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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운동의 역사적 근거
역사적 근거
기독교 역사를 논할 때 교회 역사를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선교 역사를 논할 때 학생 선교역사를 배제시킬 수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정리할때 대학생 선교운동의 역사가 바로 정리되고 조명되어야 한다. 비단 이 운동은 초대 교회를 지나 서구 교회 역사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역사에서도 새롭게 조명되고 바르게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다.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세상 역사를 살펴볼 때도 어느 사회의 개혁이나 국민의식의 변화에는 항상 지성인들이 앞장섰다. 대학이 있는 곳엔 젊은이들이 있었고,젊은이가 있는 곳엔 의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그리고 의식이 깨어있는 젊은 대학생들을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나라와 민족 그리고 사회 전역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위클리프와 웨슬리 운동이 그러했고, 독일 할레 대학의 경건주의 운동이 그러했다. 그 이후 캠브리지 대학의 찰스 시므온 운동,미국 윌리엄저의 대학생들 중 다섯 명의 하이스택(건초더미) 운동이 바로 그런 운동이었다. 그 이후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독 학생 선교 운동이 묘연한 불길처럼 타올랐다. 우리는 대학생 선교운동의 역사적 근거를 찾아보므로 어제와 오늘의 학생 운동을 비교할 수 있다. 그러한 운동에서 올바른 역사적인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의 학생운동을 보다 성경적으로,보다 살아 있는 꿈틀거리는 운동으로 가장 효과적인 운동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 학생 운동과 선교운동을 시작하고 주도했던 나라와 대학, 그리고 그곳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겠다.
1) 영국의 학생 선교 운동
모든 학생운동의 역사적 시발점은 역시 영국에서 찾아야 한다.
(1) 14세기,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학생 선교 운동
당시 옥스포드 대학교의 교수이며, 신부였던 요한 위클리프는 영국 욕사이어 주에 있는 위클리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학교 교수인 그는 당시 로마 가톨릭과 교황을 정면으로 대항하여 반박했다. 그러면서 그는 1380년 옥스포드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순회전도단을 조직하여 전도하게 했으며 나아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파하게 하였다. 그후 사람들은 이들에게 '롤라드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하여 반포하였다. 지금 세계 성경 번역 선교회의 명칭이 위클리프의 이름과 그의 사역을 이어받아 성경번역선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위클리프는 비단 영국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다. 그의 올바른 신앙과 사상이 보헤미야 왕국의 개혁자 오한 후스에게도,모라비안 교도의 지도자 진센돌프 백작에게도 미쳤다. 그뿐 아니라 그 외의 유명한 신학자와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 종국엔 다음 세대에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이루게 된다.
(2) 18,19세기,캠프리지 대학의 학생 선교운동
학생운동을 논하라고 할 때에 1779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일어난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1759-1836)이 일으킨 학생운동을 결코 빼놓을 수가 없다. 이때 일어난 운동이 결국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 청년 학생운동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 이후에 IVF(Inter-Varsity Fellowship,1960년에 UCCF로 명칭 변경:The Universities and Collegiate Christian Fellewship of Evangelical Union)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 운동이 일어난 후 케직(Keswick)수양회에서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기독 학생들이 서로 만남으로 1928년에 기독 청년 학생운동을 전국 운동으로 확대시킬 것을 합의하였고, 영국의 기독 학생 운동이 새출발을 하게 된다. 그후 1940년에 존 스토트가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하므로 UCCF운동이 더욱 확산되게 된다. 오늘날엔 이 운동이 세계적인 기독 학생 운동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문서 운동을 전개하므로 기독 청년들에게 바른 신앙과 학문을 통해 바른 사상을 정립시켜주는데 공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바나 선교대회를 이어받아 세계선교에 동참하게 된다.
