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사 / 정석종(전남대학교 총장) 3
∙축 사 / 강신석(5․18기념재단 이사장) 4
∙축 사 / 나병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5
□ 기억에서 대항기억으로, 혹은 역사적 진실의 회복 / From Memory to Counter-memory, or Recorvery of the Historical Truth
김영범(Kim Young-Bum) 1
□ Aesthetic and Political Avant-Gardes / 미학과 정치적 아방가르드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21
□ From the Ruins / 폐허로부터
리자 요네야마 (Lisa Yoneyama) 35
□ 4․3의례와 역사적 기억 / 4․3 Rite and Historical Memory
강창일 (Kang Chang-Il) 현혜경 (Hyun Hye-Kyung) 49
□ 미술이 만난 역사 / Art in History: The History of Jeju 4.3 Artistic Movements and Present
박경훈 (Park Gyoung-Hun) 63
□ 5월 미술운동의 회고와 반성 / May Uprising and Fine Arts' Movement
이태호 (Lee Tae-Ho) 69
□ Creation of Ancient Culture in Modern Japan / 근대 일본에서 고대문화의 창조
다카키 히로시(高木博志) 91
□ 1968-A Poster Analysis / 1968 포스터 분석
마르크스 무어 (Markus Mohr) 103
□ Memory, Missing People and Hope for Peace in Sri Lanka / 기억, 실종자 그리고 평화에 대한 희망: 스리랑카의 경우
산지와 리야나지(Sanjeewa Liyange) 109
□ 기억과 재현의 영상 이미지 1 / The Visual Images of Memory and Representation: 5․18 Documentary Films
정근식 (Jung Keun-Sik) 131
□ 기억과 재현의 영상 이미지 2 / The Visual Images of Memory and Representation: 5․18 Movies
김종헌 (Kim Jong-Heon) 153
□ 제주 4․3의 대항기억과 영상 / Jeju 4․3 Resistant Memories and Documentary Films
권귀숙 (Gwon Gwi-Soog) 163
□ 5․18과 음악운동 / May 18th and the Musical Movements
노동은 (Noh Dong-Eun) 179
□ 제주 4․3과 음악운동 / Jeju 4․3 and Musical Movements
이은나 (Lee Eun-Na) 191
□ 5․18 항쟁의 형상화에 사용된 음악표현양식 / The Musical Expression of May 18th through Classical Music
정유하 (Jeong Yu-Ha) 203
□ 5월 연극운동의 변화양상 / Transitional Aspect of the May Plays Movements
강현아 (Kang Hyun-Ah) 227
□ 4․3문학의 전개 양상과 그 의미 / Unfolding of 4․3 Literature and Its Meaning
김동윤 (Kim Dong-Yun) 247
□ 5월 항쟁의 문학적 재현 양상 / The Aspect of May Uprising's Literary Representation
정명중 (Jeong Myoung-Jung) 259
기억에서 대항기억으로, 혹은 역사적 진실의 회복
김영범 (Kim Young-Bum)
기억에서 대항기억으로, 혹은 역사적 진실의 회복
기억투쟁으로서의 4․3 문화운동 서설
김 영 범 (Kim Young-Bum)**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Daegu University, Sociology)
1. 반세기 동안 봉인․유폐된 4․3의 진실
1948년 이래 제주도는 줄곧 ‘4․3도’였다(현길언 외, ꡔ4․3도 유채꽃ꡕ). 그것은 자랑스런 이름이 아니라, 불온한 섬, 반역의 땅이라는 낙인의 기호로서였다. 국민국가의 법과 이데올로기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제주사람들(‘제주도 출신’)에게 그러한 낙인이 가져오는 정치적․심리적 효과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운명’이니 ‘천형’이니 하는 말을 곧잘 떠올리게 되는 멍에나 족쇄에 단단히 매인 것과 같았다. 치유되지 못하는 가슴 속 상처와 드러내어 풀지 못하는 통한이 그것에 같이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주도는 사철 아름다운 풍광 속에 깊은 슬픔과 숨죽인 흐느낌을 감추고 있는 설움의 땅으로도 비쳤다.
그렇다면 4․3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1948년 4월 3일 미명에 제주도 전역에서 좌익 무장대 조직이 경찰관서와 우익인사들을 습격한 사건, 혹은 결국 패퇴하고 만 무장봉기, 그것만이었던가? 적어도 수십만 제주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4․3은 훨씬 그 이상의 것이었다. 가족․친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떼죽음과 행방불명, 수난의 기억으로 떠오르는 갖은 고통과 오욕의 체험, 사건 종결 후에도 늘상 따라다니는 정치적 핍박과 소외, 그로부터 입게 된 크나큰 심리적 상처들...... 4․3은 흔히 그렇게 인식되며 기억되고 있었다. 봉기의 중요한 심리적 동력이 되었던 바 ‘해방 공간’에서 대다수의 제주도 토착민들이 품었던 열망과 뒤이어 갖게 된 좌절감․분노, 그리고 그 배경요인으로서의 정치․사회 상황은 거의 잊혀졌거나 ‘혼란’․‘준동’으로 간단히 매도되고 무시되었다.
국가는 4․3 봉기를 냉전적 반공이념의 잣대로 재단하여 ‘공산폭동’으로 규정짓고, 자기 또는 그 대리인들의 주민학살 행위를 합리화하며 면죄부를 주었다. 그와 반대로 제주도 주민들은 ‘빨갱이’․‘폭도’였거나 그 자식이고 형제일 터이므로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듯, 촘촘한 연좌제의 그물로 계속해서 옥죄었다. 그래서 더욱 위축되어 간 제주사람들은 섬주민이어서 맛보게 되는 고립감까지 더해져, 답답하고 막막하며 억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에건 호소할 길도 없었다.
4․3이 분명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다면, 또한 잊고 싶으나 잊어버리지 못하는 역사적 비극이었다면, 그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고 상처는 치유되어야 했다. 나아가 올바른 성격 규정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 반대였다. 봉기의 원인과 대량학살의 진상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통로조차도 오래도록 차단되고 있었다. 진실 탐사와 발굴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4․3의 진실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갇힌 것처럼 철저히 봉인되고 차폐된 채 거의 질식사할 지경에 놓여 있었다. 토벌대가 굴 입구에 불을 놓아버린 때문에 질식사한 4.3희생자 11명의 유골이 발견된 다랑쉬굴 입구를 행정관청에서 콘크리트로 밀봉하고 주위에 겹겹이 철조망을 쳐놓았던 일과 이 상황은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모른다.
자기 보안에 급급한 반공주의 국가와 그 체제를 극력 엄호․부지해 온 극우냉전세력은 4․3의 진상을 일방적으로 규정지어놓고 그 인과관계 해석권도 마냥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 발발 후 40년이 경과한 시점인 1980년대 후반에 그러한 철벽봉쇄 체제는 도전받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대사 재조명․재인식의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공산폭동론에의 대항담론으로 민중항쟁론이 대두하였고, 대학살의 실상과 그 책임소재의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민주화운동의 진전과 더불어 점점 힘을 얻었다. 그렇다고 4․3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쉽게 바뀐 것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격렬한 논쟁과 상호공방의 정치투쟁이 4․3의 재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졌고, 4․3의 진상을 밝혀내면서 그 역사적 성격과 의미도 새롭게 규정할 수 있게 하려는 사회운동과, 4․3의 진실을 찾고 알리며 그로써 4․3의 기억도 변환시킬 것을 꾀하는 문화운동이 활성화해 갔다. 바꿔 말하면, 4․3을 둘러싼 전면적 기억투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한 투쟁의 중요한 성과이면서 중간결산쯤 되는 것이 4․3특별법 1999년 12월에 국회에서 의결되어 이듬해 1월 공포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말함.
의 제정이고 그에 따른 진상조사 작업 및 보고서 작성이었다 하겠다. 그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으며, 현재진행형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견지에서 1980년대 이후로 전개되어 온 4․3 문화운동의 양상과 특징을 개관하고 그 의미를 고구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4․3 문화운동은 4․3 기억투쟁의 일환이었다고 보기에, 그 투쟁의 지형과 경로가 어땠는지를 이모저모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반세기만에 규명된 4․3의 진상 : 조사보고서의 발간과 그 의미
2003년 3월 29일, 4․3특별법에 근거하여 국가기구로 특설되어 있던 4․3위원회(「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에서는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기획단이 제출한 보고서 초안을 약간의 수정 조건부로 채택 의결하였고, 4월 29일에 ꡔ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ꡕ(이하, ꡔ진상보고서ꡕ)가 출간되었다. 4․3의 진상규명 요구를 국가가 수용하여 조사에 착수한지 3년만의 성과인 것이었다.
4․3특별법은 명칭 그대로,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입법취지로 하여 제정되었다. 희생자 위령 사업(위령묘역 조성, 위령탑 건립, 4․3사료관 건립, 위령공원 조성, 기타 위령관련 사업)을 정부가 지원할 것도 미리 규정해놓고 있었다. 희생자―그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 것인지는 별개로 하고―의 명예회복과 위령을 중심적 과제로 삼은 점과 “인권신장․민주발전․국민화합에의 기여를 목적으로” 삼은 점에서 이 법은 국가가 4․3문제를 기본적으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인식하고 뒤늦게나마 그 참절의 과거사를 청산하겠다는 전향적 자세를 취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 점은 특별법에서 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한 데서도 강력히 암시되었다. 그리고 ꡔ진상보고서ꡕ의 결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인 진술이 부가된 정의로 바뀌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577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그 구체적인 표현들 속에서 후자의 정의는 특히 1947년 3․1절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그 대상은 다소 불분명하게 처리되어 있지만―이 무장봉기 발발의 중요 원인으로 작용했고, 통일정부 수립이 무장봉기의 핵심적 명분이었음을 함께 암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무장대의 봉기는 ‘법질서의 미확립’에 기인한 단순 소요나 ‘건국 전야의 혼란기’를 틈타 기도된 폭동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갖추어진 저항행동(이었음도 시사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ꡔ진상보고서ꡕ의 결론 부분(574-582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명시적으로 지적되었다.
