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머리 수암낚시터
첫번째 안내표시
보광사 대웅전
산신각 뒤에 있는 봉학산암각
5층 석탑
395.4봉
고리티고개 표시
보호목 450년 느티나무
378.5봉
반기문 종중묘
행치재 석재공장
행치마을 표시석
반기문 생가입구
반기문 일가 제사모시는 곳
반기문 생가
큰산
352.7봉
돌고개
날머리
보현산 약수터
이번 구간은 한남금북정맥 7구간 모래재~보광산
~395.4봉~고리티재~515번도로~378.5봉~행치재
~큰산~삼실고개~돌고개~뱀거리재(22km)로 9시간
전후가 소요 될 예정 집에서 5시 35분에 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 타고 동서울에서 6시 50분에 출발
증평에는08시 16분에 도착 택시를 타고 모래재에
08시 30분에 도착 아것저것 준비하고 08시 33분에
산행을 시작하는데 바람이 불고 기온이 많이
내려 가 조금은 애를 먹으면서 했고 혼자서
끝을 맺자고 생각하여 원래 예정 산행보다
7km를 추가하면서 시작을 한 산행
모래재는 34번 국도가 괴산과 증평을 연결하면서
4차선 신설 도로가 생겨났고 터널도 여러개
통과하면서 기존의 모래재 방면에서는 보광산수련원
길 건너 임도를 따라가서 수암낚시터를 지나 지하도를
지나갔는데 알고보니 신도로에서 바로 보광산등산로
안내판 있는 곳으로 올라도 되는 것을 먼저 산행한
사람들의 산행기를 참조하다보니 택시비만 더 들인 샘
보광산 이정표가 계속 설치 되어 있고 숲으로 들어
가기전 아래쪽 묘지쪽으로 전망을 보고 오르는데
이정표에 보광산 20분, 모래재 30분 시동마을 40분으로
표시 되어 있고 임도쪽으로 내려서니 간판이 뒤돌아서
있어 가서 확인하니 보광사 인도 차도 안내판 인도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차가 다닌 흔적이 뚜렷 보광사
1분 보광산 15분 그대로 진행하니 봉학사지 터의 석탑을
확인하고 진행하니 이정표에 보광산 5분 고리티 30분
모래재 50분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곳에서도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낙엽이 떨어져
스산한 봉학사 지에는 5층탑과 우물터가 보이니
이것들만 확인을 하는데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흔적들도 보이고 뒤로는 묘지가 있는데 이 묘지는
김판서 김 소(金 素) 1602(선조25)∼1666(현종7)의
묘로 김판서의 묘에는 묘의 좌향도 있고 동자석에
문인석을 겸비하여 봉황사지 탑을 바라보고 있는
명당터 암튼 터는 아담하고 아늑하여 좋아 보이는 형국
김판서는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의 하도에서 태어나
조선시대에 벼슬을 한 사람으로 여러 가지 문헌들과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산은 본래 봉학산(鳳鶴山)
이었던 것 같고 또한 봉학사가 봉학사 5층탑 안쪽에
있었고 조선시대까지 중반까지 존속한 것 더불어
봉학사를 폐사한 후에 김판서의 묘를 조성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불분명하지만 봉학사가 고려시대의
사찰인 점으로 보아 묘지를 조성할 때 많은 사연과
말들이 있었던 것 같고 또한 1972년경까지 묘지 앞쪽에
작은 암자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아직도 후손들이
잘 돌보고 있는 묘소 봉학산이 보광산으로 변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김판서의 묘지와 봉황사지는 둥지를 틀고
있는 듯이 포근해 보이고 이 터를 풍수학상으로
"금계포란형"이라고 부른다고 가문의 영광과 민초의
원성이 함께 들어있는 장소인 것 봉학사지 5층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4장의 지대석
(地臺石)위에 세워진 것으로 초층 탑신만이 2장의
돌로 되어 있고 각층의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고 기단부는 없어지고 넓직한 지대석 위에
