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며 미래의 나침반이다. 또, 민중은 신화를 먹고 산다고도 한다. 민족 문화가 없는 나라는 앞선 물질 문명을 구가하면서도 초조하다. 우리는 언제부터 인가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해 공연히 주눅이 들어 있다. 일제 식민 지배의 잔재라고는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자랑스런 역사를 너무 축소 해석하여 왔다. 그것은 겸양의 미덕이 아니다.
세계는 나날이 좁아지고, 국제화가 진전될수록 민족주의는 더욱 강하게 타오른다. 이제 우리니 아들과 딸들은 세계로 나가 각지의 젊은이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들에게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의 기상을 전수하는 것만큼 급한 일은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으나 그 동안 많은 사학들의 노력으로 우리 고대사의 놀라운 비밀이 밝혀져 왔다. 흩어져 있는 자료들과 새로운 논문을 연구하고 직접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는 등 오랜 세월과 열정을 쏟은 끝에 세권의 책으로 태어난 대쥬신제국사에는 우리민족의 고대사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잃어버린 구슬을 찾아 모아 하나로 꿰어 놓은 보배라 아니할 수 없다.
중화족이 우리 민족의 지배하에 있다가 중국으로 독립하는 단군이전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날의 일본국을 건설하기까지의 수천 년간의 방대한 동북아 고대사를 이렇게 명쾌하게 그림으로 재현해 낸 데 대하여 다시 한번 찬탄에 마지 않는다.
축소, 소멸된 상태로 오늘에 이르른 잃어버린 우리 민족사의 고리들을 찾아 엮어 내놓은 이 책에서 우리의 아들, 딸들은 배달민족의 웅혼한 기상과 자긍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문화부장관 이 어 령
대쥬신제국사 제 1 부 동이족과 화산족
우리 민족의 이름은 배달민족(밝달민족-倍達民族)이고 나라이름은 쥬신(朝鮮)이다.
쥬신의 뜻은 우리민족이 살고있는 온누리(관경)이다, 우리가 흔히 오랑캐라고 부르는 만주지방의 숙신(肅愼)이나 여진(女眞)족들도 사실은 모두 배달민족의 한 구성원들로서 무두 쥬신(珠申)이라 부른다. 쥬신제국사(朝鮮帝國史)는 이땅에서 흥망성쇠했던 한 나라의 역사가 아니고 우리와 같은 배달민족들의 역사를 포함한 대 민족역사서이다.
우리 배달민족은 본래부터 삼신(三神)을 믿어왔는데 하늘의 한님, 땅의 ㄱ . ㅁ(아래아한글)님 , 그리고 조사의 혼령으로 표현되는 선님(仙任)이다. 각지에 수두(蘇塗)를 지어 하늘에 제를 지내니 수두란 신단(神檀)이라는 뜻이다.
일년에 두번씩 군장회의를 열어 대제사장(大祭司長)을 의미하는 단군(檀君)을 뽑았는데 단군은 곧 나라의 최고통치자로서 대제(大帝)의 위치에 있어 천하를 다스렸다.
우리 배달민족 쥬신은 새(鳥)를 숭상했으며 화산족(中國)은 용을 길하게 보았다. 따라서 역사는 봉황(鳳凰-쥬신족)과 용(龍-중화족)의 패권다툼의 연속이다.
서기전 2707년 우리민족의 불세출의 대영웅 자오지천황(慈鳥支天皇)이 배달나라의 14대 환웅이 되시자 그동안 쥬신족의 압제로부터 독립하려 애쓰는 중화족의 기를 꺾고자 큰 원정군을 일으키어 강력하게 징벌하자 이후 한동안 중화족은 쥬신의 제후국 위치를 넘을 수 없었다. 이때의 자오지천황이 바로 중국인들이 전쟁의 신으로 모셔 두려워하는 치우천황(蚩尤天皇)이시다.
서기전 909년 당시의 쥬신제국과 그 제후국은 지금의 중국본토 전영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당시 쥬신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신쥬신, 말주신, 불(卞)쥬신으로 분할 통치하고 있었다.
쥬신제국이 몰락한 후 새로운 종주세력으로 등장한 북부여는 옛 쥬신의 귀족을 축출하니 아직까지 주인이 없던 한반도로 밀려 내려오기 시작한다.
서기전 59년, 동부여의 가시라(葛思)에서 왕실 목아장의 관리자였던 고주무(高那牟)는 북부여를 정복하고 그 땅에 가우리(高句麗)를 세우니 “가우리”란 세상의 한복판 땅이라는 뜻이다.
한편 고주무의 가우리 건국에 협조했던 서소노 여왕은 그녀의 두 아들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祖)를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아산만에 상륙하니 서기전 7년의 일이였다. 이리하여 시조 비류는 유명한 백제(百濟)를 세웠고, 동생 온조는 지금의 용인지방에 십제(十濟)국을 세우게 되었다.
옛 불쥬신의 왕손 이비가(夷毘訶)의 둘째아들 푸른자손(惱室靑裔)이 5칸(五汗) 동맹의 맹주로 떠오르며 가야(加야)를 일으키고,
황하의 상류 실라강 유역에서 훈족과 충돌하여 쫓긴 오환족의 일파로서 한반도의 서울지방에 머물렀던 새라벌(徐羅伐)의 세력들은 호서로 진출하기 위하여 백제와 끊임없이 충돌하여 결국 경주 지구에 정착하니 비로서 한반도의 질서가 균형을 잡게 되었다.
대쥬신제국사 제2부 한반도와 왜열도
배달민족은 본래부터 광활한 대륙을 지배했던 기마민족으로서 일단 좁은 한반도내에 각각 자리를 잡기는 했으나 이때 새로히 발견된 왜(倭-일본)열도를 놓고 영토쟁탈전이 일개 되었다.
