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이야기
도산 안창호와 신민회 독립운동
116년 전인 1898년 9월 10일, 음력으로는 7월 25일. 아직은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토요일. 평양 대동강 서편 언덕에 솟은 쾌재정(快哉亭). 정자 위에는 이완용의 처남인 평안감사 조민희(趙民熙, 1859-1931)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날은 광무(고종) 황제의 탄신 기념일, 독립협회 관서지부 주최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대중집회라는 것이 처음이었고, 연설이라는 것도 처음이었다. 서울종로에서 시작된 만민공동회가 평양에서도 열린 것이다. 20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 연단에 올라 입을 열었다.
만민공동회
갓쓴 도산(중앙)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快)한가 했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신일인데,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축하를 올리니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이라, 어찌 쾌재가 아니리요?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우리들과 자리를 함께하였으니 이는 관민동락(官民同樂)이라, 또한 쾌재가 아니리오.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한데 모였으니 이는 만민동락(萬民同樂)이라, 더욱 쾌재라고 하리니, 이것이 오늘 쾌재정의 삼쾌(三快)라 하는 바이로소이다.”
이렇게 말문을 연 연사는 백성들이 당하고 있던 고통을 조목조목 들어 불쾌(不快)로써 말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로 다스리겠다고 새 사또가 온다 합니다. 백성들은 가뭄에 구름 바라듯이 잘 살게 해주기를 바라고 쳐다보는데, 인모 탕건을 쓴 대관·소관들은 내려와서 여기저기 쑥덕거리고 존문(안부를 묻는 서신)만 보내니, 죽는 것은 애매한 백성뿐 아니오니까? 돈을 싸 보내지 않으면 없는 죄도 있
다하여 잡아다 주리 틀고 돈 빼앗으니, 이런 학정이 또 어디 있소이까? 뺏은 돈으로 허구한 날 선화당에 기생 불러 풍악 잡히고 연관정에서 놀이만 다니니, 이래서야 어찌 나라꼴이 되겠소이까?”
대중들은 박장대소하며 웃기도 하고, 함께 울분을 터뜨리며 연설에 빠져들었다. 연설이 끝나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 쾌재정 연설로 20살 청년은 일약 관서지방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 청년연사가 도산 안창호였다.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도롱섬)에서 순흥 안씨 흥국(興國)과 어머니 제남 황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도산(島山)은 8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여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13살이 되어서야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어머니는 그를 정직하라고 엄하게 가르쳤다.
1894년 16살 소년 안창호는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충격을 받았다. 고향을 떠나 세상구경에 나섰다. 서울 정동거리에서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며 학생을 모집하는 미국인 선교사 프레더릭 S. 밀러(Frederick Scheiblin Miller, 한국명 민로아閔老雅)를 만났다. 기독교로 개종하고
밀러학당[救世學堂]에 입학했다. 3년간 신식공부를 하는 동안 인생과 세상을 보는 눈이 크게 넓어졌다.
공립협회 회장 안창호(오른쪽 끝)
청년 도산이 세운 점진학교
신민회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
졸업 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독립협회 민권운동을 고향 강서에서도 펼치기 위해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함께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했다. 평양 쾌재정(快哉亭) 연설 이후 가는 곳마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었다.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를,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하여 교육과 전교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교단에 서면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1902년 9월 3일 인천항을 출발하기 전날, 여성도 배워야 한다며 서울의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신혼부부로서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24살, 샌프란시스코의 한 소학교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어느날 거리를 지나던 중 백인들이 모여들어 동양인 싸움 구경하는 광경을 보았다. 한국인 인삼장사 둘이 구역을 놓고 멱살잡이를 하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끼어들어 해결지어 주었다. 공부를 중단했다.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한인친목회를 조직했다. 새로 오는 동포들의 숙소와 일거리를 주선했다.
1904년, 한인들이 일거리를 찾아 감귤농장이 많은 LA 인근 리버사이드로 몰려갔다. 도산도 따라 이주했다. 그는 미국인 가정의 가사고용인 자리를 얻어 부인을 학교에 보냈다. 미국인 집주인들이 집을 더럽게 쓰는 한인들에게 집 임대를 꺼린다는 말을 들었다. 도산은 일일이 한인들의 집을 방문해 집안은 물론 화장실까지 청소해주었다. 각 집에 커튼을 치게하고 문 앞과 창문에 화분을 놓게 했으며, 페인트가 벗겨진 곳은 칠을 하도록 격려했다.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도산 안창호
샌프란시스코 시가
경계하던 한인들이 솔선수범하는 도산에게 마음을 열었다. 도산은 한인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깨우쳤다. 한인 노동자들은 비록 타국의 하찮은 이민노동자이지만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해 고
국에서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나라 운명은 바람 앞의 등잔 불같이 위태로웠다.
