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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관음포 이순신순국공원
* 2022.6.18. 청천산악회(동아고동문)
* 오늘 코스 ; 관음포 이순신순국공원→ 남해읍→ 다랭이마을→ 설리스카이워크→ 독일마을
남해 여행지도
️우리나라 섬의 크기 ; 1️⃣ 제주도 2️⃣ 거제도 3️⃣ 진도 4️⃣ 강화도 4️⃣ 남해
🟪 남해 관음포의 경관과 역사적 의의
관음포 해변
관음포 해변
️남해 관음포 앞 바다는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8년(음 11월 19일 아침)에 전사 순국한 곳이다. 관음포 앞 바다를 '이충무공이 순국한 바다' 라는 의미로 李落波(이락파) 라고도 한다.
관음포 해변
관음포 해변
고려말 관음포해전에서 왜구를 격퇴한 정지 장군 추모 시설
️남해 관음포는 고려대장경 판각지이다. 남해분사를 두었다. 이 나무 조형물은 대장경판에 쓰였던 나무를 상징한다.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판각지 임을 알리는 기념물
🟪 남해 관음포의 역사적 의의
1) 고려 몽고난중 강화천도시 무신 집권자 최우의 지원으로 불력으로 몽고를 격퇴하고자, 대장경 조판 작업에 들어갔다.
작업을 총괄하는 대장도감은 강화에 있었지만 대장도감 소속 남해분사를 두어 조판의 일부를 담당했다.
여기서 만들어 진 것은 배로 강화도로 운반하여 보관하다가 조선초 합천 해인사로 다시 운반해 오늘날 까지 팔만대경의 귀중한 문화자산이 되고있다.
2) 관음포 대첩 ; 고려말 우왕때 정지 장군이 왜구를 격퇴한 승첩지.
️鄭地(1347,고려 충목왕~1391, 공양왕) ; 본관 나주, 순천도병마사, 전라도 순무사, 해도원수, 해도도원수로 서 남해 수차 왜구격퇴에 공적. 이성계 위화도 회군시 이성계 휘하 장수였다.
양광전라경상도 도절제 체찰사로 남원등지 왜구격퇴.
3) 이순신 장군이 명 해군 제독 진린과 함께 철수하는 왜군에 최후의 일격을 가해 꿰멸시킨 노량해전 승전의 장소이다. 안타깝게도 장군은 이 해전에서 전사하셔 이낙사 라는 사당이 여기에 있다.
2022.6.18. 남해 이순신 순국공원에서
이순신 영상관, 유료
이순신 영상관, 유료
이순신 영상관, 유료
관음포 夏童들
이낙사 가는 길 양쪽에는 가지가 많은 반송을 양쪽에 쭉~ 심었다.
수양느릅나무
치자꽃 피는 6월
치자꽃 피는 6월
치자꽃 피는 6월
팔손이나무
🟪 이락사, 이순신 장군 유허비, 노량해전
️1. 이순신 유언비(유삼남 대장,1998)
️2. 李落祠(이락사, 박정희대통령 필적)
️3. 이순신 유허비
▪️원비(1832년)
▪️비각현판 '大星隕海'(대성운해) 박정희대통령 필적
▪️모조비(1980년)
▪️해설판(1832년 비내용, 1980년 번역)
️4. 瞻望臺(첨망대) ; 노량해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전방급 신물언 아사" 유언비
"전쟁이 한창 위급한 순간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말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마지막으로 유언하고 전사한 말을 한자로 고쳐쓴 것이다.
️글씨는 크기 균형도 안맞고, 잘 쓰지 못했지만, 유삼남 대장, 해군참모총장이 1998년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맞이하여 직접 쓴 글씨비를 세웠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낙사 들어 가는 길
️문에는 이낙사. 비각에는 대성운해 현판
'大星隕海'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 는 의미다. 박정희 대통령 글씨다. 이 비각 하나가 사당 역할을 한다.