*일본말로 야마도(大和)란 백제말로 야뫼토(물과 산이 있는 땅)의 뜻이다.
초기에 일본열도로 진출해간 배달민족은 일본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한사코 저항하는 선주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일본따에 백제의 담로국을 세우기 위하여 파견된 신무(神武)는 토인인 즈치구모(土충知蛛)와 히기비토(侏偉) 종족을 전멸시켜버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서기 157년, 실라의 계원(繼元) 장군에 의하여 토멸당한 후 일본땅으로 망명한 비미국 왕녀의 딸 신공(神功)은 무녀로서 사람들을 속여 여왕국을 세우고 실라의 일본항로 중간지점인 사비실라(沙北新羅)를 습격하여 약탈을 한 바 있는데 그곳은 지금의 일기도(壹岐島)이며 소위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신공의 실라정벌 진상이다.
서기 249년 백제는 규슈지방에 옥라근자 장군을 파견하여 실라세력을 누르고 7개의 나라를 정복하여 일본규슈(九州) 지방의 새 주인으로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백제의 왕세자는 중국땅에 위나라와 결전을 벌리고 있는 발해연안의 외백제(外百濟)을 지원하기 위하여 신공군을 이용하기로 하고 유명한 칠지도(七枝刀)를 하사하였다.
배달민족은 크게 보아 쥬신계와 부여계 그리고 동호계로 분류할 수 있다. 노제국 쥬신이 힘을 잃고 신흥 가우리(高句麗)의 강력한 압박정치에 몰려 사방으로 분산되었는데 그중 동북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유지한 일파를 숙신(肅愼)이라 한다. 그러나 그 발음은 여전히 쥬신이다.
서기 390년, ㄱ.ㅁ(아래아한글)나루(공주)에선 응신천황이 백제의 대 단군으로 올랐고 그 다음해인 서기 391년엔 호태왕 담덕이 가우리의 대왕위에 오르니 바로 유명한 광개토경대왕이다. 이때부터 동아의 종주권을 놓고 이 두 영웅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백제의 응신천황과 가우리의 담덕대왕의 결전은 서기 396년 9월 가우리, 담덕대왕의 예상을 깨는 절묘한 육,해상의 입체 기습 작전에 걸려 백제의 수도 ㄱ.ㅁ나루가 공파 당하고 위기일발에 도성을 탈출한 응신천황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오사카지역에 나라백제(奈良百濟)를 세우니 이른바 야마도(大和)로서 현대 일본국가의 기원이 되었다.
비류계의 진씨왕조가 응신천황을 끝으로 일본으로 망명해 가자 백제의 옛 땅에는 곰나라(古典那羅)가 일어나 그 국명을 남부여(南夫餘)로 고치고 발전을 거듭하여 대해양제국을 건설하며 그 전성기를 맞았다.
★ 이쯤해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백제 역사 기록이 사실은 십제와 ㄱ.ㅁ나루, 그리고 남부여의 복합 역사라는 사실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자들이 모두 고려때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미 이땅을 떠나 왜국(倭國)에 존재하고 있는 옛 백제사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키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또한 백제의 ㄱ.ㅁ나루 시대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천황이 도왜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하늘로부터 직접 하강하였다는 주장이 불가피했던 옛 백제 천황가의 미묘한 입장 때문에 일본서기(日本西紀) 속에 상징적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를 멸망시킨 실라가 반도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일본땅에 이주한 사람들은 곧 적의 땅으로부터 쫓겨온 격이 되니 이를 역사에 기록하기가 심히 괴로웠을 것이다…
서기 597년 옛 불쥬신의 후예로 선비족의 군벌출신 양견(楊堅-수문제)은 지금의 중국을 정복하고 수나라를 세운 후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감히 가우리에 조공을 요구해 오는 무례를 범하였다. 이에 격분한 가우리는 강이식을 대장군으로 을지문덕을 부장으로 하여 수나라의 북천성을 공격하였다. 이로서 수나라와 가우리의 북방패권전이 시작되었고 수양제 때는 무려 200만의 대군을 동원하였으나 이 역시 우수한 가우리 해군의 활약으로 전멸당하는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
가우리와 4차에 걸친 대전의 패전으로 수양제는 쓰러지고 수나라도 망해버리니 그의 뒤를 이어 역시 선비족 출신인 이연(李淵)이 당나라를 세우고 가우리와의 패권전을 인계받았다. 한편 끝없는 전쟁에 염증을 느낀 가우리의 일부 대신들은 화평을 원하게 되었고 이에 격노한 연개소문은 비겁한 대신들을 몰살시키는 피의 혁명을 성공시켜 가우리의 정권을 잡았다.
이리하여 당태종의 친정군과 연개소문의 가우리군은 양국의 운명을 걸고 또다시 격돌하게 되었다.
당태종이 이끄는 최정예군이 가우리의 안시성을 에워쌌으나 성주 양만춘의 견고한 수비와 또 고연수, 고혜진의 두 장군이 이끄는 15만 별동대의 입체적인 작전으로 당군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게 되었다.
결국 50만의 대병을 동원하여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성을 만들었으나 끝내 공성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가우리 특공대의 결사적인 기습에 화살을 맞고 왼쪽눈을 잃게된 당태종은 가우리의 실력을 과소평가한 자신의 실책을 뉘우치며 후퇴를 서둘렸으나 집요한 연개소문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포오거의 요택늪지에서 가우리의 추격군에게 포위당하여 항복의 굴욕으로 겨우 목숨만 구걸하여 돌아갔다.
