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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에는 지진이 경주 및 안서도호부에서 발생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나 윗글 문장중 고려嶺南道는 당의 산남서도로서 현재의 섬서성과 사천성 중경 포함 지역이다. >
<위는 중국역사지도집에 현재 위치와 당의 15도를 매칭시킨 지도이다 .고려 영남도는 당의 산남서도이다.>
재해(災害)와 흉년(饑荒)은 근본적으로 분리해서 설명할 수가 없는 깊은 상관 관계가 있다.
재해는 반드시 흉년에 이은 기근(饑饉)을 만들고 기근은 또 다른 재해를 유발시킨다. 재해에 따른 기근이 과중하거나 반복되면 사회의 생산력(生産力)이 손상을 입게되고 생존(生存)자체에 위협이 가해지면 다른 성격의 인위적 재해(災害)가 연속 및 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질서 있는 사회체제의 유지는 힘들어진다.
사회에 있어서의 재해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라는 틀 속에서 형성되는 보편성의 상황이 늘 상존 하고 있지만, 인간 개인과 사회에 있어서 큰 문제로 항시 대두되는 것은 재해의 악순환에 따라 연계된 성격이 다른 재해연속과 누적(累積)을 어떻게 막고 피할까 하는 것에 있다.
자연재해의 경우만을 살펴 예(例)를 든다면,
'큰 가뭄(旱)은 항상 황충(蝗:메뚜기)의 피해를 수반하고, 홍수(洪水)는 수인성 전염병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자연재해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주는 가뭄과 홍수는 반드시 인간개인의 생명을 빼앗고 사회를 황폐화시키는 역질(疫疾:각종 전염병 <콜레라,장티푸스,발진티브스,이질>)을 유발하는 것이 상례다. 이러한 현상의 악순환은 또 다른 재해를 만들어내는 도둑, 강도, 폭력집단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뒤따라 절도, 약탈, 살인이라는 극한의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급기야는 목숨을 담보하여 인간을 살육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공개적인 현상인 크고 작은 전쟁(戰爭)의 순서로 옮겨진다. 자연재해와 연계된 전 지역이 야생동물들의 사파리 생리처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공간으로 변하고 시도 때도 없는 무궁한 세월 속에 잠겨버리는 것이다.'
재해가 흉년과 기근으로 이어지고, 흉년과 기근의 중복과 과중함은 또 다른 성격의 인위적 재해의 폭발로 이어져 사회 자체가 지탱할 힘이 없어지면 생산력의 저하로 민족단위의 국가는 스스로 붕괴하여 이웃나라에 복속 하든지 침략과 전쟁이란 수순에 의해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역사서에 쓰여진 수많은 역사시대의 나라들 대부분은 자연재해에 따른 흉년과 기근의 반복이 이어질 때 발생하는 반란, 봉기, 폭동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소멸해 가는 과정을 잘 묘사해 놓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고려사에 의한 고려도 수많은 자연재해 및 인위적인 재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생하여 고통을 격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인위적인 재해 병란(兵亂)전쟁과 국내반란 고려 국난사를 통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자연재해로 국한시켜 고려의 흉년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 고려의 자연재해(自然災害)
보통 한해(旱害)로 불리는 가뭄은 강우량(降雨量)이 적거나 적절치 못할 때 발생하는 피해다. 가뭄은 대기중의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고온(高溫)이 계속 되여 비가 내릴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을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정착 농경사회에서의 가뭄이란 홍수(洪水)보다 더 무서운 재해현상으로 분류된다.
홍수(洪水)는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 인력(人力)을 동원하여 부분적으로 제방을 쌓는 등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여보고자 노력도 해볼 수 있으나 가뭄은 원인을 제공하는 공기괴(空氣塊)의 범위가 넓고 크기 때문에 재해의 범위가 너무 크다. 어찌 보면 속수무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한해(旱害)에 대한 대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가뭄의 피해가 있은 연후에 대체로 황충(蝗蟲:메뚜기)의 피해가 뒤따라 산야(山野)의 나무와 사람까지 먹어버리는 메뚜기에 대한 공포가 뒤따른다는 기록들이 곳곳에 있는 것이다.
