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40장 1–15절
[서론] 우리가 마주하는 거대한 백경(Moby-Dick)과 고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모비 딕(Moby-Dick)》에서 피쿼드호의 에이합(Ahab) 선장은 자신에게 거대한 장애와 비극을 안겨준 흰 고래 '모비 딕'을 향해 복수심을 태우며 바다를 항해합니다. 에이합에게 모비 딕은 세상의 부조리이자, 자신에게 부당한 고통을 준 신(神)의 악의적인 손길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도덕적 잣대로 거대한 자연을 정죄하고 제어하려 했지만, 결국 스스로의 교만과 집착 속에 비극적인 몰락을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의 욥 역시 인생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고난이라는 '모비 딕'을 맞닥뜨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하나님을 법정으로 소환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고 집요하게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이르러 폭풍우 가운데 등장하신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논리적인 해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육지의 거대한 피조물인 ‘베헤못(בְּהֵמוֹת)’을 펼쳐 보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고난 앞에 선 성도가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 그 속에 담긴 신약적·철학적 신비, 그리고 삶의 적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이성의 교만을 내려놓는 실존적 침묵
하나님의 통치와 위엄 앞에 선 욥의 첫 고백은 "나는 비천하오니(칼랄)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시임) 뿐이로소이다"(욥 40:4)였습니다. 여기서 '비천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칼랄(קָלַל)'은 본래 '무게가 가볍다, 보잘것없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의와 억울함의 무게가 무겁다고 믿었던 욥이 창조주의 광대함 앞에 서자, 비로소 자기 이성의 무게가 얼마나 가볍고 보잘것없는지(칼랄)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어 욥은 '시임(שִׂים)', 즉 '손을 입 위에 두다(놓다)'의 행동을 취합니다. 이는 법정에서의 무익한 변론을 즉시 중단하고 창조주의 주권 앞에 완전히 침묵하는 실존적 복종을 뜻합니다.
유대계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관념적으로 대상을 분석하는 '나-그것(I-It)'의 관계와,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나-너(I-Thou)'의 관계를 구별했습니다. 욥은 그동안 고난의 이유를 관념적으로 규명하려 하며 하나님을 연구와 논쟁의 대상인 '그것'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폭풍우 속 대면을 통해 하나님을 생생한 '너'로 만나게 되면서 자기 지식의 오만을 내려놓고 깊은 경외의 침묵(시임)에 들어갑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때 빌라도와 대제사장들의 부당한 정죄 앞에서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사 53:7, 마 27:12-14)고 기록합니다. 인간 이성의 잣대로 하나님을 다 재판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침묵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드셨습니다. 성도가 자기 의를 내려놓고 영적 가벼움(칼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가 내 삶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성도가 삶의 이해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날 때 에이합 선장처럼 자신의 좁은 논리와 도덕적 틀로 하나님을 재판하려 듭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내 질문의 무게보다 하나님의 위엄의 무게가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칼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내 불평의 입을 가리고(시임), 고난의 이유를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라는 '인격적 대상'을 신뢰하는 경외를 회복하십시오.
둘째, 인간 중심주의를 깨뜨리는 창조의 주권
하나님은 욥에게 거대한 짐승 '베헤못'을 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아사)"(욥 40:15). '베헤못(בְּהֵמוֹת)'은 '짐승(베헤마)'의 단순 복수가 아니라, '모든 짐승 중의 짐승'을 뜻하는 장엄복수형입니다. 인간이 결코 길들일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육지 생명력의 극치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베헤못을 가리켜 "내가 너를 만든(עָשָׂה, 아사) 것 같이 저것도 만들었다"고 말씀하신 점입니다.
현대 철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의 유익과 이성으로 해석하려는 '인간 중심주(Anthropocentrism)'를 비판합니다. 베헤못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거나 길들여지는 동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헤못을 보여주신 이유는, 온 우주가 오직 인간의 편의나 이해만을 위해 회전하지 않으며,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두려운 신비조차 하나님의 완벽한 질서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지적 겸손'의 촉구입니다.
하나님이 욥과 베헤못을 동일한 어휘 '아사(עָשָׂה, 창조)'로 묶으신 것은, 인간이 피조 세계의 독재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래 있는 한 피조물에 불과함을 보여줍니다. 신약은 이 창조의 주권을 확장하여,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 전체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소망(롬 8:19-21)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종종 "왜 하나님이 내 뜻대로 세상을 움직여주지 않으시는가?"라며 낙심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시는 기준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입니다. 나를 지으신(아사) 하나님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베헤못과 같은 현실도 다스리고 계심을 믿고, 내 삶의 중심을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십시오.
셋째, 교만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의 "모든 교만(가온)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욥 40:12)고 반문하십니다. '가온(גָּאוֹן, 교만/위엄)'은 '높아지다, 솟구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뜻하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오만함'을 가리킵니다. 욥은 자신이 세상을 다스린다면 불의한 자들을 당장 심판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가진 도덕적 위엄(가온)의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장폴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도덕적 이성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할 때 부조리(Absurdity)와 한계에 부딪힌다고 보았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교만(가온)은 세상의 악과 고난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교만(가온)을 십자가로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8-29). 예수님은 자기 위엄을 주장하는 교만한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겸손한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도는 타인의 죄나 세상의 불의를 바라볼 때 스스로 판관이 되어 손가락질하는 영적 교만(가온)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의 온전한 위엄과 통치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나의 도덕적 우월함을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는 겸손한 성도가 되십시오.
[결론] 모비 딕의 비극을 넘어 깊은 신뢰의 삶으로
소설《모비 딕》의 에이합 선장은 끝내 자신의 교만과 분노를 내려놓지 못하고 거대한 고래와 함께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가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욥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고 하실 때, 자신의 가벼움을 깨닫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침묵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 바다에도 때때로 제어할 수 없는 베헤못과 같은 고통과 부조리가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ㆍ자신의 '가벼움(칼랄, קָלַל)'을 깨닫고, 입을 가리는 '침묵(시임, שִׂים)'의 경외를 드립시다. 인간 지식의 오만으로 하나님과 겨루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ㆍ나를 '창조(아사, עָשָׂה)' 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ㆍ자신의 '교만(가온, גָּאוֹן)'을 내려놓읍시다. 십자가에서 나의 교만을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의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창조주를 깊이 신뢰하여 관념의 하나님을 넘어 참된 평강과 회복의 삶으로 교회와 성도가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