① 4.3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 사건이었다.
② 그 단초가 된 무장봉기는 복합적 요인에 의해 발발하였다.
③ 무장봉기의 주체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의 무장대 조직이었으나, 남로당 중앙당이 직접 지시했거나 개입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④ 4․3사건 전기간에 걸쳐 무장대는 500명선을 넘지 않았고, 봉기 후 1년 여만인 1949년 6월에 사실상 궤멸되었다.
⑤ 인명피해는 토벌대가 1천명 미만(군인 180명 내외, 경찰 140명, 우익단체원 640명)이었음에 반해, 주민 희생은 2만 5천~3만 명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당시의 도민 인구의 1/10에 달하는 대규모의 희생이었다.
⑥ 신고된 희생자 14,028명 중 10세 이하 어린이가 814명(5.8%), 61세 이상 노인이 860명(6.1%), 여성 2,985명(21.3%)인데, 희생자의 86%(10,955명)가 군․경․우익단체 토벌대에 의해 사망했음이 확인되었다.
⑦ 이는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게 한 초토화작전, 과도한 진압작전의 결과였다. 또한 100명 이상의 주민이 동시에 총살된 마을이 45개소에 이를 만큼 군에 의한 집단적 인명피해 사건이 빈발했고,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군법회의’와 예비검속 및 재소자 즉결처분에 의한 희생자도 3천명 가량이나 되었다.
⑧ 집단 인명피해의 1차적 책임은 현지 지휘관에게 있다. 그러나 최종 책임은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을 요청”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지워진다.
⑨ 4․3사건의 발발과 강경진압작전 전개의 책임은 미국(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에도 있다.
⑩ 사건 종료 후에도 주민들은 연좌제의 피해와 레드콤플렉스 등의 정신적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이어서 ꡔ진상보고서ꡕ는 4․3의 역사적 의미를 총결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짓고, 국가의 책무를 제시하였다.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노인과 어린이를 포함한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것은 중대한 인권유린이자 역사적 과오로서, 그에 의해 제주도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가 되었다. 정부는 이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강조는 인용자).
요컨대 ꡔ진상보고서ꡕ는 주로 인권적 견지에서 4․3을 되돌아봄에 의해 작성된 결과로서, 당시의 국가가 냉전체제 형성의 맥락 속에서 비무장 민간인 학살이라는 반인권적 범죄를 제주도에서 저질렀음이 확인되었고, 이제는 국가가 그 역사적 과오를 스스로 기억하고 희생자를 구제하는 등의 과거청산의 책무 앞에 서 있음이 강조되었다. 실로 사건 발생 55년, 종결 49년만에 국가의 공적 권위로써 공신력이 담보될 수 있을 진상조사 보고가 비로소 나온 것이다. 이는 분명 4․3 진실회복운동이 한 차원 더 도약하며 큰 진전을 이룰 중요한 계기가 된다. 물론 이것은 4․3특별법 제정 당시의 정권의 성격 및 지향점이 과거 정권들의 그것과 크게 달라졌음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4․3특별법에서 취택된 과거청산 모델은 학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차원의 복원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실현으로 국한되었다. 국가배상 및 책임자 처벌과 같은 배상적․응징적 정의(restitutive justice)까지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추구하지 못했다 함이 정확하다. 그 점에서 4․3문제 해결의 모델은 광주문제 해결의 그것과는 또다른 한계를 분명히 안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4․3 ꡔ진상보고서ꡕ도 채택 의결 직전에 군부로 대표되는 극우세력의 반발과 저항으로 말미암아 중요 대목들의 일부 어구를 간접적인 지칭 또는 ‘순화’된 표현으로 바꾸고 어떤 것은 삭제해야 했다. ꡔ제민일보ꡕ 2003년 3월 30일자 보도기사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3월 21일 4․3중앙위원회의 6차 회의에서 진상보고서의 일부 내용을 놓고 위원들간 논란이 재연되자 소위원회를 통해 막판 의견조율을 시도한 게 3차례. 이 과정에서 30여 건에 대해 수정 또는 내용 삽입․삭제 등이 이뤄졌다. 무엇 때문에 논란이 일었고, 어떻게 수정됐는지를 살펴본다. 위원들간 가장 첨예하게 대립됐던 부분은 ‘초토화작전’과 ‘집단살상’이란 용어 사용의 문제. 이와 함께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여부, 증언자들의 일부 증언을 근거로 이를 역사적 사실로 규정한 문제 등도 논란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정내용이 맨 먼저 눈에 띤 곳은 88쪽 ‘3․1절 시위사건’ 관련. 허가된 집회와 달리 시위는 불허됐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라는 주문을 받아들여, “기념행사가 끝난 후 군정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가받지 않은 가두시위가 시작됐다”고 손질됐다. 154쪽 무장봉기와 관련해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이란 부분을 삽입, 무장봉기의 주체를 분명히 했다. 일부 위원들은 또 진상보고서 곳곳에 등장하는 ‘초토화작전’이란 용어를 ‘대토벌작전’ 또는 ‘강경진압작전’으로, ‘집단살상’은 ‘집단 인명희생’으로 수정토록 했다. 239쪽 “초토화작전의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에게 있다고 판단된다”라는 내용은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판단된다”고 수정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 해제 사실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토벌대의 총살극을 조장했다”는 내용도 “…계엄령 해제 사실은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수정, 강경진압 책임자 문제가 다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군법회의 절차(492쪽)와 관련해서는 “예심조사, 심리 및 판정․판결로 이어지는 군법회의의 기본절차를 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는 부분을 “예심과 심리를 했다는 증거가 없어 군법회의 재판절차가 정상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다시 정리했다. 이 밖에 575쪽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를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으로 수정, ‘미국’이란 직접적인 거론은 피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진상규명운동 과정에서 나왔던 정당한 요구들을 모두 수렴, 반영시키지는 못하는 한계도 드러냈다.
그럼에도 4․3특별법과 ꡔ진상보고서ꡕ는 5․18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과거사 인식과 해석이 시민사회의 압력과 정치지형의 변화에 따른 특별한 계기가 주어지면 크게, 때로는 정반대로도 변할 수 있다는 중요한 실례가 된다. 종래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이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지만 인권론적 접근으로 크게 선회하였고, 그에 따라 국가주의적․권력중심적인 역사인식과 해석이 민주주의적․피해자중심적인 것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음을 ꡔ진상보고서ꡕ는 분명히 보여주었다.
물론, ꡔ진상보고서ꡕ의 발간으로 4․3의 진실에 관한 논쟁과 공방전이 종결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수정 여지를 남기면서 확정적인 최종채택에 6개월의 유예기간을 두어 그 귀추를 지켜보게 만든 것도 4․3문제의 해결에는 아직도 상당한 긴장이 상존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4․3의 진상에 관한 공적 담론의 핵심축을 이루면서 공적 기억을 지배해 온 공산폭동론을 넘어설 중요 계기는 주어졌다. 종래 국가가 일방적으로 규정짓고 요지부동으로 고집해 오던 해석인 ‘공산폭동’에서, 공권력에 의한 무고한 주민 다수의 희생 즉 ‘국가폭력’과 ‘대량학살’ 사건으로 그 의미층의 무게중심이 옮겨졌음에서이다.
4․3 ꡔ진상보고서ꡕ가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의해 4․3은 비로소 한 시대의 비극적 사건이었던 것으로 재인식되면서 진정한 청산의 문턱에 서게 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진상보고서 작성 기획단이 정부의 공식 사과, 추모 기념일 지정, 평화-인권교육에의 활용, 평화공원 조성 등 기념사업을 정부에 건의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라 할 것이다.
그러면 학살의 과거사 청산으로 4․3이라는 역사기호의 의미층은 모두 소진되는가? 그것으로 모든 일은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는 데에 문제의 복잡성이 있고, 남은 과제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제대로 답하려면 4․3 진상규명운동의 역사를, 또한 그 운동이 본격화하기 이전의 대중적 4․3기억의 상태를 떼어내어 다시 돌아봐야 한다.
3. 1980년대까지의 4․3의 공적 기억과 사회적 기억들
현재까지의 연구성과와 논의들을 종합해 볼 때, 4․3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의미 층위를 거느리게 된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8.15 해방의 환희에 접맥되어 생기한 독립자치의 정치공동체 건설의 열망이 미군정의 실시로 좌절되고 그 시도가 탄압받기까지 함에 반발한 주민저항운동의 연장선에서 4․3은 발발한 것인데, 이는 4․3의 민중항쟁적 측면으로 집약된다. 둘째,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예고하는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함을 명분으로 삼고 통일정부 수립의 기치를 내걸어 제주도내 좌익세력 일부가 주동하여 다소 모험적이게 일으킨 무장봉기로 4․3사건은 시작된 것인데, 이는 4․3을 반미․반제 자주화의 민족통일운동으로 해석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셋째, 이러한 일련의 주민동향을 단속하고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군정 당국의 묵인․고무 아래 한국 군․경이 국가폭력의 대행자가 되어 자행한 비무장 민간인 학살의 참극과 생활근거지 초토화의 후유증이 도민들 스스로 4․3을 ‘사태’로도 제주도 사람들은 흔히 4․3을 군사적․정치적 측면과 생활사적 측면 두 가지로 분리시켜 보곤했다. 그래서 전자 즉 무장대의 봉기와 군경의 진압을 염두에 둘 때는 흔히 ‘4․3사건’으로, 후자 즉 가족․친족원․마을사람들이 포함된 엄청난 인명살상(학살)을 염두에 둘 때는 ‘4․3사태’로 지칭하곤하였다. 그렇다고 양자가 완전히 분리시켜지는 것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오히려 동시적인 것이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표상하게끔 하는 가장 큰 의미층을 이루었다.