고려의 가뭄은 왕조를 유지했던 475년 동안 175회가 발생하여 크고 작은 많은 피해를 준 것으로 역사서는 쓰고 있다.
이러한 통계 숫자는 2.7년에 한번씩 가뭄현상으로 시달렸던 나라가 고려였다는 것과 같다.
가뭄이 발생했던 시대의 기록들을 대충 살펴보면,
① 숙종 6년(1101) 4월,
'날이 가물어 천지(天地), 종묘(宗廟), 산천(山川), 사찰(寺刹)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지내고 송충(松蟲)의 극심한 번식이 있었다. 농사절기에 가뭄으로 인해 왕이 흉년(凶年)을 선포하는 조서까지 발표를 했다. 굶어 죽은 시체가 길가에 뒹굴었다.'
② 예종 15년(1121)
'여름부터 가을 8월까지 비가 오지 않아 곡식이 여물지 않았고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죽는 자가 많았다.'
③ 인종 12년(1134)
'사방(四方) 천여 리 지방의 가뭄으로 적지(赤地:농작물이 없음)가 되었고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잇대어 베고 있었다.'
④ 의종 5년(1151), 6년(1152)
'여러 차례 여러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왕이 직접 기우시(祈雨詩)를 친필로 썼으나 여러 달 비가오지 않아 곡식이 없어 길거리에 굶어죽은 시체가 뒹굴었다. 개국사(開國寺)에서 굶주리는 사람들과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었다. 전년에 이어 2년 연속 가뭄이 들었다.'
⑤ 명종 3년(1173)
'정월(1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시냇물과 우물들이 모두 고갈, 곡식의 싹이 마르고 전염병이 번졌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파먹고 사는 현상도 발생했고, 빈번히 화재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큰 근심과 한탄속에 쌓여 있었다.'
(※명종 24년(1194)에 가뭄이 들었을 때 임금과 정부가 우선적으로 행하여야 할 7가지 사항발표)
⑥ 고종 17년(1230)
'흉년이 들어 길가에 쓰러진 시체가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⑦ 고종 41년 (1254)
'계속된 가뭄으로 경성(京城:6월)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 (※몽고병이 전국토를 유린).'
⑧ 충렬왕 3년(1277)
'탐라(耽羅)에 흉년이 들어 전 가족이 죽은 집도 있었다.'
⑨ 충렬왕 7년(1281)
'봄부터 겨울까지 나라안에 전염병이 유행 죽은 사람이 많았다.'
⑩ 공민왕 8년(1359)
'양광(楊廣), 전라(全羅), 경상(慶尙)에 큰 가뭄이 들어 각도에 유랑민(流浪民) 속출했다.(※홍건적의 침략이 있었다.) 으로 정리할 수가 있다. 이밖에도 수많은 가뭄현상이 발생하여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고 '기우제'를 지내는 현상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연구 1]
10C초에서 14C말까지의 고려의 자연재해 중 가뭄현상을 175회가 발생하여 2.7년의 주기(週期)를 보기고 있고, 같은 시대로 비견되는 북송(北宋), 남송(南宋), 원(元), 명(明)초기의 가뭄현상은 292회로 정리되고 있는 대륙사의 기록을 볼 수가 있다. 고려의 가뭄현상은 대륙사의 60% 범위에 육박하고 있다.
10C∼14C의 대륙사를 장식하고 있는 역사서의 나라들은 해설상으로 나마 현 대륙 전체를 통치한 것으로 되어있다. 현 대륙은 반도로 한정하여 해설된 고려사에 의한 고려의 50배 면적을 자랑하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고려 가뭄 175회를 생각해 보자.