기단 갑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얹고 탑신을 쌓았고
각층 탑신의 면석에는 아무런 수식이 없고 모퉁이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며 상륜부(上輪部)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1개가 있고 옥개석은 5단 받침과 2단의
탑신괴임으로 되어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한 편이고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약하여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고 이 탑은 현재 사담리 보광사(普光寺) 뒷 편
옛 절터에 있었는데 1966년에 이 석탑은 2층 옥개석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청동합(靑銅盒)에 들어 있던
청동불상에서 '鳳鶴山 鳳鶴寺'라 쓰여진 시주문(施主文)이
발견되었으니 보광산 폐사지에 있던 것을 아래쪽에
새로 지은 보광사(普光寺) 대웅전 (大雄殿)에 봉안하여
1935년부터 주존불(主尊佛)로 모시고 있다는 것
보광산(普光山 539m) 정상은 묘지 상단부에서 올라가
좌측으로 약 50m 더 진행해야 하며 또한 전망대도 있고
정상에는 괴산군에서 설치한 정상 표지석도 있다는데
정맥 길에서 조금 벗어 나 있으니 확인하지 못하고 북쪽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니 괴산군에서 설치한 사거리의
표지판을 만나게 되는데 소암과 둔터 골로 내려 가는
이정표 이곳을 약 10m 만 더 지나가면 395.4m 삼각점에는
9시 41분에 도착 2003년 8월 국립지리원에서 표지판까지
설치하였으니 지금까지는 삼각점만 보아왔는데
이곳에서는 표지판까지 세워 놓았고 글의 내용 속에는
파손시키지 말 것을 당부 산 꾼들은 삼각점이 중요한
표시이므로 당연히 보물처럼 여기는 것 삼각점에서
약 50m 정도 내려서면 비포장임도가 나오고 이 임도는
둔터 골과 소암리를 연결하는데 산의 9부 능선까지 도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리티고개가 아닌 임도 이 임도에서
조금 더 진행하여 내려가면 고리티고개가 나오는데
나무가 쓰러져 있어서 조금 쓸쓸하지만 길의 형태는
뚜렷 지금은 고개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고
오른쪽으로는 청색지붕의 민가가 한채 있어서 소암리
방향으로 길이 구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5.5km 지점이며
379.2봉과 백마산으로 향하는 능선의 분기점을 통과
백마산은 왼쪽 편에 우뚝 솟아있는 산봉우리이며 경주
김씨의 묘를 지나면 내동고개로 내려서는 길 이곳부터는
이제 음성군과 괴산군의 접경지역으로 토골고개까지
진행하게 되고 우마로 보다 약간 작은 갈래길이며
돌무더기가 있는 곳으로 음성군의 주봉리 안골과
괴산군 몽촌리의 내곡을 연결하는 내동고개를 지나
377.9봉 앞쪽에 약 420봉의 더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에 삼각점이 있는 것이 이곳의 특색아닌 특색
삼각점을 지난 다음의 봉우리는 특색이 없는 봉우리
약 6~7분정도 더 가면 조망이 확 트이면서 토골고개와
오대산 및 378봉 등이 훤히 보이는 곳이 나오고
산불 때문에 나무가 없기도 하지만 고도 차이가 앞쪽을
시원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주고 토골고개은 2차선
포장도로이며 음성군 마송리 및 주봉리와 괴산군 옥현리를
연결하는 고개 괴산 85호 보호수 느티나무가 고개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곳 에는 11시 05분에 도착 이 느티나무는
높이 12m, 둘레 4.3m, 수령 450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 토골고개에서 올라설 때
묘지 쪽으로 올라서지 말고 묘지 좌측 편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표지기가 있으니 이곳이 맥 길 또한 급경사의
