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갈곡리(葛谷里)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었는지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 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이 마을이야말로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이 마을은 6.25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커다란 고개가 동쪽에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려면 20여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라 한다.
이렇게 험한 첩첩 산중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10년 전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방지거,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본당 칠울 공소가 설립되고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2년 송도(개성)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된다.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된다. 1934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된다. 1947년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 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된다. 1955년 1월 군종 신부님이셨던 에드워드 마 신부님의 도움으로 현재와 같은 공소 성당이 건립되어 노기남 대주교님의 주례로 축성 봉헌되었다. 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소이다.
법원리 본당이 약 3.5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주일에는 법원리 본당 미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신자들의 영신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 갈곡리 공소의 발자취
○1896년 김 바오로, 김 방지거, 박 베드로 가족이,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함. 이들 가족들은 옹기를 만드는 옹기쟁이와 옹기를 팔러 다니는 도부꾼들이었고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짐.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본당 칠울공소가 설립되고 김근배 바오로가 초대 공소회장에 선임됨.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남.
○1902년 송도(개성)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약현 본당에서 송도본당 공소로 이관됨.
○1909년-1910년경 칠울공소가 활성화되어 신자수가 246명으로 증가함. 이때 송도 본당신부님은 르 장드르 신부님이셨음.
○1912년 3월 13일과 1915년 3월 2일 두 차례, 송도 본당 신부님이신 르 장드르 신부님이 서울 주교관 방문차 공소를 다녀가심.
○1918년 12월 11일-14일까지 3박 4일 동안 교구장이신 뮈텔 주교님께서 공소를 방문하시어 두 사람에게 세례를, 일곱 사람에게 보례를, 한명에게 유아세례를 주심.
○1919년-1920년 신자 수가 186명으로 조금 감소함. 이때 르 장드르 신부님께서 프랑스로 귀국 하시고 3년 전 1917년 9월에 사제 서품을 받으신 안학만 신부님께서 새로 부임하심.
○1925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공소는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됨.
○1934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됨.
○1947년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 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됨.(초대 이계광 신부님)
○1953년 칠울공소가 설립된지 55년만에 최초의 공소출신 최창성 시메온 신학사가 사제 서품을 받음.
○1954년 4월 22일 지금은 옛 모습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존되어온 공소강당이 준공 됨.
○1954년 공소출신 두 번째 사제가 탄생함. 그동안 부산교구에서 활동하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김남수 루가 신부님께서 사제서품을 받으심.
○1955년 1월 9일 군종 신부님이셨던 에드워드 마 신부님의 도움으로 공소 성당이 건립되어 노기남 대주교님의 주례로 축성 봉헌됨.
○1963년 공소출신 세 번째 사제가 탄생함. 현재 주교회의 의장이시며 광주 대교구장으로 계시는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심.
○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됨.(초대 김병기 다두 신부님)
○1970년 공소출신 네 번째 사제가 탄생함. 현재 여의도 본당 주임 신부님으로 계신 김충수 보니파시오 신부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심.
○1973년 공소출신 다섯 번째 사제가 탄생함. 서울대교구 9지구장으로 계셨던 최준웅 바르나바 신부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심.
○1976년 공소출신 여섯번째 사제가 탄생함. 현재 가톨릭 중앙의료원장으로 재임하고 계시는 최영식 마티아 신부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심.
○1976년 공소출신 일곱 번째 사제가 탄생함. 조명호 다두 신학사가 원주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심.
○1983년 서울대교구 성체대회 및 성체거동이 이곳 칠울공소에서 거행됨.
○1990년 2월 2일 공소출신 여덟 번째 사제가 탄생함.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신 현재 인천 서운동 주임 신부님으로 계신 김영욱 요셉 신부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심.
○1994년 가톨릭대학 초대 총장으로 재임하시던 최창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영광스런 주교 서품을 받으시고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심.
○1998년 노후된 공소 성당이 지붕과 내부를 수리하여 새롭게 단장함.
○1999년 최창무 안드레아 주교님께서 대주교에 임명되시어 공소 방문 후 광주교구로 가시며 이듬해에 광주 대교구장에 착좌 하심.
○2002년 5월 성령강림 주일날 고향 칠울을 떠난 이들이 서울대공원에 모여 그동안 고향과 서로에게 무관심했음을 뉘우치며, 서로의 친교를 위하고 또한 고향을 보존하고 발전시키자는 취지와 함께 애향회가 발족, 최영식 마티아 신부님의 주례로 창립미사가 봉헌됨.
○2004년 7월 5일 서울 대교구에서 의정부 교구가 분구 설립되고 이한택 요셉 주교님께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 착좌하심.
