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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혜경궁 홍씨
작품 읽기
그 날[영조 38년(1762) 5월 23일] 나를 덕성합[창경궁 안에 있던 전각 이름]으로 오라 하오시니, 그 때 오정 즈음이나 되는데, 홀연(忽然)[문득, 갑자기] 까치가 수(數)를 모르게 경춘전[창덕궁 안의 수령전 북쪽에 있는 내전]을 에워싸고 우니(불길한 예감), 그는 어인 증조(미리 보이는 조짐. 징조)런고? 고이하여[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때 세손[왕세자의 맏아들 여기서는 정조를 말함]이 환경전[창경궁의 경춘전 동쪽에 있던 전]에 겨오신지라, 내 마음이 황황(遑遑)한 중[마음이 급하여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세손 몸이 어찌 될 줄 몰라 그리 나려가, 세손다려 아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 천만당부하고 아모리 할 줄[어찌할 줄]을 모르더니, 거동이 지체하야 미시(未時)[오후 1시부터 3시까지] 후나 휘령전[영조의 원비였던 정성왕후의 혼전 전호]으로 오오시는 말이 있더니,
- 혜경궁 홍씨의 불안한 예감 -
그리할 제, 소조(小朝)[왕세자로 여기서는 사도세자]에서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재촉하오시기가 뵈오니, 그 장하신 기운과 부호(扶護)하신[풍부하고 호걸스러운] 언사[말. 말씨]도 아니 겨오시고, 고개를 숙여 침사상량(沈思商量)[정신을 한 곳으로 모아서 깊이 생각함. '침사'와 '상량'은 비슷한 뜻을 가진 말]하야 벽에 의지하야 앉아 겨오신데, 안색을 나오사[좋게 고치시어] 혈기[불평한 기색] 감하오시고 나를 보오시니, 응당 화증[(火症) :걸핏하면 벌컥 화를 내는 증세]을 내오셔 오작지[오죽하지] 아니하실 듯, 내 명이 그날 마치일 줄 스스로 염려하야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더니. 사기(辭氣)[말씀과 얼굴 표정] 생각과 다르오셔 날다려 하시대, "아마도 고이하니, 자네는 좋이 살겠네. 그 뜻(자기를 죽이려는 뜻)들이 무서외."
하시기 내 눈물을 드리워 말없이 허황[마음이 들떠서 당황함]하야 손을 비비이고 앉았더니,
- 사도 세자의 예감과 체념 -
휘령전으로 오시고 소조를 부르오시다 하니, 이상할손 어이 피차 말도, 돌아나자 말도 아니 하시고[피하자거나 달아나자고 말하지 않으시고], 좌우를 치도 아니 하시고[주위에 시중드는 사람을 물리치시지도 않고], 조금도 화증 내신 기색없이 썩 용포(龍袍)[임금이 입던 정복. '곤룡포'의 준말]를 달라 하야 입으시며 하시되,
"내가 학질[말라리아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발작적 고열의 전염병]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揮項)[옛날에 쓰던 방한모의 한 가지]을 가져오라."
하시거늘, 내가 그 휘항은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시고저 하야, 내인다려, 당신 휘황을 가져오라 하니, 몽매(夢寐)밖에 썩 하시기를[천만 뜻밖에 대뜸 말씀하시기를],
"자네가 아뭏거나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세손 다리고 오래 살랴하기, 내사 오날 죽게 하였기 사외로와[사위스러워, 미신적으로 마음에 꺼림칙하여], 세손의 휘황을 아니 쓰이랴 하는 심술(心術)을 알게 하얐다네."(사도 세자는 아내인 혜경궁 홍씨에게 난폭한 짓을 했고, 혜경궁 홍씨는 늘 사도 세자를 두려워하고 있음)
하시니, 내 마음은 당신이 그 날 그 지경에 이르실 줄 모르고 이 끝이 어찌 될꼬? 사람이 다 죽을 일이요, 우리의 모자의 목숨이 어떠할런고? 아모라타[아무 일도] 없었지.
- 영조의 부르심과 휘향에 얽힌 사연 -
천만 의외에 말씀을 하시니, 내 더욱 설워 다시 세손 휘항을 갖다 드리며,
" 그 말씀이 하(전혀) 마음의 없는 말이시니, 이를 쓰소서."
