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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향한 신앙 여정-
1. 인사
안녕하십니까?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함께 하는 평신도 강단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선 대구 마가교회 배찬호 장로입니다.
저는 오늘 저의 신앙여정을 소개하는 것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서 론 ---
저의 삶에서 가장 큰 화두는 자유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에게는 신앙생활에 3가지 난제가 있었습니다.
①복음
첫 번째 난제는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저로서는 ‘복음은 이것이다.’라는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평생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복음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너무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②진리
두 번째 난제는 진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의 삶에서 최대 화두는 자유입니다. 사실 지금도 여전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던 중고등학교 시절 저의 책상 앞에는 “내 인생을 책임지는 자유인이 되자.”라는 좌우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붙여 두었는지 잘 모르지만, 하여간 그 시절 수년간 제 책상 위에 붙어 있던 좌우명은 “내 인생을 책임지는 자유인이 되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평생을 의지하고 묵상해온 성경 말씀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구절이 사실이라면, 진리를 알면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뜻이고, 따라서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저의 평생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③대속.
마지막으로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찝집하게 뒤통수를 붙잡는 문제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대변되는 전통 교리의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해 주었다.’ 는 이야기는 정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저의 상식으로는 수 천 년 전 수많은 십자가 형벌이 이뤄지던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나라에서 형을 받은 한 사람이 2천년 동안 전 세계인 그리고 오늘 나와 이후 때어날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갔고, 그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말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제대로 모르겠는데, 천국에 간다는 말이 믿어진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했습니다.
--- 본 론 ---
1. 도 입
① 기독교 방송
이런 의문과 과제들을 가슴 저 바닥에 가지고 교회에 다니던 40대 어느 날. 귀가 길에 주차 된 한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에서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예수 이전에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었으나, 예수 이후 하나님이 아버지가 됐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하는 깨달음이 생기면서, 제 나름 복음의 비밀이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② 역사적 예수
제 나름 풀었던 복음의 비밀을 말씀드리기 전에 옆길로 약간 둘러가겠습니다.
저는 대학시절 기독청년연합회 활동을 통해 ‘역사적 예수’라는 개념을 만났습니다. 덕분에 종교라는 틀속에서 교리의 눈으로만 보았던 성경을, 현실 역사의 기록물인 성서로 재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 덕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주변의 삶을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을 얻게 됐고 예수님의 실제 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상이나 문화는 잘 모르지만, 그냥 제 수준에서 드라마 보듯이 예수님의 생활상을 그려 보았습니다.
배가 불러서 시집 온 새댁을 시부모나 시동생 시누들, 그리고 친척들이 어떤 시선으로 맞이했을지, 또한 남편의 친구 등 동네 사람들은 새댁과 새댁의 남편을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지도 유추해 봅니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살아가는 마리아의 처지와 요셉의 마음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부부가 그 아이를 어떻게 양육했을지도 짐작해 봅니다. 그렇게 생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나 그 집안의 장남으로 양육되고 자란 예수의 삶을 떠 올려봅니다.
아무것도 모른 체 자라던 예수였겠지만 나이와 세상살이에서 예외는 없는 법. 어느날 우연히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됐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 역시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겠지만, 출생의 비밀을 아는 순간 어절 수 없는 질문이 따라왔을 것입니다.
“진짜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
서른이 되도록 장가도 못간 예수가 요한의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자, 하늘에서부터 울리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평생 가슴에 담아두었던 의문에 대한 답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를 보면 기쁨이 샘솟는다. (마:3:17)“
참으로 황당하고 황당하고 황당한 일이었겠다 싶습니다.
이게 뭔가? 그 길로 평생 자기를 짓눌러 온 문제를 풀기 위해 예수께서는 광야로 향합니다. 그리고 식음을 전폐하고 목숨을 건 사투를 벌입니다. 그렇게 40일. 드디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께서 깨달은 그것이 진리이고, 예수께서 깨달으신 후 우리에게 전하신 그 진리를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르고, 우리가 그 복음을 다시 전하는 활동을 전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 깨달음이 무엇이었기에 마리아가 낳고 요셉의 집에서 자란 사생아 예수, 목수의 아들로서 가업을 잇던 예수에서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냐?” 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됩니다. 그의 삶이 대전환을 이룹니다.
도대체 예수께서는 무엇을 깨달았기에 삶의 대전환이 일어났고 그 깨달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것을 저는 3가지 정도로 정리됐습니다.
2. 예수님의 깨달음
①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자기 정체성)
첫째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입니다.