(3) 19세기 영국의 부흥운동과 옥스포드 대학 학생 선교운동
독일이 경건주의 시대가 지나고,합리주의의 물결이 계몽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바로 그 때에,불란서가 합리주의와 불신앙 사상으로 전환하고 있을 그때에,영국은 청도교 주의가 성행한후 반동적인 물결이 일어나므로 자연주의와 자연신론이 영국을 휩쓸고 있을 그때였다. 또한 이러한 사상의 배경 속에 그래도 약간의 믿음을 찾아 볼 수 있었던 곳이 영국과 미국 대학교 내의 뜻있는 소수 기독 학생들이었다. 바로 이런 때에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생 선교 운동이 일어난다. 이 운동의 주역들이 바로 요한 웨슬레,찰스 웨슬레,죠지 휫트필드,오한 윌리암 플레이체 등이다.이들은 '거룩한 단체'(Holy club)라는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처음엔 매주 2회의 모임을 갖다가 나중에 매일 밤마다 일정한 장소에 모였다.매일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모여서 그들은 기도,성경연구,고전 연구를 통해 영적 능력을 쌓은 후,나중에 복음 전도와 사회 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물론 이들이 감리교를 탄생시켰지만, '메소디스트'란 신학적인 의미가 담기기 이전에 그들의 생활이 너무나 규칙적이어서 붙여진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웨슬레 형제가 1735년 오글레듭 장군의 초청을 받아 식민지 조지아주에 직접 나가서 선교를 하게 된다.
2)14,15세기,체코 프라하 대학의 학생 선교 운동
후스는 체코 공화국(전,체크슬로바키아) 프라하 대학의 교수이고,프라하 베들레헴 교회 목회자이기도 했던 보헤미야의 개혁자 요한 위클리프 사상의 추종자였다. 그는 위클리프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물론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위클리프의 사상이 철학적 사변성에 머물렀다면 후스는 그 사상을 실제 생활과 교회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후대 역사가들은 그를 사고와 행동에서 위클리프를 훨씬 뛰어 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루터보다 백년 전에 로마 교황의 면죄부를 반대했던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이다. 그는 1370년 체크 남 보헤미야 후시네크(프라하 남서쪽 1백 20킬로미터 지점)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결국 그는 독일 콘스탄즈에서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당하지만 1409년 프라하 대학에서는 물론 체크 보헤미야 파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의 개혁을 주도하게 된다. 프라사 대학의 학생들은 후스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프라하 대학의 학생들은 후스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되어 그의 개혁을 열렬하게 지지할 뿐 아니라 그의 인격과 사상을 추종했다. 백년 후 마틴 루터도 요한 후스의 개혁 정신에 영향을 받았고, 엑크와의 라이프지히 논쟁에서 ㅇ크는 루터를 요한 후스의 후계자라고 매도했고, 로마 가톨릭은 루터를 후스 사상의 추종자로 낙인을 찍게 된다.
3) 독일의 학생 신앙 운동사
독일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을 종교개혁시대와 경건주의 시대로 구분하여 다루고자 한다.
(1) 16세기,비텐베르그 대학의 종교개혁과 학생운동
종교개혁은 곧 학생 운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마틴 루터 자신이 소명을 받은 때도 대학생 시절이었다. 그리고 마틴 루터를 연구해 보면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루터 자신이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위클리프나 체크 프라하 대학의 후스처럼 대학 교수였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교수로서 멜랑톤과 함께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종교개혁과 대학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제시할 때나, 교황의 교서를 불사를때 루터의 제자들이 앞장서서 일을 성사시키닌다. 그리고 라이프지히 논쟁을 위해 길을 떠날 때나, 보름스에 재판을 받기 위해 비텐베르그를 떠날 때, 비텐베르그 대학교의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루터의 강렬한 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곧 루터의 종교 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곧 루터의 종교 개혁에 힘을 불어넣어 준 사람들이 당시 비텐베르그 시민들이라고 말하지만 그중에 역시 대학생 제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루터를 도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2) 17,18세기 할레 대학의 경건주의 운동과 학생 운동
우리는 독일 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운동 중에 경건주의 운동이 국민과 교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독일의 경건주의를 일으킨 사람은 바로 필립 야곱 스페너(Phillip Jacob Spener,1635-1705)이다.또 스페너에게 영향을 받은 자가 라이프지히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학생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였다.