이 전쟁의 결과로 가우리는 산시성(山西省), 허베이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을 다물해 내었다.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 제3부 불타는 대동아
서기 555년 남부여의 성왕을 죽이고 가야 연맹을 멸망시킨 실라는 이제 남부여와 맞설 수 있는 국력의 신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남부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양국의 화평을 위하여 실라 진평왕의 둘째공주 선화공주와 남부여 위덕왕의 증손 서동왕자와 결혼 시켰다. 그러나 왕위의 계승권을 놓고 양국관계는 오히려 나빠졌고 서기 641년, 무왕의 뒤를 이은 용맹한 의자왕은 실라의 요충인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 소량과 사위 김품석을 죽였다. 이에 복수를 맹세한 김춘추는 남부여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온갖 술책을 다하게 된다.
나라백제와 남부여는 동계 분립국(同系分立國)으로 항상 형제국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며 그 운명을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있었다. 日本 땅의 나라(奈良)에서 서명(舒明-조메이)이 천황(단군) 위에 오르자, 남부여의 무왕(武王)은 자신과 실라의 선화공주 사이에서 출생한 보황녀(寶皇女)를 서명천황에게 시집 보내어 나라백제를 남부여의 부마국으로 삼고 양쪽왕가의 혈연을 통한 동맹관계를 확고히 하였다.
백제와 운명의 결전을 각오하고 있던 실라의 김춘추는 남해의 해적출신 대해인을 파견하여 남부여의 동맹국인 나라백제의 수도 아스카(飛鳥-나는새)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대해인이 이끄는 실라군은 남부여 의자왕의 아들로서 나라백제의 대사로 파견되었던 일궁부(日宮部)의 왕(君)인 부여풍장(夫餘豊璋)의 나라 아스카군을 격파하여 실라의 속국으로 삼고 후일에 있을 대 남부여 전쟁에 동맹군이 파견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서기 647년 실라에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김춘추이 어머니로서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때마침 일본의 야뫼도를 방문한 김춘추는 나라백제의 이름을 실라의 연호 태화를 따라 대화로 지어주었다.
*대화(大和)의 대(大)자는 크다는 뜻이지만 태화의 태(太)자는 대(大)보다 더 크다는 뜻이다.
남부여의 토멸을 꿈꾸고 있던 김춘추는 드디어 일본의 대화(大和)정부를 잡아 등뒤로부터의 복병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게되자 곧 당나라를 방문하여 당과 동맹조약을 맺고 돌아오는 길에 가우리 경비선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실라의 30여성을 탈취한 의자왕은 전승무드에 깊이 취하여 깨어날 줄 몰랐다.
바다건너 식민지인 월주(越州)로부터 찬란한 비취, 옥 등의 보석들과 비단, 장식품들이 매일같이 들어오고 멀리 류구(琉球-오끼나와)로부터 머리장식의 별갑과 붉은 산호 등이 조공지며, 심지어 남지나해로부터도 진귀한 진주 등이 수입되어 부여성의 사치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서기 660년 실라와 당의 연합군은 자신감에 도취해 있는 의자왕의 의표를 찌르며 실라왕자 김인문의 인도를 받으며 황해를 건너 덕물도로 집결한 후 대 남부여(백제) 토멸작전의 막을 올린다.
실라와 유명한 계배군의 황산벌 결전이 벌어졌는데 이날의 결전으로 계백장군과 그의 5천 결사대는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라병사들도 무려 1만여명의 목숨을 잃고 있었다. 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제 부여의 도성은 지척에 있고, 더 이상 실라군을 막아 싸울 부여의 용사들은 아무데도 없었다. 영광스럽지도 못한 승전 아닌 승리를 간신히 쟁취한 김유신은 씁쓸한 마음으로 계백과 그의 5천 장병들의 장렬한 최후에 깊은 경의를 표하고 상처로 얼룩진 잔병 4만명을 수습하여 황산벌을 뒤로 하였다.
적에게 잡혀 더럽히고 실라의 종이 될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자진하여 부여인의 정절을 지킬것인가? 여인들은 죽음을 택하기로 하였다. 품안에 고이 간직했던 은장도를 뽑아들고, 그녀들은 가날픈 목과 가슴을 찔렀다. 차마 용기가 없는 여인들은 서로의 가슴을 찔렀고, 그것도 못하는 여인들은 갸날픈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절벽을 뛰어내려 백마강의 물결속에 묻혔다.
남부여 전쟁직전 그 동맹국인 일본땅의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파견된 실라의 대해인은 그후 김춘추의 새잡기군(鳥取軍)이 모두 남부여 전쟁에 투입됨으로서 외롭게 되었다. 이때 백제계의 천지천황은 대해인의 처 누가다를 요구함으로 양측이 심각하게 충돌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시작된 싸움이 일본서기가 전하는 소위 임신대란이다. 대해인은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서 천무천황이 되었고 그의 손에의하여 일본최초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 등이 완성된다.
서기 657년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서국의 화산족과 동국의 가우리는 그동안 9차의 대전을 치르면서도 좀처럼 승부를 가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국의 대호(큰 호랑이)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 남생이 크말치에 오르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크마ㄹ치(大莫離支)
그리도 두렵고 무서웠던 연개소문이 죽자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당고종은 설인귀와 정명진을 출병시켜 제10차대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용맹한 남생은 절묘한 전략으로 이번 전쟁도 승리한다.
무려 11차의 대전에서 참패한 당나라에게 행운의 손길이 뻗어왔으니 바로 남쪽의 소국 실라가 동맹을 제의해 온 것이다.
