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와 함께한 어린시절의 추억
나는 학장초등학교 서편교사 뒤편에 있던
학장동 홍깨마을 아래각단 고향집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결혼 사진 홍깨마을 웃각단 외갓댁에서(1952년) 우인대표로 온 철도청 부산공작창 직원들
당시 철도청 직원(특히 기술직)들은 국가 기간산업요원이라 6.25전쟁중이었지만 군면제 였습니다.
김해읍 동상동 사람인 아버지께서는 서면
철도공작창에 다니셨는데 공작창에 조역으로
근무하던 외가 친척의 중매로 어머니와 결혼
하시게 되었다. 결혼식은 학장동 홍깨마을 웃각단 외가집에서
치르시고 당감동 철도관사에 신혼살림을 차렸다네요..
이듬해 어머님이 나를 임신한후 인 음력6월경에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학장초등학교 서편교사 뒤편 홍깨마을 아래각단에 있던 이웃사람의 집을
구매하여 부모님이 이사한지 3~4개월 후인 9월에 내가 태어났다.
1954년 돌사진
1956년 고향집뒤 텃밭에서 뒤편에 학장동 포구나무가 보인다
1968년 홍깨마을에서 모친과 막내동생, 왼쪽에 학장초교 서편교사, 그 오른쪽에 앞점방이 보인다.
뒤편에는 장산과 황령산도 보인다.
1971년 고향집앞 들판에서 고향친구와 함께 뒤편은 낙동강 을숙도 방향
기와집옆 버드나무에 둘러싸인 초가집이 우리집임 1966, 초등6학년때 담임선생님과 학장초교 1년 후배들
홍깨 아래각단 고향집 1971 버드나무가 안보임. 중3때인 1968년에 버드나무를 성냥공장에 팔았던 것 같다.
홍깨 아래각단 고향집 (1971년) 어머님 ,동생들, 이모님 부부와 함께
외할아버지 께서는 부모님이 결혼하신 것을 보고
난뒤 그 해 말에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 가셨다고 한디.
그래서 외할아버지 얼굴은 보지 못했다.
어머니 형제자매는 장녀인 어머니와 이모 두분 뿐이셨다.
그러다보니 외할머니 께서는 첫 외손자인 나를 애지
중지 보살피셨다고 한다.
어디 다니실때는 내손을 잡고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
구덕재에서 본 학장동 모습 1956년도
구덕입구에 있던 작은 외당숙댁으로 구덕산 승학사(현 대남병원)로
주례 온골입구 신작로옆 들판쪽에 있던 천리교회로
주례 천리교회 1955년도
학장동 새밭에서 참외밭을 하는 외할머니 의동생집에 참외 먹으러 갈때도 낙동강가 장인도로
이사가기 전에 학장동 학성마을에 살던 큰 외당숙댁과 심지어는 엄궁에서 을숙도쪽으로 뱃놀이
가실때도 자랑삼아 데리고 다니셨다.
구덕입구 영찬이 형 집 부근 모습 1982
감전동 장인도 외6촌 식구들 '60년대, 장인도 낙동강둑에서..
경복이 형님,영찬이 형,성찬 동생,순복이 형,윤복이 형,길연이,창수,영숙이
초등1학년때 부평시장에서 참기름 집을 하시던 외할머니 동생인
이모할머니댁에 가실때도 데리고 가셨고 창선동 동아극장 맞은편
광복로변 적산가옥에서 1층은 점포세를 놓고 2층에 사시던 친척
집에 다니러 가서는 티브이도 처음보고 일본방송도 처음 봤다.
그리고 그날 그집 2층에서 4.19의거 데모대가 광복로에서 관용차를
부수는 것도 봤다.
동아극장 옥상에서 본 국제시장쪽 광복로 현 세명약국 주변 1930년대
창선동 광복로 주변, 동아극장과 문화극장 1961년 5.16 직후
1959년도 초여름에 외할머니댁을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는데 그해 추석전날부터 들이닥친 사라호 태풍과
폭우로 기와집에 비가 새서 밤새 세수대야와 물동이를 대어 놓고
물을 받아 내고 걸레로 수건으로 물을 딱아내던 기억이 난다.
학장초등학교 본관 뒤편에 새로지은 기와집 외할머니댁 앞에서 여동생과 함께 (1960년)
낮잠자고 있는데 깨워서 사진을 찍다보니 둘다 눈이 게슴츠레하다..