중국사(송,금,원,명)속의 현 대륙 지리·지형구조를 살펴볼 때 사막, 고원, 늪지대, 준령, 강하천, 지역을 삭제하고, 동토(凍土)지대와 아열대지방 습지대를 제외하고 나면 살기에 적합하고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의 면적은 12%∼14% 이상을 넘지 못한다. 더하여 황하연변과 북쪽의 황토(黃土)지대의 상당면적은 소금기 많은 토질로 인하여 불모(不毛)의 땅이 너무 많은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중국대륙은 자연재해가 없는 해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큰강 하천의 범람이 있고, 기후 변동에 따른 재해는 기후대(氣候帶)에 따라 수시로 수없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인데도 반도로 한정 되여 해설된 고려보다 40%정도의 빈도가 높을 뿐인 가뭄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를 조선 고려의 역사기록이라고 믿는다면 고려강역은 1만리 강역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려의 실체를 반도에 넣을 수는 없다.
단지 현 중국 대륙의 ⅔ 정도 면적 크기의 고려였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고려 인종 12년에 '나라 사방(四方) 천여 리가 적지(赤地)'로 변했다는 가뭄의 규모 설명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사방 1천리면 남북(南北) 2천리, 동서(東西) 2천리가 가뭄으로 인해 농작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또한 이때의 사방 1천리는 고려강역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인종(仁宗:1134) 시대의 고려 가뭄지역 남북 2천리, 동서 2천리 면적은 한반도를 설명하는 고려(高麗)가 아닌 것이다.
이럴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종(仁宗)시대에 편찬되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김부식)가 반도 땅 고려에서 편찬되지 않았다는 것도 충분히 알수가 있을 것이다.
고려가 대륙에서 1만리 강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175회 정도 가뭄의 피해를 2.7년마다 부분적으로 겪으면서도 나라는 물론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도의 고려가 되어 2.7년마다 가뭄이란 재해를 입고, 3.3년마다 지진(地震)의 피해를 받고, 7.5년마다 홍수(洪水)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하고, 2.6년마다 때아닌 계절에 우박(雨雹), 3.5년마다 폭풍, 태풍의 피해 받았던 고려였다면 반도의 중세기 고려왕조 475년 세월은 지옥과 같은 고통이 세월을 보낸 왕조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고려시대 475년 세월을 왕씨(王氏) 및 신씨(辛氏)가 34대를 거쳐 왕위가 교체되는 세월의 시대가 아니라 수도 없는 역성혁명이 발생하여 빈번한 왕조의 주인공들이 성씨를 바꾸며 등장했을 것이라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연구 2]
가뭄의 끝은 황충(메뚜기)의 피해를 동반하고 가뭄과 홍수란 재해는 반드시 전염병을 번지게 하여 전 국토를 유린하게 되어 사회의 기본질서와 생산력은 붕괴된다.
의약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전염병이란 곧 죽음을 대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굶어 죽은 시체와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길가에서 서로 마주 보며 뒹굴고,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팔고, 사람의 고기를 팔고 사는 상황이 이어지면 이때는 왕이고 정부고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즉 인간의 세계가 그려질 수 없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삼국도 그러했지만 중세기의 조선사속의 고려는 자연재해에 따른 국내의 혼란은 더욱 심했다. 이러한 재해(災害)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 할것인가 하는 대책 및 구휼책이 고려 명종 24년(1194)에 이르러 왕명으로 교시된다고 역사서는 쓰고 있다.
재해가 발생했을 시 임금과 정부가 취하여야할 사항으로,
① 원통하게 죄수가 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는 죄수유무 재조사.
② 재해 발생 시 홀아비(鰥), 과부(寡), 고아(孤), 자식 없는 늙은이(獨)를 구제 할 것.
③ 부역과 조세감면.
④ 현명하고 선량한 인재등용.
⑤ 탐관오리를 축출하다.
⑥ 원망과 원한이 많은 사람을 보살피고,
⑦ 임금 식사의 반찬 수를 줄인다.