이 정치적․군사적 대결에서 어렵지 않게 승자가 된 국가와 우익세력은 민중저항에 대한 탄압과 반인권적 폭력을 합리화․정당화하고, 분단체제하 반공국가의 탄생을 미화하고 보위해야 했다. 어떤 이유로든 토벌대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모조리 ‘빨갱이’로 치부되어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수많은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과 피해를 외면하거나 아예 책임을 면하려는 의도에서 좌익세력에게 전적으로 그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건 당시부터 줄곧 4․3을 무책임․무사려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짓고, 남로당 지방당내 강경파 주도의 무장봉기를 중앙당․북한 심지어는 소련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근거 없이 해석해버리고 그 점을 극력 부각시키려 했다. 육군본부, ꡔ공비토벌사ꡕ(1954); 대검찰청 수사국, ꡔ좌익사건실록ꡕ 제1권(1965);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ꡔ한국전쟁사ꡕ 제1권(1967); 내무부 치안국, ꡔ한국경찰사ꡕ Ⅰ․Ⅱ(1972); 김점곤, ꡔ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ꡕ(1973); 정석균, 「제주도폭동과 토벌작전」, ꡔ군사ꡕ 16(1988); 고문승, ꡔ박헌영과 4․3사건ꡕ(1989); 제주도 경찰국, ꡔ제주경찰사ꡕ(1990); 이현희, 「소련의 지령하에 대한민국 건국 저지하기 위한 유혈폭동」, ꡔ월간조선ꡕ 2월호(2000); 정석균, 「제주 4․3사건의 진상」, ꡔ군사ꡕ 41(2000).
그리하여 ‘대구 10월폭동’․‘여순반란사건’과 함께 ‘4․3폭동’은 해방공간에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획책한 남로당과 지방좌익의 준동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위치지워졌다.
그러나 4․3이 그런 유의 공산폭동이라는 것은 민중항쟁을 좌절시키고 승자가 된 측이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단죄해 붙인 이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 규정은 국가의 유일하고도 확고한 공식규정으로 자리잡아 1980년대까지 거의 40년 동안 지배담론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로써 국가가 4․3의 기억을 전일적으로 주조하여 공적 기억(official memory)으로 삼고 독점관리하면서 제주도민만 아니라 국민 일반에 공공기억(public memory)으로 강요하는 체제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공적 기억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관찬서; 교과서)를 통해 주조되고 대중매체(주로 반공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전파되었으며, 의심과 도전은 법적 규제와 물리력 행사의 대상이 되고 말리라는 두려움에 의해 강제되고 주입되었다.
그러한 정치적 상황과 삶의 조건 속에서 제주사람들의 의식과 심리는 극심한 패배주의, 공포심(레드컴플렉스), 자책감, 체념적 숙명론, 허무주의 사고에 점령당했다(김종민, 1999: 369-379). 4․3사건의 직접 체험자였거나 희생자의 유족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가 미쳐버린 시절,” “눈물마저 죄가 되던 험악한 세월, 말 한 마디가 피를 부르고 다시 피가 피를 부르던 험악한 세월” 김수열, 「한 아름 들꽃으로 살아」(제46주기 제주4․3 희생자 위령제 추도시), 1994.
을 생각하기조차 싫어했고, 기억 속에서 애써 지우려 했다. 그렇다고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년 돌아오는 부모․형제․친지의 제삿날에, 육체적 상흔의 고통 속에서, 시시때때로 입게 되는 연좌제의 피해 체험 속에서 그 기억은 되살아났다. 그래도 어쨌든 되살리고 싶지 않고 가능한 한 떨쳐버리고픈 기억이었다. 그래서 4․3의 기억은 억압되고 파편화되어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끄집어내면 그것은 공적 기억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매우 분열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그런 모습은 1980년대까지 거의 변함 없이 지속되었다.
4․3에 관해 비로소 제주도 주민 특히 피해대중들의 말문이 조금씩 트이고 있던 때인 1980년대 말에 도민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한 설문조사의 결과는 1989년 1월 15일부터 3월 15일까지 사단법인 제주도문제연구소(야당 국회의원 강보성이 이사장이었음)에서 45세이상(1945년 이전 출생)의 도민 1,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제주도문제연구소, ꡔ제주도민은 4․3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4․3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설문조사 보고서ꡕ, 1989; 한겨레신문, 1989. 4 .2).
그런 점을 두루 잘 보여준다. 설문과 그에 대한 응답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4․3사건을 알고 있는가?”-----“잘 알고 있다” 73%, “들어서 알고 있다” 26%, “모른다” 1%(아마도 이들은 사건 후 입도인이었을 것이다). 이는 누구나 다 알고는 있으면서도 암암리에 강요된, 또는 피해의식에 의한 자기단속적․자기검열적 침묵이 지속되어 왔음을 여실히 입증해 주는 결과치이다.
“4․3사건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가?”-----“직접 체험했다” 71%,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 알았다” 27%, “책이나 신문을 통해 알았다” 1%.
“4․3사건을 직접 체험했는가?”---“직접 체험” 71%, “체험하지 못했다” 24%.
“당시 4․3사건은 왜 일어났다고 보는가?” 이 질문에서 ‘4․3사건’은 무장대의 봉기만을 뜻하는 좁은 의미로 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남로당 조직이 공산화를 목적으로 일으킨 폭동” 23%, “좌우익 사상 싸움에서 비롯” 17%, “남로당 선동에 의한 반발” 11%, “경찰․서청 등의 횡포와 탄압에 의한 반발” 8%, “자주정신 및 5.10선거반대” 5%, “모르겠다” 27%, 무응답 9%.
“4․3사건 당시 양민학살 장면을 직접 본 일이 있는가?”-----“직접 봤다” 53%, “들어서 알고 있다” 43%, “모르겠다” 3%.
“4․3사건 당시 양민학살은 누가 더 했다고 생각하는가?”-----“경찰․군인․‘폭도’들이 했다” 41%, “경찰이나 군인들이 했다” 32%, “‘폭도’들이 했다” 25%.
“4․3사건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직접 피해를 보고 있다” 45%, “직접적인 피해는 없지만 친지나 친구들의 피해를 보아왔다” 18%, “피해가 없다” 36%.
“4․3사건의 피해자는 누구라고 생각되는가?”-----제주도민 74%, 희생자 및 부상자와 그들 가족 14%, 국민 모두 5%, 군인 및 경찰 1%, 모르겠다 3%, 무응답 3%.
설문조사 실시기관에서는 이 결과를 가지고서 4․3의 진상규명이 도민의 합일된 뜻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은 당시 진상규명운동의 열기가 타오르기 시작한 상황임도 감안된 정치적 결론이지,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아니었다.
이 무렵에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증언과 회고담 등의 자료를 가지고서 4․3 체험자들의 사건 당시의 지위-신분별 사회적 기억의 형상과 그 특징점을 탐색해 본 결과(권귀숙, 2001)에서도 의식의 분열상은 드러나보인다. 거기서는 경찰․군인․서청원․‘산사람’․좌익단체원․우익단체원․민보단원․피난생활자․피해자 등의 범주별로 구체적인 기억의 내용들은 서로 달랐지만, 학살 사태가 불가피하고도 불가항력적인 불행이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는 피해자, 남은 모두 가해자”라는 의식에 공통적으로 사로잡혀 있음이 확인되었다. 학살의 비극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으로 일어났음을 어렴풋이 감지하면서도, 그 힘의 실체를 찾으려하기보다 가까운 이웃을 포함한 서로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4․3의 기억은 거의가 부정적인 것으로 채색된 채 균열되어 있었다. 이는 국가가 주조하고 전파시킨 공적 기억에 포박된 결과였다고 볼 수 있으며, 그만큼 국가가 벌여온 ‘기억의 정치’가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4. 4․3 진실회복운동의 틀 형성과 진상규명운동의 전개: 4․3 문화운동의 배경으로서
4․3의 역사적 기억이 공공적으로 또는 대중적으로 재구성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근거가 될 역사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역사적 진실이 재구성되거나 온전히 회복되어야만 했다. 진실 찾기, 진실의 포착과 확인, 진실의 복원이 차례차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통틀어 ‘진실회복운동’이라 이름할 수 있다면, 4․3에 관해서도 그 운동은 필요했고 실제로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심축을 이루면서 우선적인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 진상규명운동이었다. 그것을 촉발․진전시킨 정치-사회사적 계기는 4월혁명(1960), 6월항쟁(1987), 문민정부의 출범(1993), 인권신장을 주요 국정지표로 내세운 ‘국민의 정부’의 출범(1998)이었다. 그렇듯 4․3 진상규명운동은 민주화운동과 발걸음을 같이하며 전개되었고, 가장 큰 추동력도 그로부터 공급받았다. 본절에서의 진상규명운동에 대한 서술의 얼개와 재료는 강창일(2001), 김종민(1999)에서 많이 취하였다.
4․3의 진상규명 요구는 1960년 4월혁명 직후에 처음 분출하여, 조직적인 주민운동으로 안착할 기미도 내보인 바 있다. 이때의 ‘진상’은 ‘학살’의 전모와 그 희생자 및 가해(책임)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 해 5월에 국회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거창․함양 등지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사건들의 진상조사를 결의하고 특위를 구성하여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하자, 제주사회에서도 4․3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를 반영하여 대학생 조직인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가 결성되어 자체 조사활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모슬포에서 대정읍민들의 진상조사촉구 궐기대회가 열렸으며, 제주신보가 피해사실 신고접수 창구를 개설하는 등의 움직임들이 이어졌다. 6월초에 국회 특위 경남조사반이 입도하여 피해신고를 접수하고 증언을 청취했으나, 예정에 없던 조사를 마지못해 실시하면서 단하루로 끝내버려 생색내기에 그치고 말았다. 도민들은 크게 실망했고, 재경제주학우회원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제주도민학살사건 진상규명 촉구’ 시위를 벌이고 대책위원회도 조직하여 조사작업을 시도하였다. 남제주 국회의원 김성숙도 1961년 봄에 「제주도 양민학살 보고서」를 내고 위령탑 건립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진상규명은 중도 좌절되었다. 그 운동의 주역이던 학생들과 언론인이 검거되고 모슬포 백조일손묘지와 위령비가 파훼되는 등, 대탄압이 가해졌다. 진상규명운동의 기세는 급격하게 꺾이었고, 십여 년만에 제 모습을 드러내보일 듯하던 4․3의 진실은 이내 날개를 접고 다시 지하로 잠복해버렸다. 그 후 20년 가까이 4․3은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금기가 되었다. 4․3 당시를 시대 배경으로 삼은 소설에서도 ‘4․3’이라는 기호는 감히 표기되지 못할 정도였다. 박정희시대의 엄혹한 통제체제 속에서 4․3의 진상은 냉동된 채 지하로 파묻혀버린 듯했다.
