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를 대적하는 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
(약 4:8)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이다. 교만한 태도는 마귀와 벗하는 일이다. 겸손한 태도는 하나님과 벗하는 일이다(6, 7).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피하게 되어 있다(7). 영적 싸움의 현장을 잘 직시해야 한다. 영적싸움에 대한 실제를 알려주는 것이 강단에서 미흡하다. 엡 6장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에 답이 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서서 진리의 띠를 띠고”, “믿음의 방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런 의미에서 엡 6장의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내용은 일곱 가지 중에 세 가지가 말씀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순종의 모든 행위나 원망을 사실은 마귀의 역사에 관련되어 있다. 요 13:2에 보면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마음을 넣었더니”라고 말씀한다. 유다의 타락에서 생각을 타고 들어오고, 경고를 받았는데 유다가 회개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면 마귀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린다. 가룟 유다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돌이키지 않고 계속 자기 욕심을 따라 가버렸다. 들어오는 생각을 분별하고 그것을 대적해야 한다.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는 무엇인가? 비밀, 은밀한 탐욕들이 가장 큰 도구일 것이다. 마귀로부터 온 생각들을 잘 분별하여 가려내는 것과 그것을 물리치는 방어 메카니즘에 잘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마귀와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우는 법을 잘 배워야 한다. 듣고 보는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잘 제어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통하기보다는 마귀와 친해진다.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고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스스로를 어두운 곳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결국 로마서 5장 6, 8, 10로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이루어주신 일이다. 사실과 진리에 근거하여 믿음을 두어야 한다. 그 훈련이 지속적으로 되지 않으면 감정을 사용하는 사탄에게 끌려 다닐 수 있다. 사탄의 존재와 접근 양식에 대한 경험과 인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사탄에게 농락당할 여지가 상당히 많다. 사탄의 실존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에 살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배 받을 때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 통치 원리를 모르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사탄에게 끌려 다니는 어두움 속에 살게 된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뒤바꾸어 문자적으로 이용해 사람을 유혹한다(시 91편 12절을 가지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영광을 취하라고 하는 상황에 사용해 버렸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간파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말씀하심으로 승리하셨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강도의 손에 들려진 칼(잘못 해석한 성경)이 되어 우리를 찌르게 한다. 그 사탄이 적용하는 말씀의 칼이 얼마나 썩고 무력한 것이며, 플라스틱 칼에 불과한지를 알거나 깨닫지 못하면 사탄이 가진 플라스틱 칼에도 두려워 벌벌 떨게 된다. 그것이 우상을 섬겨야 복을 받는다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유다 말기의 유다 백성들과 같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지동설과 천동설의 차이는 느낌과 인식은 천동설인데 사실은 지동설이 맞다.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해도 능력이 되지 않고 마귀와 싸울 수 없게 된다.
마귀가 사용하는 것은 7절에서 1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탐욕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니라(골 3:5). 탐욕은 곧 마귀를 숭배하는 것이며 따르는 것이다. 이 세상,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사용하는 마귀의 탐욕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애통하고 우는 것이(8, 9) 마귀를 대적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세상의 소리냐 하나님의 말씀이냐의 격돌이 바로 마귀와의 싸움이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들어가실 때 모든 사람과 소리를 차단시키시고 제자들만 데리고 들어가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소리)냐, 세상의 소리냐에 대한 매우 분명한 예수님의 태도를 가르쳐 준다. 마귀에 대해 너무 집착하거나 그 탓으로 돌리면서 행동하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매우 잘못된 것으로 가게 된다. 사람의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마귀가 틈을 못 타게 하는 중요한 삶의 질서다. 성경의 핵심적인 가치와 의미를 갖지 못하면 한쪽으로 치우쳐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그것조차도 사탄에게 유익한 것이 되고 만다. 모든 것을 사탄이 하는 짓으로 이해한다든지 아예 사탄 이야기가 나오면 그만 귀를 닫아 버리는 경우의 양 극단은 절대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치우친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겠느냐?는 질문은 이미 바울이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다(롬 6:1).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어찌 조직신학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 각 권의 본문에 들어 있는 것을 그대로 받고 이해하고 순종하면 되는데 그 본문의 상황들은 하나님의 무궁하시면서도 인격적인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어떤 도그마 안에 갇히게 되면 “~~주의자”가 된다. 그것은 이단이나 개혁주의라는 도그마에 너무 치우쳐 갇히게 된다.