이리하여 당은 설필하력으로 하여금 가우리군을 북방전선에 묶어놓고 소정방군을 실라와 함께 남가우리 공략에 투입하여 성공을 거둔다.
당군을 연속적으로 격파하여 그 위세를 떨치던 남생은 동생들의 철없는 질투와 모함에 걸려 적군인 당나라로 망명하였다가 당군을 이끌고 제나라인 가우리를 역격하여 900년 고씨왕조의 숨을 끊고 말았다.
옛 가우리의 대장군 대중상은 후가우리를 일으키고 흘안성을 서울로 하여 황제위에 오르니 고씨를 대신한 대씨가우리 왕조의 시작이었다.
이젠 죽은줄 알았던 가우리가 대씨왕조로 변신하여 다시 일어나 거란군과 동맹을 맺고 당을 치니 더 이상 견딜 수 없게된 당의 여제무측천은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용병군을 애걸하게 되었다.
시조 대중상의 뒤를 이어 후가우리의 황제가 된 대조영은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를 파견하여 당을 대신한 돌궐군을 맞아 천문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아직도 막강한 가우리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천문령 대첩으로 옛 가우리의 영토를 거의 다물해 내니 나라안에는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새 나라가 탄생하니 나라이름은 크고 위대하다는 뜻의 “신”나라이고, 한문표기로는 대신국(大震國)이라 하였다.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 제4부 북방제국의 흥망성쇠
대조영은 한웅, 배달님ㄱ.ㅁ 이래 천손(天孫)으로서 새나라가 다시 일어섰음을 하늘에 보고하고 온누리에 선포하기 위하여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 올라 천단(天檀)을 쌓고 제천의식을 함으로서 정식으로 대신국의 시조로 열제(烈帝) 위에 올랐다.
대조영 열제는 아직도 서쪽변경의 우리땅이 당나라에 점령당해 있음으로 이를 되찾기 위하여 그동안 반목상태에 있던 부여족과 쥬신족을 단합시키기 위하여 골안담수(경박호)에서 각 파의 대수령회의를 개최하였다.
천통(天統) 21년 서기 719년 대조영고황제(大祚榮高皇帝)가 돌아가시고 태자 대무예가 제위에 오르니 광종무황제(光宗武皇帝)이다.
고황제는 그동안 부여계와의 화합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대씨가우리(大氏高麗)에 복속되기를 거부해온 북국의 흑수부를 힘으로 다스리기로 결정히였다.
흑수부의 대수령 예속리기 칸은 동족끼리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을 바침으로서 결국 대씨가우리는 부여계와 쥬신계의 천년묵은 갈등을 씻고 민족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고황제의 다음 목표는 당나라의 숨을 끊어 옛 가우리의 원한을 푸는 것이었다. 우선 당의 동맹국인 실라를 견제해야만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실라의 반목상태에 있던 일본땅의 백제 이민정부와 친교를 맺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리하여 파견된 대가우리의 사절단은 야뫼도의 도성으로 찾아가는 동안 미개한 일본 원주토민의 습격으로 엉뚱한 희생을 당하게 된다.
대가우리의 특사 일행이 일본의 새 서울 평성(平城)에 도착한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당시 야뫼도 정부는 나라의 모든 중대사를 단군인 천황 한사람에게만 의지하고 있었다.
이때 대 가우리 대무에 광종황제의 뇌장을 읽어보면, *뇌장(賚狀-칙서,황제가내리는 성지) “무예가 이르노니 신천이 다르고 땅은 같지 않지만 그대의 소식을 듣기는 하였으니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 천조의 명을 받아 일본을 세워 대대로 덕을 빛내며 본(本家)과 지(支-分家)된지 백세(百歲-오랜세월)가 되었소…”
*천조(天-부여계는 자기들을 해모수이래 천손이라 함)
일본과 동맹을 성공시킨 대 가우리는 드디어 병을 일으켜 장문휴를 사령관으로 하여 대당 징벌군을 파병하여 산동반도로 상륙하였다. 이때 뜻밖에도 가우리 멸망당시 당에 의하여 강제로 이주당해 있던 옛 가우리의 유민들고 구성된 교포군단의 도움을 받게된다. 대 가우리군은 등주, 내주, 청주성을 파죽지세로 격파하여 중국의 심장인 동도(東都)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중국의 위기를 구하려는 실라군이 대가우리의 등을 공격해옴으로서 당에 파견되었던 장문휴 군단은 회군하여 민족을 반역한 실라군을 마천령에서 철저하게 징벌하였다.
서기 737년, 대가우리의 제4대 황제로 대흠무기가 등극하였다.
개원하여 대흥원년(大興元年)이라 하였다.
태학교(太學校)를 세워 한단고사(桓檀古史)를 가르치며 문치에 힘썼다. 그의 대당징벌 작전은 거란인 안록산을 이용하여 당을 분쇄하는 고도의 공작정치였다.
그동안 성장을 계속하여 이제 또다시 옛 가우리의 영광을 재현하며 천하의 맹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한 대가우리는 국력에 어울리는 서울이 필요하게 되어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벌여 도성을 완성하니 궁성을 비롯하여 사원, 태학(太學), 공원 등 쾌적한 생활공간이 구비된 대단히 선진적인 도시였다. 이도시는 대 가우리의 3경(三京)중 상경(上京)에 해당된다.
상경 용천부는 외곽성, 궁성, 황성으로 구성되며 외성의 길이 3989m 에 달했고, 10갈래의 큰길과 10개의 성문, 그리고 중앙의 큰 거리는 넓이가 110m 나 되었다.
성안의 북쪽과 동쪽, 서쪽에 각각 금원(禁苑)이 있고 그안에 정자와 연못 및 인공산이 있다.