정해놓게 되었다. 실제로 이렇게 하기만 했다면 고려는 글안(요), 몽고, 왜(倭), 홍건적(紅巾賊)의 침략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민간인들의 폭동과 봉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았다.
왕명(王命)으로 교시된 내용이 있음에도 왕과 권력 세신가들은 쉴 사이 없이 거대한 토목공사를 발주했고, 징병, 세금징수, 부역의 독려 및 숫한 외침(外侵)이 있었던 것으로 고려사가 쓰여진 것을 보면 교시만 있었을 뿐 실제에 있어서는 지켜지지 않은 교시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가뭄과 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는 곧 개인과 가정으로 보면 사생(死生)과 관련이 있고, 국가(國家)로 보면 존망과 쇠약을 초래하는 절대 절명의 사안이기도 하다. 현실의 불평불만과 생존자체에 위협을 느낀 개인(個人)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뭉치게 된다. 불가항력으로 파산(破産)에 이르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며 살아남기 어렵고 희망이 없다고 보여 지면 비슷한 처지에 놓은 사람들끼리는 유랑자(流浪者)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한 이들은 상황에 따라서 도적단 및 강도 집단으로 변하고 규모가 커지고 규율과 제도를 만들어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하면 드디어는 권력부, 정부, 왕조에 반기를 들어 봉기를 거행하는 순서로 옮겨지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 '황소의 난' '송강도적의 반기' '홍건적의 흥기' '태평천국의 난'등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의 흥기와 봉기는 국력의 쇠약을 불러 일으켜 드디어 일치일난(一治一亂)의 역사편술 공식을 만든다. '황소(黃巢)는 당(唐)의 멸망', '송강(松江)은 송나라 멸망', '홍건적은 원(元)의 멸망', '태평천국은 청(淸)의 멸망'이란 역사서술 공식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반기를 들어 기존 정부에 항거한 반체제 세력들은 현실 정치와 제도에 불만이 많은 세력들이었고, 이들이 죽기 살기로 권력에 항거하여 살인, 약탈, 방화를 일삼은 것은 살아남기 위한 수순이었지 권력쟁취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오합지졸의 집단들은 고등이념 체계가 필요한 권력의 창출과는 거리가 멀다. 설사 봉기에 성공하여 기존 정부를 붕괴했다고 하더라도 권력의 축은 또다시 기존의 정치 세력 중 일부의 세력에게로 돌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은 고등체계와 이념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위장을 하여야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에 있어 농민 및 백성들의 거대한 봉기와 반란이 있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는 자연재해(自然災害)란 전조현상이 반드시 있고, 권력부 및 왕조의 유지를 위해 악랄한 착취와 조세징수 및 부역동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체로 흉년과 기근을 수반하는 자연재해가 있을 경우에 중앙과 지방의 권력부의 가혹한 착취는 성행하여 많은 유랑자 집단을 만들어 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속담까지 남겼을까.
[연구 3]
고려의 자연재해 현상 중 가장 의문시되는 것은 우박(雹災)과 지진(地震)에 관한 기록들이다.
우박(雹)의 피해는 국지적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피해는 크다. 사람과 소가 맞아 죽은 경우도 있고, 역사서에 새(鳥)나 짐승이 맞아 죽었다는 기록도 여러 곳에서 볼 수가 있다. 기상학적으로 말할 때 공기의 습윤단열변화(濕潤斷熱變化:moist adiabatic change) 과정중 강제 상승 기류에서 생기는 것으로 주로 소나기구름(積亂雲)에서의 비(雨)와 눈(雪)의 중간 단계에서 생기는 것이 우박(hail)의 발생이다.