이 운동에 대하여 라토펫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루터 교회가 개
혁의 열기를 상실한 채 생명력을 잃어거자 독일 루터교 목사로 있던 필립 야곱 스페너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당시 루터 교회의 풍습과는 다르게 주말에 한번 그의 가정에서 교인들을 모아 놓고 성경 공부,설교 토론,기도회 등을 가짐으로써 신앙 갱생을 도모하였다."1)
스패너에게 영향을 받은 프랑케는 경건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려는 목적으로 귀족 자녀들을 위해 특수 학교로 설립하였다. 나중에 목사가 되어 할레에서 고아원을 세우고, 사범학교와 신학교를 세웠다. 할레에 대학이 설립된지 3,40년 만에 약 6천명의 신학자가 배출되어 한때는 경건주의가 국가와 루터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모라비아 교도이며 드레스덴(Dresden)이 고향이면서 작센(Saxony)정부 아래 시민 장관을 지냈던 진센돌프(Count Zinsendorf,1700-1760)백작도 10세에게 16세까지 할레에서 교육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도 할레 출신이고 그가 할레대학에 다닐때,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도 모임에서 큰 은헤를 받고 나서 대학을 졸업한 후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다가 결국 고아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게 된다.
4) 미국의 학생 선교 운동사
미국의 선교운동도 학생운동이 불을 당겼다. 이 선교 운동에 대해서 허버트 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이 1802년 어느날 코네티컷에 있는 그의 농장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는 사무엘 밀즈(Samuel G.Mills)에게 임했다. 4년 후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는 메사추세츠의 윌리엄즈 타운에 있는 윌리엄즈 대학에 사역 준비를 위해 입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세상 끝까지 가야 할 불꽃에 불을 밝혔다."2) 이들은 선교의 열정을 가진 형제들을 중심으로 1808년 9월에 형제단(Society of the Brethren)을 조직하였다. 이에 동참한 사람들의 이름은 제임스 리차드(James Richards) 프란시스 로빈스(Francis Robbins)하비 루미스(Harbey Loomis)고든 홀(Gordon Hall)루터 라이스(Luther Rice)등이었다. 그들은 캠퍼스 근처의 단풍나무 숲에서 기도와 토론을 위해 자주 모임을 갖곤 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을 하이스텍 운동(Haystack Movement:건초더미 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06년 6월 어느 날, 위에 열거한 다섯 명의 학생들이 메사츄세츠주에 있는 윌리엄즈에서 기도하러 길을 가고 있었다. 길을 가던 그들은 마틴 루터처럼 갑작스런 폭풍우와 천둥번개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황급히 근처의 건초더미 밑으로 대피했다. 천둥 번개를 피해 있던 그들은 거기서 평소에 기도했던 이방 세계를 위한 기도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만약 우리가 뜻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라고 외쳤다.3) 이 모임의 영향이 결국 다른 대학에 미치게 된다. 1856년 당시 미국에 156개 대학과 46개 신학교가 있었는데 그중 70개 대학에 신앙 단체가 발족된다. 그리고 70개 대학 중 49개 대학에서 해외선교에 역점을 둔 단체가 조직된다.4) 밀즈의 영향으로 1815년 북미 YMCA,YWCA가 생기게 된다. 그후 YM,YW운동은 세계 운동으로 확산된다. 그리고 20세에 들어와 1951년 빌 브라이트 같은 목사가 CCC 같은 대학생 선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전에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먼저 학교를 세웠다. 청교도들은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교회 세우는 일 다음으로 여겼다. 그 이후 그리스도인들 중에 영국 캠브리지에 있는 임마누엘 칼레지 출신의 하버드가 보스톤에 하버드 대학을 세우게 되고, 예일,프린스톤,콜롬비아 등 미국의 수많은 명문 대학들도 기독교적 신앙의 성경적인 이념으로 세워지게 되며,대학생 선교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복음적인 대학 출신들이 미국의 정치,경제,사회,전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지도자로 부각하게 된다.