○2005년 4월 10일 이한택 요셉 교구장님을 모시고 공소 성당 건립 50주년 기념미사 및 사료 전시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함.
◆ 칠울 공소 출신 수도자 근황
○ 현재 갈멜수도원에는 87세이신 최 성삼의 마리 이사벨 수녀님과 83세이신 최 미카엘라 수녀님 두 분 노령의 수녀님이 생존해 계시다. 그외 최 알렉산델 수사님은 혜화동 보나벤투라 수도원에서, 김 에스텔 수녀님께서는 횡성 안나의 집에서, 김 마리폴 수녀님은 춘천 주교좌 죽림동 성당에서, 최 라파엘라 수녀님은 제주 성 글라라 수도원에서, 전 아녜스 수녀님은 수유1동 성당에서 활동하고 계시다(2005.9).
◆ “칠울(葛谷里) 공소” 관련 기록 : Mutel 주교 일기
○ 1905년 1월 29일자 : 처음 ‘칠울’ 교우촌의 이름이 나타남 【주(註)】
○ 1912년 3월 13일 및 1915년 3월 2일 :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1866~1928년) 신부가 칠울 공소를 거쳐 서울 주교관 방문 【주(註)】
* 르 장드르 신부 : 1909년 5월 부산 본당 주임에서 송도(개성)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1919년 5월까지 재임하다가 프랑스로 귀국함
* 안학만(安學萬, 루가) 신부 : 1917년 9월 22일 사제품을 받은 후 서산 본당에서 사목하였고, 1919년 5월 연례 피정이 끝난 뒤 송도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1919년 10월 30일에 서울 출발
○ 1918년 12월 11일~14일 : 뮈텔 주교의 칠울 공소 방문 【주(註)】
【주(註)】 Mutel 주교 일기문 발췌
○ 1905년 1월 29일 영하 11도. 북풍이다. 며칠 전부터 이곳에 다시 온 가련한 시프리엥 발레 신부가 9시 30분 미사에 참석했다. 칠울(Tchil-oul)교우들이 사냥에서 잡은 아주 잘생긴 노루 한 마리를 내게 갖고 왔다.
○ 1912년 3월 13일 영하7.5도. 르 장드르 신부가 그의 칠울공소에서 송도로 돌아가기에 앞서 우리를 만나러 왔다.
○ 1918년 12월 11일 8시 반에 20리 상거의 칠울로 가기 위해 떠났다. 날시가 좋고 길도 좋았다. 별 고생 없이 20리 길을 갔다. 10시 반에 도착했다.
○ 1918년 12월 12일 성인 영세자 2명, 보례7명, 유아 영세 1명. 온몸이 흉터투성이이고 얼굴이 부어 오른 어떤 불쌍한 불구자의 고해를 듣기 위해 마을 끝까지 갔다. 이 불쌍한 모습은 우리 죄 때문에 매질을 당한 위대한 희생자를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이자의 경우는 자기 죄 때문이다. 로일(露日)전쟁 때 그는 군대를 따라갔었는데 거기서 이 병에 감염되었다. 그것은 필시 성병일 것이다.
어제는〔판독 안됨〕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두 노파에게 종부성사를 주었는데 그중 김 수산나는 회장의 모친이다. 10년 동안 맹인으로 지낸 그녀는 작년에 시력을 되찾았다. 오늘의 나이 79세이다.
저녁때 떡 12바구니를 받고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니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 1918년 12월 14일 9시에 공식적으로는 북암리(北岩里)로 불리는 송굴암 공소로 떠났다.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전체 거리는 약 10리이다. 10시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때 매우 적은 양의 눈이 내렸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갰다.
◆ “칠울(葛谷里) 공소” 연말 교세 통계표
○ 1898~1899년 : 약현 본당(즉 문밖 본당)의 초대 주임 두세(G. Doucet,丁加彌) 신부의 통계표에 처음 ‘칠울’이 나타남 → 정식 ‘칠울 공소’의 설립(신자수 : 65명)
○ 1899~1900년 : 신자수 145명
○ 1901~1902년 : 칠울 공소, 약현 본당에서 “송도(개성)새 본당”관할로 이관 (신자수 196명)
* 루블레(Rouvelet, 黃惠中) 신부 : 1900년 10월 9일 한국에 도착하여 말을 배운 뒤, 1901년 ‘송도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
○ 1909~1910년 : 송도 본당의 르 장드르 신부(칠울 신자수 : 246명)
○ 1919~1920년 : 송도 본당의 안학만 신부(칠울 신자수 : 186명)
갈곡리 공소에 대한 자료 수집에 갈곡리 애향회 조경환 마테오 회장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한국의 농민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내용, 사진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