유신체제 말기인 1978년, 제주출신 작가 현기영이 아마도 4․3 30주년을 홀로 기념하려는 굳은 결의였던 듯 중편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하면서 오랜 금기의 벽은 깨지기 시작했다. 그 소설 속에서 폭로되고 고스란히 재현된 30년 전의 집단학살 사실 및 그 실상에 독자들은 경악과 함께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제주도민들이 치러야만 했던 희생과 고통에 대한 깊은 연민의 감정을 맛보았다. 「순이 삼촌」의 발표가 바로 4․3 진상규명운동을 촉발시키지는 못했지만, 4․3 논의의 닫혀있던 물꼬를 다시 터주는 효과를 낳았다. 그 후 10년 주기로 4․3의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운동은 중요한 추동 계기와 동력을 얻게 되면서 전진해 갔다. 결국 「순이 삼촌」은 1960년에 분출했던 4․3 진상규명운동과 1988년에 부활하는 그것 사이의 가교가 되면서 서로를 접맥시켜 이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유신체제 붕괴 직후인 1979년 가을, 「순이 삼촌」을 표제작으로 한 작품집이 출간되었으나 즉시 판금조치되었다. 그로부터 반년 뒤인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부 주도의 국가폭력이 집단학살을 재연시켰다. 두 학살 모두 신생정권이 권력기반을 구축해 가는 과정에 범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했다. 또한 후자는 유사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주한미군과 미국의 묵인․방조 아래 저질러졌다는 정황증거들이 속속 드러남으로써, 1980년대 초반부터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점거농성 등 반미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시 거대한 흐름을 이루게 될 민족자주화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1986년에 이산하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의 제1부가 원고지 200장 분량으로 발표된 것은 그런 맥락과 관련이 깊었다. 4․3 학살의 대규모성과 비인간성에 초점을 맞추었고 어찌보면 수난사적 관점에서 4․3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을 「순이 삼촌」과 달리, 「한라산」은 “외세의 분단논리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4․3을 시화한 민족해방․통일지향의 서사시” 저자 자신의 표현임. ꡔ한국일보ꡕ 1988년 3월 30일자.
였다. 그래서 무장대의 활동이 부각시켜지면서 반미운동의 현대사적 기원을 이룰 영웅적 빨치산투쟁으로 그려졌다. 「한라산」은 발표되자마자 큰 파문을 일으키며 필화사건으로 번져서, 저자와 출판사 발행인 및 편집장이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지나치게 목적의식에 경도되어 4․3의 진실 찾기와 다소 거리가 있었다고도 평가되지만, 그래도 「한라산」은 식자층 사이에서 4․3에 대한 관심과 인지도를 상당 정도 높여주는 효과를 낳았다.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군부독재 정권이 퇴진함으로써 정치적․시민적 자유화의 바람이 불고 민주화운동의 열기도 고조되어 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 4․3 진실회복운동의 점화와 발흥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위주의 통치의 유산이 신속하고도 완전히 청산되지는 않아서, 유․무형의 정치적 탄압과 반공이데올로기 공세가 음험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4․3 진실회복운동은 민족민주운동의 거대역량을 방풍림으로 삼아 상당한 정도의 이념적 자양분과 인적 자원도 공급받으며저항적사회운동의모습으로출발하였다.
운동의 주역은 제주사람 자신들이었고, 근거지는 서울과 제주도 현지 두 군데였다. 그 중심부에는 재야 사회운동가, 소설가․시인․화가 등 예술인과 문화운동가, 교수․교사․대학원생 등 학술연구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초기 운동주체 구성의 이런 특징에 의하여 진상규명운동은 문화운동과 학술운동의 성격도 짙게 띠게 되었다. 그들은 평소의 활동영역을 고수하면서도 경향간에, 또 생활근거지 내에서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고 유대를 맺으며 운동의 방향 설정과 전반적인 기획, 섭외, 선전 등의 역할을 나누어 담당하였다.
초기의 인적 역량과 물적 토대는 다소 취약한 편이었으나, 서울과 제주에 운동거점 조직을 만들어 상호 유기적인 연결을 지으며 역할을 분담하고 때로는 1인 다역도 수행함으로써 그런 약점을 극복해 갔다. 애초부터 그 거점조직으로 설립되었거나 점차로 그런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 서울의 제주사회문제협의회(이하, ‘제사협’) 정윤형․현기영․김명식․강창일 등의 주도로 1987년 겨울에 창립되었는데, 회원은 전원 제주 출신 재경인사들이었다. 처음부터 4․3의 진실회복에 매진할 것을 의도하고 있었다.
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연구원(일명 ‘아라리’; 제주출신 시인 겸 재야운동가 김명식이 1987년에 설립), 제주의 제주4․3연구소(제사협의 주도로 1989년 5월 설립)이었다. 전자는 비공개조직이었고, 후 2자는 연구기관임을 표방하면서 운동단위로도 기능하게 될 반공개조직이었다.
운동의 주역들이 역점을 두려 한 것은 다음의 네 가지였다. 첫째, 항쟁 주도자와 학살 희생자들을 추념․추도하는 것. 둘째, 학살의 진상과 배후를 철저히 규명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 셋째, 제주도민들의 의식․심리 속에 은연중에 심어져 온 자기분열적․도피주의적 요소와 성향들을 극복하고 불식하여 도민 전체가 사태의 피해자였음을 재인식하고 진실회복에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끔 하는 것. 마지막으로, 4․3의 진실회복이 제주사람들만의 열망으로 그치거나 지역문제로 치부되어버리지 않고 국민 일반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도록 하여(‘4․3문제 인식의 전국화’) 문제해결 과정의 우군을 확대하자는 것.
4․3의 진실 찾기는 우선 학문적 접근을 통하여 시도되기 시작했다. 학술 부문의 가용한 역량을 동원하여, 역사적 진실 회복의 의지로 강력히 뒷받침된 연구결과를 공개․전파함에 의해서였다. 1988년 4월, 제사협은 4․3 4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에서 「제주도 현대사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4․3에 관한 최초의 학술심포지움을 개최했다. 동시에 일본 도쿄에서도 「4․3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주최하는 강연회와 추모제가 열렸다. 4․3의 발발원인과 전개과정을 주제로 1988․89년에 발표된 양한권․박명림의 석사학위논문은 4․3연구의 효시가 되었다. 제주4․3연구소도 관련문서․신문자료의 발굴․수집․분석, 증언 채록, 학술연구의 중추부로 발돋움하면서 자료집․소식지를 간행하고 학술회의 개최, 역사기행 주관 등의 활동도 벌여갔다.
학술연구 성과의 산출과 집적, 증언집․자료집의 발간과 더불어 4․3의 성격을 재규정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1980년대 말부터 종래의 지배담론과 그 함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내용의 새로운 4․3담론이 그 단초들을 발굴하고 엮어가며 형성되었다. 그것은 명백히 공산폭동론에 대한 반격이요, 그 지배담론이 도민의식에 드리워놓은 그늘을 걷어내려는 노력이었다.
새로운 인식 방향은 두 군데로 초점이 모아져, 민중항쟁론과 국가폭력범죄론으로 압축되었다. 전자는 4․3이 제주도 민중들의 생존권 수호와 자립적 공동체 유지를 위한 저항운동으로 발발, 전개되었음을 강조하는 방향의 것이었다. 고창훈․김창후․양한권․박명림 등 연구자 대부분이 이 관점을 취하였고, 도민들이 4․3을 재인식하게끔 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연재도 그 입장에서 출발하였다. 그렇다고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1948년 4월 봉기와 군사행동에 내재해 있던 의도적 공격성이 완전히 무시되거나 부인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실책이었음이 판명되었다할지라도 그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도내 좌익세력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자구책이었고, 넓게 보면 민족해방․조국통일운동과 맥이 닿는 반외세 항쟁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4․3의 핵심이 미증유의 대학살이었음을 강조하는 입장은 제주도민 대다수의 심층기억과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고, 진상규명에 대한 공감대 확장의 정서적 기초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종래에는 제주도의 지정학적․역사적 주변성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학살의 대규모․광범위성에 아연 압도됨으로써 그 참극을 마치 운명적인 수난이었던 것처럼 여기는 패배주의적․수동적 역사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새로운 관점이 나타나서 그것을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학살행위를 비판하고 그 희생자를 애도함을 넘어서서, 학살사태의 근저에는 국가테러리즘과 냉전구조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군․경과 우익집단이 자행한 무차별적 민간인 살해, 불법적 수형인 처형, 부녀자 성폭행과 능욕, 가옥 파괴와 촌락 폐허화 등을 국가폭력의 역사적 범죄행위로 문제삼고, 그 실상과 원인이 먼저 정확히 규명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인권론적 접근에 의한 사태인식으로의 전환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무장대가 저지른 학살․방화 등의 생존권 유린 행위도 충분히 문제시될 수 있었다.
결국 4․3은 크게 보아 항쟁과 희생이라는 두 국면, 두 축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인식이 가다듬어졌다. 양자는 서로 배치되기보다 오히려 보완적이고 진실의 실체를 전면적․총체적으로 포착하게 해줄 인식구도이기도 했다.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여 내세우면 부분적인 인식에 그쳐서 진실의 반면에만 가닿게 됨이 명백해졌다. 이에 따라 4․3이라는 역사기호의 의미는 ‘항쟁’과 ‘학살,’ 두 가지로 압축되어 재정립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는 ‘4․3항쟁’, ‘4․3민중항쟁’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쓰임새가 일반화하여, 서책과 연구논문의 제목 노민영 편, ꡔ잠들지 않는 남도-제주도 4․3항쟁의 기록ꡕ(온누리, 1988);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연구원 편, ꡔ제주민중항쟁ꡕ 1-3(소나무, 1988-1989); 고창훈, 「4․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 ꡔ해방전후사의 인식ꡕ 4, 한길사, 1989); 제주4․3연구소, ꡔ제주항쟁ꡕ, 1991.