길이니 올라설 때 땀이 조금 나고 우측편으로는 오대산
갈래 길이 있으며 맥은 능선 왼쪽으로 진행 약 3분을 더
진행하면 378봉 삼각점이 나오고 깃발을 달고 그 아래
삼각점을 표시하였으니 378.5봉에는 11시 22분에 내려설 때
왼쪽으로 백마산과 주봉저수지도 보이고 또한 앞쪽으로는
마송리와 36번 국도가 시원스럽게 보이니 이제부터는
음성군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길목 음성은 일찍이 진국의
땅이었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여 그 50여국 가운데
지침국에 속하였고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역이었으며
삼국시대 중기 고구려 영역이 되어 잉홀 현이라 부르고
처음에는 북쪽 노음죽 현 (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에 속하여 있었으며 그 후 금물 노군에 속하여
있었다고 우마로 시멘트도로를 통과 다시 산을 하나
넘어야 하니 낙엽이 많으며 전체적으로 산이 낮아
야산 지형 여름철에 숲이 우거지면 정맥 길을 혼돈할 수도
있겠지만 표지기가 많아 혼돈되지는 않을 것
상로리 고개는 지도상에서 포장 도로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시멘트도로 또한 앞쪽으로 묘지가 펼쳐져 있는 곳
상로리 과수원길이란 표지판이 있는 삼거리길이기에
상로리 고개로 명명 묘지로 올라서면 또 표지기가
잘 안보이고 이 묘지에서 우측 편으로 방향을 틀어
진행하면 지형이 비슷비슷하여 나침반 방향과 감각을
동원하여 길을 찾아야 하는 곳 청색지붕이 있는 집이
나온 후 뒤쪽에 광주 반씨 합장제단이 보이는데 이곳을
보고 정맥을 따라 올라서면 길은 뚜렷하게 보이고 능선의
정점에 올라서니 앞쪽으로 큰 산이 보이는데 행치고개를
넘어야만 큰 산으로 오를 수 있다는데 큰 산을 이곳에서
보니 뫼산자 형태의 육산 그런데 특이한 것은 억새와
갈대가 같이 산 위에서 공존하는 현상이 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고 또한 조금 더 진행하면 녹슬은 철조망과 잡목이
많은 구간을 지나 (행치재)행치고개에는 12시 33분에 도착
행태고개가 보이기 시작하면 달성석재공장의 석물
가공하는 곳을 보게 되고 이 도로는 36번 국도로서
증평군과 음성군을 연결하는 주 도로 이곳에서
반대편으로 넘어가려면 지하차도를 건너가면
행치재 휴게소가 있으며 휴게소 뒤쪽으로 반기문 생가가
있는 곳으로 돈을 많이 들인 흔적이 보이는 곳
큰 산이 떡 버티고 서 있기 때문에 큰 산이 이 행치재를
호위하는 것 같은 느낌이며 큰 산이 우뚝 솟아있고
토끼장이 있는 곳의 방향에 맥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이곳에서 올라서면 묘지가 나오고 이장한 묘지가
또 나오고 능선에 우마로가 있는데 이것은 묘지까지
왕복하기 위한 길로 추정 조금 더 진행하면 우측 편으로
멋지게 조성된 가족묘지가 있는데 아마도 이 근동에
있는 모든 묘지를 저곳으로 이장하여 한 장소에 모은 것
같고 이 정도 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을 터인데
큰산(509.9m)에는 13시 14분에 도착하고 고도 300m 의
급경사의 된 비알을 올라서니 땀을 많이 흘렸고
이곳은 삼각점이 있고 통신시설의 안테나가 있는 곳
으로 큰산을 출발하니 뒤쪽으로 우마로를 따라 내려가고
우마로 길을 약 30m 진행하다가 이 길을 벗어나 좌측편의
산길로 들어가고 나무계단이 있어서 계단을 밟으면서
내려가니 이 도로는 지도상에는 포장도로로 나오는데
현재는 비포장 1차선 도로 517봉에는 13시 29분에 도착하니
삼거리길인데 오른쪽으로 급경사 내리막길 여름철에
나뭇잎이 많으면 아래로 내려서는 길을 놓칠 수도 있겠으나
표지기가 많으니 조금만 주의하면 되고 약 10분만 내려서면
완만한 능선 길을 걷게 되고 14.7km 지점에 도착하니
드디어 조망이 열리고 멀리 돌고개가 보이고 초천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니 산불이 난 이곳을 지나가려니 또 잡목이
많고 산불이 난 곳과 산불이 넘지 못한 곳의 경계선을
따라 진행하면 정맥의 길 왜 산불이 맥을 넘지 못하는가?
