙 은행은 벨기에 국립 은행(Nationale Bank van Belgie)이며, 주요 은행들로는 최대 규모의 제네랄 은행(Generale Bank), 크레디트 은행(Kredietbank),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 있는 브뤼셀 람버트 은행(BBL:Bank Brussel Lambert)이 있다. 4. 교육 3~5세까지의 어린이 가운데 95%가 유치원 교육을 받으며 생후 18개월 이상이면 누구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초등 교육은 6년 기한이며 이는 의무 교육 기간이다. 중등 교육은 6년 동안 이루어진다. 1년 동안은 폭넓은 기초 지식을 배우고 2년째부터 직업 교육을 받는 BOS, 계속 공부를 하는 ASO, 기술 계통의 TSO, 예술 계통의 KSO로 나뉜다. 4년째부터는 마지막 직업 선택과 진로를 다듬는 과정이 이어진다. 6년 과정 후 대학 진학을 하는 학생들은 1년 동안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중등 교육 졸업을 인정하는 증명서가 있으면 대학교 입학이 인정된다. 대학 과정은 2년의 교양 교육 과정과 2년의 전공 과정으로 되어 있고, 전공 기간의 대부분은 졸업 논문을 준비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첨단 공학부와 의학, 약학부는 7년까지 다니기도 한다. 1425년 설립된 카톨릭 루뱅 대학교(KUL)는 지도로 유명한 과학자 메르카토르(1512~1594)를 배출한 대표적 대학교이며 언어 문제로 1970년 프랑스어권이 분리되어 나오기도 했다. 역대 수상, 유명한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을 배출한 이 학교는 엄격한 유급 제도 때문에 입학 동기생이 함께 졸업을 하는 확률이 1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왕립 겐트 대학교(RUG:Rijksuniversiteit te Gent)가 1817년에 설립되었는데 1930년까지 프랑스어권의 영향에 있다가 이후 네덜란드어화되었다. 이 대학 내의 마이크로 전자 연구소(IMEC)는 반도체 개발의 선두 주자이자 우리 나라의 많은 석학들이 파견되기도 한다. 1834년에는 프랑스어권 브뤼셀 자유 대학(ULB)이, 1969년에는 네덜란드어권 브뤼셀 자유 대학(VUB)이 설립되었다. 16세기 이후 벨기에는 인문 과학, 지리, 수학, 제약 등의 분야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려 왔다. 높은 교육 수준과 쾌적한 환경으로 외국의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철두 철미한 연구와 개발은 전통이며 특히 우주 탐험에 있어서 수많은 과학자들이 유럽 우주국(ESA) 프로그램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에어버스(Airbus), 항공기의 성공적 제작과 우주 차량 및 장비를 설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벨기에는 또한 외국 연구진과 공동으로 칠레의 유럽 남극 관측소(ESO), 제네바의 유럽 핵 연구 센터(CERN), 하이델베르크의 유럽 분자 생물학 기구(EMBO) 등의 범유럽 대형 과학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5. 언론 매체 주요 일간지로 『국민 Het Volk』, 『스탄다르트 De Standaard』, 『랏스터 뉴스 Het Laatste Nieuws』 등이 있고, 『피난시엘에코노미서 테이트 De Financieel-Economische Tijd』와 『크낙 Knack』 역시 유력지이다. 중앙 방송사로는 네덜란드어권 BRT와 프랑스어권 RTBF가 있고, BRT는 제1방송, 제2방송으로 나뉜다. BRT의 독점에 대하여 1989년 2월 플란더스 텔레비전(VTM)이 설립되었는데 좀더 오락성 있는 프로의 제작에 중점을 두고 있다. 벨기에는 케이블 텔레비전의 천국이며 방송 기자재, 영상 관련 시설은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 6. 스포츠 벨기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로서 동네 어디를 가도 푸른 잔디 위에서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저변 인구가 많은 종목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축구 강국인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우리 나라 유니폼의 대표적인 빨간색과 같은 색을 입고 있어 `붉은 악마'라고도 불리는 벨기에 팀은 저돌적이고 힘 있는 경기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사이클이나 수영 등이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 7. 