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이번 답사는 양주시로 봄마중 가시자구요(*.*)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해인
1. 일시 : 2016년 3월 13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출발
3. 답사지
1) 회암사지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3 등)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1821년(순조 21)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무학대사 부도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 법명은 자초(自超), 속성은 박(朴)씨이며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陝川郡: 삼기(三岐)) 삼가면에서 출생하였다. 1344년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인도승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고려말 퇴락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이성계를 만나 그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 예견하였다.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으며 조선 건국 초기 나라가 안정하고 정착하는데 헌신하였다. 유교의 바탕에서 건국된 조선에서 독특하게 불교인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로 평가된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그해 태종 이방원의 청을 받아 함주(함흥)에 머물고 있는 태상왕 이성계를 설득하여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403년에는 회암사를 삭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78세에 입적하였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3) 민무질 선생 묘 (경기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산52-1) 본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제(霽)의 둘째아들,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지고, 1403년(태종 3) 예문관총제(藝文館摠制)로서 송판(宋板)의 시전(詩傳)을 자본(字本)으로 하여 동활자를 주조하였다.
의정부지사(議政府知事) ·좌군총제(左軍摠制) ·우군총제(右軍摠制) 등을 지냈다. 형 민무구와 함께 어린세자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고 했다는 죄목을 받아 탄핵되었다. 대구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이배되었으며 자진하라는 명을 받고 형과 함께 사사되었다. 6년 뒤 동생인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사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4) 남을진 선생 묘 (경기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산50-2)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를 지낸 천로(天路)의 아들이다. 1368년(공민왕 17)에 현량과에 급제한 뒤 공양왕 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과 사귀었다. 고려 말 정치가 혼란하자 사천(沙川)에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친히 찾아와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듣지 않았다. 태조가 그를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자, 머리를 풀고 경기도 적성(積城) 감악산(紺嶽山)의 석굴에 들어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에 거처하던 석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 불렀다. 그의 충절을 기려서 1712년(숙종 38) 정절사(旌節祠)가 건립되었고, 1784년(정조 8) 사액(賜額)되었다. 또한 그와 함께 원천석(元天錫), 서견(徐甄), 이양소(李陽昭) 등도 세상을 피하여 살며 새 왕조에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고려사처사(高麗四處士)라 하였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5) 남양부부인 홍씨 묘 (경기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784-1) 남양부부인 홍씨[1410~1456]는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韓氏), 즉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이조판서 홍여방(洪汝方)의 딸이다. 태종 때 외교관으로 활약한 양절 한확(韓確)에게 시집가서 3남 6녀를 낳았는데, 그중 6녀가 덕종의 비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 즉 인수대비이다.
남양부부인 홍씨 신도비(南陽府夫人洪氏神道碑)는 남양부부인 홍씨가 세상을 떠난 후 1497년(연산군 3) 6월 인수대비에 의해 세워졌다. 명나라에서 비석에 쓰일 돌을 옮겨 온 일화로 유명하다. 남양부부인 홍씨 신도비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여성에게 내려진 신도비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시간이 되면...
6) 권극관 선생 묘 (경기 양주시 산북동 산91-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제중(制仲). 증조할아버지는 공조 참의를 지낸 권령(權齡), 할아버지는 상주 목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권박(權博)이다. 아버지는 종묘서 영을 지냈고 좌참찬에 추증된 권덕유(權德裕)이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로 우찬성 창녕군(昌寧君) 조계상(曺繼商)[1466~1543]의 딸이다. 형은 이조판서를 지낸 권극례(權克禮), 예조판서를 지낸 권극지(權克智)이다. 부인은 함안 윤씨(咸安尹氏)로 경양군(景陽君) 윤수환(尹壽環)의 외손녀이자 윤천석(尹天錫)의 딸이다. 딸은 윤숭(尹嵩)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어 후손을 남기지 못하였다. 아들 권창국(權昌國)도 일찍 죽어 권극례의 셋째 아들 좌랑 권득기(權得己)를 후사로 삼았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0 - 3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0 - 4234 - 70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