5) 한국의 학생 선교 운동사
일본의 학새운동사는 이미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것으로 약한다. 여기서는 복음 전래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학생 선교 운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1) 선교사에 의한 학생 선교 운동
한국의 경우도 기독교가 선교된 이후 1866년 이화학당과 1886년 6월 8일 배제학당이 설립됨으로 한국 학생 선교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화 학당의 스크랜톤(Mary F. Scranton) 여사와 배제학당의 아펜젤러(Henry G.Appenzeller)선교사를 한국 학생 운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구체적인 학생 선교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우선 1896년에 학생 YMCA 및 YWCA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46년에 KSCF(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이라는 한국 기독학생 총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은 당시 한국 학생들로서는 불가능했고 거의가 선교사들에 의해 탄생되었고 지도,유지되었다.
(2) 해외 유학생 선교를 위한 선교
우리 선교 역사엔 선교 역사상 놀라운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국어 성경이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만주 봉천에 메킨타이어 선교사와 로스 선교사에 의해 번역된 일이라든지, 송천에 소래 교회가 개척되어 예배를 드리고 자발적 전도가 이뤄진 일이라든지,그중에 하나가 바로 해외 유학생을 위한 선교가 바로 선교 초기에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1907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7명의 최초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7명의 목사를 안수한다. 그 중에 이기풍 목사는 탐라(당시는 제주도를 탐라국이라고 했고 섬나라였기 때문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임) 선교사로 파송하고 한석진 목사를 일본 동경에 파송하여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있는 조선 유학생들을 상대로 선교하게 했다. 이 일이 해외 유학생 선교 운동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6)
뿐만 아니라,역사적 기록을 보면 학선진 목사보다 1년 전에 일본 내 한국 유학생을 위한 선교가 시작된다. "한국 교회의 일본 선교는 기독교 청년회와 유학생 집회에서 비롯된다. 1906년에 한성 YMCA는 부총무이던 김정식 씨를 도쿄에 파견,도쿄기독청년회(현,도쿄한국YMCA)를 창설했다.7) 1993년 에 도쿄의 YMCA 건물이 넘어가게 될 때 한국교회에다 자금 지원을 호소하게 된 것은 도쿄의 YMCA단체나 건물이 일본인의 단체나 소유여서가 아니라 바로 한국이 도쿄에다 한국 교포를 위해 세운 YMCA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경 교회의 시작이자 재일 대한 기독교회의 발원이다."8) 이로 보아서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해외 유학생 선교를 위하여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3) 교단 내 학생 선교운동 기관
그런 이후에 교단 배경의 학생 청년운동이 발족하게 되었다. 여기에선 청년 운동은 생략하고 순수한 학생 선교 운동만을 정리하겠다.
A. SFC ; 기독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1952.7.26.창립)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부산 제1영도 교회 목사관에 뜻있는 몇몇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이 모여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운동과 민족에게 복을 전하는 전도 운동의 불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 모임의 이름을 1947년에 "학생신앙협조회"라고 명칭하였다. 이 모임의 이름을 1947년에 "학생신앙협조"라고 명칭하였다가, 1948년에 "기독학생운동"이라고 변경하고 본격적으로 학생 선교운동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창립은 1952년 7월 26일이 된다. 그후 이 운동은 교단 내 학생 선교 운동뿐 아니라, 학원선교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어 지금은 각 대학에서 SFC라는 학생 선교단체를 조직하여 학원 선교에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 교단내외 운동으로 현재 고신(고신,고려) 교단에서 주도하고 있다.