반도는 대부분 늦봄과 여름에 많이 생기는 것이 적난운(積亂雲)이고 이때 얼음 알갱이 우박이 소낙비와 함께 갑자기 내려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우박을 내리게 하는 계절은 일조, 일사량이 풍부하고 습기가 많은 계절에 주로 생긴다.(※5월∼10월 사이)
고려가 왕조를 유지했던 10C∼14C까지의 우박피해 현상기록은 184회로 2.6년에 한번씩 피해를 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같은 시기의 대륙사를 치장하고 있는 송사(宋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를 통한 우박피해 기록을 보면 175회 정도뿐이 되지 않아 고려보다 적은 것이다. 같은 시대에 우박피해로 고려는 184회, 대륙사는 175회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어찌 해석할 것인가!
대륙은 각양각색의 지리·지형구조와 기후대를 형성하고 있고 중위도 지방의 면적만 하여도 한반도 면적의 몇십 배 되며 우박이 생겨날 수 있는 하절기(夏節期) 면적도 한반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 말은 현 대륙이 한반도보다는 우박이 내릴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면적에 따른 분포 횟수도 많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뜻이기도 한다.
우박이 내릴 수 있는 기상조건을 갖추고 있는 면적이 넓고, 다양한 기후대를 보유하면서 우박이 내릴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많아야 하는 대륙이 반도에 이식한 고려사의 고려보다 우박이 내린 횟수가 적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서(정사서)의 기록들을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강변의 자갈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된다.'고 하여도 불가능한 것이다. 한반도 면적보다 50배나 넓은 대륙에서 우박(hail)에 따른 피해가 반도에 이식된 고려사의 고려보다 적은 횟수를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즉 있을 수 없는 기후현상 기록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이것은 곧 대륙 원전(原典) 역사서들이 가짜라는 뜻과 같은 것이다. 고려사의 기록처럼 고려강역 1만리 통치영역 내의 우박피해 184회면 대륙사의 175회 우박피해 기록은 송(宋), 금(金), 원(元), 명(明)나라가 고려보다 좁은 통치영역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과 같기도 하다.
대륙사를 치장하고 있는 대륙사의 대륙 우박피해는 반도로 이식된 고려가 184회면 1,840회 이상이라면 부족하나마 설득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우박이 내릴 수 있는 조건이 많고, 면적이 반도보다 50배 이상 넓은 곳에서 반도보다 적은 횟수의 우박피해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고려가 황도(皇都)와 황성(皇城)이 있었고 황성둘레 110리 황성수비대 3만명, 60만 대군을 기록한 고려사 및 고려도경의 기록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연구 4]
우박 다음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이 고려사 기록의 지진(地震)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지진이란 지구내부의 급격한 변동에서 생겨난 파장의 충격으로 파동(波動:지진파)이 지표면까지 전해지면서 지반을 흔들어 놓거나 갈라지게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것을 판구조론으로 재해석하면 대륙과 대륙의 판(版)이 이동하며 엇갈리는 부딪침의 충격이 지표면에 전달되어 생겨나는 것을 지진이라고 하고, 엇갈린 균열의 틈 사이로 용암을 뿜어내는 것을 화산이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지진에 대한 이론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판구조론과 대륙이동설'에 의하면 지진(地震)과 화산(火山)은 판(版)과 판(版)사이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지구 물리학자들이 설정해 놓은 지진대(地震帶)에서만 대지진이 발생하는 것도 현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판구조론이란 신빙성 있는 학설을 지진(地震) 발생과 연계시키면, 지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발생한 곳에서 또 발생한다는 원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진다발 지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으며 현재 지구 물리학자들이 설정해 놓은 지진대의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바로 판과 판이 서로 물려있는 곳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고려의 역사서라고 하는 고려사에는 지진전조 현상 31회와 지진발생 횟수는 142회로 기록되고 있다. 반면에 같은 시대의 대륙사는 150회의 지진현상이 있었다고 쓰여져 있는 것이다. 고려는 지진전조 현상까지를 종합하면 173회의 지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진(地震)현상으로 피해를 준 내용을 고려사에서 옮겨보면,
① 7대 목종 10년 (1007)
'호경(鎬京:西京)에 지진이 있었다.'