음식 음식 문화는 벨기에인들에게 문화 그 자체이며 수많은 레스토랑은 벨기에를 대표하는 명예 외교관들이다. 벨기에 와플, 찐 홍합과 해초, 부추를 곁들인 감자 튀김 등이 대중적인 음식이고 독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맥주 역시 자랑거리이다. 중세 각 수도원마다 독특한 양조 기법을 전수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데 그 종류는 1000여 가지에 이른다. 초콜릿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사탕, 케이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코팅 초콜릿과 상자나 캔에 담긴 선물용 초콜릿이 그 것이다. 화려한 샵의 내부와 비싼 가격으로 유명한 고디바(Godiva:1929), 1857년 설립된 노이하우스(Neuhaus), 대중적인 레오니다스(Leonidas), 바다 조개 모양의 길리안(Guylian)으로 대표되는 선물용 초콜릿 `프랄린(Pralines)'은 중심에 조각을 하거나 손으로 모양을 만든 뒤 미세한 코팅 초콜릿으로 덮은 것으로 그 맛과 모양이 세계 제일인데 예전에 독일 사람들이 하도 프랄린을 많이 사가서 벨기에독일간 열차를 `프랄린 익스프레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8. 만화 벨기에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는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화책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스머프도 벨기에에서 탄생한 것이며 죠르쥬 레미(에르제:Herge)의 땡땡(Tin Tin) 시리즈는 진보적 소재와 전문성에서 그 뛰어남을 인정받는다. 작가 에르제는 1907년 브뤼셀 태생으로 어린시절부터 『보이스카웃』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신문 삽화가로 활동했는데 명확한 선과 탁월한 기법, 우아함으로 인정을 받았다. 1929년 땡땡과 애완견 밀루가 탄생되었다. 인류가 달 착륙의 꿈을 실현하기 16년 전인 1953년 에르제는 『땡땡 달에 가다』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달 여행이라는 테마는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NASA관계자들이 놀란 만큼의 엄청난 준비와 전문성, 정확성(원자 에너지 정거장, 사이클로트론, 베바트론, 제어, 내부 환경 적응, 항해 도구, 우주복 등……)은 에르제를 다른 작가들과 구분짓게 한다. 벨기에인들의 땡땡에 대한 긍지는 놀라워서 중앙 정부가 발간하는 대외 홍보용 신년 근무 일지에 월별로 땡땡이 등장할 정도이며 드골 장군은 “나의 경쟁자는 땡땡뿐이다”라는 농담섞인 말을 남겼고, 앤디워홀은 “에르제는 디즈니만큼이나 내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고 극찬했다. 9. 인물 대표적인 문호로는 히도 허젤러(Guido Gezelle),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랑새’의 마테를링크, 역시 노벨 문학상 후보에 단골로 등장하는 위고 클라우스(Hugo Claus) 등이 있으며, 앞에서 말한 플란더스 화파를 비롯한 위대한 화가들 외에도 현대 화가들로 제임스 엔조(James Ensor), 폴 델보(Paul Delvaux),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가 잘 알려져 있다. 빅토르 오르타는 20세기 초 유럽 건축 양식에 새바람을 불어넣어 준 아르누보(Art Nouveau)의 창시자이다. 음악에서도 색소폰을 발명한 아돌프 삭스, 비우탕, 이자에 등 유명인이 많으며 퀸 엘리자베스 콩쿨은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연장으로 강동석 등을 배출하였다. 브뤼셀 왕립 음악원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유학생들이 기량을 쌓고 있다. 15세기 말 세계 무역의 중심지는 브뤼헤에서 안트워프로 옮겨져 100년 동안 번성하다가 1585년 종교 전쟁으로 함락됨에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졌으며 많은 지식인들과 상인들도 거주지를 옮겼다. 중심은 300년 후 다시 뉴욕으로 이동했다. 동인도 회사의 자본금 60%가 벨기에 출신들로부터 확보된 것이고 4년 후 서인도 회사가 설립되었을 때 아프리카와 북미 해안에서 스페인과 맞서 대항했던 세력들은 맨하탄에 정착하여 군림하였다. 이 가운데 플란더스 하설트(Hasselt) 출신의 프랑소아 롬바우트(Francois Rombouts)는 1679년에 뉴욕 시장이 되었고, 1688년 초대 민선 시장에 역시 플란더스 출신 라노이(Lanoy)가 선출되었다. 