그동안 대 가우리의 원조에 의하여 힘을 기른 안록산은 드디어 3진의 절도사가 되었고 40만 대병력을 갖게되어 이윽고 당의 토멸을 선언하게 되었다.
당을 토멸하기 위하여 평생을 노력했던 대흠무황제는 끝내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그 명을 다하고 말았다. 돌연 강력했던 제왕의 자리가 비게되자 다음의 황제위를 놓고 황족과 귀족들간에 치열한 경합이 일어나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심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서기 911년, 한반도의 유일세력이던 실라가 그 기력이 쇠진해지자 한반도의 대세력으로 성장한 궁예는 국명을 태봉국(泰封國)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으로 선포하고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며 금책을 쓰고 방포(方抱)를 입었다.
그는 외출할 때는 항상 비단으로 말꼬리를 장식한 백마를 탔으며, 동남동녀에게 번개(깃발과 우산)와 향과 꽃을 들려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또 비구승200명에는 범패(梵唄)를 부르며 그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그동안 주위의 막강한 열강들 틈에서 이리저리 쫓기며 옛 치우천황의 영광과 단석괴 시절을 꿈꿔오던 불쥬신의 후예 거란인들 에게 불세출의 대영웅인 야루철리지가 나타나 실위, 우돌, 해족을 정복하고 일약 거란의 이리근이 되었다.
★ 가우리와 마찬가지로 쥬신(朝鮮)의 이름도 여러 번 등장하니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1.단군쥬신(檀君朝鮮) 2, 신쥬신(辰朝鮮) 3. 말쥬신(馬朝鮮) 4, 불쥬신(卞朝鮮) 5. 개아지쥬신(奇子朝鮮) 6. 위만쥬신(衛滿朝鮮) 7. 이쥬신(李朝鮮) 8. 김쥬신(金朝鮮-北韓)
북방제국(諸國) 들을 정복한 야루철리지는 40만의 대군으로 남방의 강국 당으로 진격하여 하동대북을 휩쓸고 무려 9군과 중국인 95,000명을 포로하니 기고만장하던 당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철리지의 발밑에 무릎을 끓었다.
마침내 거란의 오랜 전통인 3년 질립제는 폐지되고 그는 종신 칸위에 올라 진정한 아버지(國父)가 된것이다.
서기 916년, 야루아버지는 용화주(龍化州)에 단을 쌓고 하늘에 고한 후 황제위에 올라 대성대명천황제라 하니 이때의 천황제라 함은 쥬신의 대단군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이 때에 왕건이 군사혁명을 일으켜 제 주인이던 선종 궁예를 죽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며 그 국명을 가우리(高麗)라 하였다.
이로서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의 가우리라는 이름은 3번씩이나 쓰이면서 서로 가우리의 정통을 인정받으려 하니 본서는 각각 구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부른다.
고 가우리(高句麗), 대 가우리(大高麗), 왕 가우리(王高麗)
한편 당을 공격하여 굴복시킨 거란의 야루철리지는 이번에는 같은 동족이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자기들을 야만족 취급해 온 대가우리를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황제의 숙부 할저 일행을 홀한성으로 보내 대가우리의 약점을 찾아내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망명객으로 가장한 할저일행의 홀한성 잠입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대 가우리 측도 신흥 거란의 급성장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터이었다. 때마침 망명해온 야루 아버지의 황숙은 대가우리측의 환영을 받으며 가우리의 귀빈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마침내 가우리 정부의 황족인 대소현을 포섭하는데 성공한 할저일행은 홀한성에 죽마경기가 있던날 대소현이 넘겨준 가짜마패를 이용하여 거란으로 탈출해갔다.
할저의 첩보활동의 성공으로 자신을 얻은 야루아버지는 대가우리 15부인 부여성을 공격하였다.
뜻밖에 완강히 버티는 대가우리군의 저항에 거란군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소현의 반역행위로 성문이 열렸고 마침내 부여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대소현의 안내를 받으며 가우리의 수비망을 교묘히 뚫고 홀한성으로 질주해간 거란군은 도성 30리 지점에서야 노상이 이끄는 수도방위군 2만을 만나게 된다.
노상의 결사대를 일거에 전멸시킨 거란군은 다음날 아침엔 벌써 홀한성을 철통같이 에워쌓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된 대가우리의 대인선황제는 소복에 목엔 세끼줄을 건채 양에게 이끌리며 성문을 나섰다.
항복을 위한 절차였다.
가우리 황제의 항복을 받은 거란은 홀한성을 접수하기 위하여 장수들을 입성시켰다.
그러나 나라와 함께 운명을 결심한 가우리의 용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다.
전투는 다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저항은 실로 완강하였다. 최신무기가 동원되고 무려 40만의 대군이 파상적으로 공격해 오는데는 더 이상 어쩔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성은 깨어지고…
도성을 점령한 거란군은 가우리를 통치해 보려 시도 하였으나 뒤늦게 홀한성의 비극을 전해들은 지방의 강군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홀한성은 대가우리인들의 정시적 고향이었다. 새로 동란국의 왕으로 임명된 인황왕은 홀한성의 파괴를 명령했다. 이리하여 북방대륙의 모든 신비를 간직했던 전설적인 대도시 홀한성은 장장 7주동안 불길에 휩싸이며 그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한편 조선 반도의 남단에서는 백제의 한을 풀기위한 후 백제 견훤군단의 날카로운 칼끝이 자신들의 목전에 도달해 있는 것도 모르고 한심한 실라의 왕은 그의 비빈들과 종척을 거느리고 계림의 포석정에 나아가 가을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넋을 잃고…
이때에 있었던 포석정의 비극을 삼국사기는 자세히 전하고 있으니, “갑자기 적병들이 쳐들어오자 왕은 왕비를 데리고 후궁으로 숨었고 종척 및 공경대부, 시녀들은 사방으로 도망가다가 모두가 업드려 목숨을 구걸하는데…, 견훤은 왕을 자진케하고 왕비를 탐했으며 부하들에겐 왕의 비빈들을 난행하도록 하였다.”