, 행사명 「민족사 속에서의 4․3항쟁」, 제42주기 4․3추모 학술세미나, 제주 가톨릭회관, 1990.
등에서도 빈번히 차용되었다.
그러나 항쟁의 배경과 의미요소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걸쳐 있었다고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었다. 민족사․지방사․민중사의 관점 중에 어느 것을 앞세우고 채택도 하느냐에 따라 논쟁의 입지는 달라질 수 있었다. 학살사태의 진정한 원인 또는 배후와 책임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지도 미해결의 숙제였다. 구체적 사실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게 되면서 ‘자주’와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이 설 자리는 조금씩 축소되어 가기도 했다. 그보다는 당시의 제주도 주민들의 생활상과 의식상태, 사회심리 등을 사실대로 복원해 밝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학술연구의 비중과 짐은 더욱 커지게 되었고, 그 점을 반영하듯이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제주도 역사, 제주민중저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또한 사건 체험자, 군․경․관 관계자, 일본으로 도피했던 남로당 도당 간부와 무장대 가담자, 희생자 유족의 회고와 증언들이 중시되어 그 발굴․채록 작업에 박차가 가해졌다. 진상규명운동이 본격화하기 이전부터 수집되기 시작한 회고담과 증언들을 정리하고 편집한 증언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오성찬의 ꡔ한라의 통곡소리ꡕ(소나무, 1988)와 제주4․3연구소의 ꡔ이제사 말햄수다ꡕ 1․2(한울, 1989)가 그것이었다. 1989년 초에 제주신문 4․3특별취재반이 구성되어 4월 3일부터 「4․3의 증언」 연재를 시작한 것도 획기적인 시도였다. 이 기획연재는 1990년 6월부터 새로 창간된 제민일보로 지면을 옮겨서 「4․3은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계속되었다. 그 제목은 진실에 대한 갈망이 얼마만큼 큰지를 상징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일이 마을 촌로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인터뷰하고 생생한 증언자료를 다수 확보해낸 특별취재반의 노력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고, 그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으로 나타났다. 취재기간 6년 동안 3천여 건의 증언이 채록되었던 것이다. 지방신문의 연재물이어서 제주도 주민들만 접할 수 있었던 「4․3은 말한다」는 1994년에 우선 두 권으로 묶이어 출판되었고, 그 후 1998년까지 세 권이 더 출간되었다. 심토합일의 애정과 진정성으로 자기 고장 역사의 진실을 찾아나선 향토언론인들의 집념과 투철한 기자정신이 역사적 진실 복원의 한 임계점을 보여준 사례였다.
증언(집) 형태로 4․3 체험들이 공개되기 시작하고 국회 5.18청문회를 통해 광주학살의 진상과 그 책임소재가 드러남을 보게 된 것도 하나의 자극제가 되어, 좀더 용기 있고 솔직한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강요된 침묵과 절대적 금기의 세월 동안 안으로만 담아두었던 묵은 기억들이 하나씩 인출되었고, 억눌러두기만 했던 발설의 욕구가 이제 비로소 배출구를 찾은 듯했다. ‘기나긴 벙어리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와 이제는 8,90대에 이른 4․3세대들이 봇물 터지듯 말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었다. 겪어서 알고있는 사실조차도 입밖에 낼 수 없어서 생겨난 가슴 속 응어리를 이제는 풀어야겠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백 년이고 아들을 보기 전엔 죽을 수 없어, 절대로 죽을 수 없어”라는 통한의 몸부림과,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말 하겠다”는 결연한 목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그것은 마치 4․3이 스스로 입을 열어 이제 모든 진상을 털어놓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4․3 진상규명운동이 조금씩 힘을 얻어가며 초기적 성과를 내기 시작하자 극우세력의 방해공작과 공안당국의 감시 및 탄압도 가중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선 출판물에 대한 법적 규제로 나타났다. ꡔ순이 삼촌ꡕ 판금과 작가 연행 및 고문(1979), 「한라산」 작가 및 출판인 구속(1987)에 이어, 아라리연구원이 기획하여 3권으로 펴낸 자료집 성격의 ꡔ제주민중항쟁ꡕ(1988-1989)을 이적표현물로 규정지어 판금조치하고 연구원 관계자들과 출판사 대표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1990년 7월). 3당 합당으로 거대여당 민자당이 만들어져 반민주세력이 재기를 도모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로서, 4․3 진실회복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앞서 1988년에는 4․3사건 희생자 유족들의 조직으로는 최초의 것으로 「제주도4․3사건민간인반공유족회」가 결성되었는데, 무장대에 의한 피살자의 유가족들만으로 조직되어 ‘반공’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음에도 당국에서는 달가와하지 않으며 그 성립을 막으려했다. 4․3이 거론되고 세간의 관심사가 될 계기는 어떤 것이든 생겨나는 것을 꺼려했던 것이다. 유족회 명칭에서 ‘반공’이 ‘희생자’로 바뀐 것은 1990년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성립하고 군부정권이 퇴진하여 공안세력의 발호가 억제되는 상황이 도래함에 4․3 진상규명운동은 도약의 호기를 맞았다. 중앙권력의 문민화와 시민사회의 재활성화는 지방권력의 정치적 태도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켜서, 1993년 3월 제4대 제주도의회가 4․3특별위원회를 설치, 구성하고 진상규명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4․3특위는 진상조사, 역사정립,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을 향후 추진해 갈 3단계 사업의 목표로 설정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피해 실태의 정확한 파악과 체계적인 정리가 급선무이었으므로, 도의회 4․3특위는 1994년에 4․3피해 신고실을 개설하고 1년 여 기간의 조사활동을 편 후 그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ꡔ4․3피해조사 1차보고서ꡕ, 1995(1997년 수정․보완판 발간; 2000년 2차 수정․보완판 발간).
그러나 문민정부에서도 중앙정치권은 4․3의 진상 규명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1993년 10월, 제주지역 총학생회협의회의 주도로 도민 1만 7천여 명이 서명한 ‘국회 4․3특위 구성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었고, 제주도의회도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국회의장에게 제출하였으며, 민간인희생자유족회는 ‘4․3 치유에 관한 탄원서’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보냈다. 중앙권력 또는 국가를 향한 제주도민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결집되어 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청원은 국회 운영위에 회부된 후 방치되어, 본회의에 상정도 못된 채 사장되어버렸다. 1996년 12월, 국회에서 ‘4․3사건 진상규명 특위 구성 결의안’이 발의되었음에도 1998년까지 운영위 계류상태로 남아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에 정치권을 압박하고 각성시킬 국민운동으로써 4․3문제의 해법이 찾아져야 했다. 그래서 제주4․3연구소는 1997년 2월의 이사회 결의로써 준비작업을 진행시키어, 4월 1일에 서울에서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공동대표 강만길, 김중배, 김찬국, 정윤형)가 결성되는 성과를 끌어냈다. 4․3문제 해결을 위한 국민적 연대의 신호탄이었다.
이듬해인 1988년은 4․3항쟁 발발 50주년이자 진상규명운동의 전국화가 본격적으로 시도된 해였다. 3월에 「제주4․3 명예회복의 해」 선포식을 거행함과 더불어 백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였다. 4․3과 유사한 구조의 5.18항쟁/학살에 크나큰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던만큼 1987년에 대선후보로서는 처음으로 4․3의 진상 규명을 공약으로 내건 바 있는 김대중이 10년 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는 사실도 매우 고무적이었다. 그가 이끄는 여당조직인 새정치국민회의는 3월말에 4․3 진상조사 특위를 당내에 설치했다.
범국민위원회는 4․3 50주년 행사를 전국화․대중화시켜 각지 시민단체와 학생조직의 지원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자신감을 얻었고, 그 성과에 기초하여 1999년 2월에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추진 범국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해년도 사업의 중점을 대정치권 압박과 실질적 대응에 두기로 하였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라는 목표 성취에의 제도적 통로가 될 4․3특별법의 제정을 위하여 대정치권 활동을 본격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제주 현지에서도 그동안 4․3 진상규명운동에 참여하여 일익을 담당해 온 시민단체․문화예술단체․학생단체들이 3월에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를 결성하여, 통일된 목소리와 행보가 나올 수 있게끔 했다. 다시 10월에는 도내외 24개 시민사회단체와 유족회 합동으로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가 결성되어, 중앙정치권 상대의 입법투쟁이 본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 연말에, 여야 양당의 합의가 도출됨으로써 4․3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로써 1960년에 첫 봉화가 올랐던 4․3 진상규명운동이 국가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처음으로 승리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40년만의 일이었으니, 실로 ‘장정’이라 이름할 만한 과정이었다.
5. 4․3 문화운동의 발생과 전개
1) 다시 4․3의 기억으로: 5․18의 경우와의 비교 고찰
4․3의 진실회복 과정은 5.18의 경우와 여러모로 비교될 수 있고 대비도 된다. 후자는 1995년의 특별법 제정을 기점으로 국가에 의한 공식적 과거청산․진실회복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2년 후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짐과 아울러 명예회복․배상․추념사업도 시작되었다. 사건 발생 후 17년, ‘오월운동’으로 명명되어 있는 진실회복운동이 시작된지도 17년 가량 후였다. 4․3의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온 것은 사건 발생 후 55년만이었고, 진상규명운동이 재점화하여 본격적 궤도에 오른 지는 15년 가량 후였다. 5월운동이 실질적 성과를 거둔 선례와, 중대한 인권침해가 빚어진 과거사의 진상 규명에 전향적 자세를 가졌던 정치세력의 집권에 상당 정도 힘입어 진상규명 소요 기간이 단축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사건 발생 시점에 견주어보면 매우 지체된 것이고 걸림돌도 적지 않다.