32대 대통령 루즈벨트도 1621년 미국으로 건너간 왈로니아 출신 느와이예(Noye)의 자손이다. 뉴욕의 자유 무역 규제, 허용 기준 등에 관한 무역법의 기초도 벨기에 출신들에 의해 마련되어 뉴욕의 옛이름은 실질적으로 뉴 암스테르담이 아니라 뉴 플란더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 관광지 전체 9개의 주 가운데서 플란더스는 동플란더스(Oost-Vlaanderen:겐트), 서플란더스(West-Vlaanderen:브뤼헤), 안트워프(Antwerpen:안트워프), 림부르크(Limburg:하설트)와 브뤼셀이 속해 있는 브라반트(Brabant) 주와 일부 루뱅(Leuven/Louvain), 빌포르더(Vilvoorde)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브뤼셀의 그랑플라스(Grand Place)는 빅토르 위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은 곳이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고딕 양식의 옛 시청 건물, 왕궁, 길드 하우스, 맥주 양조 조합 건물 등은 화려한 금박과 풍성한 장식을 자랑하는 플란더스 바로크 스타일로 건축되어 각기 다르지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부근의 오줌싸개 동상(Manneken Pis)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생각보다 너무 작은 오줌싸개 동상에 실망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계 각국의 옷을 입은 그 모습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루벤스와 그의 화파의 컬렉션으로 유명한 고대 미술 박물관, 19~20세기 화파의 작품이 가득한 현대 미술관, `아르누보'라는 단어의 발상지임을 자랑하는 빅토르 호르타(Victor Horta) 박물관 등 예술면에서도 볼거리가 풍부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극장 복합 건물인 키네폴리스(Kinepolice)에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6~9월 사이 브뤼셀에서는 갖가지 축제가 열리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퀸 엘리자베스 국제 음악 콩쿨도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EU 본부 등의 국제 기구 건물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북쪽으로 시 경계 지역에 위치해 있는 아토미움(Atomium)과 국제 박람회장에는 언제나 볼 만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안트워프에는 루벤스 하우스, 시청 앞 광장의 브라보 동상, 14세기 고딕 양식의 성모 마리아 성당과 옛날 귀족들이 살던 저택, 루벤스, 반 다이크 등의 진귀한 예술품을 소장한 박물관들이 온화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관광객들을 붐비게 하고 있다. 영국인에 의해 소설로 알려지기 시작한 『플란더스의 개』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 바로 이 도시이다. 브뤼헤는 `열려 있는 중세 박물관', `북해의 베니스'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다. 운하를 따라 보트를 타고 주변의 건물을 구경하는 것 자체로 이미 이 도시에 매료되며 슬픈 전설을 지닌 사랑의 호수와 1245년 세워진 수도원, 전통의 레이스 가게들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밖에 겐트(Gent)와 리에쥬(Liege)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이며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격전지 워털루(Waterloo)도 매우 아름다운데 브뤼셀에서 20km정도 떨어져 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전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워털루가 벨기에에 있다는 것은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벨기에 곳곳의 훌륭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우리 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독일이 따라올 수 없는 특이한 맥주와 프랑스 요리를 능가하는 산해 진미를 함께 맛볼 수 있는 벨기에의 진가를 알아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