서기 936년, 마침내 태조 왕건은 10만대군을 동원하여 후백제를 격파하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로서 왕씨왕조는 가우리(高麗)의 명맥을 이어가며 배달민족 쥬신의 정통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황해도 평산의 김항보는 쥬신의 북방영토가 거란에 유린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혼돈강의 완안부로 들어가 그들의 대수령으로 추천되더니 그의 성씨를 따라 대김제국(大金帝國)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金 : 금나라가 아니라 김나라임
대김제국은 청령, 백산, 소빈, 예란 등지를 통일하여 옛 쥬신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노력하였다.
대김제국은 숙적 대요제국과 타문에서 싸워 승리함으로서 거란→요→대요제국을 거치며 천하를 호령하던 야루씨의 거란을 208년만에 종말을 고하게 하고 계속하여 중국을 정복하니 이후 중국인들은 불쥬신계의 거란으로부터 다시 신쥬신계의 김씨들을 새로운 주인으로 모셔야만 하였다.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 제5부 조선해군과 대제독 이순신
13세기초(서기1206년)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대영웅 테무진은 주위의 여러나라를 정복하고 역사상 가장 크고 강대한 대제국을 세우며 스스로 크한(汗-칸)의 위에 오르니 곧 징기즈칸(成吉思汗)이다. 강력했던 배달의 대김제국(大金帝國)도 결국 중화족에 대한 주인노릇도 몽골왕실에 양보하고 물러설수밖에 없게 되었고 광풍을 맞은 촛불처럼 위태롭게 되었다.
세계 최강의 몽골기병의 공격을 받은 왕가우리(高麗)는 큰 혼란에 빠졌으나 다행히도 나약한 세습왕들을 밀어내고 무인(武人)들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신속하게 대처하기 시작하였다. 기병중심의 몽골군과는 달리 가우리측은 산악국가의 장점을 살려 모든 백성을 산성으로 집결시키며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마침 남해안을 침범, 약탈행위를 자행하는 일본의 도적들을 소탕하려는 가우리측과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몽골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며 연합군 구성에 합의하였다.
원정군의 도독사(都督使-中軍)는 김방경이 맡고 부사는 김선과 김문비로서 전함 300척, 상륙정 300척, 수송선 300척에 육군이 8,000명, 해군이 6,700명 그리고 몽골측 홀돈이 이끄는 군단을 합하여 출정하니 려몽연합군은 모두 29,700명이었다.
대체로 일본의 해적들 중에서도 일기도와 대마도 도적들이 가장 악랄한 행동을 많이 해왔었다. 오랫동안 별렀던 일이었기에 가우리군들도 이번 기회에 그 뿌리를 뽑을 결심으로 눈에 보이는 해적들을 모조리 살해하여 버렸다.
그 해적섬 일기도의 비극은…
밤이 깊어질수록 폭풍우는 그 강도를 높여가더니 마침내 엄청난 태풍으로 변하며 가우리의 군선을 마구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 엄청난 위력앞에 밝다만은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말았다.
5월 21일 김방경의 가우리 군단은 대마 북도의 동쪽 사가(佐賀)만에 상륙하여 해적들의 근거지를 철저히 파괴하여 그 뿌리를 뽑아 일망타진의 쾌거를 이루었다. 이 소탕전은 5월 26일 까지 만 5일동안 계속되었다.
일기도를 철저히 분쇄한 가우리군단은 몽골의 동로군단(東路軍團)과 합류하여 일본해적의 마지막 본거지인 하카타(博多), 6월 6일 려몽연합군은 시카노지마(志賀島)에 상륙전을 전개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하카타만에서 결사적으로 달려드는 일본군을 맞아 최초의 해전을 벌여 일방적인 쾌승으로 일본군의 기를 완전히 꺽으니…
그리고 1281년 7월 1일 밤, 느닷없이 불어닥친 태풍은 3500여척의 10만명의 강남군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이 바람이 소위 일본인들이 신의 가호라고 믿는 두번째의 신풍(神風-가미가제)인 것이다.
생사기로에서 쫓기던 왜적들 2만여명은 할 수 없이 두목 아지발도의 명에 따라 운봉으로 집결하였다. 가우리 조정으로부터 아지발도의 도적들을 토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는…
지난 7천년간 우리의 선조들의 얼이 숨쉬던 고조선의 옛땅, 가우리와 발해제국 그리고 김제국을 거치며 우리민족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깃든 우리의 국토…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까지 진출한 뒤 좀처럼 국경을 넘을 생각은 않고 갖은 유치한 핑계를 다동원하며…
대마도주 소요시노리는 그의 아들 요시토모와 가짜중 겐소(玄蘇)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측의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요시토모는 조선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정해왜변의 주동자였던 오도(五島)의 해적두목 산삼보라, 망고시라, 긴시요로 등을 붙잡아 와서…
정여립의 사건을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한 왕 이연은 이 사건에 모두를 무차별로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그 수효가 무려 1천여명이 넘으며 그중에는 5살짜리 어린아이로부터 82세의 노파까지 섞여 있었다.
유성룡은 왕 이연에게 이순신을 조심스럽게 추천하여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로 보냈다가 곧이어 고사리진의 첨사로 전임시키더니 불과 수일 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전격 발령을 내렸다.