이것은 간단하게 생각하면 위로 올라가는 불길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산불과 맥은 경계선을 긋기에 나도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고 2차선 포장도로 도로를 건설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진짜 새 도로인 삼실고개에는 14시 01분에 내려서는데
길목에다 나무를 잔뜩 베어 갖다 놓아 옆으로 돌으려니
미끄럽고 도로 왼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으로 오르는
포장 길림길로 오르는데 까만 천으로 콩밭 울타리를
쳐 놓은 길따라 오르다 넓은 묘지군 꼭대기에 시그널을
확인하고 오르자니 숨이 차고 솔밭을 지나는 듯
잡목구간이 또 이어지니 길 찾기도 어렵고 세멘임도에
내려서고 올라서자 잡목 숲이 또 이어지니 오르막을 잡목과
싸우며 올라서는데 어느 덧 352.7봉이라는 준희의 표시판이
나무에 달려 있고 삼각점도 있어 안심하는데 14시 38분이었고
돌고개에는 14시 50분에 내려서서 좌우를 살펴보니
아스팔트 삼거리에서 하영특수유리(주)쪽으로
표시가 있었는데 헤갈리게 되어 있어 조금 망설이다가
시그널따라 오른쪽 숲으로 오르는데 능선을 따라 가니
길이 없어지고 나무와 숲이 가려 길 수가 없어
왼쪽으로 길도 아닌 곳으로 내려서니 임도길
임도 따라 포장도 양쪽으로 나무가 쓸어져 길을
막고 있고 이리저리 시그널을 찾으나 없어
왼쪽 쓸어진 나무를 빠져 나와 소파등 쓰레기가
산재한 도로를 따라 나오니 하영특수유리 도로
정문 앞을 지나니 오른쪽으로 논이 나오고
사이 임도를 따라 간다가 숲으로 붙으니
철탑이 나오고 왼쪽으로 묘지군을 보며 진행하니
뱀거리재 (정맥 산행 끝)에는 15시 34분에 도착
아스팔트 2차선 도로 보현산약수터 비석옆 보현산 임도
안내판도 있기에 택시를 부르면서 베낭을 정리하고
택시가 오자 바로 음성에 도착하여 16시에 출발
서울집에는 19시 15분에 도착하여 모든 것을 마무리
*큰산: 해발 509m의 큰산은 원남면 보룡리, 하당리,
덕정리에 걸쳐있는 산으로서 일명 보덕산이라고 하며
큰산의 서남쪽으로 꽃절이 있으며 바위가 움푹 패여
10여평이 되는데 특이하게 바위 아래 불상이 있으며
꽃절 바위에서 나오는 약수가 유명하며 등산을
하다보면 임도가 잘 닦여 있어 등산하기가
매우 편리 하며 천연림이 울창하게 생육하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페러글라이딩 출발 장소가 조성되어 있어
많은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다.
*초정리 약수 : 충북 청원군 북일면(北一面) 초정리에
있는 약수는 청주시 동쪽 10여 km 지점에 위치하며
라듐 성분이 다량 함유된 천연탄산수로 발견된 것은
600여 년 전으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 세종대왕이
이곳에 60일 동안 머물며 눈병을 고쳤고 세조도
이곳 약수로 심한 피부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보이며
세계 광천학계에서는 초정약수를 세계 3대 광천의
하나로 꼽는다고 지하 100 m의 석회암층에서 솟아오르는
이 무균(無菌) 단순탄산천은 용출량(1일 약 8,500ℓ)도
풍부하려니와 이를 가공하여 상품화하기까지에
이를 만큼 널리 알려진 약수로서 부강약수(芙江藥水: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소재)와 함께 국내 제일의 약수로 꼽힌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 1944년 6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행치마을에서 태어났고 행치마을은
약 500년 전 광주 반씨 장절공파에 의해 형성되었고
광주반씨 장절공파 행치 종친 15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 마을은 한남금북정맥의 큰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으로 36번 국도가 지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그는 1944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나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충주고 2학년 때 '외국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하였으며
이때 케네디대통령을 만나보고 외교관의 꿈을 키우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하였으며 1970년 2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외무고시에 합격했고 외교관 시절을
거쳐 외교통상부 차관과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고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재직중인 2006년 2월
유엔사무총장직에 출마해서 단독 후보로 추대되었으며