② 8대 현종 16년 (1025)
'4월에 영남도(嶺南道), 광평하(廣平河)지역 10개 현에 3차례 지진이 있었고, 7월에 경주(慶州), 상주(尙州), 안동(安東), 밀성(密城), 청주(淸州)에 지진이 있었다.'
③ 9대 덕종 1년 (1032)
'상주(尙州)의 10개 현(縣)에 지진이 있었다. 이듬해(1033) 6월에 안동부(安東府), 섬주(陝州)에 지진이 있었다.'
④ 10대 정종 2년 (1036)
'6월 경성(京城), 동경(東京), 상주(尙州), 광주(廣州), 안변(安邊) 관내의 주현(州縣)에 지진이 있었고 동경(東京)은 3일간 계속 되었다.'
⑤ 10대 정종 3년 (1037)
'9월에 귀주(龜州), 삭주(朔州), 박주(博州), 태주(泰州), 함원진(咸遠鎭)에 지진이 있었다.'
(※ 전년8월에 동경관할 주현과 금주(金州), 밀성(密城) 등지에도 지진이 있었다.)
정도로 지진 발생 기록을 정리할 수가 있다. 그밖에도 경주(慶州), 연주(漣州), 교주(交州), 익령(翼嶺), 동산(洞山), 경도(京都),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나주(羅州), 예성(禮城) 등지에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도 볼 수가 있다.
판구조론에 의하면 한반도는 환태평양 지진대에 들어가 있지도 않고 황하(黃河)지대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지진대에 들어가 있지도 않다. 고려사의 지진 기록들은 정밀지진계가 없었던 시대였던 만큼 무감(無感) 지진은 포함되지 않는다. 모두 유감(有感) 지진으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체험적 지진기록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고려의 지진발생 142회, 대륙사의 지진발생 기록 150회를 같은 시대로 놓고 보면 황당하고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또한 고려의 지진발생 지역을 종합해보면 중점적으로 지진이 발생한 곳이 경도(京都:京城), 서경(西京), 동경(東京), 금주(金州), 경주(慶州), 상주(尙州)지역으로 압축할 수가 있다. 고려의 지진 142회의 대부분은 앞에 열거된 지명이 포함된 주변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어 지진(地震)이 판구조론 설명처럼 발생했던 곳에서 또 발생한다는 지진대(地震帶) 속의 고려를 잘 증명해주고 있는 듯 하다.
고려사의 지진기록 142회와 다발지역을 반도에 입력해보면 반도는 10C∼14C나 지금이나 격렬한 지진대에 해당하고 판(版)과 판(版)이 맞물려 있는 지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륙은 유라시아 지진대가 기련산맥과 황하지대로 연결되고 이어 감숙, 섬서, 산서, 산동, 하남, 하북 지방에 적지 않은 지진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유라시아 지진대는 1976년 하북성 당산(唐山)지진에서 70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경우도 있었다. 반도에도 규모가 적은 지진(地震)은 발생하는 곳이나 판이 맞물려있는 지역이 아니며 대규모의 지진이 있을 곳은 아니라는 지질학계의 보고서도 있었다.
문제는 고려사와 맞물려서 만들어진 반도 고려에 있는 것이다. 지진대가 아닌 반도가 고려시대에 유감과 체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지진이 142회면 지진대가 있고 반도 면적의 50배에 해당하는 대륙의 넓은 강역에 같은 시대에 지진 150회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륙의 체험적 유감지진 150회가 정사서의 기록을 믿어 사실이라면, 142회의 고려사의 지진기록은 반도의 고려를 말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것이다.