B. SCE : 기독교학생면려회(Student Christian Endeavor)
이 운동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교단의 기독 학생 선교 운동으로써 원래 고신과 합동할 때 SFC란 이름의 교단 내 학생 신앙운동이 계속되었으나 73년 총회에서 교단 총회에서 교단 내 학생 운동과 청년운동이 일원화되어야 한다는 헌의에 따라서 기존 청년면려회 운동인 CE의 이름을 따라 학생신앙운동을 SCF로 일치하기로 결의에 우ㅢ하여 1974년부터 SCE운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교단 내 학생 신앙운동은 1957년에 시작되었고,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는 1963년으로 보면 된다. 이상으로 교단 내 학생 선교운동은 대표적인 두 단체만 소개하였다.
(4) 교단 밖의 학생 선교 운동 기관
우리 나라의 경우도 교단 내 학생 선교 운동보다 교단 밖 학생 선교 운동이 훨씬 활발하게 전개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교단 내 학생운동과 교단 밖 학생 선교운동을 경험한 바, 그 원인을 지적한다면 그 원인이야 많겠지만 우선 가장 큰 원인으로 교단적인 전통의식과 제약,개교단적,개교회적 우선 순위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반면에 교회밖 학생 선교운동은 계층의 단일성과 학생이라는 동질성,그리고 학생 선교단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개방된 전도 방법과 개성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자유자재로 실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에게 호감을 갖게 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근본적인 이유야 복음 제시의 방법, 뜨거운 비전 제시 및 도전, 성경 공부의 귀납법적 방법 도입 등 많은 것들이 발전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우선 교단 밖 선교 단체를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단체와 둘째는 자생한 선교 단체이다.
A. 외국에서 들어 온 선교 기관
a. IVF(Korean Inter-Varsity Fellowship;1956)
"한국 기독학생회"이다. 이 운동은 영국에서 시작한 운동으로서 대학 캠퍼스의 복음화를 목표로 하는 초교파적인 복음주의 세계 학생 선교운동이다. 시므온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이 세계적인 조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886년부터로 보면 된다. 이 운동이 우리 나라에 들오오게 된 것은 1956년인데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이정윤 선생이 황성수박사의 계열과 연합하여 IVF를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IVF가 시작될 때의 명칭은 한국 복음주의학생연맹(Inter Varsity Evangelical Student Fellowship)이라고 하였다가,1959년에 한국기독교학생연맹(IVF)으로 개칭하게 된다.그러다가 1969년부터 한국기독교학생회라고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b. CCC(Korea Campus Crusade for Christ;1957.11.1)
"한국대학생선교회"이다. 원래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빌브라이트(Bill Bright)박사에 의해 시작된 학생 선교 운동이다. 빌브라이트 박사는 1951년 LA와 UCLA에서 CCC라는 대학생 선교운동을 시작한다. 이 운동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57년인데 그해 11월 1일 김준곤 목사에 의해 창립되게 된다. "오늘은 학원 복음화"라는 비전을 가지고 대학생 선교에 주력하여 많은 엘리트 지성인들을 전도하여 한국 교회뿐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봉사하게 하였다. CCC는 대학생 선교뿐 아니라 사랑방 운동을 전개하여 농어촌 선교에도 일익을 담당하였고 그 밖에 73년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EXPLO '74와 '84를 개최하므로 학원 복음화는 물론 민족 복음화를 주도하게 되었고,세계적인 부흥 집회를 통해 복음 전도와 세계 선교 그리고 교회 부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현재 전국 약 36개 대학에 CCC선교 단체가 조직되어 있으며 책임 간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C. DFC(제자들선교회:Disciple for Christ:1942.4.창립)
