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무수히 시도했던 새로운 등반 중의 하나가 93년의 토왕성빙폭 야간 단독등반이었고 이외에도 과감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앞선 등반을 많이 시도했다. 많은 산악인들이 히말라야로 갈 때 그는 거벽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요세미티 등반을 했다. 벽 하나를 등반하는데 짧게는 3~4일에서 길게는 열흘이 걸리는 요세미티에서도 그는 조디악을 혼자 등반하기도 했다. 이런 등반을 했다고 해서 그가 목숨을 하찮게 여겨 불나방처럼 돌격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도 사실 조심스럽고 죽음이 두렵다. 선뜻 다가서지 못해 긴장할 때도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너무 부풀려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의 등반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다. 수많은 실패가 쌓여 봉우리 정상에 서는 등정이나, 벽을 다 오르는 완등을 이루었고 생명의 고비 또한 숱하게 넘겼다. 86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등반에서는 캐신리지 6,000미터에서 친구 이종관씨와 조난을 당한다. 그들 곁에는 하얀 낭떠러지와 고소증과 추위, 배고픔만이 남아있었다. 텐트에서 구조 또는 죽음을 기다리며 정씨는 애국가를 불렀다.
“노래는 하고 싶은데 가사 생각나는 게 없는 거예요. 귀에 딱지가 앉은 애국가를 떠올렸어요. 그 다음에 어머님 은혜를 불렀고요. 내 딴에는 이승을 하직하는 송가였어요. 노래를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서, 울었죠. 무언가 억울하기도 하고.” 결국 고립된 지 5일 만에 구조대가 출동해 살아났다. 89년에는 안나푸르나 1봉을 8,091미터까지 등반하고 내려오는 길에 칼날능선에서 고꾸라져 벼랑으로 떨어진다. 천우신조로 겨우 로프를 잡아 살긴 했지만 그 때 떨어지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
첫댓글 이분의 해외원정 일정에 내가 섞여 있었다는 것은 나 나름대로 영광이였다. 내가 산 생활에 있어서 지난 시간과 현재도 이분은 나의 멘토이였지만 향후 미래에도 나에겐 영원한 멘토링이 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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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 설마 돌팔이를..??@@ 그럼 갸도 돌팔이..??
갸 ~라면 누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