고려사의 지진 기록이 대륙의 고려 정황을 말해 놓은 것이라는 것은 지진대의 구실을 하고 있었던 지진 다발 지역의 지명(地名)을 역사서와 지명고(地名考)에 따라 추적해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고려 강역에서 지진(地震)이 자주 발생했던 지역으로 서경(西京)은 평양으로 호경(鎬京)이라고 함으로써 옛 주나라의 도읍지였던 현재의 서안(西安:長安), 함양(咸陽)지역을 말해놓은 것이고, 이곳에서부터 남동(南東)쪽에 금주(金州)라고 하는 지진대의 안강(安康)지구가 있다.
동경(東京), 경주, 상주(尙州)는 하남성 낙양지역과 산서성 남부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경도(京都), 경성(京城)지역은 개봉(開封)과 주변지역을 말해 놓은 곳으로 황하지진대에 속하는 지역이다.
고려사에 쓰여진 지진 다발지역의 대부분은 유라시아 지진대로 이어지는 황하(黃河)와 위수(渭水)지역으로 현재의 섬서성, 산서성, 하남성으로 이어지고 지명으로는 서안(서경)→안강(금주)→낙양(동경,상주,경주)→경도(경성,개봉)로 이어지는 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고려사의 지진기록 142회와 지진다발 지역의 지명(地名)들 모두는 위수와 황하지대의 유라시아 지진대로 옮겨져야 맞는 것이며, 반도의 지진기록이 아닌 것이다. 고려사의 지진기록은 지진대이자 판과 판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는 지진발생 및 현상의 기록인 것으로 서경, 동경, 경성으로 이어지는 지진대의 라인(line)에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사의 고려국 지진다발 지역으로 쓰여진 서경, 동경, 경성지방은 유라시아 지진대로 연결되는 황하지진대에 속하는 곳에 있었고 실제도 그러하다. 반도의 고려는 아니었던 것이다. 반도에는 고려사에 의한 고려가 없었고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고려견문록이자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도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고 했다.
[연구 5]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는 蝗蟲(메뚜기)의 피해가 24회 정도가 있었다고 쓰여져 있다.
홍수(洪水) 다음에는 황충(蝗蟲)의 발생이 없으니 가뭄(한발) 다음에 염려되는 것은 먹을 것을 찾아 구름처럼 모여 이동하는 메뚜기 떼의 제2차 피해인 것이다. 풀잎과 나뭇잎, 나무껍질조차 먹어버리고 그래도 먹을 것이 없으면 동물과 사람까지 먹어버리는 공포의 메뚜기 떼의 발생인 것이다.
고려의 황충피해 24회 중 인종(仁宗) 23년(1145) 7월의 기록을 보면, '황충이 극성하여 북계(北界), 창주(昌州), 삭주(朔州), 귀주(龜州), 의주(義州), 정주(靜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서해도(西海道), 해주(海州) 등지에 피해를 주었다.'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이때의 황충피해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황충피해는 고려의 경기(京畿)지방을 중심으로 서해도(西海道), 해주(海州), 서북면(西北面), 북계(北界) 지방에서 발생한다는 한계가 있다. 주로 황하지대 및 그 이북과 북서(北西) 지방에서 황충이 발생하는 것이다. 황충이 발생했다는 고려의 영역중 대부분은 스텝건조기후대와 건조기후대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반도의 지형에는 서북면, 서해도, 북계(北界), 서해도(西海道)로 할 지리지형을 갖추고 있지 않다. 모두 대륙에 있었던 지명들이고 지금도 있다. 여기서 서해, 해주(海州), 서북면(西北面)이란 감숙성, 내몽고 서쪽 , 신강성쪽을 말하는 것이며 대륙에서도 기후변동이 심하여 황충이 자주 발생하기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삭주(朔州)는 산서성 북부와 내몽고 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의주(義州)는 섬서성 의천(宜川)을 말하는 것이다. 정주(靜州)는 섬서성 북부와 감숙성 동부를 말하는 것이며 창주(昌州)는 내몽고 찰합이 지역을 말하는 것이 된다. 서해도란 고려 통치 강역 서쪽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여 대륙에서 무한대(無限帶)의 서쪽을 의미하는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또 북계(北界)와 동북면(東北面)과 관련된 방향표시 지역의 본래 의미도 그러하다.