해설사님 해설중 / 이락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 친필
️`대성운해`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 이충무공 전사후 시신을 일시 여기에 안치했다가 아산 현충사 부근(외가댁이 있었던 곳) 으로 옮겨 장사 지냈다. 대성운해는 박정희 대통령 친필.
대성운해 비각 안에 비를 잘 볼 수있도록 왼편에 다시 만들어 세운 모조 비석
🟫 [유명 수군도독 조선 삼도통제사 증 의정부 영의정 시 충무이공 순신 유허비]
有明으로 시작한다. (이미 멸망해서 존재하지 않지만 존중해서 사용)
, 조선의 수군총사령관 , 삼도수군통제사 이시며, 영의정으로 추증된 분, 시호는 충무이고, 존명은 이순신. 그 분과 연고가 있는 유허비
🟫 이 충무공 유적비 ↑↓
남해읍에서 동으로 이십여리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큰 배가 드나들고 있는 이 곳은 관음포, 옛적의 삼도수군통제사 였으며 돌아가신 뒤에 영의정으로 추존된 이 충무공께서 순국한 장소다.
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을 대파한 이래 지금까지 이백 삼십 여 년 동안 해상에는 왜적으로 인한 걱정이 전혀 없어졌지만 공은 이 싸움에서 탄환을 맞고 목수을 잃었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의 시기였다. 이 때를 당하여 충성과 지혜로 임금을 도와서 국가의 중흥을 이룩한 여러 사람이 있었다.
모두들 공신에 봉하고 역사에 기록 되어 그 이름을 빛내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공적이 천지에 가득하고 명성이 해외에까지 떨쳤으며 역사가 흐를수록 태양처럼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으로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충무공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옛 역사에도 충신 의사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의 공과 덕이 영원한 후대에까지 칭송되기로는 충무공과 같이 위대한 분은 다시 없을 것이다.
공의 유적으로는 좌수영의 대첩비 벽파진의 명랑대첩비 충무의 충렬사비 순천의 충민사비 남해의 충렬사비 등이 있어 모두 영원한 세대에 공의 공적을 알리고 있으나,
다만 장렬한 최후를 마친 이 곳에는 아무런 기념물이 없었다. 금상 32년 (1832, 순조)은 선조 임진 이후 네번째 맞이하는 임진년이다.
임금께서는 깊은 감회를 일으켜 당시에 공을 세운 분들에게 추숭의 예전을 베풀 때에 가장 먼저 공에게 실시하였다.
이 때 마침 공의 8세 항권이 공이 맡았던 삼도수군통제사로 이곳에 부임하여 왕명을 받들어 제사를 드리고 나서 여러 주민들과 상의하고 순국한 유적지에 이 비를 건립하기에 이르렀으며, 공은 또한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고 하겠다.
▪️원비 1832년
▪️예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 짓고
▪️형조판서 예문관 제학 이익희 쓰다.
▪️서기 1980년 11월
▪️임창순 역술
▪️배재식 씀
▪️경상남도 세움
🟪 첨망대
첨망대 / 이 충무공이 전사한 노량바다를 관망할 수 있다.
노량해전도 1598.11.19(양력 12.16. )
임진왜란이 끝나는 날.
露梁海戰
노랑 앞바다는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순천 왜교성에 고립된 소서행장을 구출하기 위해 서 출동한 왜장 도진의홍 등의 500 여척과 이순신 제독이 주도하는 조명수군 150 여척이 처절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순신 함대의 공격으로 죽음이 경각에 놓인 도진의홍은 막다른 골목인 줄도 모르고 관음포로 도망갔으며, 이순신 함대의 맹추격으로 크게 패하여 겨우 50 여척만 빠져나와 여수해협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이 진투가 끝날 무렵 이순신 제독은 왜군의 조총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지금 전쟁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마라 라는유언을 남기며 전사하였다.
이곳은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끈 마지막 해전지요, 이충무공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애국충정이 깃든 곳이다.