그것은 항쟁으로서도 학살사의 한 페이지로서도 4․3과 5.18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5.18항쟁의 기본 성격은 독재 종식과 군부집권 저지를 위한 민주주의투쟁이었다. 광주학살의 책임이 미국에도 일부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오월운동에 반미운동의 성격이 일부 부가되기는 했지만, 1980년대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는 ‘반미’ 구호나 운동을 이념적 단죄의 표적으로 삼기는 이미 어려워져 있었다. 그리하여 오월운동은 5.18항쟁 정신의 복원과 계승을 외치며 80년대 이후 민족민주운동에 끊임없이 생기와 영감을 불어넣어주면서 거침없이 민주화의 완성을 추구해 갈 수 있었다. 광주문제의 해결이 더디게 진행된 것은 이념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지배세력이 동원한 호남고립화 전략이 먹혀들어 가면서 급속도로 전국화해버린 지역주의 정서가 주요 원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에 반해 4․3항쟁은 격심한 좌우대립․남북대결의 정치지형 속에서 그것이 주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발발했고, 그만큼 민족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냉전구조의 덫에 치여 꼼짝없이 발목이 잡힌 형국이어서 쉽게 이념적 단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4․3을 거론하고 기억해내는 것 자체를 금기의 영역으로 묶어두는 것도 그러한 단죄로써 가능했다. 반독재 민주화 항쟁에 대해 정권과 지배세력이 갖다붙인 호칭들은 ‘소요’나 ‘불상사’를 의미하는 ‘사태’(‘부마사태’․‘광주사태’)로 끝났지만, 민족문제를 건드렸거나 좌익세력의 가담․개입이 확인된 항쟁은 영락없이 ‘폭동’이나 ‘반란’으로 규정되어버린 것(‘4․3폭동’․‘대구폭동’․‘여순반란’)에서도 그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하여 항쟁 진압 과정에서 군대․경찰 등 공권력에 의한 학살이 있었더라도 ‘폭동’으로 이름붙여진 사건들에 대해서는 국가 자신이 면죄부를 쉽게 내주었고, 오히려 희생자들을 당연히 응징되어야 할 죄인 즉 ‘폭도’로 몰아 일체의 진상규명 노력을 저지하고 금압하였다. 또한 시․공간적 단절의 크기도 중요한 차이를 낳았다. 육지부 대도시에서 벌어졌던 5.18 학살은 숨기거나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에 의해 바로 엊그제의 일로 생생하게 기억되는 동시대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진실은 피해자나 유족만이 아닌, 적어도 그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거나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5.18 학살의 기억은 가해자와 피해자 및 제3자 모두의 ‘공유된 기억’이었다. 그로부터 5.18 항쟁 기간에 시민군으로서 혹은 무고한 피해자로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살아남은 자들이 느끼게 된 강렬한 부채의식이 오월운동의 심리적 동력이 되어주었다. 다만 문제는, 사회민주화의 더딘 진도와 지역주의의 장벽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으나 가해자-범죄자였던 국가만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 항쟁과 학살의 진실이 그로 인해 십 수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공인받게 되었던 것이다.
4․3의 진실회복은 5.18에 비하면 훨씬 더 어려운 조건 속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넘어서고 이겨내며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4․3은 고립된 섬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벌써 40년 전의 일이 되고 있었다. 그것이 4․3의 기억과 4․3문제를 주변화시키는 한 요인이었다. 사건의 흔적과 기억은 오랜 시간의 경과로 지워지고 마모되고 뒤얽혀가고 있었다. 게다가 학살의 가해자 범주는 5.18의 경우처럼 안/밖, 우리/그들로 확연히 경계지워져 있지 않았다. 제주도 안에, 심지어 한 동네 안에, 서로를 자기 가족․친족에 대한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4․3에는 엄청난 무게의 이념적 낙인이 찍혀 있음으로 인하여 적대와 갈등이 깊어지기 쉬웠고, 사자들에 대한 부채의식보다는 자기변명과 자기보호 본능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면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 나올 가능성도 높았다.
이러한 정치적․심리적 조건들은 4․3의 진실복원 전략이나 과거청산의 지향점에 대해서도 큰 제약과 한계를 부과하였다. 5.18의 경우에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치르게 되었던 역사적 희생의 복원과 복권을 누구나 당연히 주장하고 쉽게 얘기할 수 있었던 데 반해, 4․3의 경우에는 항쟁의 역사적 경험은 물론이고 그때 치른 희생의 복원․복권을 그리 쉽게 주장하지를 못하였다. 광주학살에 대해서는 책임자 처벌과 배상을 문제해결의 당연한 원칙으로 내세울 수 있었지만, 4․3 당시의 학살에 대해서는 그러한 요구를 내놓는 데 제약이 많았다. 진상규명, 명예회복, 그리고 희생자 위령사업이 과거청산을 위한 정치적 요구의 한계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 근거 내지 명분으로는 민주화보다는 인권이 주로 원용되었다. 침해받고 유린된 인권을 늦게나마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요구로였다. 흔히 인권과 짝을 이루어 강조되는 ‘평화’는 ‘항쟁’의 기억을 무화시키고 부정하는 효과도 가질 수 있기에 미묘한 긴장이 새로 생길 수도 있었다.
4․3 진실회복운동에서 오월운동이 내보이던 단호함․격렬성․비장감 등의 특징이 별로 나타나 보이지 않고, 다소 조심스러운 모색과 지구전적 태세, 유연한 연대 형성의 노력이 더 두드러져 보이게 된 것은 아마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증언을 통해, 비밀문서의 획득과 해독에 의해, 유적․유허지의 발굴․발견을 계기로, 문학예술적 재현의 힘으로 학살의 진상과 그 참혹성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추체험되었다. 그것은 학살현장 체험과 그 직접적 트라우마(trauma)를 겪지 않았던 후세대인들이 전하며 마음속 깊이 흐느끼게 만들었다. 4․3의 기억은 그렇게 해서 재생되고 재구성될 수 있었으며, 가해자의 후손인가 피해자의 유족인가를 따지기 전에 학살의 과거를 반드시 청산해야만 한다는 심정적 공감대가 도민들 사이에 폭넓게 형성될 수 있었다.
2) 4․3 문화운동의 발생과 전개양상
4․3의 진상규명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많은 장애물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극복․돌파해 가는 가운데 진실을 확증해냄에 의하여 수십 년만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진실을 움켜쥐어 오늘에 회복시키려는 집단적 의지로써 추동되었다. 진상규명은 진실회복에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현실화한 진상규명운동과 나란히, 또는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 4․3의 문화적 재현 운동이었다. 그것은 기록과 증언으로 이미 밝혀진 사실들과 그것들에 의해 형성된 심상을 표출해내고 창조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 집단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수행, 전개되었음을 말한다. 그것 역시 진실회복에의 열망에 바탕을 두고 그 운동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는데, 간단히 ‘4․3 문화운동’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이제 그 발생과정과 전개양상을 살펴볼 차례이다.
(1) 추모․위령제
4․3에 대한 일체의 논의가 금기시되고 있던 정치적 상황에서 그 진실의 한끝이라도 드러내고 알리려는 의지는 문학과 예술을 매개로 하여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시도가 중편소설 「순이 삼촌」을 비롯한 현기영의 일련의 작품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순이 삼촌」은 문학의 이름으로, 문학의 힘을 빌려, 4․3 학살의 참혹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정면으로 폭로함으로써, 그 비극적 역사를 재인식하고 과거를 성찰해 보게끔 했다. 출간되자마자 판금된 그의 소설집은 그러나 은밀히 유통되면서 사실상의 스테디셀러가 되어, 4․3 진실찾기의 당위성을 많은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켜 주었다. 그가 근친의 대명사인 ‘아버지’와 ‘삼촌’을 소설 제목으로 썼던 것은 역사를 바꾸어보려다 덧없이 스러져간, 아니면 역사의 폭력에 짓눌려 느닷없이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해 그 자녀세대가 맛보게 되는 절절한 그리움, 깊은 상실감, 까닭 모를 연민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복합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대변하는 것일 법하였다.
그런 심리는 무엇보다도 망자들에 대한 추모․추념․애도의 의지를 가장 먼저 불러일으킨다. 소설 「순이 삼촌」이 발표된 지 몇 달 후인 1979년 4월 3일, 고향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몇몇 청년지식인․활동가․종교인이 어느 집에 모여서 비밀리에 추모의 제사를 지낸 것도 그런 심리가 반영된 행위였고, 상징적 의미가 큰 의례였다.
그 후로 4․3 문화운동의 기폭제와 동력은 추모․추념 제의/행사나 그 시도를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의 공개된 추모행사는 1988년 도쿄에서 열렸는데, 김석범․김민주가 주도하여 전년도에 결성된 「제주4․3을 생각하는 모임」이 주최한 것이었고, 그 후 연례행사로 굳어졌다. 제주도에서는 1988년 제주문화운동협의회가 40주년 추모제를 준비하였으나 당국의 저지로 성사되지 못하였고, 이듬해 제주여민회․제문협․제주청년연합 등 12개 단체가 ‘4․3민중항쟁 기념행사 공동개최’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협의한 결과, 제주시민회관에서 처음으로 추모제가 열렸다. 행사는 제주도 무속전통 속의 ‘큰굿’ 제차에 따라 진행되었고 마당굿도 곁들여졌다. 그 후로도 1993년까지 매년 4월초에 문화예술․여성․민민운동․천주교․학생 등 각 분야를 망라한 10여 개 단체들로 구성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에서 추모제를 준비하고 주최하였다. 서울에서도 1990년 42주년을 맞아 제사협과 재경제주학우회협의회 주관으로 성균관대 잔디광장에서 추모제가 개최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추모행사의 연례화를 꾀하였다.
