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팔공산(八公山) 파계사(把溪寺)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 (중대동 7)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
창건 및 연혁
파계(把溪)의 뜻은 한자로 ‘잡을 파(把)’, ‘시내 계(溪)’로 '시냇물을 잡다(把溪)'라는 뜻이다. 따라서 ‘파계’는 9갈래로 흩어진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의 이름이다. 9갈래 물길은 일주문과 진동루 사이에 현존하며 매우 깊다고 전해온다. 진동루(鎭洞樓)는 ‘파계사’라는 이름만으로도 9줄기 물의 기를 진압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여 지어진 건물이다.
혹은 파계사의 좌우로는 9개의 계곡이 있는데, 곧 구룡(九龍)을 상징한다. 파계사 이름은 이들 아홉 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나와 사회를 혼란케 하지 못하도록 잡아둔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파계사는 804년(애장왕 5)에 신라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心地)왕사가 창건하였다. 그런데 자세하게 알려진 연혁이 없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05년 중창하였다. 이후 1695년 현응 스님이 중창하였다. 이때부터 왕실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았다. 왕실과 인연을 사적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숙종 계유년(1693년) 시월 초닷새 밤에 임금은 스님이 대궐로 들어오다 이내 자취를 감추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상서로운 빛이 대궐의 안을 비추자 사람을 시켜 빛이 솟아나는 곳을 찾아보게 하였다. 그 사람이 남대문에 이르니 파계사의 영원 스님이 관서 지방을 두루 거쳐 한양의 여각에서 머물고 있었다. 임금은 스님을 불러 놓고 손을 잡으며 기뻐하였다. 스님을 수락산으로 보내어 칠성님에게 백일기도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1694년에 원자(元子)가 태어났다. 1695년 스님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리고 예우로 전송하면서 내탕금[임금 개인 재물]을 주었다. 이것으로 칠성전, 백화루 지었다.
또 사적기와 조금 다르게 사찰측에 구전되는 이야기가 있다.
현응 스님은 극심한 불교 탄압 정책을 왕에게 탄원하기 위해 한양으로 갔다. 스님은 3년간이나 도성에 머무르며 왕을 만날 기회를 가지고자 하였다. 그런데 결국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그만 포기하고 파계사로 내려오기 위해 한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되었다. 위 사적기 내용처럼 이날 밤 숙종이 신이한 꿈을 꾸고 결국 왕과 스님이 만나게 되었다. 태자를 얻게 해달라는 숙종의 청을 받은 스님은 당시 삼각산 내원암에 있던 농산 스님과 백일기도를 하였다.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 스님이 숙빈 최씨의 꿈에 나타났다. 곧 숙빈 최씨는 임신하게 되었다. 농산 스님이 죽어 태자로 환생한 것이다. 이 태자가 이후 영조다.
1979년 원통전의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영조의 어의(御衣)와 발원이 나왔다. 이로 인해 현응 스님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 부분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발원문 가운데 파계사를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다는 표현이 있다. 현응 스님의 노력으로 파계사는 조선 중후기에 활발한 사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성보문화재
일주문을 지나 사역으로 들어오는 오른쪽에 부도전이 있다. 현응대사의 부도와 비(1701)를 비롯한 여러 스님의 부도와 비가 있다.
경내에는 2층 누각인 진동루에 들어서면 법당인 원통전이 높은 기단 위에 서 있고, 그 좌우에 적묵당과 설선당이 있다. 이 건물 뒤쪽으로 기영각·산령각·응향각·미타전 등이 있다. 기영각은 숙종·영조·정조의 어필을 보관하여 어필각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어필이 전해지지 않는다.
원통전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이 있다. 높이 108㎝다. 1979년 6월 개금불사 때 발견된 복장 발원문에 1447년(세종 29)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그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원통전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보물)다. 1707년 왕실에서 발원하여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