1905년 3월 28일, 장남이 태어나자 이름을 필립(必立)이라고 지었다.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다짐을 아들의 이름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해 4월 5일 동지들과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된 도산은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신보>을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조직했다.
조국으로부터 일제가 을사5조약을 강제하고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동지들에게 부담이 될까 주저하는 도산에게 동지들은 국내에 들어가 국민단체를 만들어 국권을 회복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도산은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 취지서를 가지고 1907년 2월 20일에 귀국하였다. 도산은 서울로, 대구로, 원산으로 다니며 전국의 지사들의 만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신민회에는 양기탁ㆍ박은식ㆍ신채호같이 『대한매일신보』계 인사들, 이회영ㆍ이시영·전덕기ㆍ이동녕 같이 상동교회(尙洞敎會)계 인사들, 이승훈·안태국·최광옥·김구 같은 서북 지방과, 이상재·윤치호·주진수 등 서울 등지의 신흥 시민계 인사들, 이동휘·노백린·이갑·유동열·조성환 등 무관 출신 인사들,이강(李剛) 임치정 등 미주 공립협회의 인사들이 결집했다. 이들은 각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온 인사들이며, 대부분은 독립협회(1896∼1898)의 만민공동회 운동에 앞장섰던 청년회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뜻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켰다. 이리하여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을 거의 회원으로 흡수하여 1910년경 약 800명에 달하는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애국단체가 되었다.
공립신보
신민회 회원들이 붙잡혀 가는 모습
청일전쟁 때 파괴된 평양교회 모습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공화정체(共和政體)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을사조약으로 사실상 대한제국은 운명을 다했으며, 황실과 대신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어 망한 대한제국을 버리고, 비非노블레스들의 오블리주, 즉 보통사람들의 힘으로 주권을 되찾아 보통사람들의 공화국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민회는 자유공화국 수립을 위해 국민을 새롭게[新民] 하고, 사회·국가의 모든 부분을 새롭게 하는 사업에 나섰다. 각지에 계몽운동가들을 파견하여 애국, 국권회복, 민권, 신사상·신지식·신산업 계몽 강연을 했다. 전국에 학회를 조직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
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연학회(練學會)·동제회(同濟會)·서북학회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신민회 회원들은 각종 학회의 통상회, 토론회·강연회·친목회·학교·교회·운동회·기타 각종 집회를 적극 활용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신문·잡지와 서적을 펴내고,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강화 등지의 보창학교,서울의 협성학교 등 우수한 학교를 설립하고, 이들 학교에서 사범교육을 실시해 교사를 양성했다. 이동휘 한 사람이 세운 학교만도 100여 개나 되었다.
실업 발전을 위해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안악의 소방직공장(小紡織工場)·연초공장,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을 세웠다.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독립운동기지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0년 12월부터 선발대
인 이회영 일가와 이동녕 등이 비밀리에 단체 이주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일제는 1911년 1월에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 9월에 소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 등을 날조하여 신민 회원을 대거 체포하였다.
탄압과 곤경 속에서도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이른 봄 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웠다. 무관학교는 만주 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라 이름하였다. 신민회는 중앙조직 아래 도. 군 조직과 군의 하위에 반(班)
을 편성했다. 신민회는 비밀조직이었음에도 중앙은 물론 군조직에 이르기까지 의결기관을 두어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공화제를 신민회 모든 조직에서 실현한 것이다.
세월호로 대한민국의 휘황찬란한 발전의 이면에 이끼처럼 껴 있었던 탐욕과 이권결탁과 무사안일과 적당주의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지금이야말로 국민을 새롭게 하고, 정치를, 교육을, 산업을, 민생을, 복지를, 안전과 국방을, 대한민국을 반듯하게 만들 새 신민회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100여 년전 800명밖에 되지 않는 신민회 회원들이 일제의 갖은 탄압과 어려움 속에서 자유의 나라 이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재산을, 가족을, 목숨까지 바쳤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대로 좌절하거나 누구 탓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장막 저편에서 시퍼런 불을 켜고 이편을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잠들지 못하는 눈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
자료 더보기