이 선교회를 해외에서 들어 온 선교 단체로 구분한 것은 그 뿌리가 CCC이기 때문이다. 이 선교회는 1992년 4월에 CCC에서 탈퇴한 학생 선교 단체이다. 400여명의 간사 중 40여명이 탈퇴하게 된다. 처음엔 선교회의 명칭을 가칭CGC(Campus Globle Crusade)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 움직임에서 강한 주장을 세운 대표는 김석환 간사, 진공렬 간사이고 그 외 박수웅 목사 등이다. 이들은 1989년부터 CCC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자연스러운 개혁을 요청 시도하면서 CCC 대표의 김준곤 목사는 물론 국제 대표인 빌 브라이트 박사에게까지 진정서를 내게 된다. 그러나 중재 역할을 기대했던 국제 총재 빌 브라이트 박사가 오히려 개혁을 주장하는 간사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결별을 선언하고 DFC 발족하게 되었다. 개척의 핵심 문제는 CCC의 인사 행정의 부조리,CCC의 모든 재산이 모금을 통해 설립 내지는 유지되었으나,사유 기업화하려는 의도에 반발한 것이다.9)
d. JOY(Joy Mission:1958.5.18)
"죠이선교회"이다. JOY라는 명칭은 'Jesus frirst,Others second,You third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특징 있는 이름이다. 1954년 주한 미국인이던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몇몇 선교사들과 함께 고등학생들을 위해 JOY Bible Class를 시작했다. 이들이 성장하여 대학에 진학함에 따라 대학생 중심의 복음 전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당시 대학생이 된 심상권, 김흥수, 이미자 등이 주축이 되어 1958년 5월 18일에 JOY Youth Club으로 발족하게 된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명칭 변경을 통해 지금은 JOY Mission으로 불리게 되었다.
e. YFC(Youth for Christ,1961,1962)
"한국십대선교회"이다. 원래 1930년대에 미국,캐나다,영국 등지에서 청년 학생들을 위한 대규모 전도 집회가 열린다. 이때에 젊은이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 후 미국의 수많은 도시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젊은이"(Youth for Christ)라는 가치를 든 집회가 물결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4년 여름 어느날,미국의 인디아나 주의 위노라 레이크(Winona Lake)에서 팔머 먼츠(J.Palmer Muntz)박사와 아더맥키(Arther Mckee)등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서 YFC가 출범하게 되었고, 이때에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정식으로 탄생을 합하게 되어 임시의장에 토레이 존스(Torry Johnson)박사가 선출되었다. 1944년 시카고 대회에서 국제 YFC가 창립되어 현재 60여개 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해방직후 김홍범,황성수,김치선,조동진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국가적인 혼란 상태로 말미암아 당분간 침체 상태에 있었다가 1960년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김장환 목사와 길치수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고,1961년에는 서울에서,1962년에는 수원에서 새롭게 발족되었다.
f. 네비게이토 선교회(The Navigatotors:1963)
이 선교회는 미국의 도슨 트로트맨(Dawson Trotman)에 의해 1934년에 창설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63년 유강식 선생에 의해 본격적으로 활동이 전개되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발족 동기는 바로 구성 요소 성경 암송과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생애라는 책과 이 엠 바운즈(E.M.Bounds)의 "기도의 능력'이란 책을 통해 크기 영향을 받고 탄생하게 된다.
B.한국 자생학생 선교기관
a. UBF(University Bible Fellowship:1961.9.1)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이다. 전남 광주에서 이창우 선생에 의해 1961년 9월1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배사라 선교사(Miss Scrah Barry)조력과 재정적인 후원에 힘입어 이창우 선생이 주축이 되어 대학생 복음화라는 목표하에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후 많은 문제점이 발생되었다. 그리하여 1977년에 분열되어 "성경읽기회"(SBF:Student Bible Fello- wship)라는 명칭을 분리된다.