첨망대 현대 한시들
첨망대가 근래 생겨서 옛 시는 아니다.
🟦 첨망대 한시1
우리 이공 생각하며 수루에로 오르나니
일찍이도 이 곳에서 큰 공훈을 거두었네
꽃을 찾고 바다 구경 여러 사람 모였었고
칼만지며 시를 읊은 장사들이 노니누나
폭죽으로 그런대로'강한 왜적 몰아내고
거북선은 몇 번이나 저 바다를 오갔는가
신묘하다 작전계획 오랜 역사 전해지고
남긴 공적 요즈음도 육대주에 펼쳐지네
(화촌 정철기)
🟦 첨망대 한시2
아름다운 우리나라 제일가는 첨망대요
관음포라 깨끗한 곳 오얏꽃이 피었도다
태평성대 오랜 세월 나라 형편 좋아졌고
옛 싸움터 빈 곳에다 월계수나 심어보리
푸른 바다 거센 파도 옛 성인을 추모하듯
흰 구름의 쪽그림자 충성 절의 다했도다
천지간의 모든 여건 잘 갖춰진 이 마당에
남해 강산 좋을시고 길이길이 빛나리라.
(매헌 채현표)
🟦 첨망대 한시3
양지바른 관음포에 첨망대가 높이 섰고
긴 세월에 남해군민 길이길이 사모하리
남녀 간에 놀이 와서 봄 잔치가 즐거웁고
온갖 무리 경주하고 온갖 꽃 빛나도다
왜적놈들 망동 있어 오랜 세월 전란 중
충무공이 세운 공훈 만세토록 꽃다우리
한 밤중에 떨어진 별 공께옵서 가시나니
같은 때에 슬픈 눈물 전국 각지 가득하네.
(화담 유우석)
🟦 첨망대 한시4
충무공의 큰 공훈은 태양같이 밝고 빛나
첨망대에 오른 오늘 감회 또한 길고 기네
임진 정유 독전 북이 오랜 세월 연이었고
한 저녁에 크나큰 별 홀연 중에 빛 감췄네
산새들이 제 우나니 봄풀들이 무성하고
산책객이 우연히도 들꽃 향기 만나지네
전국 각지 관람객이 승겨 물어 돌고 돌아
손 맞잡고 무리 이뤄 우리 남해 찾아 드네
(도은 김정윤)
🟪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장면을 수묵화로 그리고 타일로 구워 벽화를 만들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선 지휘 조각상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선 지휘 조각상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선 지휘 조각상 중에서 수병들이 용전분투하는 장면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 한분은 이순신 장군. 다른 분은 내원한 명수군도독 진린 장군으로 보인다.
명량대첩 이후 막판에 명 수군이 내원했다.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노량해전 수묵화 타일벽화
🟪 불멸 이순신 장군
️늦은 나이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 말단직 출발
▪️이순신은 1545년(인종 1) 한성부(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子 여해(汝諧) 이다. 어려서 활달하고 강직함을 보여 무인의 자질이 있었다.
▪️처음에 유학을 배웠으나 22세에 비로소 무예에 뜻을 두고 훈련을 시작했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마하여 급제에 실패한 후 1576년 (선조 9년)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처음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훈련원 봉사, 발포만호 ,건원보권관 등을 역임하면서 특히 함경도 변방의 오랑케 토벌에 공을 세웠다.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 만호직을 수행하던 중 오랑캐 침입으로 피해를 입어 한 때 백의종군을 하였으나,
▪️이후 정읍 현감(종5품) 등을 거쳐 1591년 (선조 24) 전라 좌도수군절도사(정3품 당상관)에 발탁되었다.(유성룡 천거 덕분)
️전승 또 전승과 수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출전하여 크고 작은 여러 해전에서 전승하였으며, 1593년(선조 26)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1597년 (선조 30) 임금 선조의 오해와 불신으로 파직, 투옥되어 사형의 위기에 처했으나, 정탁이 이순신의 목숨을 구하는 상소문과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감형되어 도원수 권율 장군 막하에서 백의종군하였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참패하고 전사하자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을 거두었다.