그해 봄에 이모님을 시집 보내시고
그 다음해 가을에 외할머님께서는 기와집을 팔아
논을 사고는 우리집에 살림을 합치셨다..
외갓집에 아들이 없다보니 작은 외할아버지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들이시어 내 외삼촌이 되었다.
그때 양자로 온 외삼촌댁(외삼촌 부모님)에 논을 몇마지기 줬다고 한다..
이모님 결혼 사진 1959년도, 외가 식구들과 함께, 아버님이 여동생을 안고 있고, 그 오른쪽 어머님은
나무에얼굴이 가리셨네요, 맨 왼쪽 아래가 내고요. 이모님 옆이 외할머니 입니다..
봉도외삼촌,봉선외삼촌,혈청소할머니,숙자이모,장인도형수,감천이모,영주동이모 모습도 보인다.
혁명공약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성명)
1961년 5.16 군사혁명이 나고 혁명공약을 아침조회때 마다 낭독하던 그 시절
그 해 여름 7월말에 내 세살밑 6살이던 여동생이 뇌염에 걸려 부산 위생병원에
입원하고 전염병이 났다고 학장초등학교는 여름방학때가 되어 휴교하고 동네에는
출입제한 줄을 치고 야단났었다. 부산위생병원에 입원한 여동생은 계속 치료를
받고 있고 9월경에는 지병이 있으시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서편교사 우리교실 골마루에서 보니 우리집 초가지붕에 하얀 저고리가
얹혀져 있는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보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우셨다.
초등2학년 9살이던 그때 철이 없어선지 어머니따라
눈물은 흘렸지만 슬픈 줄은 별로 몰랐다.
외할머니는 화장으로 당감동 화장장에서 상을 치르고
얼마후에 여동생이 퇴원하여 집에 왔는데 반신불수가
되어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심정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아프고 슬픈 지옥의 해 였을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여동생은 방에서 눕거나 앉아서만 4년을 지내다가
안타깝게도 10살때 죽고 말았다.
홍깨호수 '60년대, 학장초등 오른편 앞점방 뒤쪽 땅을 파서 모래를 채취하다보니 홍깨호수기 생김
송도해수욕장 '60년대
송도 초등학교와 거북섬 1967년도
양자로 온 외삼촌댁이 송도에 있던 관계로 초등학교 5~6학년때
여름방학만 되면 거기가서 몇 일 있어면서
송도해수욕장에 살다시피 했다.
물좋은 학장이 고향인 관계로 초등학교 다닐때에 벌써
홍깨천과 홍깨호수 그리고 낙동강 샛강에서 마구잡이
수영으로 단련되고 엄궁수문 수로에서 마구잡이
다이빙에 단련된 나는 송도해수욕장에 가면 물 만난
고기였다. 도시 애들은 잘 하지 못하는 다이빙대 까지
헤엄쳐가서 다이빙을 수차례식 하고 놀았고.
외가댁에 양자로 온 철호 외삼촌 결혼 사진 1968년, 외가 친척들 모습이 많이 보인다. 지동이 삼촌도 보이네
어떤날은 영화사에 다니시는 외삼촌께서 공짜 영화표를
주셔서 외삼촌 동생인 막내 외삼촌따라 도심쪽 제일극장,
부산극장,문화극장 등 개봉관에 영화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제일극장 1960
부산극장 1960년대
문화극장 1959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외할머님은 상당히 발이
넓으신 여장부셨고 정이 많으셔서 첫 손자인 나를 애지중지
하였으며 지병이 있으시다 보니 구덕산에 있는 사찰로
주례 천리교회로 기도하러 다니셨던 것 같다.
외할머님 1960년
요즘와서는 부모님 사진은 물론이고 하나 있는 외할머님 사진도
가끔보고 일찍 저세상으로 간 여동생 사진도 가끔 본다.
나도 이제 늙어가나 보다..
어머님과 이모님 범어사에서 1960년
감천 이모님과 어머님
어머님과 구덕 경찬 형수님
장인도 경복 형수님
봉선 외당숙
봉도 외당숙
경찬이 형님
명선 누나, 명자 누나, 영식이, 송도에서 1960년대
봉선 외당숙 식구들, 학장동 홍깨 마을 1960년대
철호 외삼촌, 작은 외할아버지, 울 아버님, 옥서방 이모부님 1950년대
영래,용만,용덕,차애,집사람 앞줄 민성(작은아들), 경민(차애 아들). 우석(큰아들)
무주스키장 눈썰매장에서 행복했던 한때 1992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