본문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어불성설이다. 항상 본문 문맥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통합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을 돕고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을 도와야 할 매우 중요한 관계에 있다. 교리의 형성은 교회의 이단이라는 환경 때문이었다. 이단 문제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조직신학이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 구절 본문에 대한 왜곡 때문에 생기는 경우도 많다. 요일 3:9이나 시 12:6이나 마 13:34 등 한 구절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생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 구절이 문맥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잘 풀어가면 이단의 논리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는 말처럼 ‘신학은 성경의 시녀다’는 말도 있어야 할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는 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우울증과 마귀에 사로잡힌 것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분명한데도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우울증인 경우에 정신과 약을 먹는 것을 통해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도 귀신 들린 것으로 몰고 가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귀신이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거나 찬송을 부를 때 조용하게 있는 경우는 귀신들렸다고 할 수 없다.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정체를 숨기는 것이 특징이다. 자기가 스스로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은 진짜 귀신들린 사람이 아닐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맞다. 얼굴이 달라지고 짐승같이 된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귀신들린 사람이 아닐 수 있다. 괴력이 나온다거나, 목사가 말씀을 전할 때 방해하거나 큰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면 그는 귀신들린 것이 아닐 수 있다. 우울증 환자 그룹들을 교회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한계가 있다. 정신과의 도움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정신과적 질병으로 알고 치료받는 일을 잘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되어야 정신과적 병도 치료할 수 있다. 목사들이 성도들의 모든 문제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목사는 만능을 가진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말씀과 예배를 외면하고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일을 위해서는 공동체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교회와 곧 교제인데 현대교회는 교회와 교제가 따로 있는 것 같다. 흩어지는 교회가 강조되다 보니까 모이는 교회에 대하여 소홀하게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흩어진 교회가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에너지를 어디서 받는가? 공동체의 교제로부터 공급받아야 하는 데 모임을 통한 공동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절실하다. 공동체가 있을 때 영적 전투나 삶에서 가장 큰 힘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일 수 있다.
깨끗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 구심력이 약해지면 원심력에 의해 나가떨어지고 만다. 구심력을 위해서 모임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히 10:25). 교회 공동체가 상처를 주는가? 그 상처를 받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의를 이루어야 한다. 공동체는 약점도 있고 연약함도 있다. 그것을 성숙한 자들이 끌어안아 주어야 하고 용서하는 모범을 보임으로 공동체를 잘 만들어 가야 한다. 화목제물은 이웃과 나누어 먹도록 되어 있다. 번제를 드린 후에 화목 제물을 드리는 데 나누어 먹는 화목제물을 통해 공동체의 하나됨을 확인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례를 통해서 분열된 죄를 지적하고 하나로 만드는 일로 역할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만 성찬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다. 성찬은 하나됨을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방편이다. 하나 될 의향이 없으면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돌이켜야 한다. 성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한 몸 됨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화목하는 것은 하나님과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필수적이다. 어느 한 가지만 하겠다고 하는 것은 참된 경건이 아니다. 참된 경건(고아와 과부(이웃)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과 위로부터 난 지혜(약 3:17)를 생각해야 한다.
주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한 것은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다.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자가 백 데니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목하는 것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을 수 없게 된다. 용서를 하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평안하고 시원해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용서라는 일에서 감정과 의지가 조금 구분되어야 한다. 의지적으로 용서하고 감정적인 것이 해결되도록 기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감정에 지배를 받는 것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두어야 하지 감정에다가 믿음을 두고 살면 지옥과 같은 인생이 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 가운데 이웃과 가까이 특히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그룹과 소그룹과 개인 만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거나 균형을 잃어버린다면 치우치게 된다. 그 세 가지를 다 구현할 수 있도록 지도자가 인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세 규모의 그룹 만남을 잘 이루어지도록 지도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이다
김영엽 목사(다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