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플러스] 맥주병에 남긴 쪽지문.. 15년 만에 잡힌 살인범
남정훈 입력 2017.07.05. 19:26 수정 2017.07.05. 21:37NS 공유하기
'태완이법' 시행 2주년.. 장기미제사건 해결 잇따라 / 살인사건 공소시효 없어지고 과학수사 기법 향상 큰 효과 / 2002년 발생 호프집 살해 사건, 지문검색시스템 활용 결국 검거 / 아산 갱티고개 살인 진범 2명도 1만7000여건 통화 분석 붙잡혀
지난해 장기 미제 사건을 다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시그널’의 형사 이재한(조진웅 役)은 “미제사건은 누군가 포기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라고 명대사를 남겼다. 드라마기에 가능한 얘기라고 웃어 넘길 법하지만, 드라마는 현실이 됐다. 최근 경찰이 향상된 과학 수사기법에 힘입은 끈질긴 수사를 통해 10여년을 끌며 미제로 남을 것 같던 살인사건의 진범을 검거해내며 범죄자에게는 결코 숨을 곳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경찰은 2002년 서울 구로구의 한 호프집 여주인 살해 사건의 진범을 15년 만에 검거했다. 자칫 미제로 묻힐 뻔 했던 이 사건이 해결된 것은 ‘쪽지문’(조각 지문) 분석을 통해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수사기술의 향상 덕분이었다. 아울러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를 주된 내용으로 한 ‘태완이법’ 덕에 경찰이 미제 사건의 부담을 덜고 재수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도 한 몫 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수사팀은 2002년 호프집 여주인 A(당시 50세)씨를 살해하고 금품을 훔쳐 달아난 혐의(강도살인)로 장모(52)씨를 구속했다고 5일 밝혔다.
2002년 12월14일 장씨는 호프집 종업원이 퇴근하고 A씨만 혼자 남자 곧바로 둔기로 A씨를 마구 때려 살해한 뒤 시신을 가게 구석 테이블로 옮겼다. 이후 A씨가 지갑을 다락방에 두는 것을 눈여겨본 장씨는 A씨의 지갑에서 현금 15만원과 신용카드를 훔쳐 달아났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는 현장 증거를 분석하고, 장씨가 두 차례나 A씨의 신용카드를 사용한 것을 확인해 탐문 수사를 벌였으나 검거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CC(폐쇄회로)TV가 보편화되기 전이었던 데다 장씨가 범행 이후 수건으로 범행 현장을 정리해 지문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사건의 실마리는 현장 구석에 깨진 채로 놓여있던 맥주병에 찍힌 오른손 엄지손가락 쪽지문이었다. 당시는 쪽지문은 분석할 기술이 부족했다. 쪽지문만으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는데다 지문 대조도 일일이 수기로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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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서울시경 형사과 중요미제사건수사팀장인 정지일 경감이 15년 동안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던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호프집 살인사건 범인 검거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후 서울청이 창설한 장기미제수사팀에서 수사했던 사건으로 2002년 가리봉동 호프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현대 수사기법을 통해 찾아낸 것이다. |
그렇게 미제로 남는 듯 했던 이 사건은 2015년 일명 ‘태완이법’이라 불리는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반전을 맞았다. 지난 1999년 당시 6살이던 김태완군은 황산 테러를 당해 49일간 투병하다 숨졌고, 범인의 공소시효 만료가 다가오자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여론이 일었다. 2015년 형사소송법 개정 이후 대대적으로 미제사건 수사에 나섰다. 서울청 중요미제사건수사팀도 지난해 1월부터 이 사건을 재수사하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사건발생 당시 상황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했다. 다행히도 15년 전 현장에서 채취한 쪽지문은 잘 보관되어 있었고, 2012년부터 경찰에 도입된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아피스)을 통해 쪽지문의 유력한 주인을 추려냈다. 이어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발자국)이 뒷굽이 둥근 ‘키높이 구두’라는 분석 자료를 적용해 신장이 165cm로 작은 장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지난달 26일 장씨를 검거했고, 나흘 만인 29일 그를 구속했다. 장씨는 경찰 조사에서 “호프집 앞에 있던 쇠파이프로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진술했지만, 당시 타일공의 보조로 일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둔기를 미리 가방에 준비하고 계획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장씨는 범행 직후 수사망을 피해 잠적한 뒤 2003년부터 최근까지 택시기사로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남은 여생을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지내게 됐다.
경찰은 15년간 미제로 남았던 ‘아산 갱티고개 살인사건’의 진범 2명도 최근 모두 검거해냈다. 아산 갱티고개 살인사건은 15년 전인 2002년 4월 아산에서 직장 동료로 알게 된 B(50)씨와 C(40)씨가 평소에 자주 드나들던 노래방 여주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다. B씨와 C씨는 2002년 4월18일 노래방 여주인 D(당시 46·여)에게 “집까지 태워 달라”고 접근한 뒤 아산시 송악면 갱티고개에서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하고 D씨의 카드를 빼앗아 8차례에 걸쳐 195만원을 인출했다.
경찰은 사건 직후 전담팀을 구성해 수사를 벌였지만 당시 이들은 용의 선상에 배제됐고, 결국 범인을 찾는 데 실패했다. 최근 15년 동안 미제로 남은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한 경찰은 당시 범행 현장 인근 1만7000여건의 통화 자료와 피해자 가게에 있던 명함 95개 가운데 B씨 이름이 일치하는 것을 토대로 지난달 21일 B씨를 붙잡았고, 공범에 대한 추적을 이어가 끝에 C씨까지 지난달 30일 검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