UN 총회에서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임명 이로써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007년 1월 1일부터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그가 유엔총장이 되고 나서
풍수가들은 그의 생가터가 용맥(龍脈)이 흘러 내리는 명당이라
그가 사무총장이 되었다고 하고 변설가들은 그의 삶의 이력을
찾아내어 그의 생을 '미쳐라!' '겸손하라!' '꿈을 잃지 마라!'는
말들로 압축해 떠들고 있으며 확실히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미쳐 있었고 크게 남 앞에 나서는 법 없이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꿈을
잃지 않고 있었던 사람 게다가 그의 생가가 있는 행치마을은
한남금북정맥의 주요 산 중 하나인 '큰산'이 감싸고 있으니
명당임에도 틀림이 없을것 그러나 그가 처음 유엔 사무총장에
나간다하고 발표했을때 사람들은 모두들 반기문이 누구야? 라고
반문 우리나라 외무장관인 줄은 알겠는데 그가 뭘하던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기 때문 사실 UN사무총장 자리는
그에 앞서 메이저신문 중 하나인 J일보 회장이던 홍모씨가
공공연히 도전을 하고 있던 자리 노무현 정부의 출범 이후
홍씨는 자신의 꿈인 UN사무총장 자리를 위해 국민적인
지지 기반이 취약했고 특히나 언론과 대척점에 있던
노대통령을 지원했고 그 댓가로 주미대사 자리에 오르며
UN 사무총장의 꿈을 향해 착착 나아가고 있었으니
UN 사무총장 자리는 그간 미묘한 국제 역학관계에 기초한
`대륙별 안배 원칙`이 불문율 처럼 지켜져 왔지
초기에는 지역순환 원칙이 없었지만 3대 미얀마의 우탄트
사무총장부터 아시아(3대)→구주(4대)→미주(5대)→
아프리카(6,7대) 등 지역 별 교대 수임(受任) 원칙이
지켜져 온 것 7대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아프리카
가나 출신이니 이제 다음은 아시아가 사무총장을
배출할 차례이고 그동안 역대 사무총장들이 모두 강대국이
아닌 약소국 출신이었던 점 등을 고려하면 홍씨의 꿈은
거의 기정사실화 되는 분위기 그러나 역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는 하늘이 내는 것이라 홍씨는 안기부 도청사건으로 촉발된
대선자금 스캔들 때문에 사법 처리되면서 UN사무총장을
향한 꿈을 접어야 했으니 결국 이러한 천시(天時),지리(地理)의
조건 아래 인화(人和)로 자기관리를 해 왔고, 마침 아시아,
그 중에서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 대한민국의 외교장관을 하고
있던 반기문이 UN사무총장으로 낙점이 된 것
반기문의 이런 천시, 지리의 조건 완성을 그가 태어난
행치마을을 둘러 싸고 있는 '큰산'에서 찾고 싶어
'큰산'은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높이가 509m에
불과한 작은 산 우리나라 4400여개 산(山)들 중 1000m가
넘는 산(山)만도 수백개에 이르고 큰산보다 높은 산은
셀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산'이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큰산'이란
이름을 갖고 있고 용맥(龍脈)으로 칭송를 받고 있는
이유는 적시성(適時性)과 희소성(稀少性)에 그 이유가 있다 할 것
'큰산'은 백두대간이 속리산에서 갈래쳐 중원지방을
모두 아우르다 안성 칠장산에서 다시 한남과 금북으로
가지를 쳐 서해바다를 향해 뻗어나가게 만드는
한남금북정맥 상에 위치 한남금북엔 시루산, 국사봉, 구
봉산 등등 높은 산들이 즐비하지만 '큰산'은 보은,청주,
청원, 괴산을 거쳐 오며 점점 고도를 낮춰가던
한남금북정맥의 산맥이 음성지방에 들어서며
한번 불끈 솟아 오르는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높이가 낮아지며 평야가 넓어지는 곳에
우뚝 솟아올라 주변을 호령하니 비록 작은 산이지만
큰 산으로서의 역할과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지
이 땅엔 반기문보다 똑똑하고 경력이 더 화려하고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수두룩하나 반기문은
외교관이라는 큰 맥(한남금북정맥)에서 한발짝도
벗어 나지 않고 깊이를 쌓았고, 꼭 있어야 할
자리(큰산)에 있음으로써 UN사무총장이란 영예를
얻을 수 있었던 것 이렇게 '큰산'과 '반기문'이
같은 연결고리로 이어짐을 볼때 반기문 사무총장은
큰산의 정기를 받았음이 분명해 보이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의 도움을 받았음에
앞서 겸손한 인격을 바탕으로 한 인화(人和)로 평생을
살아 왔음이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란 전세계적인
인물로 성장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
한남금북정맥 일곱번째 걸음은 반기문이란
큰 인물을 배출한 '행치마을'과 '큰산'을 지났다는게 소득
2010. 12. 4. 조성철
趙成哲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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