1991년 ‘민간인희생자유족회’가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위령제를 따로 개최하였는데, 이는 ‘누구를 추모할 것인가(누구는 추모해서 안되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다툼의 파생물이었다. 유족회장은 추념사에서, “남로당 지령을 받은 붉은 광란배들이 제주도를 공산기지로 만들려고 피비린내 나는 공산폭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때 민민운동 진영과 시민단체 중심의 사월제 공준위 주최로 관덕정 광장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추모제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었고, 이에 학생과 시민들이 가두시위로 항의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해산시키고 무차별로 연행하였다. 공준위는 4․3항쟁 유적지 순례 행사 중에 4월 5일 대정읍 송악산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1992년의 위령제에서도 유족회장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속임수로 제주섬은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위한 싸움터로 화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제주도 4․3폭동사건은 해방 직후 사회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소수의 공산분자들이 순박하고 가난한 섬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제주도를 공산화하려고 획책한 사건”(정석균, 1988: 189)이라고 규정지어놓고 있던 군(국방부)의 시각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암울했던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이웃과 이웃을 위로하고 사랑과 화합의 악수를 나누자”고 제의하여, 전년도와는 다소 달라진 자세를 내보였다. 같은 날, 시민단체 중심의 공준위가 개최하는 추모제도 전년과는 달리 경찰의 저지를 받지 않고 열렸다.
1993년에는 도의회가 중재에 나서서 민간인희생자유족회와 사월제 공준위가 공동으로 위령제를 개최하고 한곳에서 봉행하는 방안이 모색되었으나 협상 결렬로 무산되었다. 이 해의 4․3추모 기간에는 전국적으로 7백 곳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는데, 4․3을 민중항쟁으로 기리고 항쟁참여자와 학살희생자를 모두 같이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의회의 거듭된 중재 노력은 1994년부터 유족회․공준위 공동 주최의 합동위령제 거행으로 결실을 맺었다. 공준위는 ‘추모제’라는 명칭을 고집하지 않았고, 유족회는 무장대 가담 혐의가 있는 사망자도 ‘희생자’ 명단에 들어가는 것을 용인했다. 다만 “4․3으로 인해 사망했으나 도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 인사는 위령제 대상에서 제외”하기로만 했다. ‘폭동’과 ‘항쟁’이라는 ‘극단적인 용어’도 서로 쓰지 않기로 합의했다. 모든 희생자 유족들간의 화해와 50만 도민의 화합을 위한 디딤돌이 놓여진 것이었다. 위령제 봉행 취지문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이고 해결자인 제주도민의 단결에서부터 4․3의 명예회복은 시작될 것”임이 강조되었다. 도지사의 추도사는 “슬픔과 고통의 4월을 화합과 전진의 4월로 승화시킴으로써 갈등을 치유”할 것을 주문했다. 제주도의회 의장도 “단순한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나 떳떳한 제주인”이 될 것을 역설했다.
이윽고 1997년에는 4․3의 상처를 범도민적으로 승화시킨다는 취지로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50주년이 되는 1998년부터 매년 위령제를 주최하였다. 그리고 2001년부터는 범도민위령제봉행위원회가 매년 새로 구성되어 위령제의 개최를 주관하였다. 유족회의 위령제는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공준위의 추모제는 탑동광장에서 따로따로 치러지던 것이 합동위령제가 되면서 종합경기장에서 치러졌고, 특별법 제정 후 위령공원 부지가 봉개동에 정해지자 2000년도부터는 그곳으로 위령제 장소가 바뀌었다.
따로따로 치러졌을 적에 위령제는 헌화․분향․종교의식을 내용으로 하여 시종 애잔함을 자아내고 엄숙한 분위기로 일관되었던 데 반해, 추모제는 굿과 노래공연을 통해 망자와 산자들의 교감이 이루어지기를 꾀하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합동위령제가 되고부터는, 참석자의 범위와 인원규모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갔지만, 그 형식은 마치 학교 조회와 같은 모양으로 굳어진 채 별로 바뀌지를 않았다. 유족들이 슬퍼할 틈도 없이 각급 기관장과 정치인들의 일방적인 연설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속에서 2000년부터 위령제에서 정치인의 추모사는 최소화하여 거의 빼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유족과 시민 참석자들은 소외되어버렸다. “이것으로 위령제를 모두 마친다”는 사회자의 알림말이 있고 난 뒤에 유족들이 읍면별로 마련된 제단 앞에서 정성껏 분향하고 잔을 올리며 영혼들을 위로한 후 같은 마을 주민들끼리 음복하는 가운데 비로소 ‘진짜 위령제’는 치러졌다. ꡔ제민일보ꡕ 1998년 4월 4일자 참조.
(2) 위령을 넘어서: 4․3 문화운동의 태동과 그 주체․조직
위령제가 점점 더 형식적인 틀에 갇히면서 소극적인 해원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각 기관(장)이 연례적으로 생색내는 장소로 변질되어 갔다면, 4․3의 진실 확인과 복원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문화․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진 창작․공연 활동과 그 성과들의 집적 및 공개는 4․3 진실회복운동을 가속화시키고 그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한 활동들은 일단은 개별 작가․연행자 나름의 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 그리고 기량으로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보다 계획적․집중적․조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필요에서 하나의 운동 대오로 결집하였다. 거기서 4․3 문화운동의 흐름이 태동하고 발전해 갔고, 이 역시 제주사람들에 의해 제주 현지에서 비상한 활력으로 추동되었다.
4․3 문화운동은 특히나 단단한 조직적 틀의 확립을 요하는 것이었다. 6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의 지평이 확대되어 가는 속에서 70년대의 민족문화론․민중문화운동의 흐름을 부활시켜 잇는 새로운 문화운동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발양되었고, 제주에서도 여러 개의 문화운동조직들이 만들어졌다. 제주청년문학회, 우리노래연구회, 놀이패 한라산, 미술운동단체인 름지 등이 그것이었다. 곧이어 전3자는 협의체적 연대조직을 결성했는데, 그것이 제주문화운동협의회였다. 제문협은 민족민주운동과 보조를 같이하는, 또는 그 일환으로서의 문화운동의 여러 과제들을 소화해내려 하였고, 특히 4․3의 복원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구체적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다. 다른 여러 단체들과 함께 4․3 추모제의 거행을 꾀하여 공준위의 일원이 된 것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였다. 그러다 1994년에 민족예술의 발흥에 뜻을 같이하는 도내 청년 문화예술인들의 결속체로 제주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이 조직되면서 제문협은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3) 4․3 문화운동의 양상과 특징: 사월제를 중심으로
제주민예총은 산하에 문학․미술․음악․연극(나중에 ‘공연예술’로 변경) 분과위원회를 두고서,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목표는 명백히 4․3의 진실 회복에 두어졌고, 발족 당년인 1994년부터 연례적으로 4․3예술제를 개최함을 중심사업으로 삼아 10년간 그대로 이행하였다. 제주청년문학회(1998년 제주작가회의=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로 전환), 놀이패 한라산, 노래패 섬하나 나하나, 민요패 소리왓, 그리고 름지의 후신인 탐라미술인협의회 등, 분야별 상시활동조직과 그 성원들이 민예총 각 분과위원회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래서 매년도의 4․3예술제 주제에 걸맞는 내용으로 분과별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4․3예술제는 4월 한달 동안 제주시를 중심으로 도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그 구조는 3월 31일의 전야제와, 4월 1일부터 30일까지 사이에 적정 기간과 날짜가 배정된 문학제․미술제․음악제․연극제 등의 분과별 행사들로 대별되었다. 전야제의 내용은 초기에는 관덕정 광장에서의 초혼굿과 마당굿으로 구성되었는데, 몇 년 후 거리굿이 그 중간에 첨가되었다. 그리하여 초혼굿은 시청앞에서, 시민들이 대거 결합하는 거리굿은 남문로와 중앙로를 따라 관덕정까지의 가로에서, 그리고 마당굿은 관덕정 광장에서 연행되었다. 전야제의 이런 형식 배치는 제주도의 오랜 무속 전통을 현재화시킨 것이었다. 개별 행사의 내용은 문학의 밤(창작시 낭송, 비디오 상영), 문학강연회, 시전, 미술전, 마당극, 추모노래 공연, 라이브 콘서트 등으로 구성되었다.
예술제 주최측과 참여단체들은 나름의 메시지를 열정적이고도 곡진한 목소리로 전하고자 애썼다. 항쟁과 학살의 현장에서 스러져 간 이들의 “넋이여 오라”(1995년 미술제 주제)고 외쳤고, ‘진혼’(1994년 노래공연 주제)에 도민 모두가 나서야 함을 깨우쳤다. “닫힌 가슴을 열며”(1994년 미술제 주제) 4․3의 비극을 직시할 것을 호소했고, “섬의 하나됨을 위하여”(1995년 예술제 및 노래공연 주제) 어서 빨리 분열이 청산되기를 염원했다. 또한 4․3의 항쟁정신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의 “되살림과 깨어남의 아름다움”(제3회 미술제 주제)을 그려내고자 했다.
문학 분야에서는 4․3문학 작가들과의 대화(‘4․3과 나의 문학’)와 세미나(‘4․3의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수용’)를 통해 4․3의 진실과 상처가 문학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재현되어 왔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하였고(1998), 4․3문학의 소재가 된 곳들을 직접 답사하는 문학기행도 시도되었다(1999).
4․3의 회화적 재현은 탐미협이 주력해 온 활동 목표로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와 별도로 강요배 개인의 집중적인 작품활동을 통해서도 특출한 성취가 이루어졌다. 1992년에 개최된 그의 4․3역사그림전은 “4․3항쟁의 퇴색해가는 희미한 기억의 불씨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하려는 집요한 회화적 작업” 심광현, 「화폭에 담긴 제주민중의 투쟁과 한」, ꡔ역사비평ꡕ 1993년 봄호, 180쪽.