b. ESF(Students Bible Fellowship:1976.4.8)
"한국기독대학인회"이다. 이 단체는 UBF와 뜻을 같이할 수 없다는 학생들이 1976년 4월8일에 전주와 서울의 동대문,서대문,한양 지구를 중심으로 모임을 새롭게 하고 그 명칭을 처음엔 SBF로 하였다가 1984년 9월 15일에 ESF로 개칭하여 사역하게 된 단체이다. 지금은 국내에 14개 대학,미주 지역에 2개 지부,영국과 서독에 각각 1개의 연락소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C.한사랑선교회(The Love Mission :1971.10.19)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제자를 삼자"는 표어로 1971년 10월9일 김한식 중심이 되어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d. 예수전도단(YWAM,Youth With A Misison:1972.11.시작)
1972년 11월부터 오대원(David E.Ross,예수전도단 대표) 선교사의 집에 모여서 시작한 화요 기도모임이 예수전도단의 시발이 되었다. 그후 여기서 만난 임종표,박현주,서상희 등 세 젊은이가 강원도 영월에 전도 여행을 다녀온 후 1973년 11월 17일에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다. 그후 1980년 여름에 국제 YWAM과 연합하여 1981년 1월부터는 YWAM,Korea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e. 학생선교운동(SMF:The Student Mission Fellowship)
이 운동은 1974년 총회신학대학원(예장,합동,사당동)에 재학중이던 김유식,김활영,윤회원,강승삼,이남백,정광호,한경철 등 신학생들이 모여 기도하던 중 세계선교의 비전을 보고 설립된 학생 선교 운동이다. 그후 많은 헌신자들이 참가하였다. 그들 중에 한성수 김철수 선교사가 대표적이다(지금 이들은 다 해외 선교사로 나가 사역하고 있으며, 강승삼 목사는 나이제리아 선교사로 10여년 사역하다가 현재는 예장(합동)총회 선교국장이다). 지금은 안대혁 목사가 대표로 있으며 중등부(MMF) 고등부 (HMF)대학부(UMF) 일반부(LMF)라는 조직을 두었으나 상징적인 단체로만 남아있다. 그러나 학생선교운동 출신 현역 선교사들이 초창기의 순수한 선교 열정을 이어받은 새로운 선교운동으로의 재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f. 학복협(학원복음화협의회)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외국에서 들어온 학생운동이든지 아니면 한국에서 자생한 학생운동이든지 간에 한국 선교 운동은 60,70년대에 교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 학생 선교 운동의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상의 단체들 중 몇 단체가 중심이 되어 학복협(학원복음화협의회)를 창설하고, 각개 전투적인 학원 복음화 운동에서 서로 연대하고 연합하는 인해전술적인 선교 운동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이곳에서 "선교한국"을 개최하여 1994년 현재 3회에 걸쳐 수많은 선교 헌신자를 발굴하였다.
g. 기타.
그밖에 동숭동 구서울대대학 캠퍼스에서 당시 재학생이었던 손봉호,김명혁 김상복 학생 등이 조국과 교회를 위하여 함께 일할 뜻을 모으고 기도하던 모임의 출신들이 오늘의 한국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들이 되기도 하였다.그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기독 학생 운동 출신들이 많다.