1591년 3월 9일 일본의 대추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의 중신인 5명의 타이로(大老) 등을 오사카성으로 소집하여 조선침략을 결정하였다. 이 역사적인 오사카 회의결과에 의거하여 전국의 영주들에게 즉각적으로 선박건조와 병사의 징집 배당량을 할당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당시 나이 40세, 십자가를 군기에 그려넣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영세명은 오거스틴, 조선침략군의 선봉으로 참전하여 갖은 못된짓을 다한다.
가토 기요마사(加騰淸正), 당시 나이 38세,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南無妙法蓮華經”의 깃발을 들고 그의 배에 부처님을 모신 불당을 세워놓았다.
부산진성에서 혈전을 벌리고 있을 때 정발을 지원하기 위하여 달려온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왜적과 백병전을 전개하며 싸우다 전사하였고 노장 정발도 최후까지 사투를 벌리다. 결국 100여 군사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파죽지세로 조선을 강탈한 일본은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명장을 만남으로서 그 기세가 꺽이게 된다. 명제독 진관의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經天緯地之村補天浴日之功” (하늘로 날을 삼고 땅으로 씨를 삼아 온 천하를 경륜하며 다스릴 인재로서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공을 세웠다.)
1592년 4월 12일 완전한 전투함 귀선(거북선)이 진수 되었다. 이배는 길이가 27.6m 머리에서 꼬리까지는 무려 33.7m에 이르고 넓이는 상장이 9.2~10.4m 높이는 6.6m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최선진적인 거함이었다.
이순신 함대의 처녀출전은 전라좌수영의 모든 함선이 총망라되었으나 우선 주력 전투함인 판목선이 24척, 통신 연락선인 협선이 15척, 위장선인 포착선이 46척, 총85척이었다.
그러나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군함은 거북선 1척과 판목선 23척 뿐이었다.
다카토라 함대를 맞은 이순신의 기동함대는 최초의 본격적인 해전능력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때 새로 함재포로 개량한 구경 16cm의 거포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으며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 등도 각각 제 목적에 맞는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서 왜적들을 남해에 수장시키는데 성공하였을 뿐아니라…
이순신의 함대는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 전법과 정(丁)자 타법으로 적의 함대를 괴멸시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300년이 지난 1905년 5월에 벌어진 남해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멸한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도코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순신 연합함대 제2차 출동전과
적의 전함 : 69척 격침(3척은 나포)
적의 병력 : 10,120명 도살(적장 來島道之, 龜井玆矩 포함)
아군피해 : 군함손실-없음, 전사자-11명, 부상자-47명(이순신도 어깨에 총상을 입음)
9월 1일 오후 3시 30분경, 초량목을 통과한 이순신의 기동함대는 81척은 일본의 대함대 470척이 집결해 있는 부산진을 향해 돌격을 해들어갔다. 이 싸움은 6대 1의 열세임에도…
이후 왜군은 조선의 육군으로부터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국산 육상용 대포들을 높은 고지에 배치하여 왜선을 엄호하고 있으므로…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속에 뛰어들어 결사전을 감행하는 이순신 기동함대…
오후 4시부터 시작된 결사전은 오후 7시경에 이르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만세… 그리고 또 만세…!
이순신 함대의 눈부신 활약으로 남해안의 제해권은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
임진년 5월 4일 제1차 기동함대를 이끌고 출동한 이후 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전개하였다. 그동안 격침시킨 적선이 무려 207척, 대파한 적선은 152척, 도살시킨 일본군이 무려 33.780명.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해전이 세계 도처에서 있어왔지만 격침 359 대 0, 희생자 33,780 대 243,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한 조선해군의 대제독 이순신의 이와 같은 불멸의 기록은 영원히 세계 해전사의 신화로 남을 것이다.
이순신 함대의 남해안 봉쇄로 인하여 평양에 주둔 일본육군은 심각한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게 되어 할 수 없이 후퇴를 감행하게 되었다. 1월 21일 패장 고니시 유키나와는 간신히 한성에 도착한다. 그러나 철군도중 1400명이 죽고 목숨을 유지하고 이있는자는 겨우 6천 6백명 뿐이었다.
해군사령관이 된 육장출신인 원균은 일본연합함대의 기습을 받고…
그동안 이순신에 의하여 탄생되었던 세계최강의 기동함대를 모조리 잃고 원균 자신의 기함마저 불에 휩싸이자…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결사함대를 형성한 이순신은 적의 함대를 야습으로 격멸하고…
기울어지는 국가의 운명을 한판승부에 걸고 부족한 화력과 함대를 천연환경과 물길의 흐름으로 동맹군 삼아…
불과 12척의 초라한 이순신함대를 발견한 일본에 113척의 최신 정예함대는 이순신의 유인에 걸려 명량의 좁은 해협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침내 이순신제독의 기함에는 전 함대의 총공격을 명하는 깃발이 올랐고 이를 주시하며 휴식을 취하던 9척의 전함들이 일시에 달려들며 하늘을 뒤집을 듯 함포를 벼락같이 발사하였다. 이에 혼비백산한 일본함대는…
이순신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이 극치를 이루며 세계 해전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창조되고 있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명량해협은 일본군의 패잔선과 시체들로 지옥불을 연상케 하였고 이를 바라보는 제독은 눈에는 소리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로서 그에게 지워진 모든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되었다. 조국을 침략해온 왜적들은 이제 곧 물러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병참의 지원없이 북진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평양철수의 피눈물과 함께 육군의 선봉대장 유키나가가 경험했던 일 아닌가.
명량대첩 !