하니,
"슬희[싫네], 사외하는[마음에 꺼림칙한 재앙이 올까 두려운] 것을 써 무엇할꼬?"
하시니, 이런 말씀이 어이 병환(病患)이 든 이 같으시며, 어이 공순히 나가랴 하시던고? 다 하늘이니, 원통 원통이요(숙명론, 운명론).
다 그리 할 제 날이 늦고 재촉하야 나가시니, 대조(大朝)[임금, 여기서는 '영조'를 가리킴]께서 휘령전에 좌하시고, 칼을 안으시고 두다리오시며 그 처분을 하시게 되니, 차마 차마 망극하니, 이 경상(景狀)[광경]을 내 차마 기록하리오? 섧고 섧도다.
- 영조의 부르심과 휘항에 얽힌 사연 -
나가시며[사도세자가 나가자], 즉시 대조[영조]께서는 엄노(嚴怒)[준엄하게 성이 남]하신 성음(聲音)이 들리오니, 휘령전이 덕성합과 머지 아니하니, 담 밑에 사람을 보내어 보니, 벌써 용포를 벗고[사도 세자가 폐위를 당함] 엎대어 겨오시더라 하니, 대처분(大處分 :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일 / 사도 세자가 음모를 꾸몄다 하여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이 오신 줄 알고, 천지 망극하야 흉장(胸腸)[가슴과 속]이 붕렬(崩裂)[무너지고 찢어짐]하는지라.
게[거기에] 있어 부질없어, 세손 겨신 데로 와 서로 붙들고 아모리 할 줄을 모르더니[좌불안석], 신시(申時 :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전후 즈음에 내관(內官)이 들어와 밧소주방[外所廚房 : 외소주방 /바깥 소주방, 대궐 안에서 음식을 만드는 곳]에 쌀담는 궤를 내라 한다 하니, 어찐 말인고? 황황하야[마음이 급해 허둥거리며 정신이 없다] 내지 못하고, 세손궁이 망극한 거조(擧措)[행동거지. 몸을 움직이는 모든 것. 조처]가 있는 줄 알고 문정전[창경궁 안에 있는 건물의 하나]에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 쌀궤를 내오라는 영조의 지시와 영조를 만류하는 세손
하니, 대조께서 나가라 엄히 하오시니, 나와 왕자 재실(齋室)[왕자가 공부하던 집]에 앉아 겨시니, 내 그 때 정경이야 고금 천지 간에 없으니, 세손을 내어 보내고 일월이 회색(晦塞)하니[깜깜하게 아주 꽉 막히니], 내 일시나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으리요?(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칼을 들어 명을 결단하랴(스스로 목숨을 끊음 / 목숨을 끊으려) 하더니, 방인(傍人)[옆의 사람]의 앗음을 인하야[빼앗아서] 뜻같지 못하고(죽지 못하고), 다시 죽고저 하되 촌철(寸鐵)[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나 무기]이 없으니 못하고, 숭문당[창경궁 명정전 북쪽에 있는 집]으로 말매암아 [거쳐서]휘령전 나가는 건복문이라 하는 문 밑에를 가니, 아모것도 뵈지 아니코, 다만 대조께서 칼 두다리오시는 소리와, 소조에서,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얐사오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오소서."(사도 세자의 간곡한 호소)
하시는 소래가 들리니, 간장이 촌촌(寸寸)이 끊어지고[마디마디 끊어지듯 하고 / 혜경궁 홍씨의 참담한 심정] 앞이 막히니, 가슴을 두다려 아모리 한들 어찌하리요[속수무책의 상황]? 당신 용력(勇力)과 장기(壯氣)[건강한 원기]로 게(거기 / 뒤주)를 들라 하신들 아모쪼록 아니 드오시지, 어이 필경에 들어 겨시던고?[사도세자가 자신의 힘과 기운으로 뒤주로 들어가라던 영조의 명령을 어기고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결국 들어갔던 것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음] 처음은 뛰어 나가랴 하시옵다가, 이기지 못하야 그 지경[뒤주에 갇혀 있는]에 밋사오시니[미치었으니, 이르렀으니], 하늘이 어찌 이대도록 하신고?