저는 예수께서 광야 40일 동안 목숨을 걸고 알고자 했고, 풀고자 했던 문제의 출발은 “진짜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의문, 즉 자기 정체성의 혼란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목숨을 건 사투의 첫 번째 의문은 당연히 자기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답은 “진짜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라는 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준, 내 생명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라는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이 된 영적 존재인데, 지금껏 육적인 존재라고만 생각했구나.
내가 그동안 육신에 매여 육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만 찾았구나....
그런데 ‘진짜’ 나를 있게 한 이, 즉 진짜 나를 있게 한 내 생명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됩니다. 육적인 존재를 넘어서서 영적 존재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봅니다. 자신의 진짜 정체성, 근본적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요, 신의 분신이요, 신과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②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일원론으로 관점 전이)
두 번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없다. 즉 이원론적 관점에서 일원론으로의 관점 전이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알게 됐다는 것은 타인의 정체성이나 대상 세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게 됐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명, 즉 하나님의 자녀요, 분신이요, 하나님과 근본이 같은 하나라는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됐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동시에 알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요? 아니겠지요.
하나님이 지으시지 않은 것이 없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자녀요, 분신이요, 하나이겠지요. 나아가 모든 대상 세계가 그렇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일원론적 관점으로의 관점 전이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신 혹은 야훼 하나님으로 지칭되는 절대가 상대세계에, 무한이 유한의 세계에, 영원이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세계와 연결됐을 뿐 아니라 이미 들어왔다는 의미이고, 달리 표현하면 절대와 상대가 하나이고, 무한과 유한이 하나이고, 영원과 종말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낮과 밤이 합쳐져서 하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안에 낮이라 칭하는 밝은 때가 있고, 밤이라 칭하는 어두운 때도 있다는 것이요, 낮은 밤이 있어야 비로소 낮이 될 수 있고, 밤은 낮이 있어야 비로소 밤이 될 수 있고, 자녀가 없이는 부모가 될 수 없고, 피조물이 없이는 창조주도 없으니 피조물은 곧 창조주의 나타남이요, 따라서 창조와 피조는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계관을 갖게 된 예수님이기에 하나님이 내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내가 곧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돼 있지 않은 하나님의 분신인 것이 당연하고, 따라서 미천하다고 취급되는 한 생명의 무게는 결코 온 천하보다 가볍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예수께서 깨달으신 이런 것이 진짜 세상 이치, 다시말해 진리라면, 우리 역시 예수님과 다르지 않은 존재요, 예수님과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③ 생각은 모두 사회적 산물이다.(자유와 해방)
세 번째는 우리의 생각은 모두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근원과 본질에 대한 이런 통찰이 생긴 예수님의 관점에서 선악과,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나무에서 열린 열매를 따먹은 인간들이 만든 세상과 사회는 결국, 이원성에 기초해 누군가 기준(이런 기준을 전하고 나누는 것을 성경은 법 혹은 죄라고 부른 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나누고 구분하는 이원성의 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꽤뚫어 보였을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모든 생각은 결국 인간사회의 사회적 산물인 관념일 뿐인데, 그 것을 절대화해(즉 우상화 해) 나는 물론 타인들까지도 그 것에 종속돼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어쩌면 평생 죄의 결과라 정죄하며 가슴을 짓누르고 스스로를 열등하게 여기게 만들었던 사생아라는 멍애 역시 사회적 관념이었는데, 그 관념에 종노릇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런 통찰은 예수로 하여금 어떤 사회적 기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해방자로 자신의 길을가 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이해가 생기면서 십자가 대속과 같은 전통교리들에 대한 문제는 저절로 풀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이고 더 이상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의미 였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더 이상 땅의 법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존재라는 말이고, 죄형법정주의라 했으니 적용되는 법이 없으니 죄도 성립되지 않고, 우리는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존재이니 죄의 삭인 사망도 없구나. 그래서 예수 믿으면 다시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믿으면 당연히 죄로부터 예외자, 즉 해방 될 수 있고, 죄가 없으니 사망도 없고, 당연히 영생을 얻는다고 했구나라고 이해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본체가 하나님과 하나이고 선하신 하나님게서 어떻게 악한 것이 나올 수 있으며 무한과 영원에 속한 우리가 영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는 결론도 도출됐습니다. 비로소 대속과 영생의 의미가 이해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간이면 당연히 지켜야할 정말 최소한의 도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절대화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이었구나 바로 거기에 구속돼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구속과 자유 역시 둘이 아니고 자유는 구속이 있어야 비로소 자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자유에 대한 문이 조금 열린 듯 했습니다.