▪️ 그후 힘겹게 수군을 재건하고, 1598년 (선조 31) 내원한 명나라 수군과 연합작전으로 철군하는 일본군과 노량에서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나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 사후 충무공 시호, 증직 영의정 까지
▪️사후 우의정으로 증직되고 1604년 (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면서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43년 (인조 21) 충무의 시호가 내려지고
▪️1793년 (정조 17)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무인이지만 문장에도 조예가 깊어, 뛰어난 시문 그리고 국보(제76호) 로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겼다.
️도요토미히데요시 일본군 침략
▪️일본 전국시대의 내전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정복이라는 개인적 야망 실현과 자국내 불안한 정치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1592년 (선조 25)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일본군이 부산포를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사흘만에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되었으며,
▪️연이어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후속부대 약 14만 명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한성(서울)을 점령하고, 이어서 평양 및 함경도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조선은 호남지방과 평안도를 제외한 전 국토를 일본군에게 유린당하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임진왜란 상황도
▪️관군전투 대첩 ; 진주대첩 김시민 / 행주대쳡 권율 /
▪️이순신 장군 해전 대첩 ; 한산도 대첩 , 부산포 대첩 , 명량대첩 , 노량대첩
️의병활동
▪️의령 곽재우 / ▪️합천 정인홍 / ▪️거창 김면 / ▪️영천 권용수 / ▪️금산 조헌 영규/ ▪️나주 김천일 / ▪️담양 고경명 / ▪️연안 이정암 / ▪️금강산 유정사명대사 / ▪️묘향산 휴정서산대사 / ▪️길주 정문부
️옥포해전
▪️ 물령망동 정중여산
▪️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침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옥포해전 직전 이순신의 호령, 1592.5.7)
️한산도 해전
▪️ 학익열진 일시제진
▪️ "학익진을 벌려서 일시에 모두 함께 진격하게 하였습니다".(이순신의 장계에서, 1592.7.15.)
️노량해전
▪️ 치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모조리 무찌를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노량해전 직전 이순신의 기도문, 1598.11.18 자정)
▪️ 전방급 신물언 아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마라"
(이순신 노량해전 전사 직전 마지막 유언)
️ 노량해전
노량해전은 1598년(선조 31) 음력 11월 19일 남해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이다.
이 해전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수군은 일본 수군과 치열한 접전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아무런 명분없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침략군의 철수를 유언으로 남기며 사망하였다. 이에 모든 일본군들이 순조롭게 철수하고 있었으나, 순천 왜교성에 주둔 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조.명연합군의 포위를 당하여 위기에 직면하였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남해와 사천의 일본군들은 대대적인 구원 함대를 편성하여 왜교성으로 진격하였다. 왜교성 앞바다를 차단하고 있던 조명연합함대는 일본군 구원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급히 노량 수로로 이동하였다. 이윽고 임진왜란 해전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젔다.
해전은 19일 새벽 2시경 부터 시작하여 정오무렵에야 끝났다. 결과는 조명연합함대가 일본함선 2백 여척을 격파한 대승리였다.
연합함대의 선봉군으로서 조선수군의 적극적인 공격작전,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통솔과 함께 조명수군의 화공전법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도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 현감 고득장 등 여러 명의 장수들이 전사하고,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아침 동틀 무렵에 맞이한 죽음의 순간에도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마라"
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안위보다 전황을 걱정하는 위대한 장수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있다.
노량해전은 조명연합작전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서, 임진왜란 동안 가장 큰 전과를 거둔 해전이었다. 노량해전의 종식과 더불어 7년 간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충무공 웅대한 기상, 검에 새긴 글자.
三尺誓天 山河動色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왜 총탄이 충무공의 심장을 관통하고 빠져나가는 모습 조형물.
왜병사
왜병사
조선병사
조선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