우리가 고려사를 통하여 고려가 북계(北界), 동계(東界), 서북면(西北面), 동북면(東北面), 서해도(西海道)라는 방향표시의 지명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고려사의 고려강역 1만리 속에 있었던 지명표시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 같다. 반도에 광대한 스케일의 고려사를 넣어두고서는 고려사의 황충 피해조차 설명할 길이 없어지는 망막함이 있는 것이다.
반도의 지리지형 구조는 3면이 바다여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라 언제나 강수량은 충분하고 바다 때문에 급격한 기후변동을 초래하지 않는 온난다습한 지역이다. 스텝건조기후대와 건조기후대에서 주로 발생하는 황충이 발생할 근본적인 조건과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두자.
고려사의 가뭄과 지진현상의 기록처럼 황충기록도 대륙 고려에서 발생했던 기록을 반도에서 있었던 것처럼 거짓 해설해 놓은 것이다.
[연구 6]
대홍수가 63회, 천둥과 벼락으로 인한 피해가 307회, 기근과 흉년이 든 것이 47회, 전염병이 유행한 것이 15회, 폭풍의 피해를 입은 경우가 135회, 이상 한파 19회, 이상 난동 22회, 폭설피해 입은 것이 34회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 고려사의 고려다.
인위적인 재해를 제외하고도 자연재해와 연계된 피해현상을 고려 통치 475년 동안에 년간 2.96회 꼴로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곧 매년 3종류 정도의 자연재해 현상이 발생했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재해 현상기록들은 고려(高麗)의 강역에서 있었던 과거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지만 역사시대의 장소가 반도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가뭄, 홍수, 지진, 때아닌 서리, 폭설, 농절기의 우박, 전염병, 폭풍, 이상한파, 이상난동 이란 자연재해 현상이 한반도라는 좁은 고려강역에서 년3회정도 계절별로 발생했다면 반도 고려왕조는 유지하기조차 힘든 나라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인종(仁宗:12년)때처럼 고려강역 사방 1천리, 즉 남북 2천리, 동서 2천리의 풀도 자라지 못하는 가뭄이 있었고, 전해(前年)에도 있었고 이듬해도 있어 죽은 시체가 길가에 늘어서 있을 정도면 왕조와 정부 자체는 지탱하기 힘들다. 한반도의 경우라면 이때 이미 고려는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고려가 475년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1만리 강역을 소유했던 황조였기 때문에 사방 1천리 가뭄이 계속되어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가뭄이든 사방 1천리 강역 밖에서 구휼식량과 재물을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1,407회의 자연재해 발생현상은 대륙의 황제국 고려, 1만리 강역에서 일어났던 현상이며 반도라는 좁은 강역에서 일어났던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고려의 자연재해 현상을 좁은 반도로 옮겨서 475년 세월을 곱씹어보면 아비규환의 영화 필름이 돌아간다. 더하여 글안의 침입으로 왕(王:현종)이 도주를 하고, 강조(康兆)가 반란을 일으켜 임금을 시해하고, 곧이어 여진(女眞), 합단(哈丹), 몽고(蒙古), 홍건적의 침략과 굴복, 항복, 피난으로 이어지는 인위적인 재난의 수순이 연속되었으면 반도 고려는 있지도 있을 수도 없는 중세기의 왕조가 된다.
역사서는 인위적인 창작품이고 더하여 역사서(원전)를 빙자하여 무리한 해석을 일삼으며 일정한 장소로 국한시킨 자들은 권력과 부화뇌동하며 횡포와 손을 잡으면서 봉록을 받는 관학파라는 답습적 엉터이 사가(史家)들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진실과 민족역사의 정체(正 )와도 하등에 관련이 없는 것이 반도 조선 고려사의 허황된 모습이다.
정용석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