- 사도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둠 -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며, 내 문 밑에서 호곡[목놓아 슬피 욺]하되, 응하오심이 아니겨신지라, 소조 벌써 폐위(廢位)하야 겨시니, 그 처자[작가와 아들인 세손]가 안연(晏然)히[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하게]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요, 세손을 밖에 두어시니 어떠할꼬?(사도 세자가 폐위됨으로 인해 자신과 세손마저 궁 밖으로 쫓겨날 것을 염려함)
- 궁에서 쫓겨날 것을 염려하는 혜경궁 홍씨 -
줄거리 요약
‘한중록’은 모두 네 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세자빈이 된 이후 50년 간 궁궐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는데, 사도 세자의 비극은 말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2편과 제3편은 천정 쪽의 누명이 억울함을 말하는 내용이다. 제4편에서 비로소 사도 세자 참변의 진상이 기록되었다. 영조는 그가 사랑하던 화평 옹주의 죽음으로 세자에 무관심해지고, 그 사이 세자는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 놀이를 즐기는가 하면,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하였으나 성격 차이로 부자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마침내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여기에 영조 38년(1762)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유폐시켜 9일 만에 절명하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친정 아버지인 홍봉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여기 실은 것은 사도 세자가 뒤주에 들어 절명하는 처분이 내리는 과정과, 그 이후 자신의 처지를 기록한 부분이다. 이 글을 쓴 혜경궁 홍씨의 당시 나이는 71세였다.
이해와 감상
이 글은 1795년, 정조의 어머니이며 사도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남편의 참변과 자신의 기박한 운명을 회상하여 자서전적으로 기록한 수상이다. 총 4편인데, 제 1편은 정조 19년 작자의 회갑 때 쓰여졌고, 나머지 3편은 순조1년~5년 사이에 쓰여졌다. 사본에 따라 <한등록>, <한등만록>, <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제1편은 조카에게 주기 위한 순수한 회고록으로 친정중심으로 기록하였는데,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와 입궁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나머지 3편은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순조 1년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로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에 대한 일종의 해명서이다.
제 2편에서는 친정의 몰락에 대한 자탄을 주로 서술했는데, 정조가 초년에 외가를 멀리 한 이유나 아버지 홍인한을 멸망시킨 홍국영(洪國榮)의 전횡을 폭로하고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누명이 벗겨지는 날이 오기를 염원한다.
이듬해에 쓰여진 제 3편은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2편에 이어 정조가 말년에 외가에 대해 뉘우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는 사실을 기술했다.
제 4편은 며느리 가순궁(嘉順宮)의 요청으로 썼는데, 사도세자 참변의 진상을 폭로하고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일어나게 된 경위와 궁중 내의 갖은 음모에 의해 일어난 임오화변의 참상을 자세히 서술하고 친정의 연루 혐의를 해명하였다. 홍씨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의 내막을 폭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중록>은 비빈이라는 신분의 인물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절계 야화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한편, 궁중용어와 풍속을 잘 보여주는 궁중문학의 효시로도 평가될 만하다. 문장과 표현에 있어서 고상하고도 우아한 어휘의 사용, 절실하고도 간곡한 묘사, 전아하고 품위있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가히 한글로 된 궁중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작품 전편에서 귀인다운 품위와 사실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문체를 보이며, 기구한 내용을 입체적 구성에 담고 있기에 그 자체가 한 편의 소설에 비길 만하다.
핵심 정리
* 작자 : 혜경궁 홍씨
* 갈래 : 궁중 수필
* 의의 : ① 내간체 문학의 백미
② 전아한 궁중 용어 사용
③ 적절하고 간곡한 묘사
* 주제 : 임오 화변을 중심으로 한 작자의 기구한 궁중 생활 애환
혜경궁 흥씨(惠慶富 洪氏, 1735~1815) :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 장조(莊 祖,思悼世子)의 비(妃). 본관은 풍산. 영풍부원군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임. 9세 때인 1744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자 혜빈(惠嬪)에 추서됨. 후에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 남편이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敬聽王后)로 추존.
1795년,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많은 일생 올 (한중록)이라는 자서전적인 수필로 남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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