예를 들면 학생운동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1910년 6월 YMCA의 간사로 활동하였고,윤치호,조만식,이상재(하령회,당시 기독학생들의 모임),강원용(대한기독전국학생연합회:Korea Student Christian Federration 1948.4.25 총무),황성수 (IVF 및 SCE 출신),김영삼 대통령(SFC)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학생 선교운동 출신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의 한국 교회 지도자 가운데 김의환 목사,김영철 목사(IVF)광주중앙교회 변한규 목사,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안상동산교회 김인중 목사(이상 CCC),상도제일교회 유용규 목사,한국선교훈련원장 이태웅 박사(이상 JOY),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YFC)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는 자들과 직접 선교사로서 선교 현지에 나가서 사역하는 일꾼들의 수는 여기서 다 헤아일 수가 없을 만큼 많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 대학생 운동의 경우,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는 성도교회 대학부 지도목사 시절 학생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도전하여 양육한 결과 오늘의 사랑의 교회가 시작되었으며,그중에 한정국 선교사(KOMF대표)나 "E-랜드"의 사장 박성수 집사같은 귀하고 훌륭한 주의 일꾼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른 기독 학생 선교 운동 출신들을 일일이 언급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5) 해외에서 발족된 한국 유학생 선교운동 기관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해외 유학생 선교는 맨 먼저 일본 유학생들을 선교하기 위한 운동으로 1906년과 1097년에 시작되었다.10) 그 이후 한국의 해외 유학은 경제 성장과 해외 유학 자유화에 힘입어 현재 미국의 경우는 "한국 유학생 수가 3만 1천76명으로 세계 5위를 차지하고 있다"11) 고 한다. 이들 유학생들을 위한 선교는 한국에서 대학생 선교 단체를 통해 경험한 일꾼들이 이민이나 유학을 통해 또는 선교사로 해외에 진출하게 됨에 자연히 해외 유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유학생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1) 미국 내 SFC학생 수양회
한국 SFC(기독학생신앙운동)에서는 미국에 있는 간사들을 중심으로 학생 수양회가 매년 LA지역에서 개최되고 있다.
(2) 미국 내 CCC 학생 수양회
CCC가 물론 미국에서 한국으로 1957년에 들어 왔지만 한국에서 대학생 시절 CCC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대학 생활을 통해 신앙생활을 했던 졸업생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거나,이민을 감으로 미국 내 한국 유학생들과 교포2세 고등학생,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LA지역에서는 매년 CCC미국 수양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3) 북미주유학생수양회(KOSTA:Korean Student in America) 미국 워싱톤 한인침례교회(현재는 지구촌 교회로 명칭 변경)를 목회 하던 YFC출신인 이동원 목사와 CCC 출신인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가 주축이 되어 북미주 유학생 수양회를 1986년에 개최하므로 말미암아 북미주 내 한국 유학생 수양회가 시작되었다. 1990년 이후에 와서 국제복음주의 유학생연합회(Korean Students Abroad)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이 명칭은 이미 유럽에서 실시되고 있는 수양회와의 차이를 두기 위해서 사용된 명칭이다. 처음엔 북미주유학생수양회로 출발했다.
(4) 유럽유학생선교회/유럽유학생수양회(KOSTE:Korean Students Mission in Europe) 한국 SFC(현,SCE)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전개하였고,CCC를 통해서 민족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받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세계 선교 비전을 받았던 김승연 목사는 1983년 6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독일 주재 선교사로 파송받는다. 독일을 중심으로 사역하면서 유럽 내 유학생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1986년 전유럽의 주요 도시 목회자와 선교사들과 유학생들에 대한 전략을 가지고 구체적인 협의를 하게 된다. 제1차적으로 유럽 유학생 수양회를 개최하자는 데 의견을 일치하고, 1987년에 개최하려다가 시간,장소,재정적인 준비부족으로 한 해를 연기하여 1988년 3월 7일부터 10일까지 북부 독일 ?작커(Hitzacker)에서 첫번째 수양회를 개최하게 된 이래 95년이면 8회째 수양회를 개최하게 되며 지금까지 약 1천5백명의 결신자와 헌신자들을 배출하였다.
이 일을 수종드는 동역자들은 국제적으로 구성된 지도위원과 후원이사회가 있으며 전유럽과 대도시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협력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 조직으로는 각 나라와 도시에 간사들이 임명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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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것도 없는데 후원이 없습니다
치료약값으로 돈을 다 쓰고 먹을것도 못사는데 오늘은 꼭 도와주시는
회원님이 계셨으면합니다 먹지도 못하면 카페작업을 못합니다,,
카페지기는 건강상 매일 약과 주사를 맞으며 살아 갑니다
카페운영을 위해 .통신료를 내야하고 공과금.주거임대료.관리비
인슐린 췌장과 합병증약값등 너무 쪼들리고 감당치 못합니다
매달 치료약값 30만원 공과금30만원 주거.임대료 먹거리등을 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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