이라는 평가와 함께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1998년에 다시금 서울․광주․대구․부산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가진 50여 점의 역사화는 제주의 역사, 4․3의 전모를 독특한 화법으로 그려낸 것으로, 50주년을 계기로 한 ‘4․3의 전국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놀이패 한라산이 4․3예술제에 매년 참가하고 전국적인 활동도 벌이면서 걸출한 성과를 낳았다. 1983년에 당국의 탄압으로 해체되어버린 극단 수눌음의 단원들이 다시 모여 1987년에 발족시킨 한라산은 1989년 서울(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잠들지않는 남도―4․3제주민중항쟁」을 공연한 것을 필두로, ‘총론에서 각론으로’라는 방향성을 전제해 놓고서 4․3의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에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사월굿’ 연작으로 기획 창작한 마당극들을 매년 사월제 기간에 도내의 제주시․서귀포․한림․고산에서 공연하였다. 또한 서울․대구․원주․인천․목포․성주에서의 전국민족극한마당에 참가하여 공연하였고, 부산․광주․대전․청주 등 다른 도시 순회공연도 가졌다. 그럼으로써 한라산은 4․3의 진실을 젊은 세대들의 머리에 각인시키고 또한 전국화시키는 데에 남다른 기여를 한 것이었다. 공연예술 분야의 4월 문화운동 대오에는 노래패 사월과 풍물굿패 신나락도 새로 합류하였다.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 확인된 진실을 전달․전파시키는 데 영상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지만, 4․3 문화운동에서도 영상작품의 제작과 영상자료의 활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미 1991년에 MBC가 방영한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부분적으로 4․3을 다루면서 기존의 공산폭동론을 배제하고 제주도민들의 수난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4.28 평화협상 결렬과 미군정 및 경찰측의 강경진압 방침 채택의 배경 등도 영상화하여,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4․3의 비극에 눈뜨고 그 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보게끔 했다.
1993년에 4․3다큐멘타리제작단이 조직되어, 「다랑쉬의 슬픈 노래」(1993), 「잠들지 않는 함성 4․3항쟁」(1995), 「무명천 할머니」(1999), 「유언」(1999) 등의 걸작품을 만들어냄에 의해 4․3의 진실을 여러 각도에서 파헤치고 그것을 호소력 있는 영상이미지로 전달하였다. 1998년의 위령제에서 4․3다큐멘타리 제작단은 “4․3의 증언―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증언장을 마련하여, 피해자나 희생자 유족의 생생한 육성증언 장면을 영상화하기도 했다. 1997년 조성봉이 만든 다큐멘타리 영화 「레드헌트」는 서울다큐멘타리영상제, 인권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베를린영화제, 암스테르담영화제에 속속 출품되어, 4․3의 진실이 전국화․세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영화는 대학가에서도 널리 방영됨에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제재하려 했지만 법원의 무죄 판결로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조성봉은 1999년에도 「레드헌트 2」를 제작 출시함으로써 국보법 체제하의 무지막지한 반공폭압주의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돌파를 꾀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4․3 문화운동에서는 영상매체를 중시하고 영상자료를 적극 활용하는 추세가 점점 강해졌고, 그것은 다시 4․3 예술제에도 그대로 전이되어 1998년부터 영상 분야가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1998년에 다큐멘타리 작품인 「본풀이」가 상영되었고, 1999년에는 ‘4․3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를 통해 본 미군정과 4․3’이라는 주제로 영상세미나가 열렸으며, 2000년에는 ‘기억에서 부활로’라는 주제 아래 “평화와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영화들”을 가지고서 영화제가 열렸다. 이와 관련하여 1999년에는 시각자료의 확충이라는 취지에서 역사사진전과 유물유적전이 새 행사항목으로 도입되었고, 그럼으로써 4․3의 진실에 좀더 다가가면서 실감으로 느낄 수 있게끔 하였다.
50주년이 되던 1998년에는 사월제에 학술행사도 추가되었고, 이후 매년도의 중요 행사항목으로 유지되었다. 4․3사건 때 파괴되어 결국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들에 대한 조사결과가 학술심포지엄을 통해 보고되었고 책자로도 발간되었다. 그 후로 ‘잃어버린 마을’들은 4․3주간 중 역사순례의 대상이 되었고(2001), 영구히 기억하기 위한 표석도 세워졌다(2002). 학술대회는 매년 주제가 바뀌는 속에서도 4․3을 기억하고 그 진실을 복원하며 올바로 청산하는 길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었다.
6. 4․3 문화운동의 의의와 전망: 결론에 대신하여
ꡔ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ꡕ는 4․3의 진상과 그 역사적 의미를 국가가 기억하고 그것의 미래화에도 앞장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면 적어도 ꡔ보고서ꡕ의 결론 부분은, 즉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사실해석들은 종래의 공적 기억을 대체할 새로운 역사적 기억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직은 낙관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다. 군내 강경파와 일부 수구정치세력이 완강한 저항과 반발의 자세를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크게 비관할 이유는 못된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ꡔ보고서ꡕ 내용이나 결론을 여론주도층이 수긍하고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듯하니, 그것은 4․3에 대한 새 해석이 종래의 관변측 해석을 누르고 우위에 서게 됨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된 데는 ꡔ보고서ꡕ 내에 하나하나 제시된 증거와 논리도 중요하지만, 현대사에 대한 국민적 인식의 틀이 그동안 크게 바뀌어 왔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꼽아야 한다. 지배이데올로기와 공적 기억에 기만당하고 배신당한 경험을 너무도 많이 가지게 되었던 때문이다. 사실, 어떤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 늘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역사인식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 하나라고만 주장하거나 하나이어야 한다고 고집할 근거도 박약하기만 하다. 진실은 언제든 변하며 다중적인 것일 수가 있다. 그렇다고 강자와 승리자가 내세우고픈 진실이, 또는 제비뽑기 식으로 아무렇게나 선택된 진실이 우리를 현혹하도록 방임해서도 안된다.
진실 찾기, 진실의 확인, 진실의 복원이라는 일련의 행정(cycle)으로 이루어지는 진실회복이 늘 소망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4․3에 관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4․3의 진상은 그런 진실회복운동의 긴 경로를 통해서, 그 성과로서 규명이 된 것이다. 진실은 갈등이 아닌 평화를 가져다준다. 누구든 진실에 승복하기로 하는 이상, 그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실의 횃불 밝혀 평화의 바다로” 제10회 4․3미술제(2003) 기념 4․3미술 전작도록 ꡔ4․3미술 10년의 역사: 1994-2003ꡕ의 부제.
나아가자는 말도 그런 의미로 이해된다.
그런데 한 공동체가 겪었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집단적․사회적 기억은 그 원인은 재쳐둔 채 재난․참화의 실상에만 사로잡히면서 왜곡되어지기 쉽다. 그것이 오히려 회상의 회피, 기억의 억압과 침전이라는 결과도 낳게 된다. 그만큼 역사적 기억은 개인적․집단적 차원의 선택 또는 배제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우선은 기억할 것인가 말 것인가(잊어버릴 것인가)의 선택이 있게 되고, 기억하기로 한다면 사건의 어떤 부분을 얼마만큼 어떻게(어떤 의미로) 기억할 것인가가 결정된다. 후자의 경우에 중요해지는 것이 기억의 물질화이다. 부유하는 기억들을 잡아끌어 정박시키고, 억압되고 있거나 침잠 상태의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며, 다른 집단이나 후세대인들에게 환기 또는 전달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행위이다. 그것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다양한 결과를 낳는 문화적 재현이기도 하다.
4․3에 대해서도 앞에서 보았듯이 다방면으로 문화적 재현 작업이 이루어져 왔다. 사실적 재현도 있었고, 상징적 재현도 있었다. 사건 자체를 재현해보려는 노력도 있었고, 그것에 관한 개인적 심상이나 사회적 기억을 투영시키는 방식의 재현도 있었다. 주로 문학․미술 분야에서의 개인적 재현행위들도 있었지만, 1990년대에 와서는 집단적․조직적인 재현활동이 대종을 이루었다. 증언, 추모제, 마당극, 노래, 영상물․조형물 제작이 대표적인 경우들이었다. 그것은 ‘밖’으로부터의 관찰의 시점보다는 ‘안’에서의 문제제기 자세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로부터 특별한 의도와 목적의식을 내장시켰다고 볼 수 있는 실천적 문화운동 범주가 성립했던 것이다. 그것은 4․3의 두 측면, 즉 항쟁과 학살에 공히 초점을 맞추면서도 종래의 지배담론이나 공적 기억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 의미를 찾고 재현해내려 했다. 그것은 진실회복을 위한 지난한 싸움이기도 했다. 이것이 4․3 문화운동을 ‘기억의 정치’의 장에 위치시켜놓고 ‘기억투쟁’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고찰하며 그 효과를 꼼꼼하게 분석도 해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글에서는 4․3 문화운동의 양상을 자세히 전면적으로 다룰 여유가 없었음으로 해서 지금 단계에서는 그런 분석이 정치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투쟁’이 현존하는 대립물의 팽팽한 대치와 갈등의 형국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창조적 혁신, 어떤 유의 부활과 전변(transformation)과 초월(transcendence)을 중요한 의미항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적으로 그 문화운동=기억투쟁은, 4․3을, 그 격렬한 항쟁과 대량학살의 시간을 직접 체험하고 살아남은 자의 심층기억과 사적 기억들을, 그러나 공적 기억의 지배력과 그것에 포섭된 사회적 기억들의 무게에 눌려서 전혀 목소리를 못내고 침묵하는 개인의 회상으로만 존재하는 수동적 기억들을 1980년대 말 이후 민주화의 시공간 속에서 비로소 목소리를 내며 분출하는 활성적 기억으로 만들어갔다. 억압된 기억의 변성과 변위가 일어나 자기확신을 기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부활하고 변환된 기억은 다시 기존의 공적 기억에 균열을 일으키고 사회적 기억의 질서를 교란시키면서 4․3에 관한 새로운 공적 기억의 소재요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적 재현 운동은 결과적으로 청산 대상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집합기억 형성, 새로운 역사적 기억 구성․창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임이 판명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집단/공동체/사회가 역사적 진실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낡은 이데올로기적 기억으로부터 신생의 기억=대항기억으로의 이전, 아니 단순한 수평이동이 아니라 극적인 비상과 초월을 경험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볼 수 있다. 이것이 4․3 문화운동을 탐색해 봄으로써 얻게 되는 이론적 시사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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