이것은 확실히 인류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첩중의 대첩이었다. 이 한판승부로 인하여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나왔고 그동안 승승장구하던 왜군들은 스스로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의 해군은 대제독 이순신의 이름과 함께 그 빛나는 전통과 영광을 계승해 가게 된다.
※ 이 대쥬신제국사는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를 보시지 못하신 분을 위하여 간단하게 그 내용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워드화 해서 글을 올렸습니다.
따라서 인용된 간단한 설명문은 본문과는 다르며 대체로 보아 이야기의 흐름이나 분위기 정도를 소개하는데 그칠 수 밖에 없음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대쥬신제국사 본문은 모두 5권으로 무려 12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임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대쥬신제국사는 회화풍의 그림이야기로 되어있으며 그 그림은 1995년도에 국내와 국외에서 전시가 되었다.)
나는 1995년 처음 이책을 보고 상당히 놀라웠다. 이전에 보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전개하고 그 맥을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에 의해서 역사의 꿈을 다시 되살리며 역사는 새로이 전개 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 위의 글은 지난 6월 KBS역사스페셜폐지에 당혹하여 제가 오래전에 읽었던 대쥬신제국사를 워드화해서 역스게시판에 단계적으로 올린글을 여러분과 함께 하기위해 모아 보았습니다.. 한해를 잘마무리 하시고 앞으로도 더욱힘찬 활동을 바라겠습니다...회원님들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첫댓글아니 세상에~ 이거 정석희님이 아니십니까...정말로 반갑습니다...몇일전에 가입인사란에 글을 올렸을때에 저는 묵경학인님이 정석희님이라고는 전혀 알지를 못했는데...제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말입니다..이글을 보고 프로필을 보니 메트릭스라고 되어잇지 뭡니까...메트릭스는 정석희님이 역스게시판에서 사용하시던 닉.
경천애인님 이렇게 반겨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시작과 끝이 같아야 하는데 삶이 그렇게 나두지 않더군요. 공기가 없을때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듯 역스가 조기종영 되고나서 보니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것가를 느낍니다. 우리가 좀더 역스를 사랑하고 아껴주었드라면...하는 후회가 스쳐지나갑니다.
정석희님의 그열정과 수고는 역스게시판에서 역스부활을 위해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모르는 이가 없을것입니다...님과 같은 분들의 그러한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있었기에 kbs가 재방영결정을 하기에 이른것이지요...작금이 중국역사왜곡사태가 터지니 역스의 그 소중함과 그 때 저희들의 주장이 얼마나 옳앗는가를
정부와 언론과 학계와 kbs가 다시한번 크게 느끼고 이번 봄개편에 반드시 역스가 부활할것입니다..공영방송이 먼저 나서서 이런 대비를 해야하는데 완전히 역사의 수례바퀴를 꺼꾸로 돌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럿으니 말입니다..학계,정부,정치인,언론이 들이 이제서야 역사의 중요성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는것같으니
첫댓글 아니 세상에~ 이거 정석희님이 아니십니까...정말로 반갑습니다...몇일전에 가입인사란에 글을 올렸을때에 저는 묵경학인님이 정석희님이라고는 전혀 알지를 못했는데...제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말입니다..이글을 보고 프로필을 보니 메트릭스라고 되어잇지 뭡니까...메트릭스는 정석희님이 역스게시판에서 사용하시던 닉.
...이거야 원...암튼 이렇게 뵙게 되니 기쁜마음 그지없습니다...오늘 올려주신 대신제국사도 너무 감사합니다...그리고 역사스페셜이 다시 방영되고 역사스페셜을 통하여 잃어버렷던 우리역사가 다시회복되어 만천하에 알려지는 그날까지 함께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정석희님을 뵙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다시한번 드립니다...님도 건강하시고 자주 카페에 들러 주시고 많은 활동 부탁드리겠습니다...
경천애인님 이렇게 반겨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시작과 끝이 같아야 하는데 삶이 그렇게 나두지 않더군요. 공기가 없을때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듯 역스가 조기종영 되고나서 보니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것가를 느낍니다. 우리가 좀더 역스를 사랑하고 아껴주었드라면...하는 후회가 스쳐지나갑니다.
그러나 이모든 것들이 역사의 필연의 법칙이 아닐까요. 신단재의 역사관에 나타나듯 我와 非我의 투쟁인 것을...이제 우리 힘을 모아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합시다. 이땅에서 거짓된 역사가 사라질때까지...
정석희님의 그열정과 수고는 역스게시판에서 역스부활을 위해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모르는 이가 없을것입니다...님과 같은 분들의 그러한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있었기에 kbs가 재방영결정을 하기에 이른것이지요...작금이 중국역사왜곡사태가 터지니 역스의 그 소중함과 그 때 저희들의 주장이 얼마나 옳앗는가를
정부와 언론과 학계와 kbs가 다시한번 크게 느끼고 이번 봄개편에 반드시 역스가 부활할것입니다..공영방송이 먼저 나서서 이런 대비를 해야하는데 완전히 역사의 수례바퀴를 꺼꾸로 돌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럿으니 말입니다..학계,정부,정치인,언론이 들이 이제서야 역사의 중요성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는것같으니
한편으로는 뒷북치는 이들이 도대체 한심하기가 짝이 없고 ,편으로는 이나마 제 정신을 차려 가는것 아 그마나 다행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해봅니다...말씀대로 이땅에서 거짓역사가 사라질 까지 같이 노력합시다~~~
이 글 전부터 이 분의 활약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번 뵐려고도 하는데, 라이파이로 유명세 떨쳤던...... 그러고보면 위에 소개된 저서의 작가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