제가 현재까지 풀어낸 복음의 비밀은 대략 여기까지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저의 삶의 관성이 하루아침에 모두 바뀌었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구절이 절절하게 함께 다가 올 때도 있고, 오호라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말도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3. 여정의 걸림돌(두 가지 복음과 오독)
성경말씀의 본질이자 대다수 교우들이 당연히 알고 있는 이런 것들을 아는데 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삶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적용되는데는 아직도 어린아이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나름의 이런 깨달음이 생기니 마음속에서 ‘혹시 내가 이단이 돼 가는 것은 아닌가? 라는 불안함이 올라왔습니다.“ 그동안 가졌던 신앙관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저의 내면에서는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저에게 힘이 된 분이 지금은 은퇴하신 저희 마가교회 서일웅 목사님 이십니다. 목사님의 응원으로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복음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첫째 종교와 교리의 틀에 갖혀 던 기독교 율법주의 신앙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제가 발견한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예수의 복음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울의 복음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혼돈 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는 신뢰할 만한 메신저이니 그의 메시지에 주목하라는 의미인데, 메시지에는 주목하지 않고, 예수를 또 다른 의존의 대상으로 친근한 신으로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징검다리 이자 불안을 해결해줄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만 본 격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관점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읽은 성경이다 보니 오독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보는 눈이 바뀌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면서 그동안 보았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음 알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으로 읽었던 구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저는 이 구절의 ‘나’는 예수이고, 여기의 나를 예수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다시 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만’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나 예수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자(올자가 아니고)가 없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읽혀진 것은 예수께서 알고보니,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 자체 이더라, 너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물론 너희도 이전의 나 같이 스스로에게 속지 말라. 너희 자신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 하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아울러 이제는 예수께서 ‘나’라고 지칭하신 것이 ‘육신의 나’인 경우가 있는 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나’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구분할 수 있게 되어갑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우상으로 존재했던 예수님의 모습도 비로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됐습니다.
4. 내 삶에서 복음의 적용
제 나름 이 같은 관점 전이는 저의 삶에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저 자신을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안에 정말 세세하게 많은 규범들이 저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완벽주의가 제 안에서 저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전히 이같은 삶의 관성속에 살아가지만 더 이상 지배당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 대해 애정어린 관심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음식 앞에서 맛이 있다 없다 표현하는 것은 불경하다 여기다 보니 저의 취향은 무엇인지 이미 망각해 벼렸는데, 이제 제가 어떤 음식을 맛있어 하고, 어떤 이야기에 감동하는지, 어떤 순간에 기뻐하는지 드라마의 어떤 장면은 채널을 돌리고 싶어 아내와 의견이 엇갈리는지 등 저 자신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참 쫄아서 살았다는 것도 알게 돼 제 자신이 참 안스럽기도 합니다. 저의 가장 큰 특징이자 부모임으로부터 물려 받은 위대한 유산이라고 여긴 것이 건강한 몸과 함께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스스로 자부했는데, 이런 저의 드러난 모습이 한편으로, 수고하고 짐진 자의 전형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제야 제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 놓고 온기를 가진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는 듯 합니다.
복음이 저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삶에 대한 용기입니다. 완벽주의에 주눅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찬호야 쫄지마. 사회적 역할에 네 인생을 맞추려 하지 말고, 삶의 주인으로서 겁내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네 나름 멋지게 살아 봐.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일도 결국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분이 나와 함께 하잖아. 사회적 시선이 요구하는 욕망이 아니라 내 안의 생명력으로부터 비롯된 욕망이 삐죽이 싹을 틔웁니다.
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상황에 대해 수용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의 감정을 나무라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불편한 현실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점이 내면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결론
이야기를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분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으로만 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만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된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절대와 하나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는 유한의 세상을 살지만 영원에 속해 있고 무한과 연결돼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일체의 사회적 산물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우리에게서 끊을 수도 없앨 수도 없습니다. 더 이상 사회적 규범과 도리 등 사회적 산물인 율법에 매여 죄의 종노릇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찮고 미천해 보이는 사람이나 대단하고 굉장해 특별한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 역시 나와 같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입니다. 미천과 특별은 사회적 산물인 육신의 눈을 통해 비춰진 것일 뿐입니다. 상대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며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면서 사랑의 빛을 나누며 삽시다.
또한 성도로서의 삶을 마음껏 펼쳐 갑시다. 세상은 때로 우리들의 삶을 감당하지 못해 우리에게 고난을 안겨 줄 수도 있겠지만, 두려워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 자녀답게 우리 길을 한 발 한 발 내딛읍시다. 우리는 넘어질 지라도 아주 엎드러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겹고 걱정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합해서 선을 이루시고야 마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섭리와 은혜의 시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속한 자로서, 당당하고 멋지게, 그리고 담대하게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두 손 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